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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정신과 전문의 김승기 시인의 시 읽기/김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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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949회 작성일 11-03-1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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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比․批|정신과 전문의 김승기 시인의 시 읽기

뿌리에서 야생 사과까지

-나희덕 시인론




나희덕의 새로운 시집 <야생사과>를 읽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갑작스런 변모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모성적 따뜻함’(정현종), ‘유하고 건강한 시’(김기택), ‘단정한 기억, 착하고 얌전하며 읽기 쉽다’(황현산), 그리고 ‘간명하고도 절제된 언어’(김진수) 등이 그 동안 일관된 나희덕에 대한 평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미덕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 이번 시집이다. 해설을 맡은 조강석도 놀라고 있다.

웬일인지 새 시집에서 나희덕은 세계를 내뱉고 있다. 나희덕의 언어가 이처럼 자신의 내부를 소개疏開하려는 의지를 품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다소 의외의 일이다. 왜냐하면 한동안 그의 언어는 성찰로 팽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삶에 치명적인 인지들을 버팀목 삼아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면서 생의 비의秘意를 해독하고 바로 그런 성찰에 기초하여 내면의 방을 안으로부터 단단히 걸어 잠그면서 고통을 견디는 시인이었다.

―조강석, <야생사과> 해설에서


그런 그녀가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즐겨 입는 야한 옷을 입고 외출(?)을 감행했다. 이는 한 시인의 변모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는 계열의 시 포즈이기도 하다. 나희덕의 이 외출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조강석은 아래와 같이 서두를 꺼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나희덕의 새 시집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지하는 바는, 그가 24시간 낯설어지는 형벌을 꽤 오래 전에 언도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시집에서 그의 생체시계는 수시로 멈춰선다. 일상의 시간은 성찰로 부풀기는커녕 언제라도 질문과 회의와 후회와 탄식으로 미분되어 마른다. 그리고 그렇게 마른 시간들은 다시 일상 위에 떨어져 쌓인다.

성찰省察이란 세상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알아가는 과정이다. 주체인 나와 객체인 대상을 접하며 습관화된 인식 결과나 법칙성을 나름대로 새롭게 조명하고 동일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그 동안 나희덕은 이 과정에 참으로 충실했다. 그는 ‘앞으로의 작업은 사회 역사적인 문제들을 구체적인 나의 체험들과 융화시켜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뿌리에서>)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자세는 다섯 번째 시집까지 아주 다양한 대상을 거치며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새 시집은 이 과정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고 있다. 어떤 변모든 하루아침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집, 산문들을 다시 살펴보며 그 도정을 추적해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리라.



페르조나Persona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흉내 내고 따라하는 동일화 과정이 시작된다. 이것은 언어를 획득하며 보다 급속히 진행된다. ‘엄마’라는 첫 단어를 학습함을 시작으로 차츰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상징계에 복속되어 간다.

일정 시기까지는 부모, 가족, 학교,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습득해 나가게 되고, 그 습득한 가치체계를 자기 생각, 느낌, 의지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실은 이것들은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 가짜 자아이다. 즉 빌려온 가면Persona으로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할 뿐이다. 흔히 이 과정을 잘 수행할 때 ‘착하다’, ‘모범적이다’라는 찬사를 받으며 사회의 모범적인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나희덕은 이런 면에서 어떤가? 김기택이 이 부분을 가장 근거리(시운동 동인)에서 지적한 사람일 것 같다. 그는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교과서적 가치에 의존하고 있다.’(<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는 것이 나희덕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모든 평자들의 평은 그녀의 페르조나가 얼마나 강한가를 지적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특히 첫 시집이 더욱 그러하다.

<뿌리에게>는 그녀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해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2년 뒤 25살(1991년)에 낸 처녀시집이다. 첫 시집이란 흔히 그렇듯 습작기를 껴안은 시간 위에서 쓴 시들이다. 그녀의 것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정사에서부터 성장과정, 그리고 그녀가 몸담고 있던 첫 교직까지 시간의 스펙트럼이 넓다. 따라서 작품은 균질하지 않고 작가가 고백했듯 습작기의 작품도 포함시켜 다채롭다.

