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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신작단편(노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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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05회 작성일 10-12-07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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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
노재희


어젯밤 일기예보에서 꽃 기상도를 보여주었다. 남쪽에서 시작된 꽃사태가 북상하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 목련 등이 제주부터 영호남을 거쳐 중부지방으로 올라오고 있다더니, 이제 그녀의 무릎에까지 꽃이 피었다. 춘복 씨는 자신의 무릎에 핀 꽃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어젯밤 뉴스 끝머리에 본 것이 일기예보가 아니라 정말 뉴스는 아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남쪽에서 시작돼 북상하고 있다는 꽃사태가 사실은 노인들의 무릎에 꽃이 피는 무슨 전염병 같은 것이고, 그 정체모를 사태가 지금 한반도 전역으로 번지고 있다는 뉴스는 아니었을까?
겨우내 끙끙거리면서도 잘 참아왔었다. 그러나 어젯밤에는 어찌나 무릎이 콕콕 쑤셔대던지 설핏 잠이 들었다가도 다시 깨기를 반복했다. 양쪽 다 아팠지만 특히 오른쪽 무릎엔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있었다. 아이고, 누가 내 다리 좀 뽑아 가라. 어릴 때 할머니가 말하곤 했던 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피부 아래에 쌀알만 한 단단한 뭔가가 여러 개 만져졌다. 이게 뭘까 싶어 자꾸 손이 갔다. 손이 닿을 때마다 그 자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내일 다시 윤정형외과를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검지손가락에 낀 묵주 반지를 돌리며 잠을 청했다. 
젊을 때는 어딘가 아파도 며칠 지나고 나면 금세 괜찮아지곤 했다. 지금의 괴로움도 며칠 후면 다 지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당장 죽을 것처럼 아파도 그 생각이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가지 않는 것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나아지리라는 기대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 오직 통증뿐인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나쁜 것이 있다니, 우리 모두가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야만 하는 게 신의 섭리일까? 그녀는 주님을 살짝 원망하다 잠들었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오른쪽 다리는 아예 구부러지지도 않았다. 뭔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났지. 자리에 누운 채 춘복 씨는 혼자 중얼거렸다. 옆으로 몸을 돌려 이부자리에 손을 짚고 간신히 일어나 등을 장롱에 기댔다. 무릎 상태를 보려고 잠옷을 걷어 올리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달 전쯤 들른 버스 정류장 앞 윤정형외과 의사는 그저 퇴행성관절염인 것 같다고 했다. 그저? 그녀는 자기 또래는 됨직한 의사 선생의 주름진 입가를 쏘아보았다. 무당은 젊어야 용하고 의사는 늙어야 용하다는 말도 다 거짓부렁이지 싶었다. 아픈 사람을 많이도 봐왔겠지만 환자는 아파서 똑 죽을 지경인데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를 꼭 그 앞에 붙여야 하는지 몹시 서운했다. 저도 다 늙어가는 주제에! 이렇게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속으로 끌끌 혀를 차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의사가 이 모양이니 병원이 이 지경이지. 의사뿐 아니라 병원도 몹시 늙은 상태였다. 대기실의 소파며 진료실의 집기 같은 것들이 모두 낡아 있었다. 깨끗하기는 했다. 오래 입어 색이 바랜 옷을 잘 다려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단정하지만 그래도 퇴색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니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의 지하철역에 새로 생긴 <관절전문클리닉>에 손님을 다 빼앗긴 것도 당연했다. 