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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특집/이십대의 발랄한 상상력들(이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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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성형
이 수 빈|가수, 25세
눈을 떴을 때, 깜깜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늦은 밤이었다. 텅 빈 거리에서 헤매어 다니다 밤새도록 비에 젖은 그가 또 떠올랐다. 밤의 공길 흔들며 우산을 타고 내려온 당신을 만난 그날, 손 뒤로 그림자들은 슬쩍 뒤돌아보기 시작했고 ‘우리 손 잡아요’ 키스나 다른 건 별로 서로 좋아하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손은 애정이 없으면 잡을 수 없는 거라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라고 그림자들은 재잘댔다.
손을 잡던 그날, 깍지 끼던 손 위로 눈이 맞았다.
그로부터 시작된 둘만의 관계.
1. 그녀의 이야기
사람들은 곧잘 ‘사랑에 빠진다’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나의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그의 사랑인지 시원스레 대답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지만 사랑은 설명할 수 없고,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살며시 다가와서는 이내 나를 사로잡아버렸고, 사랑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림자가 두개이면 나도 변할까?”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감돌던 봄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란히 함께 걷던 그는 물었고 우리는 즉시 그 질문에 해결책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먼저 그는 말했다. 일단 그림자를 없애면 난 투명해질 테니까, 여탕에 들어가 볼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듣던 나는 깔깔거리면서도 힘껏 유치하게 제 2의 답변을 맞받아쳤다. 나라면 그림자를 두개로 묶어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그림자를 분신처럼 집어넣고 난 집에서 뒹굴뒹굴 잠을 자던지 햇살 좋은 공원으로 놀러나가겠어. 그리고 몹시도 피곤한 날에는 그림자를 집에서 재운다고 말하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순박한 그의 대답이 날아왔다.
“그림자를 위로 던져 날라다니게 한다!”
“그거 좋은데!”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거나 몹시도 피곤한 날이면 그림자를 대신해 보낸 뒤 순간이동을 하거나 감성을 공유하는 거지.”
그 생각 참 괜찮다고 동의하는 순간, 이어서 그가 또 말했다.
“우리 그림자가 하나로 둘이 합쳐지면 좋겠다. 그치, 너무 야한가, 그치.”
대답하지 않고 갸우뚱거리며 함박웃음을 짓다가 눈이 마주쳤는데,
“자기 그림자를 잡고 올리면 키가 커지는 거야, 그림자를 압축시키면 살이 빠지는 거야. 그런데 그림자끼리도 키스할 수 있을까?”
그는 되물었다. 머뭇머뭇하는데 집 근처의 가로등은 꺼져 버렸다.
막차시간이 다다른 추운 날씨에도 바람을 등지고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헤어지기 아쉬워서 집 앞에서 동동거리며 뒤돌아보던 아쉬운 발걸음을 하던 우리는 우리 그림자를 서로 집에 놓고 가기로 했다.
먼저 그가 원하던 대로 내 그림자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 정사각형으로 접혀졌다. 그의 그림자는 조그만 팅커벨이 되어 내 옆에서 날아다니기로 했다.
가끔은 모기나 파리로 오인 받을 수 있을 테지만 혹시나 벌레 따위에 위협받지 않도록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내 등 뒤 옷 속 사이에 찰싹 붙어있기로 했다.
처음에는 어딜 가나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것 같아 좋았으나 알고 보니 그림자는 매우 시끄러웠고 잔소리를 해댔다, 조잘조잘. 심지어 그의 목소리는 꿈속에서조차 들려왔다.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내가 왜 그의 주기적인 야동검색순환주기를 알아야하는가.
그의 양치질을 하지 않고 자는 습관이라든지, 누워서 양말을 벗어 엉덩이 밑에 깔고 잔다든지, 밤이고 낮이고 소소한 일상사를 읊고 살아온 과정을 낭송하며 라디오 진행을 하는 그림자가 조금은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눈 감아도 멀리 있는 그의 가까이 있는 것 같음을 느낄 수 있어 뿌듯했다, 둘이면 혼자 있을 때처럼 편하지 못할 거란 예상을 뒤엎고 그의 그림자는 놀랍도록 편안해서 함께 있어 안도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나에겐 언제부터 그림자가 생겼던 걸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는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 전에 만난 적이 있을까? 그래서 처음부터 사랑하게 된 걸까? 사랑하게 된 시작점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나지 않아 그의 그림자에게 물어보면 그림자는 딴청을 피우거나 다른 화제로 돌려버리곤 했다.
