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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서경희의 한문고전 漢文古典 다시 읽기/서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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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78회 작성일 11-03-1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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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比․批|서경희의 한문고전 漢文古典 다시 읽기

일연一然의 마음으로 읽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義解편 찬시讚詩





일연一然(1206∼1289)이 찬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총 5권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의해義解편은 제4권 제5에 기술된 14조의 이야기로서, 진평왕(재위 579∼634) 대에 활약한 원광법사를 서두로 신라 불교의 위상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고승들의 특이한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중국의 고승전의 의해義解편은 찬자의 의도를 가장 강하게 전해주는 부분이지만, 제목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義解편은 일연一然이 정한 제목이 주는 메시지가 매우 강렬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연의 의중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의해義解편에는 각 편마다 주제가 되는 제목을 붙여 인물의 방향성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각 내용에 일연一然의 찬시가 부기되어 있는 경우는 48조이다. 그 가운데 의해편의 찬시는 11조 12수인데, 특히 일연이 찬탄하는 인물의 개성이나 업적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함축되어 있다. 찬탄 대상이 되는 이는 원광, 양지, 천축으로 간 유사들, 혜숙과 혜공, 자장, 원효, 의상, 사복, 진표, 심지, 대현과 법해이다. 이들은 통일기 전후 신라 불교의 흐름을 대변하는 승려들이며 신라 불교의 흐름을 특징짓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연의 찬시 형식은 모두 한시 칠언절구이다. 한 구가 7자로 되어 4행으로 된 시이며, 1, 2, 4연에 운자를 달았다.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서 ‘선문운사禪門韻士’ 일연이 56세(1261)에 고려 원종元宗(재위 1259∼1274)의 부름을 받고 개성에 머물 때 당시 재상인 시중 이장용李藏用(1201∼1272) 등 4인과 함께 운을 취하여 시를 것이 한 축인데, 당시 시를 짓는 이들에게 상당히 유행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당시 승려시인 일연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1. 「원광서학圓光西學」 원광이 중국으로 유학하다


바다 건너 중국땅의 구름을 헤치고, 航海初穿漢地雲

몇 사람이나 오가면서 맑은 덕을 배웠던고. 幾人來往揖淸芬

옛 자취가 청산에 남아 있어서, 昔年蹤迹靑山在

금곡과 가서의 일을 들을 수 있네. 金谷嘉西事可聞


일연은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과 고본 <수이전殊異傳>에 기재된 원광의 전기를 소개하고 있다. 두 가지 다른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가 중국에 유학하여 처음에는 소승경을 배웠지만 만년에 대승경전을 강의했으며, 맑은 덕을 갖추어 항상 웃음을 머금고 사람을 대하는 관대함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원광은 중국 수나라 통일 전에 이미 중국 남경의 진나라에 유학하여 노장 유학 제자백가 사서 등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절에서 베푸는 강의를 통해 불교의 종지宗旨를 듣고 불법에 귀의하여 소승경인 <성실론成實論>과 <아함경阿含經>을 탐구했으며 <반야경般若經> 강의를 하는데 이르렀다. 수나라 문제가 중국을 통일하여 진나라를 침입했을 때 수나라 난병에게 잡혀 죽음에 직면했지만, 불교적 영감을 드러내는 그를 수나라 대장은 무사히 돌려보냈다. 그 후 원광은 수나라 서울에 와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의 내용도 수용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진평왕 22년(600)에 신라로 돌아온 그를 왕은 성인으로 대접했고, 남녀노소 모두 그의 박애정신에 환대했다. 원광은 낯에 항상 웃음을 머금어 노기를 띠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의 손을 잡고 백성 구제를 부탁했다. 일연은 그의 맑은 덕에 감화를 받았다. 그 이전에도 불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한 신라승려는 여러 명 있었다. 그런데도 일연이 의해편 서두에 원광을 배치한 것은 그가 유학승의 선두그룹이면서 대승적 사고를 지닌 불법 실천의 선구자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1, 2구는 원광이 중국에 가서 난국을 헤치고 당당하게 불법의 맑은 덕을 섭취하고 돌아온 이로 찬미하고 있다. 일연이 염두에 둔 것은 청분淸芬, 즉 맑은 향기이며 깨끗한 덕행이다. 그는 불학에 일가견이 있기 전에 이미 유학과 제자백가, 사서 등에도 심취했으며, 소승경전도 읽었다. 그러나 그는 늘 대승경전을 강의했다고 한다. 일연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은 72세(1277) 이후 4년 동안 왕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며 향인 김척명이 지은 「원광법사전」에 운문사의 개조 보양스님의 사적을 잘못 기록한 것을 보고 그 진상을 밝힌다. 원광이 타계한 선덕왕 9년(640) 이후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유적은 아직 청산에 남아 있었다. 맑은 덕을 펼친 이의 덕업은 자취를 남기고 이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의 일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운문사는 일연이 76세(1281) 되던 해 충렬왕의 부름으로 경주행재소로 가기 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 이미 국사였던 일연이 72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왕명에 의해 거처를 옮긴 곳이 운문사인 것이다. 이곳에서 일연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다니며, 사적이 있는 곳을 답사했다. 이는 그의 답사와 탐구욕으로 인해 남은 기록이다.