은사이기도 한 정현종은 그 발문跋文에서 육화된 시들을 칭찬하며 다른 많은 시들이 그렇지 못함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데올로기적인 면도 많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시집 전편에 걸쳐 거짓 자아인 페르조나의 목소리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무는 표정까지도 어둡지 않구나/붉은 해여,/끌려가는 뒷모습조차 비굴하지 않구나

―「지는 해」 부분


내일이라도 두 아이가 돌아온다면/밥보다 반가운 아이들,/덥석 껴안고 감사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이다

―「한 그릇의 밥」 부분


끝없이 국어사전을 찾으며/네 이름을 부른다,/국어사전이 끝나갈 무렵 마침내 통일이여

―「국어사전을 찾으며」 부분

평화로운 새마을 유아원/용감한 아이들을 길러내는 바다

―「붉은 가시고기」 부분

미국의 수입개방 압력에도 아랑곳없이/반성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아름다운 태풍의 눈이다

―「태풍의 눈」 부분


죽은 고기들이/강기슭에 와서 뒹굴면/그걸 주워다 양식으로 삼는,/살아남은 우리는/강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

―「여의도」 부분


네가 듣지 못하는 노래,/이 노래를 나는 들어도 괜찮은 걸까.

―「수화」 부분)


가짜 자아 페르조나를 구성하는 정신사회적 요소는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그의 구조이론structural theory에서 우리의 정신 구조를 본능, 자아, 초자아로 나누었다. 욕망이란 본능Id이 있고, 이것을 현실과 동시에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자아Ego, 그리고 이 사회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초자아Supper ego다. 우리의 삶은 하고 싶은 본능대로 마음껏 할 수 없고, 도덕적이거나 이상만을 좇을 수도 없다. 세 정신구조 요소는 균형적이어야 한다. 흔히 그 균형은 피라미드 형태로 얘기한다. 본능이 가장 넓고(많고), 다음이 자아, 그 다음이 초자아다.

그런데 나희덕에 있어서는 이 피라미드 균형에서 상대적으로 본능, 자아는 작아지고, 초자아의 비대상태를 보인다. 이는 청교도적일 정도로 엄숙한 가정환경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자기자식을 다른 고아들과 똑같이 취급하던 아주 엄격한 부모의 초자아에 자신을 동일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녀의 초자아는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지 못하고,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아무것도 품지 않게(「천장호에서」) 만들어버리고 있다. 산문에서 보다 더 쉽게 그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데, <반통의 물>을 보면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상적이기만하다. 그녀의 정신구조의 균형은 불안정한 역피라미드 형태라 할 수 있다. 세 구성 요소 중 과잉된 초자아는 많은 부분이 그녀의 거짓 자아, 페르조나로 강요되고 있다.



이별離別


아무리 남의 것을 빌려온 가면Persona일지라도, 20여 년 이상 자기 것으로 알고 살았다면 그것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큰 이별이다. 그동안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주관자로서의 작용을 수행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였던 것이다. 이런 ‘나’를 버리는 과정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지게도 없이/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젖지 않는 마음」 부분


네 물줄기 마르는 날까지/폭포여, 나를 내리쳐라/너의 매를 종일 맞겠다

―「풀포기의 노래」 부분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향기 같은 것 인가요

―「찬비 내리고」 부분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나뭇가지 오래 흔들릴 때」 부분


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굴참나무, 사람주나무, 층층나무, 가문비나무

―「잔설」 부분


저녁 무렵/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하늘 한구석 뒤엉킨/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혼돈이며/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중략)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그런 저녁이 있다

―「그런 저녁이 있다」 부분


예전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게 있다면/단 하나라도 남아 있기만 하다면/그 어둠과 안개의 힘으로/말랐던 계곡의 물도 다시 흐르게 할 텐데/(중략) 어떠한 은밀함도/숨결함도 남아 있지 않은 산길 위에/나는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십년 후」 부분


눈 위에,/소복하게 쌓인 눈 위에/나는 큰 대자로 눕는다

―「등이 시린 일」 부분


내가 기대어 살아 온 것은 정작/허기에 불과했던 것인가/(중략)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그런 지푸라기에 붙인 불꽃이었을까/(중략)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그 앞에 신이라도 벗어야겠다/마른 나뭇가지처럼 그리로 그리로 기울고 싶다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부분


