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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특집/이십대의 발랄한 상상력들(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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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없다
박 연|가수, 22세
20대에 가능성이 있습니까?
원고의 주제를 듣자마자 난, 이 ‘물음표’가 정말 물음표인지 궁금해졌다. 국어 시간에 배운 화법들이 가물가물하게 머리를 스쳤다. 정말 궁금한 걸까, 비꼬는 걸까. 질문의 저의가 대체 무엇일까. 눈치를 보다가 도리어 묻기로 했다. 대책 없이 해석했다간 엉뚱한 글을 뱉어내게 될 테니까.
그럼, 20대에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가요?
의도적인 질문에 의도적인 답변. 두 개의 문장에, 똑같이 두 개의 물음표가 있다. 이 물음표에는 20대 문제를 둘러싼 의문, 아니 의심이 담겨 있다. 젊은이들이 잘 하고 있다면 굳이 ‘너희 뭐 하냐’고 묻지 않았을 것이고, 젊은이들이 정말 못 하고 있다면 ‘대체 왜 묻습니까’라고 반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개의 날선 질문에, 세대 간의 극단적인 현실 인식과 의혹들이 드러난다. 첫 번째 물음표는 20대의 미래를 어둡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가능성’을 추궁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 물음표는 그 시선이 불편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 글은 20대의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은 20대를 둘러싼 의문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부모님 세대가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가 부모님들에게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질문이다. 의문에 의문을, 질문에 질문을 던지면서 ‘20대’를 둘러싼 서로 다른 현실인식이 어떻게 부딪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의심할 것이다.
최근 유행처럼 쏟아져 나온 20대 담론들은 몇 가지 질문에서 출발한다. ‘20대, 살아 있나요?’, ‘20대, 무엇을 하고 있나요?’, ‘20대, 정말 괜찮나요?’. 이것들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안부 묻기’다. 세대론들은 기본적으로 ‘20대의 생존 여부’를 문제 삼는다. 그런데 궁금증의 대상이 되는 20대의 실체는 세대론에 따라서 다르게 그려진다. 똑같이 ‘20대’라고 지칭하면서도 각 세대론이 바라보는 현실은 너무나도 상이하다. 이것은 일종의 말장난이다. 한 쪽에서는 20대를 ‘살아남기 위해 스펙을 쌓고 쉴 새 없이 경쟁해야 하는 세대’로 규정하는데 한 쪽에서는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졌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서로 20대라는 범주와 20대 문제 자체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둘의 논쟁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차이를 넘어서지 못할 경우, 논쟁은 빙빙 돌다가 다시 전제를 묻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당신이 말하는 20대는 누구인가?
이 치명적인 질문에, 어느 누구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세대론의 내용을 결정짓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20대 문제가 ‘세대론 간의 다툼’으로 치환되는 순간,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세대론 뿐만이 아니다. 언론에서 규정하는 ‘20대’ 또한 특정한 현실을 강조한다. ‘20대 운동’의 사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대강 정해져 있다. 그 조건은 사건의 본질을 넘어서 ‘흥행 요소’를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례들은 당돌하고 파격적이거나, ‘명문대’와 관련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최초’여야 한다. 여기서 ‘20대’라는 키워드는 이슈를 양산해내는 일종의 마케팅이 된다. ‘젊음’이라는 말도 하나의 패션이 되어, 20대에게 패기 있고 당당하거나 발랄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건의 본질을 분간해낼 수 없게 된다. ‘포장’이 아닌 본질을 읽어내려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찾아야 하고, 그것들을 종합해 적합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언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고려대를 자퇴하고 대학 거부 선언을 했던 김예슬 씨의 사례를 보자. 그녀의 선언은 잠잠한 대학사회의 침묵을 깨고 왜곡된 제도권을 폭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애초에 이 사건이 빠른 입소문을 타고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던 과정은 선언의 의도에 비해 아주 단순했다. 그것은 바로, 명문대에 대한 말초적인 욕구였다. 초반에 인터넷을 달구던 댓글들은 ‘명문대’와 ‘자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에 집중하면서, 대자보에 담긴 비판이 아닌 김예슬 씨 개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잘 나가는 고려대생이 학교를 그만 뒀대, 이제 뭐 먹고 살까, 재입학 한다면서, 아니야 자퇴가 정상적으로 처리되었대……. 넘쳐나는 추측과 단정들 속에서, ‘오마이뉴스’의 정혜교 씨는 「왜 김예슬의 대자보에만 주목하나」라는 기사를 통해 김예슬 씨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이 ‘고려대이기에 가능했던 센세이션’이라고 냉소했다. 정 씨는 ‘그녀(김예슬)의 행동에 어떠한 훼방을 놓을 마음도 없다. 다만, 당신들의 행동에 훼방을 놓고 싶다’라고 현상을 꼬집어 말했다. 그도 그렇듯이, 대학에 맞서 저항한 사람이 김예슬 씨뿐이던가? 물론 그녀처럼 자발적 퇴교를 통해 문제를 비판한 사람은 많지 않다. 시스템을 뛰쳐나오는 그녀의 저항 방식은 충격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이뤄지고 있다. 바로 똑같은 ‘20대’에 의해서 말이다. 불행하게도 언론에서 ‘20대 운동’의 사례로 다루는 것들은 주목 받은 몇몇 이들에 한정된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핫한’ 키워드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 말은 즉, 20대라는 프레임으로 미디어에 조명되는 곳 이외에서도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당장 내 주변을 둘러볼까. 학내에 유입되는 자본으로부터 대학문화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뮤지션 연대 ‘관악자작곡놀이’는 첫 음반 <야간활동>을 냈다. 스물다섯 살 음악노동자 ‘단편선’은 집회 현장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사례들마저도 나의 주변, 그러니까 대학생들과 뮤지션들의 이야기에 국한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더 많은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고, 나는 그 주체들이 또래라는 이유만으로 이것들을 ‘20대 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20대라는 범주는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궁금해질 뿐이다. 대체 말이야…….
당신들이 말하는 20대는 누구인가?
다시, 전제로 돌아왔다. 당신과 나는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다가 어느 것도 해소해내지 못한 채 뫼비우스 띠처럼 출발점으로 왔다. 더 이상 의견을 말하기 전에,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G세대론도, 언론도, 나도 결코 양보할 수 없다.
20대의 ‘보편성’이란 애초부터 없다. 날것인 현실을 짜깁기하는 서로 다른 관점만 존재할 뿐이다. 관점끼리 치고 박고 싸울 뿐이다. ‘20대’라는 것은 내용이 아니다. 하나의 프레임일 뿐이다. 이름일 뿐이고, 패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은, 그 단어에 ‘매운 맛이’있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거부할 수 없는 섹시함이나 내칠 수 없는 매력 같은 것 말이다. 잘 팔리는 뭔가, 그러니까 ‘엣지’ 말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근데 그게 뭐지? 대체 말이야…….
당신들이 말하는 20대는 누구인가?
20대를 보신 분은 제보해 달라.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 마음이다.
박연∙<요새 젊은것들> 공동저자. 관악 딴따라 연대‘관자놀이’이장, 밴드‘꿈에 카메라를 가져올걸’보컬, 정치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있음. 글 쓰고 노래하고 싸우러 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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