3, 4구에서는 일연이 운문사에 머물며, 원광의 사리를 모신 돌탑인 부도가 있는 금곡사金谷寺와 수나라에서 돌아와 머물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를 설하던 가슬갑嘉瑟岬을 찾아본 일을 의미한다.

금곡사는 현재 안강 서남쪽 골짜기에 있고 가서현은 청도 인근의 마루이다. 일연은 그 곳을 거쳐간 승려들의 행적 가운데 원광의 사적에 가장 관심을 드러내었다. 의해편의 첫머리를 장식한 원광서학의 찬시는 대승경전을 강하며 박애정신을 실천한 원광을 기리는 일연의 마음이 녹아 있다.


2. 「양지사석良志使錫」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재 마치니 법당 앞의 석장은 한가롭고, 齋罷堂前錫杖閑

조용히 단장하고 향로에 손수 단향을 피운다. 靜裝爐鴨自焚檀

경 읽기를 다 마치니 더 할 일 없어, 殘經讀了無餘事

조성한 원만한 불상을 합장하며 바라본다. 聊塑圓容合掌看


양지는 신라 선덕여왕 때 활약하던 승려이며 시주로 절의 재정을 충당하는 데 충분한 역량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양지스님의 지팡이는 그의 특이한 재주가 외롭지 않도록 그를 대변하는 ‘제 2의 양지’이기도 하다. 그는 재주를 구비하고 덕이 높았으나 손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 덕이 특출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유명한 불상과 탑 조성 외에도 편액을 직접 썼으며, 장륙존상을 만들 때는 성 안의 남녀들이 모두 다투어 와서 그를 도왔다. 일연은 양지가 기예와 덕을 고루 갖춘 승려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를 찬탄하는 시를 지었다. 본문에서는 양지의 기술에 의해 조성된 불상이 상당히 많았음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서 그의 덕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전체 제목은 ‘양지가 지팡이를 자유자재로 부림(良志使錫)’이지만, 찬시에서 양지라는 승려는 네 가지 일을 순차적으로 행한다. 1,2구에서는 재를 행한 후 정성을 다해 맑은 기운을 북돋우어 주는 단향을 피운다. 3, 4구에서는 소리내어 불경을 다 읽은 후 그동안 만들던 불상을 마지막 손질한 후 자신이 만든 불상을 향해 합장한다. 승려의 직분은 세분화되어 있으나, 양지는 그 일을 모두 다 행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지는 신라 통일기 이전 불교승려의 모습이며, 그 시기의 승려가 얼마나 근면하고 경건했으며, 또한 이판사판승으로서 완벽한 자세를 지녔는지 찬시를 통해 시간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일연이 생존해 있던 13세기 고려시대 선승이 본받아야 할 초기 신라불교의 참신한 단향 냄새가 느껴진다.


3. 「귀축제사歸竺諸師」 인도로 가신 법사들


머나먼 천축 첩첩이 두른 산으로, 天竺天遙萬疊山

힘들여 오른 유사들 가련하구나. 可憐遊士力登攀

몇 번이나 달은 외로운 배 떠나보냈건만, 幾回月送孤帆去

지팡이 따라 돌아온 구름 보지 못 했네. 未見雲隨一杖還


일연은 <고승전>을 일람하며,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 중인도로 간 승려 56인의 전기에서 신라인이 10인 있었음을 발견하고 그들의 법명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당시 인도인들이 신라를 ‘닭신을 받드는 나라’라고 했다는 기록을 전하며, 당시 불법을 위해 용맹정진하며 7세기 중인도의 나라타로 간 신라승려들을 찬탄하고 있다.