바람아, 나를 마셔라./단숨에 비워 내거라.//내 가슴 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울 수 있는 것은 울고/꺾일 수 있는 것은 꺾이도록. (중략)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태풍」 부분


이별은 이렇듯 외롭다. 방황하거나 우두커니 서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학적이며, 타나토스Thanatos를 꿈꾸기도 한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이별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만남의 징후를 느끼는 어수선한 기대감도 만들어 준다. 좀 더 그 이별의 도정을 따라가 보면, 그녀가 유토피아의 구조라고 한 바 있는, “광휘로 가득 찬 노을의 이미지를 잃어버리고 나는 지금 일몰의 시간이 부려다놓은 깊은 심연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반통의 물>)” 즈음의 상황일지 모르겠다.

들것에 실려/까마득하게 먼 길 떠나는 새벽/헐거워진 내 몸속으로 들이 닥치는 찬바람은/이 충만한 냉기는 세상의 경계 속으로 나를 불러들인다

―「그믐」 부분


숨을 쉬던, 그 모든 삶이/조각난 슬픔으로 바닷가에 뒹굴 때/내 필생의 조개껍데기 다 주울 수 없어

―「낙조」 부분


꽃은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단 한 송이도/입술을 열어 용서라고 발음해 주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 마음 터트려/괜찮다 괜찮다 대답해주기 전에는/한 걸음도 물러 설 수 없었다

―「봄 길에서」 부분


짙은 그늘 속/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나는 이생의 나와 화해한다/그리고 산에 내려가면서/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까욱 까욱 울음소리를 내 보기도 한다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부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별 몇 개가 떨어졌는지/잡풀 뒤에 숨어서 누가 울고 있다 (중략) 소리는 풀잎 뒤에서가 아니라/내 마음 어느 갈피에서 나는 것 같다 (중략) 가까이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것들이여/내 안에 있지만 또한/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들이여

―「소리에 기대어」 부분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별」 부분


이별이란 정신분석적 용어로는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을 말한다. 이것은 리비도Libido가 부착Cathexis되었던 애착대상과 분리되며 나타나는 심리반응이다. 나희덕의 페르조나가 아주 견고했던 만큼 이별의 노래도 이렇듯 길다.

첫 번째 시집이 페르조나를 자기 자아自我인 양 인식하고 행동화한 노래라면, 두 번째 시집(<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1994)은 그 페르조나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노래다. 그러나 페르조나를 벗어던지는 것은 성장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진통이므로 이렇게 슬픈 빛을 띠며 젊은 날을 장식한다.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어깨와 업히고 싶은 등도 필요하리라.

아버지는 저를 업었지요/(중략) 내 생의 무게를 누군가 견디고 있다는 것/그것이 긴 들판을 건너게 하였지요./그만 두 손 내리고 싶은/세상마저 내리고 싶은 밤에도/저를 남아 있게 했지요

(중략) 저는 자라 또 누구에게 업혔던가요./바람이 저를 업지요/업다가 넘어져 일어나지 못 했지요

―「밤, 바람 속으로」 부분)


그녀는 아버지 등에 기대어 꺼질 것 같은 생의 무게를 잠깐 견딘다. 그러나 부모의 역할은 여기 까지다. 페르조나를 씌워준 장본인이 부모이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 던지고 혼자 서려면 바람에 업힐 수밖에 없다. 그 바람은 새로운 ‘나’의 탄생처로, 차가운 현실일 수도 있고, 들뜬 욕망일 수도 있고, 이제껏 억눌렸던 외치고 싶은 말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바람의 등에 업혀 지금까지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맨얼굴로 세상과 맞닥뜨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옛날 애착대상으로부터 쉬 벗어나지 못하고 판자촌이나 헐리는 재개발 지구, 양수리 등을 서성거린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새로운 자아가 잉태되고 있고, 그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고 아주 지난하지만 지속된다.

