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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신작시/탱고 외 1편- 단편으로 본 미시근대사 제 9화-/이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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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68회 작성일 11-03-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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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렬
탱고 외 1편
―단편으로 본 미시근대사 제9화

어릴 적부터 전쟁의 위험을 들으며 자란 극작가는 폭력의 공포에서 풀려날 수 없었다. 서울 변두리 가난한 집안 출신, 검정고시를 거쳐 진학한 대학시절 그는 완전한 외톨이었다. 뚜렷한 사회정치관을 가졌음에도, 배경이 없다는 이유로 회색인이 되었다. 한쪽 편을 들면 들러리로 희생될 게 확실하다는 것. 이 나라의 문제가 과도한 정치 지향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철저한 미학주의를 고수했다. 그는 마지막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데, 재산을 탕진해버리고 빈민가에서 독신으로 살다가 반실성한 아르헨티나의 상류층 여자에 대한 얘기. 젊은 시절 그녀를 사랑했던 시인은 매년 12월 31일에 찾아간다…… 극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보수논객 김 아무개보다 보르헤스를 인용하면 얼마나 산뜻한가. 사랑방을 다락방으로 바꾸면 그 음험한 정치성이 대부분 탈색된다.



탱고
―인터뷰

장소, 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 저녁.
등장인물:중년의 여자

(무대에 의자 한 개.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음.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 맨발의 남루한 차림)
(인물에 어두운 조명)

밤과 고독에 대해 묻고 있는 건가요? 그건 모두 오래전 얘기. 음악도 애절한 사랑도, 8월의 눈 내리는 어느 아침에 문득 모든 것이 떠나갔음을 기억할 뿐.

(침묵)

자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폐허에 이르면 아무 곳에도 닿을 필요가 없음의 행복. 지금 소중한 건 내려다보이는 담장들과 작은 하늘과 자동차…… 소리.

(침묵)

약속된 미래를 내팽개친다는 걸 모두 의아해 했지요,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뼈 한줌. 쾌락도 눈물도 그보다 훨씬 묽을 뿐.

(침묵)

고통은 없었지요, 허전했을 뿐. 골목을 우두커니 보며 브랜디 병을 열고, 마지막 향기를 음미하는 정경. 광기란 참으로 황홀한 것, 언제까지나 문밖에 서 있을 것 같은 느낌, 그 하염없음의 엑스터시.


(침묵)

해변에 펼쳐진 색색의 양귀비꽃들을 본 적이 있나요. 내 인생은 그 자리에서 매혹되어 눈멀어버린 것. 막막히 밀려오는 물에 내맡겨버린 것.

(침묵)

어느 해였던가, 시내 호텔에서 한 신사가 거리의 여자를 불렀지요. 지배인의 전화를 받고 도착했을 때,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이 가버린 후에도 길모퉁이에 한참을 서 있었지요.

(침묵)

이른 아침 문밖에 의자를 내어놓고 종일 기다리는 건 오래된 일과. 골목에 쏟아지는 볕, 발밑에 떨어지는 꽃잎들과 함께.

(침묵)

더 이상 꽃을 키우지는 않아요. 이곳에도 가끔 떠돌이 세일즈맨이 들르지요. 낡은 축음기로 탱고를 말없이 듣고는, 빗과 동전 지갑, 보들보들한 내의를 외상으로 맡기고 가지요.

(침묵)

난로 위 주전자 달그락거리는 소리, 윗집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지붕을 건너는 고양이 발소리, 소리…… 소리에 대해 다시 얘기하고 싶군요.


(침묵)

식탁 위 마른 빵조각의 침묵, 주방 수세미의 인내, 빛 속을 날아다니는 먼지의 아득한 걸음걸이에 매혹되어 사는 생활을 그는 잘 이해했지요.

(침묵)

그 이는 꼭 마지막 날에만 왔어요. 가장 좋은 커피와 보드카를 마신 후 자정에 떠났죠. 이야기가 참 많지만, 그가 남긴 시 한 구절로 그만 대신하지요. (주머니를 뒤적이며 쪽지를 꺼내어 낭독함)

길가에 방 하나를 세 들어/흐린 오후의 거리를 내려다보며/사라져가는 것들을 말없이 보낼 수 있다면./낙엽 쌓인 길모퉁이에 싸락눈 내리는 날/한적한 양품점과 허름한 옷가게를 지나/나무층계를 오르는 어둠의 소리를 들으며/그때 그곳을 떠나버린 것, 후회하기도 하고/이별 끝에는 늘 저녁이 찾아왔음을 회상하며./ 필생의 직업으로 삼류시인처럼/어느 누구에게나 기쁨이 되는/카드 인사말을 종일 쓸 수 있다면./소중한 그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우리 영원히 함께 하기를……/마지막 일기를 접듯 카드를 묶어/가버린 애인에게 전할 수 있다면.

(암전)

(다시, 어두운 조명)
(여자가 사라지고 없음)

(막)


이성렬∙서울 출생. 2002년≪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비밀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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