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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특집/이십대의 발랄한 상상력들(박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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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박 정 선|대학원생, 24세
새침하게 흐린 품이 비가 올 듯하더니, 결국 춘삼월에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 날이야말로 집에서 백수취급을 받는 26살의 소설가 박 씨에게는 오랜만에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요즘은 예전보다 출판사나 문학잡지가 많이 늘어서, 신문사의 신춘문예 이외에도 등단할 수 있는 길이 많아졌다. 박 씨도 어느 별 볼일 없는 문학잡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였다. 그러나 등단 이후 쓴 작품들은 발표도 안 되고 있어서 이렇다 할 활동도 못하고 백수처럼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박 씨의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서 한 프로덕션에서 전화가 온 것이 아닌가.
박 씨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부러운 순간이 많았다. 「달콤한 나의 도시」나 「개인의 취향」, 「아내가 결혼했다」처럼 우리나라 소설도 하나 둘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는 소설보다는 다소 밝고 동화적인 내용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박 씨는 여러 소설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화 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이나 다른 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니 작가로써 참으로 기쁠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몇 년 째 자신의 책은 고사하고 작품조차 제대로 발표하지 못한 자신에게 프로덕션의 관계자가 박 씨의 작품에 관심이 있다며 한번 만나자고 하다니……. 박씨는 관계자와 약속시간을 정하고 ‘딸깍’ 하고 전화가 끊겼을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다.
박 씨는 자신의 작품을 들고 주뼛주뼛 프로덕션으로 갔다. 시가지에 큰 건물 4층에 위치한 프로덕션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저마다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을 서성이던 박 씨는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자신을 이 프로덕션의 PD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어느 회의실로 박 씨를 안내했다.
“요즘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지는 건 아시죠? 아무래도 드라마 시나리오로 쓰는 것 보담 소설로 또 만들어 놓으면 작품성도 있고 괜찮을 것 같고, 또 이게 잘 되면 저희뿐만 아니라 작가님도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럼 책도 많이 팔리실 테고 원하는 글 다 쓰실 수 있으실 테고 이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죠. 허허허허!”
박 씨는 혼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PD 앞에서 긴장감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곧 엄청난 성공을 하게 되어 자신에게도 화려한 장밋빛 삶이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덕쿵덕 뛰는 것을 느꼈다. 잘 되면 자신도 ‘대학까지 나와서는 집에서 밥이나 축내며 쓸데없는 글나부랭이를 쓰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부모님의 자랑이자 나아가서 학교, 나라의 자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학시절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등단하겠다고 고시원을 빌려 불철주야 글을 쓰던 나에게, 그만 정신 차리라며 뒤에서 비웃던 사람들에게도 성공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스멀스멀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저 그럼 가지고 오신 작품들을 한 번 봐도 될까요? 저 일단 등단작 「언니가 죽었다」를 볼까요? 캬― 괜찮은 데요. 이거 언니가 죽은 후 동생의 심리묘사가 참 탁월해요. 거기다 언니의 죽음을 추적하면서 밝혀지는 그 진실들……. 참 좋아요.”
박 씨는 흐뭇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이 인정을 받게 되다니. “아니요……. 별 것도 아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하던 박 씨의 귀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들렸다.
“그런데, 좀 약해요. 너무 심리위주라 굉장히 정적이군요. 우리가 아무래도 드라마를 만들 거니까 좀 더 극적으로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일단 「언니의 죽음」 이거 제목으로 가고, 내용을 좀 바꿉시다. 언니가 일단 첫 장면에서 죽어요. 근데 사실 언니는 자살이 아니고 형부가 죽인 거죠. 형부는 언니 친구랑 바람이 나서 둘이 결혼하기 위해 언니를 낙태시키고 죽인 겁니다. 근데 언니가 살아요. 살아서 아무도 못 알아보게 전신 성형수술을 해서 복수를 하는 거죠. 하지만 사실 언니는 정말 죽었고 언니인 척 복수를 하는 것은 쌍둥이 동생인 거죠! 이렇게 아주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겁니다. 요즘 시청자들 이런 드라마 아주 좋아하잖아요. 박 작가님, 괜찮지 않습니까?”
PD는 박씨의 얼굴이 사색이 된지도 모르고 자신 있게 물었다. 박 씨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드라마를 통해 많은 독자들을 만나는 건 좋지만, 자신의 작품이 아무런 의미도 내용도 없는 정체불명의 것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별로인데요. 원래 소설의 내용도 괜찮은 것 같고, 그렇게 만드시려면 사실 꼭 제 작품을 가지고 드라마 하시지 않아도 괜찮은 데요.” 목소리를 겨우 짜내어 대답하는 박 씨를 보고 PD는 답답하다는 듯이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문학계가 이래서 문제에요. 그저 고상한 척, 자기들은 다른 척,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됐어요? 젊은 애들이 우리나라 소설 읽는 줄 알아요? 아니에요. 다들 일본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읽어요. 왜냐! 거기 나오는 것들은 안 고상하거든. 가볍고 재미있고 쉽거든. 왜 우리나라 소설은 죄다 이념에 전쟁에 그런 것들이 섞여 나오는지 몰라.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봐요. 당신도 정신 똑바로 차려요. 그래서 되겠어요. 서점에 가서 직접 보세요. 이제 소설가의 개념도 없어졌어. 타블로, 구혜선, 이적, 차인표, 이 사람들이 누군 줄 알아요? 연예인? 아니야∼ 다 소설책 낸 작가들이야. 이젠 연예인들도 다 책을 내고 그런다니까. 옛날이나 소설가가 지식인이구나 쳐줬지. 이제는 그런가. 너도나도 다 책 쓰고 그렇지. 그러니까, 작가님. 작가님도 잘 생각해보세요. 이거 진짜 좋은 기회인 거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대우도 못 받고 살 거야? 그래 이 작품도 좋네, 「엄마의 재혼」. 작가님 정말로 가능성 있다니까.”
박 씨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마저 PD 입에 오르자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죄송합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라고 하며 황급히 그 곳을 빠져나왔다. 저 멀리 PD의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요. 내가 곧 다시 연락할게요.” 라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출판사에서 정신없이 뛰쳐나온 박 씨는 울적한 마음에 설렁탕 한 그릇과 소주 서너 병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언제부터 세태의, 미디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문학은 구닥다리 신세가 되었는가. 게다가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작품이 제대로 발표되지도 못하는 현실이 슬펐다.
적막한 집으로 돌아온 박 씨는 그만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자신의 작품에 설렁탕 국물을 쏟아 버렸다. 설렁탕에 흥건히 젖어 눅눅해진 원고들을 자신의 얼굴에 비비면서 박 씨는 중얼거렸다.
―열심히 써 놓았는데 왜 발표가 되지 못하니, 왜 아무도 읽어주지 않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박정선∙부경대학교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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