“골짜기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십년 후」), “어렵게 멀어져 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 봐 등을 돌리고 추억의 속도보다 빨리 걷”기도 하고(「기억의 자리」),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잎사귀들의 날을 넘어야 한다”(「흐린 날에는」). 그러다 보면 “끊어진 길이 하늘의 별자리로 만나 빛”날 때도 있고(「이 골방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며(「저녁을 위하여」),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듯함과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산속에서」)를 깨닫기도 하며 단단해진다.



이름 부르기


나희덕은 자신의 산문집 <반통의 물>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 일이라 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는 철학자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름이란 삶의 총체이자 증거와도 같은 것이며 나를 비로소 나이게 하는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 믿는다고 했다.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불빛도 산 그림도 잃어버렸다/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헛되이 던진 돌맹이들,/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천장호에서」 전문


나희덕의 세 번째 시집에 나오는 첫 시다. 시집 자서에서 그녀는 “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고, “고통이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곤 했다.”고 토로했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그 고통이 이제 과거형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시집이 마무리될 즈음은 어느 정도 고통이 잦아들 즈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천장호에서>는 고통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마음을 나타내지만 이 상태에서도 그녀의 이름 부르기는 지속되며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 일’도 계속된다. 페르조나 속에서도 어떠한 대상과의 관계는 있어왔을 터이니 새로운 대상과의 관계라기보다는 기존 대상과의 관계를 수정 재설정해 나간다는 말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그녀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그 무수한 길도/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중략)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나의 생애는/모든 지름길을 돌아서/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푸른 밤」 부분


산에 와 생각합니다/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하고,/(중략)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의 물,/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도토리, 청살모, 쑥부쟁이 이뿐이어서/당신 이름뿐이어서

―「시월」 부분


그녀가 부르는 ‘너’와 ‘당신’은 누구인가. 다시 시작한 사랑, 자기애自己愛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제부터 나희덕의 이름 부르기는 가면의 정체성Persona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사고, 감정, 의지가 주체가 된, 자신의 창을 통한 이름 부르기이고, 이는 세상을 재탄생시켜 가는 구체적 과정이 된다. 그녀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거미와 누에가, 거미줄을 쳐나가듯, 누에가 실을 뽑듯, 여러 대상의 이름을 부르며 새로운 자아自我 속에 촘촘히 그 대상들을 재정립해 나간다.

죽은 새를 보며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버스를 기다리며 깜박 지나가버릴 생도 생각하고, 스타킹, 구두, 칸나에 대한 추억, 남편, 곱추 어미, 늙은 오동나무, 빚, 웅덩이, 깨어진 유리, 풀밭, 아스팔트 틈의 풀, 공터, 옥상 위의 풍경, 거미줄에 사라져 가는 것, 이끼, 아버지에 대한 회상, 가방, 아들과의 관계, 종점, 나비, 폭포, 거리距離, 쓰러진 나무, 물속의 나뭇잎, 누군가가 남기고 간 흔적, 달팽이, 태엽시계, 소리들, 새 떼들, 남한강 발원지 등 무수한 것들에 눈길을 주고 그 이름들을 다시 부른다.

이 과정이 지속되며 나희덕의 정체성은 공고해지고 이제는 옛날의 나희덕이 아니게 된다. 그녀에게 씌워졌던 가면이 벗겨져 가면서 점차 “얼어붙은 호수” 같던 마음은 풀리고 이제 그녀의 호수는 다양한 물상들을 품어 고유한 색깔의 메아리를 갖게 된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마음 지도와 기상도”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그녀 속엔 “목련 한 그루, 오엽송, 모란 두어 그루와 라일락” 등의 여러 형상의 자아도 같이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자아를 지키기 위해 “누구를 벨 수 있는 칼날”을 갖기도 한다. 그러며 그는 이제 옛날의 자신에 대해 담담히 거리를 두고 회상(「뜨거운 돌」)하기도 한다. 이런 이름 부르기, 대상 새롭게 이해하기는 네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과 다섯 번째 시집 <사라진 손바닥>까지 아주 집요하고 지루하게 계속된다.



