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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 특집 현실/이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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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66회 작성일 11-03-18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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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교육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경림|시인




이 땅에 육신을 부여 받은 사람은 누구나 같은 단계를 거치며 어른이 되어 늙고 병들고 죽는다. 신비롭게도 그 어느 단계도 같은 것이 없으며 죽는 날까지 새로운 발견, 새로운 경험을 통해 늘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아이이며 청소년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이 거치는 어느 단계도 새롭지 않은 것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세상 만물 하나하나를 온몸으로 느끼며 호흡하는 시기인 청소년기는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할 수 있다. 돌아보면 그 때의 구름, 그 때의 산등성이, 어느 날의 노을, 어둑한 골목, 그 길을 걸어가는 어느 여학생의 뒷모습, 그 어떤 것도 까닭 없이 슬프고 신비롭고 애틋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리라.

청소년기는 성장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시기이다. 신체적 성장이나, 성적 성숙에서 볼 수 있는 현저한 변화는 단순히 외형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나 정서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요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남녀의 성적 역할의 차이로 나타나고, 흥미와 호기심에서도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정서적으로도 이 시기의 신체나 생리적 발달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갑작스러운 생리적 발달은 정서적 혼란과 함께 자신의 행동에 대해 회의하고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고독감에 젖게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심적 변화와 갈등이 한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세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자연의 섭리는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무렵이 문학이, 아니 시 같은 것이 문득 한 인간에게 찾아오는 첫 번째 시기時期가 아닐까 생각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라는 제목의 시에는 그런 묘한 조우遭遇가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내가 그 나이 였을 때

詩가 날 찾아 왔다.

나는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언제 어떻게 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詩」


위의 시구에 나타난 것처럼 나도 시가 언제 날 찾아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의 첫 머리에서 아른거리는 햇살, 비뚜룸한 망개나무 대문, 뽀얀 마당, 청솔 울타리, 그 밑에서 사촌오빠와 반두께놀이를 하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네 살 가량의 계집아이. 전생의 어느 한 나절 같은 그 아득한 무엇(?)이 나의 최초의 시였는지, 한참 후 불청객처럼 찾아왔던 첫사랑과 밤마다 유난히 희게 흘러내리던 달빛이 시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것들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 했을 뿐이다.

실로 자연自然스럽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만남들이 자연스레 나의 시의 한 부분이 되었다면, 그 다음은 아버지로부터 혹은 가족이나 친구, 스승으로부터 받은 영향의 적지 않은 부분이 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쓰시던 다다미 산조 방에는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앉은뱅이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언제나 쓰다만 원고지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자유문학≫이니 ≪현대문학≫이니 하는 문예지들이 있었고, 일본어로 된 내용 모를 소설들과 정지용이나 오장환, 이장희 같은 시인들의 시집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삼학년 어느 봄날 아버지는 햇빛이 쬐―한 툇마루에 앉아 「봄은 고양이로다」 라는 시를 혼잣말처럼 읊고 계셨는데 그 옆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나는, 그 때까지 경험했던 어떤 느낌과도 다른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때 나는 아버지께 왜 고양이의 털이 꽃가루와 같다고 했는지, 고양이 눈에 왜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른다고 했는지, 그게 무언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진짜 고양이 한 마리를 가져와 내게 만져보라고 하셨다. 진짜 미친 봄의 불길 같은 고양이 눈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시인은 이런 것들을 누구보다 꼼꼼히 관찰할 줄 알고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해 주셨다. 나는 아버지께 그 시를 적어 달라고 졸랐다.

그 후 나는 그 시를 읽을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듯한 묘한 느낌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나는 문득 한 마리 고양이가 되어 나른한 햇살 속에 뒹굴기도 하고 고염나무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로 피기도 하며, 혼자만의 비밀을 즐기는 시간이 많아졌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내가 ‘아버지 햇살이 너무 따뜻하니까 눈물이 핑 도는 거 같아.’ 했더니 아버지는 ‘그래, 햇살이 이렇게 따뜻하면 눈물이 핑 돌기도 하지.’ 하고 허허 웃으셨다.

