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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특집/이십대의 발랄한 상상력들(황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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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33회 작성일 10-12-0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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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에서의 아침

황 성 일|시인, 20세




햄버거를 씹으면서 맛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아침, 패스트푸드점 창가에 햇살이 실루엣처럼 떨어진다. 커피잔을 들고 무심히 창밖을 보며 앉는다. ‘똘똘이’라고 쓰인 나이트클럽 전단지가 길바닥에 비틀비틀 굴러다닌다. 높은 건물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하늘이 잘 안 보인다. 시선을 내리고 커피를 들이킨다. 아침부터 높은 힐을 신은 여자들의 다리가, 어지럽게 널린 똘똘이 전단지들을 밟고 지나간다. 간혹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격투기 선수, 미르코 크로캅의 다리가 힐을 신고 지나가기도 한다. 문득 입안에서 커피의 쓴맛이 감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는다. 한 방 얻어맞은 듯이 입안이 얼얼하다. 입술을 만져보니 실제로 손가락 끝에 피가 묻어나온다. 어제는 좀 일찍 잔 것 같은데. 빠르게 먹는 아침이란 이런 것이다. 서두르면 다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또 서둘러 자리를 뜬다.

봄날씨가 너무 좋다. 햇살이 부드럽게 몸에 감긴다. 놀기 좋은 곳이라 그런지, 서면에는 연인들이 참 많다. 밖에 나오자마자 남녀 둘이 걸으며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나와 같은 방향이라 얘기가 한동안 계속 들린다. 대화 내용인즉, 여자가 자기 얼굴이 너무 커졌단다. 남자가 답하기를, 니 얼굴이 아무리 커져도 오빠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면서 살 좀 더 찌란다. 아마 저 남자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가 실실 웃고 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나도 실실 웃는다. 저 둘이 만나기 전에는 두 사람 다 정상이었으리라. 아침부터 속이 더부룩하다. 소화가 되어야 책상에 앉을 텐데. 걸음의 방향을 바꾼다. 트림이 나올 때까지 한동안 걷기로 한다.

더부룩한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쳐본다. 피곤해서 그런지 찝찝함이 오래 간다. 사실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은 실제 그들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판단의 잣대는, 동일시의 미묘한 변형이다. 내 내면에서 거북한 관념을 형성하고, 저들에게 그 관념을 투사하는 것이다. 얼굴이 더 커져도 좋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사실 말이 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는 실제로 얼굴이 커지는 여자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주 드물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런 남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제자리에 잠시 멈춰 선다. 꺼억.

체증은 생각보다 아주 가볍게 내려가는 것이었다. 사실 알고 보면 체증이 내게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체증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되는 게 세상이다. 내가 마음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내 마음이 형성한 관념에 의해 색깔이 입혀진 왜곡된 것일 뿐.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이상 세상은 허상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젊은 사람이라면 근래에 한 번 쯤 ‘생각 없이 살지 마라’ 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의미심장한 말에 대해 한 번 되묻고 싶다. 생각을 하며 사는 것과 생각 없이 사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인가.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단 3초만 있기도 어렵다. 생각이 없어지는 순간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네’ 하면서 또 다시 생각이 일어난다. 생각을 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이상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아닌, 왜곡된 허구일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사실 살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 뿐,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에 의해 투사된 온갖 왜곡된 꿈속에서, 마치 그것이 실제인 양 울고 웃으며 사는 것이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예외는 없다.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면 그는 꿈속을 허덕여온 것이다. 생각이 멈출 때, 돌연 실제 세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멈출 때, 지금 이 순간 일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완전히 노출된다.

‘생각 없이 살지 마라’ 하지만, 나는 생각 없이 사는 삶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다. 바보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게 실재하는 살아있는 삶이다. 생각 없이 살 때 모든 인위적인 판단이 떨어져나가고,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가식적인 행위를 하지 않아도, 즉각 상황에 가장 알맞은 최선의 행위가 일어난다. 지식 따위는 도무지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지식을 참 좋아라 한다. 그러나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지향하는 지식의 삶에 반대한다. 소위 말하는 ‘지식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만큼 분열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면 마음속에 수집해둔 온갖 지식들을 끄집어내어 이성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삶은 매우 역동적이라서, 도무지 지식만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은 전혀 논리정연하지도 않다. 지식은 논리를 좋아하지만, 실제 삶은 완전히 비논리적이다. 해가 뜬다. 거기에 무슨 논리가 있는가. 그냥 뜨는 것이다.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이 남긴 명언이 있다. ‘누구나 한 방 맞기 전에는, 그럴 듯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전략은 지식일 뿐, 실제 시합이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길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학원 앞이다. 꽤 걸었더니 후덥지근하니 목이 마르다. 생수를 사 들고 와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내 자신을 한 번 가만히 관찰해 본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떤가. 나는 얼마나 실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침부터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꿈속을 허덕였다. 생각이 많으니, 자연스레 말이 많아진다.

입을 Ep기 시작할 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오염되기 시작한다. 세상엔 사실 아무런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세상을 보는 마음’이다. 마음은 무턱대고 저항하고 싸우려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세상에 저항하는 만큼, 실제가 아닌 허구의 삶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말을 하는 법을 배웠으면 말을 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사실 별 말이 필요가 없다.

말이 너무 많았다. 글을 썼으니, 연필과 함께 생각 또한 내려놓는다.



황성일∙2007년 ≪리토피아≫로 등단.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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