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7호(2010년/봄) 신인상(시부문)/선운사 가는 길엔 숲이, 숲 속엔 나무가 산다 외 4편/김춘
페이지 정보

본문
37호(2010년/봄) 신인상(시부문)
김춘
선운사 가는 길엔 숲이, 숲 속엔 나무가 산다 외 4편
도솔천 저 쪽에서 이 쪽, 속세로 건너오다
오랜 시간 나이를 세다가 잊었다는 노목들
직립하는 나무의 속성도 잊었다
잎새 없는 자리마다 북소리가 둥글게 말려 붙어있어
새의 발톱에 할퀸 날에는 온종일 윙윙 거려
숲은 얼굴을 찡그리곤 해 그럴 때마다
눈가루가 발자국 위로 날아와 앉아 나의 속눈썹 같이
종소리가 울려 적막과의 은밀한 포옹
포옹 뒤로 숨은 종소리의 긴 꼬리를 밟는 무표정한 사내
나무의 젖은 등뼈를 껴안고서 목을 묻고 운다
옹이들이 컥컥 튀어 나와 껴안은 나무의 등뼈에 박힌다
옹이는 그렇게 뜨거운 생채기였던 것
숲은 찢어진 적막을 노련하게 봉합하고
나무 따라 기울어지는 어깨를 곧추 세우곤 해 그럴 때마다
눈가루가 발자국 위로 날아와 앉아 나의 입술 위에 너의 입술 같이.
소나무
안개마을로 들어간 그와 그의 숲으로 들어간 안개가
하늘로 걷는다 균열의 그늘에 세로획이 그어지고
그 갈피로 걸어 들어가면 따가운 숨소리 닿는다
어제는 그를 붙잡고 새가 말하는 동안 비가 왔다
빗물을 지하 두 번째 층에 묻고 키우기로 했다
물결 따라 오르면 구름의 맨살을 끌어안을 수 있지
푸른 바람이 찢어진 숲의 한 자락을 들어 올릴 때,
빠져나갈 때, 붉은 발등의 그는 오랜 생각에 잠겨
알아채지 못한다 스스로를 봉인한 곳은 아직 끈적해
기울어지는 마음을 잘라버린 지독함이다.
새벽을 훔쳐보다
천지의 맞물린 틈으로 얇은 그가 쓰윽 나오는 걸
나는 종종 훔쳐보곤 해, 훅 맡아지는 알콤한 냄새
들고양이 굼실굼실 얇아지고, 쓰윽 사라지네
밤사이 구겨진 옷깃에서 화르르 꿈들이 날려
오그리고 있던 좁은 길들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하지
좁은 길을 밟고 걸어가는 어깨가 왜 둥글까 생각하지
내 몸이 둥글게 말렸다는 걸 잊은 거야
이런, 그가 문 뒤에 숨은 나를 통과했던 거야
나는 후다닥 밝은 눈동자에 눈꺼풀을 치네
새들, 부리를 씻는 소리가 귓속에서 탕탕 울려오고
천지에 박혔던 못이 튕겨 나와 머릿속으로 데굴 굴러오네.
그의 콜라주*에는 그녀가 있다
혀와 혀가 말려서 독설이 되었다 통로에 뿌려진 독설이 화실에 걸린 그의 외투를 발기발기 해집어 놓았다 붓끝의 색깔이 맵다 그녀의 팔과 다리를 뚝뚝 분질러 바꿔 붙이고 더 매운 색을 칠한다 그녀의 혀는 파랗게 질려서 뱀의 혀가 된다 꽁초의 담배 연기를 깊이 삼킨다 혀와 혀가 말려서 달콤한 거짓말이 되던 날도 있었다 그 달콤한 거짓말은 대동맥을 지나 발가락의 촉수에 박혔지 그 날의 그녀를 오려내어 식어버린 그녀의 심장에 붙인다 심장이 순간 뜨겁게 뛰다가 멈춘다 이런 날은 그림이 혼자 마르도록 내버려 두고 술집으로 간다 등받이 없이 삐그덕 거리는 의자에 앉아 독설만큼 쓴 소주를 들이킨다 줏대가 있어야지 암 줏대가 있어야지 그렇고 말고 주인 여자의 사설도 허리춤에 끼고 좁고 가파른 통로에 들어선다 발등에 떨어지는 건 몸속에서 발효되어 더 강력해진 사십 도의 알콜, 눈물이 아니다 구멍 깊은 외투 주머니 속 어딘가에 열쇠가 있기는 있다 철커덕 검은 철문이 열리고 그를 빨아들이는 방, 그녀가 없다.