아랫방에 세 들어 사는 서 여사도 그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의사도 셋이나 되고 간호사와 물리치료사도 셀 수 없이 많을 뿐 아니라 모두들 친절하기가 이를 데 없고 각종 물리치료 장비들이 즐비해서 병원에 가기만 해도 아픈 게 싹 낫는 것 같더라고 서 여사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칭찬을 주워섬길 때와는 달리 그녀는 더 이상 그 병원에 가지 않았다. 병원에 한 번 간 것으로 싹 나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인테리어가 잘된 치료실에 늘어서 있다는 물리치료 장비들이나, 의료진이 아낌없이 베푼다는 그 친절이 모두 고스란히 비용에 포함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게보린과 훼스탈, 파스만 가지고 평생을 나는 사람들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였다. 보험이 적용되는 파스나 싸게 처방 받기를 바랄 뿐이었다. 윤정형외과는 춘복 씨처럼 번쩍거리는 새것 앞에서 괜히 주눅 드는 게 싫은 노인들에게는 아주 맞춤한 곳이었다. 이따금 그런 노인들이나 들를 것 같은 병원이 의사와 함께 날로 늙어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이었다. 게다가 의사는 흰 가운도 입지 않고 책상에 앉아 책만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하드커버 장정의 두툼한 영어책들이 어지럽게 잔뜩 쌓여 있었다. 병원에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는 의사가 아니라 책만 파고 앉은 무슨 책벌레 같았다. 그래서 더욱 의사가 환자에게는 관심도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사는 좀 두고 보자고 했다. 정 참기 어려우면 뼈주사를 맞는 방법도 있다는 말에 그녀는 의사 선생의 책상을 짚고 오뚝 일어섰다. 뼈주사라니, 말만 들어도 뼛속 깊숙이 쑥 들어오는 주사 바늘이 느껴져 사지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얼른 달려 나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삼키며 한산한 환자 대기실과 간호사 데스크를 지나 병원 문을 나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체국 앞 사랑약국에서 파스나 사다 붙일 걸 괜한 걸음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 섞인 찬바람이 춘복 씨의 구부정한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낡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윤정형외과는 20년 전부터 버스 정류장 앞에 있었다. 이제는 쇠락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그동안 버스 정류장에서 숱하게 버스를 타고 내리면서도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 사이 무슨 큰 병이 걸린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이 좀 흘렀을 뿐이었다. 이사 오던 해 담장 아래 심은 넝쿨 장미가 무성해져 이제 담장 너머로 가지를 내밀고 꽃을 피울 정도의 시간밖에는 지나지 않았다. 담장 안쪽에만 떨어지던 꽃잎들이 불과 몇 미터 이동해 바깥에 떨어지는 사소한 일이 일어난 그 시간 동안, 그녀도 무릎을 접었다 폈다를 사소하게 반복했을 뿐이었다. 
춘복 씨는 잠옷 자락을 붙잡은 채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흰 꽃이었다. 개나리도, 진달래도, 철쭉도, 목련도 아닌, 그저 흰 꽃이었다. 이름 모를 들꽃 같기도 하고 소박한 소국 같기도 했다.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데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처럼 담박했다. 모두 여섯 송이였다. 다섯 장의 꽃잎 가운데에 노란 꽃술이 자잘하게 박혀 있고, 초록색 꽃받침 아래로 짧은 꽃대가 무릎에 단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꽃을 피워낸 그녀의 마른 다리는 흡사 나뭇가지 같았다. 다리에 피어 있는 얼룩덜룩한 검버섯 사이에서 흰 꽃이 더욱 환했다. 고목에도 꽃이 핀다더니 딱 그 짝일세.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오늘은 늦으시네. 어머니!”
며느리의 목소리가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
“…….”
“그게 뭐예요?”
잠옷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앉아 있는 춘복 씨의 무릎에 시선이 붙잡힌 채 며느리가 들어왔다. 허둥대던 며느리가 무릎을 방바닥에 쿵 찧었다.
“얘야, 너도 무릎 조심해라.”
“…….”
“이게 뭐 같으냐?”
목을 길게 빼고 꽃을 들여다보던 며느리가 소리쳤다.
“여보! 이리 좀 와 봐요! 여보!” 
밖에 있던 아들의 지청구 소리가 가까워졌다. 
“빨리 나가자니까 거기서 왜 부르고 앉았어?”
방문 앞에 당도해 아내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본 아들은 경계하듯 천천히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엄마……, 이게 뭐야?”
“고목에 꽃 피었다.”
