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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특집/이십대의 발랄한 상상력들(안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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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80회 작성일 10-12-0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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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서울 떠나 살 수 있을까?

안 은 별|기자, 23세




장면 1. 재작년 여름 일본 산인山陰 지방을 여행 중일 때다. 시마네(島根) 현청 소재지인 마쓰에(松江)란 중소도시에 들렀다. 도시의 명물인 ‘신지호’ 주변에 앉아 있으려니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 그는 인터넷으로 알게 된 여자애와 만날 예정이었는데 바람맞았다고 고백했다.

오사카에서 대학을 나와 취직했는데 하필이면 이 ‘촌’에 발령이 났다며 그는 저녁 먹는 내내 불평과 한탄을 늘어놨다. “도쿄에서 왔댔지? 부럽다”(당시 나는 도쿄에서 유학 중이었다), “일 끝나면 할 게 없어”, “빨리 여길 벗어나길 바랄 뿐이야”, “이 주변엔 아무 것도 없어”…오죽했으면 인터넷으로 만난 애한테 바람 맞고 나한테 말을 걸었을까 싶었다. 단 하루였지만 솔직히 나도 그곳이 심심하긴 했다. 도쿄의 휘황찬란한 밤이 그리웠다.

장면 2. 바로 다음 날. ‘유노츠온센’(温泉津温泉)이란 마을로 갔다. 마쓰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진 어촌 마을이었다. 버스도 안 다니고 무인역 달랑 하나가 마을 입구를 지키는, 저녁 7시만 되면 깜깜해지는 곳 말이다.

이 마을에서 묵었던 전통 료칸(여관) ‘요시다야’는 좀 특이한 곳이었다. 료칸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어 대부분 늙은 여성이 몇 대 째 내려오는 가업을 처분하지 못해 곤란한 상태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요시다야의 여주인들은 모두 20대다. 료칸 소유주와 혈연관계도 없고 이 마을에 연고도 없다. 이들은 료칸 운영 외에도 지역 방송 출연, 공정무역상품 거래 등 활발한 로컬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마을엔 ‘요시다야’의 운영진 외에도 카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20대 사업가들이 꽤 있었다. 그 어느 여행지보다 조용했지만 지루할 틈 없는 곳이었다.

장면 3. 서울 거주 3년째로 접어드는 내가 퀭한 모습으로 광화문 일대를 거닐고 있다. 서울에서 나는 광화문만 벗어나도 공황상태에 빠지는 증상과 이 나라의 문화·행정·권력의 90%를 점령한 과도한 편중현상에서 오는 피곤을 동시에 겪고 있다. 단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이 도시는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고 있고 나는 그 끝에 간신히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를 대신해 밀려나고 있다. 앞서 가는 사람들은 이제 집 한 채 마련해야 된다고 충고한다. 더 앞서 있는 사람들은 서울을 좌판삼 아 ‘부루마블’ 게임을 한다.


서울에 산다는 것

“서울, 남산, 전차, 술집 주인아저씨, 하숙집 아줌마, 일요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이제 곧 날이 밝겠지. 거리로 나갈까. 사람들을 만날까. 커피를 마실까. 머리부터 깎아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휴일>(1968, 이만희)의 마지막 장면, 시대를 초월해 ‘젊은이’들이 서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버려야 할 이유가 동시에 읽힌다.

영화는 돈도 직업도 없는 젊은 두 남녀가, 돈도 직업도 없기 때문에 무료하고 비참한 휴일을 보내는 내용이다. 비록 40년 전이지만 영화엔 오늘날의 현실이 겹쳐 보인다. 허욱이 사랑한다며 호명하는 것들은 모두 이 도시이거나 도시의 잔상인데, 정작 허욱은 그것들로부터 내동댕이쳐진 존재다. 서울은 직업이 있어야만 휴일이 반가운 날이고, 동시에 커피를 사 마실 입장료가 있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

영화의 배경인 60년대 말은 많은 젊은이들이 영등포행 기차표를 ‘편도’로 끊었을 때다. 1955년 전체 가구의 61.9%를 차지했던 농가구수는 64년 55.6%로, 5년 후 49.6%로 급격하게 줄어든다. 정부가 중공·중상정책을 펴면서 농촌을 완전히 외면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상경한 수많은 꿈들에 비해 배당은 형편없었다. “대부분 무작정 떠나갔다. 남자들은 막벌이(흙지기, 공사장 잡역 등)을 하고 여자들은 식모살이를 할”(70년 6월 동아일보)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인구의 서울 유입은 계속됐고, 2010년 서울은 남한 땅 0.61%에 불과한 면적에 인구 22%가 사는 기형적인 구조가 됐다.