이 찬시는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세상을 마친 일을 ‘첩첩 산’과 ‘외로운 배’로 형상화하였다. 1, 2구에서 인도까지 가는 길의 ‘첩첩이 두른 산’은 힘겨운 여정을 암시한다. 그들의 행은 오로지 불법을 향한 지고지순한 마음이 빚어낸 고행이다. 3, 4구의 ‘외로운 배’에서는 그들이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나던 모습과 항구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들을 떠올리게 한다. 일연이 신라 승려의 행적을 훑어 본 후, 전 시대의 구도자에 대해 느꼈을 경건함. 그들이 구도의 일념으로 그렇게 이곳을 떠나갔으며,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향에서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독한 수행자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자신이 유학승으로서의 고행을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선승이기 때문에 구도를 위한 만행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 힘든 여정을 찬시로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이혜동진二惠同塵」 혜숙․혜공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다


벌판에서 활쏘고 사냥하고 침상에 드러누웠지. 草原縱獵床頭臥

술 취해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잠잤지. 酒肆狂歌井底眠

한 짝 신과 공중에 뜬 몸 어디로 갔나. 隻履浮空何處去

한 쌍의 귀중한 불속 연꽃이라네. 一雙珍重火中蓮


혜숙과 혜공의 갖가지 모습은 부처나 보살이 악인이나 일반인을 교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유사하다. 그들의 기행은 보통 승려들이 흉내 낼 수 있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1구는 혜숙이 국선과 사냥하고 고기를 먹는 시늉을 했으나 계율을 어기진 않았고, 여자의 침상에서 자고 있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실체는 다른 곳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2구는 혜공이 술에 취해 미친 듯 노래하고 우물 속에 들어가 몇 달씩 나오지 않았으나 옷이 젖지 않은 신이함을 말하고 있다.

일연은 혜숙의 모든 기행에는 외견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 내재해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리고 혜공에 대해서는 그가 결코 원효대사에 버금가지 않는 존재이며, 선덕여왕을 사모한 지귀의 심화도 방비할 만큼 영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서술하고, 본문에서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인 승조僧肇(383〰414)의 후신임을 강조하였다.

3구에서 혜숙을 짚신 한 짝으로 형상화시키고, 혜공은 죽을 때 공중부화하는 모습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일연은 구마라습, 승조, 혜공, 혜숙 같은 계율 밖의 승려들에 대해 그들 나름의 구도방식을 일견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자장이 계율을 정하기 이전 신라불교의 한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혜숙과 혜공을 ‘화광동진’의 ‘동진’으로 명명했지만, 4구에서 일연은 그들을 ‘화중련’ 즉 ‘불꽃 속에서 스러지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과 연꽃조차 실체는 없다. 오직 공일 뿐이다.


5. 「자장정율慈藏定律」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일찍이 청량산을 향한 꿈 파하고 돌아오니, 曾向淸凉夢破廻

칠중삼취가 일시에 열리었네. 七篇三聚一時開

승속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어, 欲令緇素衣慚愧

동국 의관을 중국처럼 만들려 했네. 東國衣冠上國裁


자장은 선덕왕의 치세에 힘을 부여하기 위해 귀국해서 황룡사 9층탑 건립에 매진한 인물이다. 신라와 중국 양쪽에서 모두 여왕을 불신하자 불심佛心만이 그것을 잠재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사를 일으켰지만 당시 매우 불리한 여건에 처했다. 결국 국내에서는 승상인 비담이 난을 일으키고 그 결과 내란으로 신라의 국력소모는 매우 컸다.

자장의 출신과 행적을 보면 부모의 관세음신앙으로 잉태되어 출생 이전에 이미 불교적 인생관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왕이 권유하는 세속적인 최고관직을 거부하고 불법을 위해 중국 유학길에 올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난다. 1구의 ‘청량산’은 화엄경에 나오는 화엄의 성지 오대산을 의미한다. 2구의 ‘칠편삼취’는 부처님의 일곱 제자의 유형과 계학의 세 가지를 이름이니 대승보살의 계법을 말한다.