관념들이여 놓아다오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 불교 유식학唯識學이다. 이 유식학에서는 인식 대상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색과 명이다. 색은 다섯 감각기관五根이 공간 안에서 접하는 구체적 개체五境들로, 같이 할 때만 인식認識되는 현재적 인식인 현량現量의 대상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명인데 생각意根의 대상, 즉 정신적 관념적 분별 대상法境으로, 기억을 통해 직접 접하지 않아도 언제라도 불러와 추리 인식될 수 있는 비량比量이다. 명은 이름을 뜻하며, 이름은 우리에게 그 지칭된 것에 대한 심상心想을 일으키며, 말(소리나 문자)로 표현된다. 명은 일반 명사 또는 개념에 해당되고, 이들이 결합하여 구를 만들고 문장을 이룬다.

나희덕의 대상에 대한 이름 부르기를 살펴보자. 세 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1997)에서는 구체적 대상 자체, 즉 현재적 인식 언저리에 머물며 현량에 가깝다. 그런데 이것이 네 번째 시집인 <어두워진다는 것>(2001)과 다섯 번째 시집인 <사라진 손바닥>(2004)에 들어서서는 대상 그 자체는 점점 구체적 개체가 사라지고 사유의 대상[]이 되어간다. 즉, 이름 부른 대상에 자기의 기억을 채색해버리며 명, 비량比量으로 만들어버린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시집을 묶으며 그녀의 자아는 견고해질 대로 견고해지고, 그 것에 비례해 이름 부르기는 무수한 대상을 의식화해 새로운 자아의 그물망에 포획하는 일에 다름 아니게 되어간다. 이른 바 경계(야생사과, 시인의 말), 관념을 양산해냄을 의미한다. 그러다 마침내 나희덕은 다섯 번째 시집에서 절규를 한다. “‘도덕적 갑각류’라는 말이/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이제 나를 놓아다오.”(<사라진 손바닥>) 이는 그녀의 의식, 자아가 너무 비대해져 과대히 의식화되었음을 단적으로 토로하는 말이다.

첫 번째(1991)와 두 번째(1994)시집에서는 강요된 초자아의 비대화의 결과로 나타난 페르조나의 과대와, 그것과의 이별 때문에 심한 홍역을 앓았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자신의 자아의 팽창으로 인한 지나치게 의식화된 관념이 문제가 된다. 자아의 지나친 팽창은 다른 대상을 침습하게 되고 모든 물상, 즉 이름이 불려지는 대상은 그 실상 자체로 서있지 못한다. 다만 규정된 개념, 기억되어 되불려진 상인 관념, 경계境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산은 산이되 산이 아닌 것이다. 그 대표적 시가 다음 시이다.


처음엔 연꽃을 열어 보이더니/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말 건네려 해도/손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발밑에 떨어진 밥알들을 주워서/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백년쯤 지나 다시 오면/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그보다 일찍 오면 빈손이라도 잡으려나/그보다 일찍 오면 흰꽃도 볼 수 있으려나//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라진 손바닥」 전문


이것은 회산의 백련지라는 연못에 대한 시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구체적 대상現量인 연못이 폐선이 가라않은 것 같은 삭막한 관념의 덩어리比量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비유라는 것 자체가 아상我相에 사로잡혀서 어떤 대상의 실체는 간데없고 표상의 개념으로 전치시켜버려 한정화限定化하는 치명적 약점을 갖는다. 이제 나희덕의 시에는 노래하려는 대상이 아니라 관념이 채색된 상징계의 암호들만이 포획될 뿐이다.



야생사과


나희덕의 여섯 번째 시집 <야생사과>를 접하는 내 첫 느낌은 ‘나희덕마저’였다. 그 간결하고 단정하던 문체는 허물어지고 논리 정연하던 연상은 느슨loose해져 제멋대로 날아오르고 있다. 더 이상 종전의 나희덕 읽기 독법은 통하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창밖은 고요해/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접시를 앞에 두고/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물었지/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사과 씨는 사과의 심장이었을까/둘레를 가진 것들은/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지지/심장이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너는 들어본 적 있니?/둘레로 퍼지는 침묵의 빛,/사과를 잃어버리고도/접시가 깨지지 않은 것처럼/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식탁과 접시는 말없이 둥글고/창밖은 고요해/괄호처럼 입을 벌리는 빈 접시,/새는 날아가고/나는 다른 심장을 삼키고/둘레를 가진 것들은/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