2. 그 남자의 이야기
―사랑을 놓지 않는 남자
태초에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 라고, 빛나던 사랑에서, 사랑했던 기억이 빠져나가고 나면 어둠이 남을까? 한 사람이 어디론가 떠나며 남긴 자리는 도대체 그 무엇으로 메울 수가 있을까.
사랑은 몸과 마음 어느 언저리에선가 끊임없이 새어나오기 마련이다. 하늘 가득 펼쳐졌던 사랑했던 기억들과 그리움과 그 눈빛을 어떻게 감추겠는가.
사랑에 등 돌린 후 사랑을 감추려하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자꾸 기억이 빠져나가 사랑의 기억을 놓치는 여자와 그런 그녀의 손을 결코 놓지 않는, 그녀를 또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그녀와 사랑을 하고 있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외롭던 그에게 그의 그림자가 말했다
“신이 나를 만든 건, 당신이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야. 언제나 곁에 있고 아무리 먼 곳까지 도망치고 뜀박질해도 당신을 향해 달려오고, 또 제일 어두운 순간이라도 난 늘 곁에 있어. 조금이라도 빛이 비춰지게 되는 순간 나는 너를 제일 크게 감싸니까. 사랑을 한다는 것도 그런 거야,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네 몫이고, 깊은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네 몫이지. 너는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야만해. 조금 생각하면 모든게 당신 탓이고 조금만 더 생각하면 모든 건 나의 탓인 것이지, 이 짧은 거리 속에 미세한 틈 속에 가엾기도 하고 따스하기도 한 사랑이란 마음이 세 들어 살고 있어. 그것이 바로 나, 당신의 그림자야.”
그림자를 잃어버린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오는 방법은 없을까, ‘기억은 지워져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랑을 담을 공간이 없는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겠노라고 신에게 날마다 눈물로 조아리는 그에게 빛과 어둠은 결국 그의 그림자를 성형해주기로 했다. 그림자를 만들려면 빛과 어둠이 공존해야 만들 수 있듯 늘 함께였던 사랑과 추억과 믿음과 상처와 안도와 한숨과 눈물들을 더해 서로의 빛과 어둠을 불러 그의 그림자를 나누어 성형하기로 했다. 다시 그녀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그림자를 나누어 그녀의 것으로 사랑으로 채워 주는 것. 행복한 기억만이 남은 그림자를 그녀에게 나누어 그에겐 상처의 그림자만 남을지라도 사랑은 베풀고 나누어 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밤새 눈물을 꼬매고 한숨을 닫아내 그림자성형이 회복되고 생성된 첫날, 처음 만났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만나는 순간 그림자의 사랑은 나누어지고 그와의 사랑은 더 커질 것을 알기에 그와 그의 그림자는 그녀의 그림자에게 말했다.
“그냥. 네가 너무나 필요해서,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아서 여기 왔어.”
3. 우리의 이야기
번쩍, 눈을 뜨니 어제의 나는 사라지고 새롭게 태어난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과 만나면서 내가 원상복귀로 되돌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장난 시계바늘처럼 늘 다른 곳을 향해 있던 내 마음이 남들과 같은, 남보다 한층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기억해요, 어제까지의 일이 기억나지 않지만 신선한 마음가짐과 생명력 넘치는 활기로운 몸의, 그날의 느낌을. 그리고 상쾌하게 일어나 나간 그 날 당신을 만났습니다. 놀랍도록 익숙한 표정의 당신은 나를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활짝 웃음을 지으며 달려왔습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치고 정성껏 얼굴을 들여다보던 당신은 물었습니다.
“넌 어디에서 왔니?”
나의 그림자가 대답했습니다.
“난, 꽃별, 꽃별에서 왔어.”
사랑을 하게 되는 순간 생기는 것은 바로 꽃과 그림자. 혼자가 아닌 둘이 될 때, 둘이 하나가 될 때, 서로를 바라보느라고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 그 순간 피어나는 등 뒤의 날개 같은 꽃그림자가 피어난다.
이수빈∙가수, 아티스트, 경희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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