자장은 귀국하기 3년 전에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낭떠러지지에 들어가 바위를 가로질러 방을 만들어 3년을 기거했다. 자장이 만년에 꿈속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기로 하고 태백산으로 가는 장면은 화엄종의 도래를 예언한 것이다. 그는 비록 화엄을 접하지 못했으나 그가 닦은 대승불교의 맥이 후에 의상이 태백산에서 화엄을 뿌리 내리게 되는데 일조한다.

자장의 역할은 신라사회에 대승불교의 계율을 정한 개도자이다. 그는 통도사를 짓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신라사회에서 불교를 믿는 신도와 승려의 수를 기하급수로 늘어나게 만든 이이다.

3, 4구에서 자장의 또 하나의 역할이 신라의 복식을 국제사회에 맞게 바꿈으로서 신라의 위상을 높였다고 전한다. 일연은 이 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 정도에서 멈춘다.

본문 후반에서 언급한 자장의 만년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년에 외형적 허상에 치우쳤으며, 문수보살은 이에 자장을 ‘아상我相에 물든 이’로 치부하고 떠나버린다. 아상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4상의 하나로서 ‘자신의 위상만을 높게 생각하여 여타의 견해나 상을 낮추어 보는 마음’을 말한다. 자신을 찾아온 남루한 옷차림의 늙은 거사가 바로 문수보살의 진신임을 뒤늦게 깨달은 자장은 결국 후회하며 그를 좇았으나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일연은 승려로서의 자장에게 왜 완벽한 말년을 부여하지 않았는가? 그 답은 ‘아상’에 있다. 계율에 얽매어 진정한 실체를 지나친 실책. 일연은 승려의 그 면을 지적하고 있다. 금강경의 유명한 4구게인 ‘상이 존재하는 것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이 진정한 실체가 아님을 안다면, 곧 여래를 볼 수 있으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는 일연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던 것이다.


6. 「원효불기元曉不羈」 원효는 구속받지 않다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角乘初開三昧軸

뒤웅박 춤은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舞壺終掛萬街風

달 밝은 요석궁 봄 잠은 이미 옛일. 月明瑤石春眠去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보는 소상의 그림자만 있네. 門掩芬皇顧影空


1구의 ‘각승’은 원효가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금강삼매경소>를 지은 일을 말한다. 두 뿔이 의미하는 바는 본각과 시각인데, 본각은 여래장, 즉 본래부터 인간은 불성을 갖추고 있음을 말하며 시각은 수행을 통해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2구는 큰 박을 머리에 쓰고 염불을 외우며 포교하는 원효를 그리고 있다. 원효의 역할은 불교의 난해함을 쉽게 민중에게 전달하는 일이었으며 당시 학승이 직접 거리로 나선 것을 말한다. 일연은 1, 2구에서 당시 원효가 학승으로서 명성을 드날렸으며, 그의 업적인 불교의 대중화에도 관심을 가졌던 승려였음을 알리고 있다.

본문에서 원효는 자장이 귀국하여 처음 머물던 분황사에 살면서 <화엄경소>를 지었으나, 제4권 「십회향품」에 이르러 그만 그쳤다고 하였다. 이는 화엄학 이외에도 불교 전반에 대한 원효의 학문적 업적이 계속되었음을 말한다.

3구에서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그의 인생에 전기가 되었지만, 이미 그 일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4구에서 원효는 아들 설총의 존재로 인해 실체화되었다. 설총이 만든 원효의 소상이 600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 존재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일연은 76세의 나이에 경주 황룡사를 찾았으나 이미 몽고란에 불타버린 그 곳은 연좌석과 주춧돌만 남았다. 이 찬시를 통해 일연은 아쉬운 마음으로 근처에 위치한 분황사에서 들러, 원효의 흔적을 확인하였고 벅찬 감회에 젖었음을 알 수 있다.

7. 「의상전교義湘傳敎」 의상이 화엄을 전하다


덤불을 헤치고 연진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니,

지상사 문 열리고 귀한 손님으로 맞이했네.

화엄을 캐어와서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똑같은 봄빛이다.