* 콜라주 -미술 회화 기법의 하나... 화면에 종이 조각이나 섬유 등을 붙여 재질감의 변화와 색채. 구도 등의 면에서는 독특한 효과를 기함.
술래가 사라졌다
내가 내 속에 숨어드는 사이 술래는 슬퍼졌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짧은 손가락을 기억해
내가 내 속에 숨어있는 사이 술래는 사라졌다
변두리 쪽방에서 나왔을 때 네가 없다는 걸 알았다
지상에 왔던 길 하나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한 순간도 숨지 않겠다고 다짐해
술래는 늙지 않아 짧은 손가락이 길어지지 않아
오늘, 창을 닦았다 앞산으로 오르는 길이 투명하다
칡넝쿨이 돌돌 말고 있던 고요가 잘근잘근 씹힌다
평평한 산돌, 산돌의 잔등이 아직 따뜻한데
저만치 덤불 속에서 푸득 산새가 날아오른다 누구일까
나의 길어진 손가락이 습관처럼 너를 기억한다.
당선 소감
나라는 의식이 생길 때까지
뒷산으로 오르는 언덕에 산벚나무가 있었다. 까맣게 익으면 나무에 올라가 입이 까매질 때까지 따 먹곤 했었다. 어느 날 열매를 따 먹으러 갔을 때 그 나무는 베어져 있었다. 그렇게 내 시에 대한 열망도 언제였는지 베어져 버렸다. 그러나 내가 살아내는 동안 그 나무는 내 안에 들어 와 있었다. 잘린 밑둥치에서 다시 싹이 나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만들고 있었다. 실한 열매를 맺으라며 흙을 북돋아 주는 응원군까지 생겼다. 응원군에게 보답하며 살고 싶다. 내가 나라는 의식이 제대로 생길 때까지 시를 쓰고 싶다. 추천해 주신 강우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당선자 김춘
추천평
시를 만드는 솜씨 좋아
김춘의 「선운사 가는 길에 숲이, 숲속에 나무가 산다」 외 4편을 신인상 추천작으로 내보낸다. 김춘은 시를 만들 줄 아는 솜씨가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일들이나 사물들을 시로 소화해 내는 재주(시적 자질)가 뛰어나다. 그리고 투고한 작품 10편의 모두 시적 수준이 고르다. 시 「선운사 가는 길에 숲이. 숲속에 나무가 산다」에서 시를 시작하는 도입부가 “도솔천 저쪽과 이쪽, 속세를 건너오다/오랜 시간을 세다가 나이를 먹었다는 노목들” 같은 표현은 시적 형상으로도 빼어날 뿐더러 시를 이끌어가는 솜씨도 만만찮음을 보여준다. 또 「소나무」에서 “어제는 그를 붙잡고 새가 말하는 동안 비가 왔다”라는 표현이라든지 “물결 따라 오르면 구름의 맨살을 끌어안을 수 있지” 같은 표현은 매우 신선하다. 그리고 「새벽을 훔쳐보다」에서 보듯이 새벽이 오는 미미한 풍경과 시간이 과정을 김춘은 아주 다양하게 시로 만들 줄 안다. 이만하면 시인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너끈히 해내리라 믿는다. 다만 「그의 콜라주에는 그녀가 있다」에서 보듯이 상상력의 다양한 전개는 좋으나 그것이 너무 실험적이고 자칫하다가는 시를 너무 난해한 쪽으로만 끌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사족으로 단다. 좋은 시 쓰기를 바란다./추천위원 강우식(시인)
추천15
- 이전글37호(2010년/봄) 신인상(시부문)/허망한 영광의 알레고리 외 4편/천선자 10.08.19
- 다음글37호(2010년/봄) 신작시/밤꽃 향기 흩날린다 외 1편/천화선 10.08.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