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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신작시/자줏빛 흠집 외 1편-르네 마그리트 그림 기억을 보며/노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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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43회 작성일 11-03-1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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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봉
자줏빛 흠집 외 1편
―르네 마그리트 그림 「기억」을 보며


누구에게나 어떤 기억은 주름진 검자줏빛 커튼을 길게 드리우고 있다
푸른 하늘에 언뜻언뜻 보이는 구름 몇 조각을 반나마 가리운 채

아버지가 통나무 목재를 구입하시러 철원으로 출장 가셨던 날, 점심 후
트럭에 기대 좋아하셨던 낙타표 카멜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던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술 취한 헌병이 난사한 흉탄에 쓰러지신 그 날 이후,
내 눈동자 가느다란 혈관에선 아무도 모르게 검붉은 피가 새고 있었다

조르고 또 졸라서 책방에서 사 주셨던 전래동화 책 <이야기 주머니>
말도 되지 않던 「후후 쩍쩍 맛나다」란 이야기를 이제는 누가 알까

하얀 주먹 공에 내가 연필로 선명하게 쓴 한자 이름을 보시고
명필이라고 내 곰쑥*은 꼭 유학을 보내 주시겠다 약조하셨던
깡마르고 선구자 노래 좋아하시고 장작도 잘 패셨던 서른 셋 젊은 아버지
두 발의 흉탄이 허리를 관통해, 유언 대신 얼마나  쓰디쓴 피를 흘리셨을까 마지막 온몸으로 쓰신 흘림체 글씨들

아무래도 어떤 기억은 바싹 마른 몇 잎의 잎사귀, 실금이 깊이 새겨진
색깔이 너무 곱고 아까워 언젠가 책갈피에 꽂아두었던 단풍잎 몇 장,
늦가을 좁쌀만 한 이슬이 홈빡 맺혀있던 울음방울들 어린,

암말도 못하고 틈새 속에서 오랜 침묵으로 버티던, 잊혀진 아버지의 이름, 깊은 심연 속에서 숨 쉬고 있던 붉은 핏자국

마른 눈물이 푸른 하늘에 언뜻언뜻 구름 몇 조각으로 떠 있는 사이사이, 갸웃갸웃 단풍잎 몇 장으로 무늬를 꾸며 보는 날. 모처럼 아버지께 도톰하게 목화솜 햇솜을 넣고 새 이불을 꿰매드리고 싶은 날  

*곰쑥:어렸을 적 내가 숙맥이라고 아버지가 불러주시던 별명.

 

 

 



호박꽃 친구


그날 그 애는 날 보자마자
대뜸 ‘늙은젖’이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다
손 내밀어 만질 듯
불쑥 안겨올 듯
한바탕 까르르 웃었다

좋구나 아무러면 어떠랴
한때는 어여쁜 돌잡이
천도복숭아 같은 뺨
야드르르한 분홍빛 젖꼭질
남 볼라 가린 적도 있건만

자르르 찰진 기름기 도는
뜸 잘 들인 햅쌀밥 한 그릇
미루고 지어주지 못한 일
마냥 눈의 못이 되었다

검버섯 난 얼굴 가리지 않고
우두커니 책상 옆 지켜주며
천진난만했던 어렸을 적
내 눈길 새롭게 일깨워 주는

옥바리 놋쇠 뚜껑 젖꼭지를 잡고
속엣말 한참 들어보는데

늙은 젖, 내일은 정월 대보름날이니
모처럼 목욕도 시켜달라며
은행 잣 대추 밤 팥을 넣고
찰밥을 담아 먹어보란다
내내 찰진 친구 삼고 살아 보잔다


노혜봉∙서울 출생. 1990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산화가>, <쇠귀, 저 깊은 골짝>. 기타 <알 수 없어요>.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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