―「새는 날아가고」 전문


시집 <야생사과>(2009)의 첫 시다. 첫 시라는 것은 시인이 시집을 묶을 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고 흔히 그 시집의 방향성이나 대표성을 띤다. 따라가 보자. 난데없이, 새가 내 심장을 물고 갔단다. 창밖은 고요한데 접시를 앞에 두고 식탁에 앉아있단다. 접시엔 사과가 한 개 놓여 있고 그 사과를 베어 문다. 그런데 사과가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단다. 사과는 심장으로 연상되고 ‘사과 씨는 사과의 심장 이었을까’로 연상은 가쁘게 건너뛴다.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진다는 말을 끌고 온다.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 들어본 적 있냐고 묻더니 접시는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처럼 자신도 깨어지지 않고 식탁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 사과가 심장이 되고 접시는 시적 화자와 어느새 동일화가 되어 있다. 접시는 여전히 건재하며 말없이 둥글고 창밖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하다. 괄호처럼 입을 벌린 빈 접시? 괄호는 저 혼자 상실감에 빠져 있다는, 아니면 혼자 할 말이 많다는. 어쨌든 심장을 물고 새는 날아가고, 대신 다른 심장을 삼켜 대리만족하면 된다. 둘레를 가진 것들, 세계재현이나 세계모델을 구성하는 것들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이유로 만났다 헤어지며 사는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어지러울 정도로 연상이 빠르고 숨이 차다, 낱말들을 결합하는 일반 사회적 법칙인 통사統辭는 이미 해체되어 버렸다. 문법에 충실한 이분법적 이성理性, 즉 코지토cogito, ergo sum는 이미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다. 유기적 형식은 아득해 보이고 그저 연상을 쫓아갈 뿐이다. 나와 접시, 사고와 심장이 동일화되어 있다. 어차피 나와 너, 사과와 나라는 구별도 화엄華嚴에서는 부질없는 경계(共相)가 아닌가? 사과라는 말, 심장이라는 말도 무수한 개념이 모여 만든 집합체로, ‘이런 것은 이것이라 부른다.’고 규정한 것(法相)일 뿐이고, 까짓 거 ‘심장’을 ‘사과’라고 부른들 어떻겠는가? 시 하나를 더 읽어보자.


1/빗방울이 구름의 죽음이라는 걸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빗방울이 풀줄기를 타고 땅에 스며들어/죽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2/인디언 무덤은/동물이나 새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빗방울이 멀리서도 길을 찾아올 수 있도록

3/새 형상의 무덤은 흙에서 날고/사슴형상의 무덤은 아직 풀을 뜯고 있다/이 비에 풀은 다시 돋아날 것이다

4/나무들은 빗방울에서 냄새로 이야기한다/숲은 향기로 소란스럽고/오래된 나무들은 벌써 빗방울의 기억을 털고 있다

5/쓰러진 나무는 비로소 쓰러진 나무다/오랜 직립의 삶에서 놓여난/나무의 맨발을 빗방울이 천천히 씻기고 있다.

6/빗방울은 구름의 기억을 버리고 이 숲에 왔다/그러나 누운 뼈를 적시고/구름과 천둥의 시절로 돌아 갈 것이다

7/구름이 강물의 죽음이라는 걸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죽은 영혼을 어루만진 강물이/햇빛에 날아오르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빗방울에 대하여」 전문


「새는 날아가고」와 같은 독법이 필요하다. 이 두 시의 공통점은 내용면이나 형식면에서 폐쇄적이 아닌 개방적 형식을 문법 연상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상은 논리적이지 않고 분리, 연결, 선회, 치환되며 어디로 튈 줄 모른다. 한마디로 어떤 전형이나 보편성 전체성은 없다. 이것은 흔히 우리가 일컫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다. 데리다의 후예인가. 그녀는 해체를 꿈꾸는 것인가.