아들은 천천히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꽃잎을 쓰다듬어보고 꽃술을 건드려보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고 킁킁거렸다.
“냄새 좋으냐?”
“좋네.”
“무슨 꽃 같으냐?”
“몰라.”
아들이 갑자기 꽃대를 그러쥐고 뽑는 시늉을 했다. 탁, 춘복 씨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들의 뒤통수를 갈겼다. 
“손 저리 치워!”
“엄마, 이게 뭔 해괴한 일이야? 밤새 무슨 일 있었어?”
“다리가 구부러져야 나도 저 냄새를 한 번 맡아볼 텐데.”
“무슨 일 있었냐니까?”
“낸들 아냐? 밤새 똑 죽겠을 만큼 무릎이 쑤시더니만, 일어나니까 이렇게 돼 있더라.”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 그럼 지은이는 어째요?”
잠자코 있던 며느리가 입을 열었다.
“야, 너는 지금 그게 문제냐? 엄마가 이렇게 됐는데?”
“그게 아니라…….”
춘복 씨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다들 빨리 나가거라.”
아들은 마지못해 뚱한 얼굴로 일어서는데 며느리는 여전히 뭉긋거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럼 지은이는…….”
아들이 며느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오늘은 데리고 나가야지, 엄마 이러고 있는데 애를 어떻게 놓고 나가냐.”
자는 아이를 깨우니 아이가 칭얼거렸다. 옷을 입자고 하는데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니 퍽, 아이 등짝을 갈기는 소리가 들렸고 곧 이어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장롱에 기대어 앉아 그 소리를 그저 가만히 듣고 있자니 춘복 씨는 속이 상했다. 갑자기 콩콩 마루를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티셔츠를 목에 낀 채로 지은이가 도망쳐 왔다. 그녀는 얼른 다리에 이불을 덮었다.
“할미!”
그녀는 아이가 다리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팔을 붙잡아 옆에 앉혔다. 아이를 안아 달래주고 티셔츠에 팔을 끼워 옷을 마저 입혔다.
“지은아, 오늘은 엄마 아빠랑 식당에 가는 거다. 우리 지은이 착하지?”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미가 아파서 그래.”
“할미 많이 아파?”
아이가 조막만한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눈썹에 아직 눈물방울을 달고 있었다. 
며느리는 그 사이 큰 아이를 채근해 깨워놓고 작은 아이에게 우유를 먹였다. 성미 급한 아들은 벌써 나가서 기다리는지 골목 쪽으로 난 춘복 씨의 방 창문 아래 주차해놓은 1톤 트럭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대문간에 묶여 있는 개가 짖기 시작했다. 
“에미야, 재롱이 밥은 주고 나가라. 저눔 시키 또 온종일 짖어댈라. 밥 줄 때 조심하고.”
모두들 나가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이불을 가만히 들어보았다. 이불에 눌려 꽃이 상하지나 않았을지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꽃은 신기하게도 그대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화가 아닐까 싶어 살살 꽃잎을 만져보다가 손톱으로 살짝 눌러보았다. 생채기가 생기는 걸 보니 진짜 살아 있는 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무슨 조홧속이란 말인가. 
그녀는 다시 이부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열두 살 큰 아이가 달그락거리며 혼자 밥을 챙겨 먹는 소리며, 빠끔 할머니 방문을 열어보는 소리, 대문을 나서면서 개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소리,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개가 컹 짖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아랫방에 사는 정호가,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크게 외치며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갔고, 서 여사가 정호를 부르며 뒤따라 나갔고, 쾅 대문이 닫혔다. 개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컹컹 짖었다. 그러고는 사위가 조용해졌다. 