인구는 포화상태, 그러나 서울의 면적은 그대로인데다가 ‘포용력’은 더 낮아졌다. 재개발, 부동산 열풍이 그 좋은 예다. 서울이라는 상징 자본을 점유하기 위한 싸움은 결국 서울에 주소를 등록하기 위한 싸움이며, 현재 서울에 횡행하는 현상은 가진 이들을 더 안으로 덜 가진 이들을 외곽으로 몰아내는 과정이다. 더 넓고 좋은 아파트는 늘어나고 있지만 거기에 입주할 능력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다. 재개발 지역 주민들이 물러나는 대가로 받는 푼돈으로는 다시 서울에 입장할 수 없다. 이들도 쫓아내는 서울이 비 서울인에게 관대해지길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서울에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서울에 살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좋은 주거지에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열악한 주거지로 내모는 일이다. 똑같은 이치로 서울을 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내쳐지고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도시에 남아있는 것이 결코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서울에 남을 것인가

20대에게 수많은 질문과 책임이 요구되지만, 나는 앞으로 ‘어디 사실 건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연명하다 보니, 대부분의 우리가 갈 길은 부동산 경쟁 대열에 합류하거나 멀찍이 밀려나 도시 빈민으로 잔류하는 것뿐이라는 심증이 굳어져간다.

이런 문제를 도시 빈민 철폐 운동으로 정면 돌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한 축엔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하는 선택지도 존재한다. 서울의 폭력성을 제거하려면 서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농·귀촌·지역사회 투신이 20대 사이에서 저항의 의미, 운동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장면 2에서 떠올린 ‘요시다야’의 경우가 그렇고, 최근 사회적 기업 콩세알ⁿ의 ‘율면은 대학’에서 추진하는 귀촌 프로그램이 그렇다. ‘율면은’의 젊은이들은 농사 교육과 함께 그들만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운동이든 뭐가 됐든, 20대에게 서울 아닌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을까?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먼저 ‘먹고 사는’ 문제가 가로막고 있다. 지방엔 일자리가 부족하고 그나마도 열악한 상황이며, 농사일이 금싸라기가 될 일은 아주 드물 테니 말이다.

거기다 문화자본과 사람의 부재, ‘무료함’을 견딜 수 있는가도 문제다. 한 교수는 지방 일자리 기피 현상이 일이 힘들고 임금이 적어서가 아니라 주말에 여가를 즐길 시설이 없다는 이유에서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또 언젠가 슬쩍 귀농 이야기를 꺼냈던 친구 A는 “그래도 혼자선 못가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또한 출신지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에게 서울은 이미 버릴 수 없는 고향이다. 지난해 ‘서울서베이’ 조사 결과를 보면 시민들 가운데 78.6%가 서울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는데, 이런 경향은 대부분의 국토가 도시화된 뒤에 태어난 80년대 이후 출생자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미 마을공동체가 사라져버렸는데, 아파트를 굳이 고향이라 여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학교 앞 자취방이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도시에서만 떨칠 수 있는 익명성도 우리를 붙잡는다. 도시가 사람을 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고 사람들이 도시를 만든다는 역설이다. 경북 A도시 출신 친구 B은 “마을 사람들이 날 너무 잘 아는 게 싫어” 상경했다고 말했다. 마을은 좁다. 편집해서 보여주기가 익숙한 세대에게 서울의 숨 막히는 밀도는 차라리 축복인 셈이다.


‘같이’ 가면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젊은이들이 촌에 간다고 하면 농촌을 낭만화하지 말라는 경고를 꼭 듣는다. 농사일은 ‘오가닉’의 이미지완 딴판이며, 흔히 상상하는 지역 인심이란 것도 호락호락 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필요한 경고는 과연 서울 그림자를 지울 수 있는가. 서울이 제공해준 물질·상징자본, 사람, 익명성 등의 편의를 잊을 수 있느냐다. 귀농은 일부 언론에서 부추기듯 블루오션을 ‘개척’하거나 땅의 수익률을 높이는 행위가 아니라, 서울에서 따랐던 서열과 가치관을 버리거나 수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귀농 시인 서정홍도 조언한다. “여러 가지 까닭으로 도시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가난한 농부처럼 살아야 합니다. () 살아 온 삶을 뒤돌아보면서 하나하나 바꾸어나가야 합니다”라고. 문제는 버리고 바꾸는 일이다.

자, 그럼 나는 서울을 버릴 수 있을까? 모든 애증을 다 털어버릴 수 있을까? 장면 1에서 느꼈던 심심함과 우울함,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있을까? 당장은 “더 부대껴 볼 생각입니다만……”이라는 대답밖엔 안 나온다. 그러나 언젠가 함께 할 녀석들을 꾀거나 납치해 ‘남쪽으로 튀어’ 볼 까 생각 중이다. 기역 자는 알아도 낫은 모르고, 미드 <24>는 알아도 24절기는 모를지언정.



안은별∙경희대학교 언론학부 졸업, 영화지 ≪무비위크≫ 기자, 지난 해 ≪프레시안≫ 국제팀 기자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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