의상은 당나라 사신이 본국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고 양주에 머물다가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화엄종의 2대 지엄의 문하에 들어간다. 지엄은 의상을 특별한 예로 영접하여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화엄경> 연구에 매진한다. 그가 670년에 신라로 귀국한 것은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라는 신인종 명랑이 밀단을 가설하여 국란을 벗어나는 기도를 주관했다. 의상은 6년 후인 676년에야 비로소 태백산 부석사에 가서 대승의 교법을 포교하였다. 그 후 당나라 법장이 당나라 유학승 승전을 통해서 서신을 보내 와서 의상에게 전한다. 일연은 비록 승전에 대해 찬시를 짓지는 않았지만, 승전이 돌멩이를 향해 화엄경을 강의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일연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비호를 받고 중국에서 명성이 높았던 승려 법장의 서신이 의상의 지명도를 높혀 당시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말하고 있다. 의상은 신라에 화엄사찰 10곳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학승인 원효와는 달리 저서는 2가지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연은 그에 대해 ‘솥 안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 살코기만 맛보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일승법계도>는 귀국하기 전 668년에 이루어졌는데,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일연은 ‘세상에서 의상은 금산보개, 즉 불타의 화신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금광명경에 나오는 금산보개는 부처 가운데 1인이며, 신라사회에서 의상의 위대성을 비유한 명칭이다. 그는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허공을 오르는 등 기행을 행했으나 그것에 대해 경계하는 말로 일침을 가한다.

1, 2구에서는 의상이 중국에 유학하여 귀한 대접을 받았으며, 3, 4구에서는 중국의 화엄을 태백산에 심었으나 그 전법의 무게가 똑같음을 말하고 있다.

원광, 양지, 천축으로 간 법사들, 혜숙과 혜공, 자장, 원효. 신라불교는 드디어 화엄을 캐어와 중국과 똑같은 모습의 완벽한 불교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일연은 그 감동을 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의상을 부처의 화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8. 「사복불언蛇福不言」 사복이 말하지 않다


잠잠히 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리. 淵默龍眠豈等閑

떠나면서 읊은 한 곡 간단도 하다. 臨行一曲沒多般

고통스런 생사가 본디 고통 아니다. 苦兮生死元非苦

연화장 세계가 넓기도 하다. 華藏浮休世界寬


사복은 아비 없는 과부 소생이며, 몸이 성하지 못한 서민아이였다. 원효는 그의 조견인이 되어 사복의 모친상에 참석해 포살시켜 수계하도록 했으며, 숲속에 장사지냈다. 사복은 원효에게 자신의 모친이 전생에 함께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라고 말한다. 자신을 원효와 동격이며, 어쩌면 한 수 위라는 것을 과시했지만, 원효는 잠잠히 그것을 받아들여 수긍했고,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는 사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본문에서 사복이 죽은 후 먼 훗날 사람들이 그를 위해 점찰회를 열고 그를 높이는 황당한 얘기도 덧붙이게 되자 일연이 이에 대해 가소롭다고 말하고 있다.

잠자는 용이 남긴 곡조는 간단하다. 삶과 죽음은 본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화장 세계는 넓다고 하였다. 이 세상의 다양함을 긍정하고 있다. 일연의 화엄선 인식이 드러나는 찬시이기도 하다. 이미 신라사회는 잡화엄식雜華嚴飾의 사회가 되었다. 물론 원효의 역할이 지대했으며, 최하위층도 생사를 초극하는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고 그 사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9. 「진표전간眞表傳簡」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


말세에 나타나 무지를 깨우치니, 現身澆季激慵聾

영악 선계에서 감응해 통했다. 靈岳仙溪感應通

정성으로 탑참만 전했다 말라. 莫謂翹懃傳塔懺

동해에 다리를 놓은 어룡도 감화했다. 作橋東海化魚龍


「진표전간」은 신라 중대의 한 불교성향을 말해 준다. 처음에 진표는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의 현신에게 오계를 받았다는 스승을 만나 정성이 지극하면 1년 안에 법을 받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변산의 부사의암에 가서 온 몸을 던져 법을 구하자, 지장보살을 만난다. 그러나 자신의 뜻은 미륵보살에 있으므로 더욱 정성을 다하자 마침내 미륵의 기별을 받고 점찰경 2권과 간자를 받는다. 그는 752년에 물고기와 자라에게도 불경을 강의하기에 이른다.

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은 그 소식을 듣고 그에게 보살계를 받았으며 왕후와 외척들은 그에게 특별 보시를 한다. 그는 산문의 개조가 되어 많은 제자를 거느리게 된다. 일연은 중국에서 이런 유형의 탑참법을 593년에 이미 금지시켰다고 전하며, 이런 방편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비록 법성종法性宗이 아닌 법상종法相宗이지만, 대승으로는 남음이 있다고 본 것이다.