시를 좀 더 쫓아 가다보면 그것도 아니라 갸우뚱하게 된다. 우선 그는 ‘본질은 있는가? 본질은 무엇인가?’로 대별되는, ‘인식론적 회의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 적 존재론적 회의론’에 빠져 있지 않다. 단지 그녀가 그리도 진저리를 치던 관념형성 전의 전의식Preconsciousness 즈음에서 연상 가는대로 가다보니 문맥이 극도로 자유분방하고, 욕구가 자유롭게 방출되며 자신의 내면, 주장, 욕망이 아주 선명해졌을 뿐이다. 시집 <야생사과>를 처음 대하며 내가 한 오해誤解는, 무엇을 할라치면 아주 충실히 해야만 하는 나희덕답게(이런 성격 성향은 아직도 남아있는 페르조나의 잔재이리라), 시 쓰기가 너무나도 본능Id 특성에 충실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그래서 명료하기보다는 거칠고, 시들이 길어지고 산문화된 경향을 보였다.



나희덕이 서있는 자리


본능적 삶이란 나희덕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앞에서 지적했듯, 본능Id은 지나치게 비대화된 초자아와 너무 커진 자아Ego 때문에 최대한 억제되어 있어왔다. 그런데 그녀가 본능적 삶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고, 이 화려한 외출은 그녀에겐 반가운 일이다.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본능Id이란 것의 특성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본능Id은 내면 밖에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부분 비의식적이어서 부지불식 중 작동하고 예측불허하며 아주 역동적이고 어떤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비의식은 의식으로 표현하면 줄어드는 특성이 있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비의식적 동기에서 이루어진다. 본능은 만족되지 못하면 긴장이 생기는데, 이것을 즉각 없애려는 쾌락 고통의 원칙Pleasure pain plinciple이 작동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장 소망충족Wish fulfillment을 시키려 한다. 이는 장님 같이 일방통행이고, 한마디로 의식부분이나 자아와 의사소통이 안 되는 무의식 덩어리다. 서로 상반된 것이 공존 수행될 수 있으며 간섭하지 않고 서로 다른 욕구가 동시에 추구될 수 있다. 그리고 말이나 문자보다는 이미지 상상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논리적 연결도 어떤 종류의 전후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아서, ‘왜냐 하면’이라는 이유가 없고, ‘부정Negation(아니다)’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리고 시간개념이 없고Timeless, 에너지가 아주 쉽게 다른 것으로 치환Displacement(옮겨감, 예로 한 이미지에 붙어 있던 성적 에너지가 다른 이미지로 옮겨감)된다. 환경영향을 받지 않고 고려하지도 않는다. 이 본능은 공통 인류의 것이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이번 시집은 이런 특징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을 보라. 언제 그녀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나.

“희덕아. 삼켜야만 하는 것, 삼켜지지/ 않는 것, 삼킨 후에도 울컥/ 올라오는 것……여러 가지지만/그래도 삼킬 수 있음에 늘 감사하자. 미선. (중략) 미선아. 삼킬 수 없는 것들은/삼킬 수 없을 만한 것들이니 삼키지 말자./ 그래도 토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자. 희덕”

―시 ‘삼킬 수 없는 것들’ 중에서


옛날에 나희덕은 ‘삼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우냐’면 ‘그래 맞아 참 고맙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토할 힘을 감사하자 하고 있다. 삼키고 싶지 않으면 삼키지 않고, 토하고 싶으면 토하면 되지 굳이 왜 삼켜야 하나? 또 삼키다가도 싫으면 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게 본능이고, 본능엔 기다 아니다가 없다.

어째든 나희덕의 주장은 무의식적 억제Repression 내지 의식적 억압Supression의 저항을 뚫고 나온 말이다. 나희덕 그녀는 ‘하고 싶으면 하고 만족해야하는’, 본능Id을 바야흐로 크게 앓고 있다. 이렇게 본능을 좇아가다 보면 자아나 관념들에 억제되던 옛날의 나를 부정不正해야 한다. 지금까지에 시작법詩作法이 그렇고, 자아정체성, 세계관이 그렇다. 그녀는 기존에 것들을 껴안으며 수용하고 인내하며 그 경험들이 자기화 되길 기다렸다 시를 쓰곤 했었다.