이래저래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심리적으로 조숙하게 자란 것 같다. 웃기는 얘기지만 육 학년 때는 괜히 시건방이 들어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시집에서 훔쳐 본 「병든 서울」이라는 시를 베껴다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에이 재미 대가리도 없다. 그기 무신 시고?’ 하고 아무도 나의 시건방에 호응해 주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는 다시는 아이들에게 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육이오 전쟁 기념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국어 시간에 육이오를 주제로 한 시를 써보라고 해서 나는 아이들과 뒷산 옥녀봉에 올랐다가 가랑잎으로 덮여 있던 한 국군의 시신을 본 기억을 ‘가랑잎 사이로 불쑥 솟은 군화 한 짝’이란 제목으로 써 낸 것인데,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이 부르시더니 시가 참 좋다며 ≪학원≫이란 잡지에 투고해 보라고 하셔서 멋모르고 낸 것이 다음 달 학원지에 실린 것이다.

그 때는 아버지도 기뻐하시며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셔서 나는 금방 시인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부터 나는 학교에서 장래 희망이라도 쓰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작가나 시인이라고 썼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어느새 예비 시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십 수 년 전부터 나는 한 청소년백일장의 심사를 보고 있다. 내가 거쳐온 길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많은 청소년들이 백일장에 참여해 시나 수필을 써서 제출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그러나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문장이나 이미지 묘사의 기본틀이 전혀 잡혀있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아방가르뜨적인 시의 흉내를 낸다던지, 너무 멋진 수사를 찾아 전전 긍긍 하다 보니,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없는 시들이 청소년 시에 나타나는 걸 보면 씁쓸하다.

또 한 가지는 시든 산문이든 명징한 진실에 입각해서 써야한다는 기본적인 패러다임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는 잘못된 문학교육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롭고 사실적이며 깊이 있는 사유의 틀을 만들어 주는 교육, 현상 자체가 이미지요, 메타포로 인식하는 태도는, 문학교육의 시발점인 청소년기에 온몸으로 익혀야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항가리의 여성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소설 중 한 대목이다. 거의 자전소설이라 할 만한 이 소설의 한 대목에서 우리는 문학교육의 현장에서 놓치고 있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작문공부는 이런 식으로 진행 한다.

우리는 모눈종이, 연필, 커다란 노트를 가지고 부엌의 식탁에 앉는다. 우리 둘 뿐이다.

둘 중 하나가 말한다.

―네 작문 제목은 ‘할머니 집에 오다’야.

그러면 다른 하나가 말한다.

―네 작문 제목은 ‘우리의 노동’이다.

우리는 쓰기 시작한다. 종이 두 장에다 두 시간동안 그 주제로 작문을 하는 것이다. 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서로의 글을 바꿔 본다. 사전을 찾아가며 상대방의 철자법 틀린 곳을 고쳐주고 끄트머리에는 ‘잘 했음’, 또는 ‘잘못 했음’ 따위의 평가를 써준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 했음을 결정하는 데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은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은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써야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이불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막연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중


위의 지문에 나타난 것은 물론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의 대화 내용이지만, 또한 문학의 기본인 사실적인 현상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개인의 생각이기도 하다.

사실을 그대로 쓸 수 있는 것은 곧 진실을 쓰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사적 감상과 사실을 구분하는 태도는 별 일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눈을 마련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 외에도 청소년 문학교육에 필수적인 것들은 너무 많다. 다양한 독서를 통한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도출해 내고 자신만의 사유를 만들어 가는 일기 ,등 우리가 교육현장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고 보면 그 동안 우리는 문학을 수학이나 과학처럼 너무 가르치려고만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문학은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아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쓰는 것들, 모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부터 강의하고 있는 모 대학 문창과 전문가 과정의 수업에서 봐도 수강생의 대부분이 이런저런 문예지로 등단한 전문가들임에도 이 부분에서 거의 초보수준에 머물러 있는 분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대로 쓰기’라는 극히 초보적인 과제가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문학의 밑그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문학의 입문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철저히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사실에 입각해 쓰는 초기의 문학교육이 생략된 교육의 결과라 생각된다. 현상을 그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을 쓸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질 좋은 문학을 생산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속의 한국문학의 입지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리라.



이경림∙1989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 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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