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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특집/이십대의 발랄한 상상력들(이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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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22회 작성일 10-12-0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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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다, 개청춘

이 펭 귄 |대학생, 22세




내가 아직 고 3일 때, 엄마가 유명한 점쟁이에게 점 보러간 적 있었다. 점쟁이는 마치 뭐든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엄마를 힐끗 보며 당신의 딸은 앞으로 책만 읽었다 하면 잠이 쏟아질 거라고 하더란다. 그 때야 그냥 더럽게 재수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어떤 예언이었던 것처럼 정말 난 잠이 많아졌다. 심지어 책을 읽건 안 읽건, 낮이건 밤이건, 잠만 자다보니 현실과 비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따금 어느 순간 문제지를 풀다 잠에 빠져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나만은 피해서 지나갈 것 같던 많은 시간들이 어느 순간 나를 휩쓸어, 그 속에서 한참 허우적거리다가 정신 차리곤 했다. 심지어 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생각 없이 지낼 때도 많았다. 자꾸 부유하며 멍하니 있었다. 그 와중에 사회는 또 어찌나 정신없이 돌아가던지. 요즘은 더하다. 가뜩이나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것도 버거운데 언론은 자꾸 꿈벅꿈벅하고 정부는 연신 말을 바꾼다. 그러다보니 실눈을 뜨고 여기가 어딘지 나는 누군지 저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살피게 되었다. 배꼽 언저리에서 골골거리며 겨우 유지되던 불꽃을, 사회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주었으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기준이 대체 무얼 지, 나는 충분히 주위를 의식하며 살아가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엄마는 아직도 나더러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꼭 목표를 결혼이나 노후관리에 둬야 하는 걸까.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아직 주위에 관심도 없고 현실에 대한 감을 잡지 못해 혼자 둥둥 떠 있었을 땐, 좀 외롭고 많이 불안했다. 방황하는 청춘은 원래 그렇다고 누군가 내게 위로 같은 걸 건넸지만 내 눈엔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해도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 뚫는 것처럼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의 단단한 방어막이란! 마치 그 사람들 틈에 끼어버린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지쳐버렸다. 아니면 사람들은 대게 그럴 거라는 편견에 내가 스스로 몸을 도사리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러다가 도피하고 있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20대 감독들이 같은 20대들에 대해 찍은 <개청춘>이라는 인디다큐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세워놓고 오로지 한 목표를 위해 착착 살아가고 있는 줄만 알았던 20대의 모습들이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다들 불안해하고 외로워한다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그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일순 뜻 모를 안도감을 느껴 나른해지기까지 했다. 그다지 독특하지도 않고 부족한 부분도 있는 다큐였지만 내가 만족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특히 그 중에 다큐를 찍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발견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대기업에 다니면서 나름 동일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 선상에선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 일은 그 여자가 머무르기엔 너무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 일을 계속 한다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자기가 똑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떻게 꿈만을 좇으며 살겠냐며 다시 한 번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말할 테다. 그렇지만 결국 다큐를 찍는 방법으로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그녀는 정말 무수한 고민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영화 말미의 일이고 그 후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선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는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에게 제목 ‘개청춘’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개 같은 청춘’일 거라고 했다. 그렇구나,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알고 보니 ‘개청춘’이었다. ‘열리는, 꽃피는 청춘.’ 어쩜 그렇게 상반될 수 있냐며 친구와 소리 내 웃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마냥 현실에 머물지 못하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면 그렇게 외로울 것도 없다. 전전긍긍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왔다던 시인은 ‘스물 세 해 동안 자신을 키워온 게 바람’이라더라.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과연 무엇이었을지. 나의 8할은 조금 어지러운 이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내가 비현실적이었지만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처럼 방황하며 혼자 외롭고 혼자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주기 위해 나름대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이게 내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인 것 같다. 난 아직도 거기 있다.



이펭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문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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