꽃만 따먹으며 왔다/ 또옥, 또옥, 손으로 훑은 꽃들로/ 광주리를 채우고 사흘도/ 가지 못할 향기에 취해 여기까지 왔다(중략) 뿌리를 드러낸 나무 앞에 며칠째 앉아있다

―「말의 꽃」부분


어쩌면 좋아요 나를 부르려는데/ 내 이름이 사라졌어요 이름 밖에서 서성대는/ 아이 하나, 복도는 너무 길고 캄캄해요

―「누가 내 이름을」부분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이는데(「야생사과」) 어떻게 계속 따라 갈 수 있는가. 이런 자기부정들은 필연이고, 또 이런 부정들은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 실천은 뒤에 있는 나를 멀리하고 지금의 나, 본능의 명령에 충실한 나를 따라가는 것이다.

나팔을 부는 소년도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도 처음엔 완강한 선속에 갇혀 있었지요 그들을 꺼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을 빻고 또 빻는 일뿐이었어요

―(「쇠라의 점묘화」부분

당신 몸 속에 흘러들어/메뉴판 가득 적힌 당신을 주문하고/나를 후루룩 마셔버리고 싶어/아니면 당신 입 속에 숨어/질기디질긴 나를 되새김질하거나/당신 눈 속에 스며/나를 스르륵 지워버리고 싶어

―「 말코비치 되기」부분


음악에 몸을 맡기자/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중략) 당신에게도 들리나요?/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분홍신을 신고」부분


빤질하고 견고한 관념 같은 선을 부수고 그 안에 갇혀 있는 노인을 꺼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여적까지의 당신을 나를 지워버리고 싶고, 그냥 음악, 아니 내 몸의 리듬에 맡기고 싶다고 한다. 본능은 원래 시간 개념과 전후 인과 개념도 없는 일방통행이다. 이런 그녀의 모든 노력의 근거는 아래 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의 물기가 거의 말라갈 무렵 낯선 땅에서 물의 출구를 발견한 셈이다/무수한 나를 흘려보내는 것이 첫 물줄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었으니,/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기원에 대한 갈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이전의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맞기고 싶다./오늘도 봄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 다른 나를.

―시집 <야생사과> 시인의 말


페르조나Persona와 지나치게 의식화된 자아, 그리고 수용과 이해 그리고 포용하며 구조적 안정감을 중시하던 지금까지 시작법은 첫 물줄기이고 경계이다. 옛날의 나희덕에게는 당연히 이것은 견뎌야 할 어떤 것이었고, 기억의 되새김질을 통해 육화되길 기다렸었다. 이제 그녀는 그것을 거슬러 극복할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기억의 되새김질인 비량比量적 사고를 버리고 현재의 날[生] 언어인 현량으로 노래하고 있다. 비유가 아닌 구체적 대상의 풍경으로 언어를 대신하고 있다.

한때는 나희덕은 초자아 과잉이 문제였고, 그 초자아에서 풀려나자 이제는 자아의 비대 때문에 관념과잉을 겪었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성격구조의 마지막 남은 한 곳을 너무나 충실히 나희덕답게 탐험 중이다. 그곳은 바로 본능Id이고 지금 그녀는 목하 본능 과잉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강석은 이 상태를 “그녀는 의미들이 쌓일수록 깊어지는 통찰과 그와 비례해 무거워지는 마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 그녀는 자꾸만 막무가내 흐르고 싶고, 지우고 싶고, 마음의 실타래를 한없이 풀어내며 문지방을 넘나들고 싶다”고 말했다.

본능을 포함한 자아니 초자아니 성격 구조의 모든 목적은 보다 많고 효율적인 소원성취Wish fulfillment , 욕망성취로 귀결된다. 그러기 위해 성격구성 요소들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했듯 나희덕은 그러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껏 지나치게 억제되었던 욕망을 쏟아놓을 권리가 그녀에겐 마땅히 있다. 그녀의 본능이 가지가지 색깔로 환하게 꽃밭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이런 과정은 그녀를, 넓은 본능이란 아랫도리를 가진 균형 잡힌 피라미드형 성격구조를 갖게 할 것이고, 그 결과 보다 자유롭고 관대하며 여유롭고 따뜻하게 성숙시킬 것이다.



김승기∙경기 화성 출생.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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