법성종은 화엄종과 천태종을 말하며, 법상종은 유식종唯識宗·유가종瑜伽宗 등으로 불린다. 당나라의 현장玄奘이 중인도 날란다Nalanda 사원에 가서 호법 계열의 유식학을 배워와서 규기窺基에게 전함으로써 중국에서 하나의 종파로 성립되었다. 존재의 현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모든 존재는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마음의 작용인 식이 연기緣起해 현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유식론을 바탕으로 한다.

1, 2구에서는 참법이 무지를 깨우치는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며, 자연에서 감응해 통했다고 하였다. 3,4구에서는 그의 정성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사람이 아닌 어류를 감동시킨 점을 높이 사고 있다. 고려 중기에 법상종 계열의 지지를 받던 귀족층의 신앙행태에 대해서 폭넓은 이해를 볼 수 있으며, 무인과 일반 서민의 선불교와 왕실의 화엄신앙에 대해서도 모두 수용하고 있다. 이는 대장경을 통독한 이후 만년의 견해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진표의 스승은 문수보살의 현신을 접한 이이다. 진표는 그의 신념에 확신하고 미래불인 미륵을 향해 정성을 다한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법상종 계열의 신앙과 맥이 닿는다. 일연이 진표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고려시대 13세기 불교 신앙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10. 「심지계조心地繼祖」 심지가 진표의 뒤를 잇다


궁궐에서 자랐으나 진작 속박을 벗었고, 生長金閨早脫籠

근검과 총혜는 하늘이 주셨구나. 儉懃聰惠自天鍾

온 뜰의 적설에서 간자를 뽑아내어, 滿庭積雪偸神簡

동화사 상상봉에 가져다 놓았구나. 來放桐華最上峰


심지는 신라 하대 제41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아들이다. 그는 진표의 법상종에 흥미를 드러내었다. 그는 팔공산에 거처하며,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이어받은 영심공의 법회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지장보살의 위문을 받으며 혼자서 예를 올렸다. 법회가 끝나서 돌아올 때, 간자가 심지의 옷섶에서 떠나지 않는 신이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이 심지에게 간자를 내 주었고, 심지는 간자를 산꼭대기에서 던져 인연이 있는 팔공산 동화사 우물에서 찾아 다시 모셨다. 일연은 고려 제16대 예종睿宗(1079∼1122, 재위: 1105∼1122) 때에 그 간자가 존재했음을 전하고, 점찰경 상권에 1백 89개의 간자 이름이 서술되어 있다고 하였다.

일연은 진표의 가사 한 벌과 1백 89개의 간자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고 기록된 책을 소개하며 동화사에 전해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1, 2구는 심지의 천성에 대해 찬탄하고 있다. 3, 4구는 정성으로 예를 다하자 그의 주변에는 눈이 쌓이지 않고 휘날리기만 하는 신이함을 드러냈으며, 그가 간지를 던져 인연이 있는 동화사에 모시게 되었음을 적고 있다.

신라하대 법상종의 한 경향을 전해주고 있다.


11. 「현유가 해화엄賢瑜伽 海華嚴」 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


남산의 불상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돌리고, 遶佛南山像逐旋

청구의 불교가 다시 중천에 높아졌구나. 靑丘佛日再中懸

궁정의 솟구친 맑은 저 물이, 解敎宮井淸波湧

누가 향연에서 생긴 줄 알리. 誰識金爐一炷烟

법해의 파란을 보라 법계는 넓다. 法海波瀾法界寬

사해의 영축도 어렵지 않느니라. 四海盈縮未爲難

백억 수미산이 크다고만 말라. 莫言百億須彌大

그것은 모두 스님의 한 손 끝에 있느니라. 都在吾師一指端


본문에서 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가 도의 대결을 펼친다. 각각 우물물과 동해물을 넘치게 했으나 그 법력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두 찬시에서 모두 승려의 존재감을 높이 사고 있다. 다만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라 경덕왕 때의 일이며, 왕은 두 승려를 모두 존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신라 왕실불교는 미륵을 숭상하는 법상종을 지원하면서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을 숭상하는 의상의 화엄종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덕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화엄종의 법력에 더 의지하였고, 결국 혜공왕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화엄종의 법력은 이즈음에 극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해편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내용은 8세기 중반 화엄불교의 정점에서 끝을 맺는다. 매우 의미심장한 마무리이다.



서경희∙성균관대학교 국문학 박사. 현 성균관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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