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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특집/이십대의 발랄한 상상력들(노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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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20회 작성일 10-12-0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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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지 연|시인, 19세


1. 착지
어렸을 적 나는 유독 낙서하는 걸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8을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지. 매일 연습장에 8을 그리며 무수히 많은 8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연습장을 넘겼을 때, 나는 사방이 온통 8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메모지가 필요하면 8을 찢었고, 8위에 다른 숫자들을 적어 넣었다. 냄비 받침대를 찾을 수 없을 때에도 나는 8을 사용했다. 8 위에 라면 국물이 튀었을 때도 나는 그것들을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니까 8을 뒤집으면 8이 된다는 걸 아는데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내가 8을 망가뜨릴 때마다 8은 ∞ 무한대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러니 나는 지금 아주 조금의 침묵을 즐길 필요가 있다. 무한대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임으로, 매우 무한한 것임으로. 그런 시간들을 찾은 까닭에 돌고 돌아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내가 스무 바퀴를 도는 동안 어디론가 끊임없이 달려갔을 너의 정자들과 나의 난자들을 상상하며 나 혹은 너로 발음되는 엇갈리는 ‘우리’ 라는 발음을 소리 내어 해본다. 이 순간 나와 너, 혹은 ‘우리’로 지칭되는 ‘우리’는 얼마나 가련한 텍스트 혹은 관념이 되는 걸까? 
너를 상상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너의 손톱은 조금씩 짧아졌으며, 우리는 바람이 부는 날 일정하게 공원 벤치에 마주앉아 아주 고독한 노래를 들었다. 가끔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를 생각하며 일정한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고독. 아주 고요한 진리다. 낮게 속삭이며 가끔, 너무나도 확고한 눈빛으로.
나는 너를 생각하며 가끔 너를 잊어버렸다. 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목이 조금 말랐던 것이라고. 나는 약간의 빵과 물을 마시며 매일매일 조금씩 소멸해갔다. ‘갑자기’가 아닌 ‘서서히’에 모든 초점을 맞춘 채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서서히.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눈 깜짝할 사이 나는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잠깐 발광하며 영원히 소멸하며, 길고 긴 침묵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은 아주 잠깐, 지상에서. 

2. 발광
유독 빈혈이 심해진 건 지난해 여름부터였다. 날이 무척 더웠으며, 더웠기 때문에 나는 잠깐 책장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잡고 있던 펜을 땅에 떨어뜨렸다. 모든 일들은 언제나 순간적이었으므로, 기억들 또한 순차적으로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눈을 감는 0.01초 사이 나는 펜을 떨어뜨렸으며, 떨어진 펜이 땅에서 살짝 튀어 오르는 0.01초 동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와 힘으로 발광했다. 영사기 속 늘어진 필름처럼, 늘어진 기억으로 나는 뜨거운 빛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의 오후를 그렇게 기억해냈다. 뜨겁게 달아올랐으며, 그 뜨거움의 정점에서 나는 쉬지 않고 셔터를 눌러댔다. 온몸이 전율했으며, 그 미열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아 나를 발광하게 했다.
앨범 속에 꽂혀있는 사진을 볼 때마다 온몸이 푸르르 떨리는 것은 그러니 순간의 힘이다. 기억이 순간을 기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너를 기억하려 할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푸시시, 이내 모든 공기가 빠져나갈 것처럼. 이것이 반짝, 하고 사라지는 소멸의 근원이라면 이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생존한 이래로 가장 잘 보존되어 온 습성일 것이라고. 결국 나는 본능으로 발광하고 있으며, 이것이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자위 방법임을 나는 몸소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오렌지 빛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창가에서 아프게 수음하며 너의 이름을 애무 하는 것은 내가 나를 맹렬히 기억하고픈 까닭이다. 가령 세상의 모든 진리를 진리라 정의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점점 가벼워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오늘은 용기를 내어 너의 안부를 물어본다.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고.

3. 접속 
끊임없이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이것이 지상에 내 발자국을 남기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만개한 벚꽃이 흩날리는 동안 옮겨갔을 수많은 그림자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나는 지금 너의 실루엣을 기억하고 있다. 눈이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던 어느 겨울날 아침 쌓여가던 우편함 안의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과 한 송이의 장미. 그리고 해가 거듭 될 때마다 양말 속에서 사라져버리던 나의 크리스마스 선물들까지. 모두 깊은 밤이었으며 밤이었기 때문에 조금 추웠으리라. 그러니 나의 편지가 나의 우편함으로 돌아온 건 우연이 아니었고, 산타할아버지는 과연 폭설과 함께 사라졌으며, 나는 끊임없이 스물에 머물러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성년이었고, 그러므로 나는 내 긴 목을 더욱 길어 보이게 할 두텁고 긴 목도리가 필요했다. 어떤 순간에라도.
그러니 내가 카렌족을 알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무심코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그들의 긴 목을 보게 된 것. 우리는 모두 목이 길어 노래하는 슬픈 짐승이라고. 나는 반짝이는 고리들 속에서 너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문득 그것이 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받을 크리스마스 선물들이 한가득 숨겨져 있다는 것도. 너의 그림자와 함께.
그래서 나는 네가 생각나는 날이면 목을 꼿꼿이 세워 손을 호―호― 불어본다. 날이 추웠으므로, 내 목은 너무나도 길었으므로. 나는 오래된 유행가를 부르며 끊임없이 편지를 쓴다. 모든 피사체는 늘 흔들리는 순간만을 담아냈으므로, 또 다시 벚꽃은 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여름이 오고 있었으므로. 환영처럼 반짝, 모든 그림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며 접속중이였고, 해는 점점 길어지다 짧아졌으며, 나는 점점 목이 길어졌다. 이것이 나에게 가장 가까워지는 길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래된 유행가를 부르며, 나지막이.

4. 출구
8을 뒤집으면 8이 된다는 것. 모든 것들은 꿈이었거나 허상이었거나 순간이었거나 착지했거나. 현재에 몰입하는 것은 가장 멀리 현재를 피하게 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어제로 치부되는 것들을 사랑하며 미래를 가정해 일기를 쓰는 것. 모든 것들은 현재시제. 현재야말로 현재를 가장 완벽히 재현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찰칵.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기억은 겹쳐졌으며, 왜곡되었으며, 재현되었으며 결국 실현된 것이라고. 찰칵. 발광하는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달려가며.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는 수정란들에게 무한한 영광의 박수를. 그리고 이 순간, 착지.


노지연∙2009년 ≪시인세계≫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계열 1학년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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