이불 속에서 다시 무릎의 꽃을 쓰다듬어보았다. 문득, 꽃이 핀 오른쪽 무릎의 통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감쪽같았다. 누가 내 다리 좀 뽑아 가라고 했더니, 다리는 놔두고 통증만 가져간 모양이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신기한 것은 또 있었다. 이 황당한 사태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태도가 몹시도 담담하다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장사하러 나가는 아들 내외를 대신해 큰 아이를 키울 때만 해도 궂은 날에나 뻑적지근하던 무릎이 뒤늦게 생긴 작은 아이를 키울 때부터는 허구한 날 시리고 아렸다. 겨울에는 시베리아 기단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무릎을 핥고 지나갔고 한여름에는 아예 무릎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왔다. 무역풍이라는 게 있다던데 이건 숫제 무릎풍이라고 불러야겠어. 일찌감치 무릎 통증에 이골이 난 서 여사가 예의 그 잘난 척하는 말투로 말했다. 무역풍이든 무릎풍이든 삼복더위에도 무릎만큼은 얼음장이라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있기 일쑤였다. 
큰 아이를 겨우 유치원에 보낼 만큼 키워 놓았더니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좀 편해지겠다고 기대하고 있던 춘복 씨는 적잖이 실망했다. 안 그래도 자식이 둘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둘째를 얼른 가지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게 누구 차지가 될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어차피 나올 거라면 아들이길 바랐건만, 또 딸이었다. 며느리는 남의 속도 모르고 이렇게 말했다. 지은이는 순해서 키우기가 한결 낫죠, 어머니? 골목에 나가면 동네 여자들도 속 모르는 소리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기를 키우면 아기한테서 기를 받아서 노인에게 좋다던데, 지은이 할머니는 기를 두 번이나 받으니 아예 회춘하시겠어요! 춘복 씨는 쓰게 웃으며 속으로 소리쳤다. 에라, 이년들아, 네년들도 나중에 회춘 그거 퍽이나 해봐라!
아이의 두 돌이 지나고 나서 오랫동안 망설이며 혼자 연습하던 말을 아들에게 했다. 애들은 또래랑 놀아야 배울 게 많다잖든? 아들은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어린이집 싼 데, 시립 이런 데는 대기자가 많아서 기다리는 동안 애 다 크게 생겼고, 웬만한 데 맡기면 그거 비용이 만만치 않아. 여기 뉴타운 지정되는 거 오늘 내일인데, 우리도 얼른 돈 모아서 아파트 입주금 만들어야지. 딱지만 갖고는 입주는 꿈도 못 꾸는 거, 엄마도 알지? 우리도 한 번 보란 듯이 아파트 살아봐야지. 우리 엄마,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평생 고생만 했는데, 내가 진짜, 아파트 살게 해드린다니까. 그리고 어린이집에 보내야 애들 잘 큰다는 말은 다 돈 벌려고 하는 말이야. 맞벌이들이 애 맡기고 돈 벌어봐, 나중에 남는 거 없다고. 나는 그래서 엄마한테 늘 고마워. 진짜 감사해. 지영이처럼만 키워줘요, 내가 대신 용돈 드릴게. 춘복 씨는 오래 벼려온 한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 아들은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열 마디 스무 마디를 주워섬겼다. 용돈을 준다고 해도 애 떼어놓고 나가 쓸 수도 없었지만 그나마도 5만원씩 두 번 주고는 말았다.   
춘복 씨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깟 용돈은 안 줘도 된다, 이놈아! 나는 회춘 같은 거 바라지도 않는다, 이년들아! 그녀는 이불 속에서 혼자 막 소리를 질렀다. 이 기막힌 국면에서도 며느리 머릿속에 가장 먼저 아이에 대한 걱정이 떠오른 것처럼 춘복 씨도 그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그러나 며느리와는 정반대였다. 춘복 씨는 이제 아이를 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갑자기 횡재한 기분이었다. 애를 키우면 기를 받는다고 그랬냐? 온몸에 기운이 나는 게 아마 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며 받았던 기가 이제야 깨어나는가 보다, 이것들아! 그녀는 다시 크게 웃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불현듯 배가 고팠다. 새삼 식욕이 솟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오른쪽 다리는 구부러지지 않았다. 개밥을 챙겨주라고 이르면서도 그녀 자신의 밥은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바쁘게 뛰어나갔다지만 일러준 대로 달랑 개밥만 주고 시어미 밥은 까맣게 잊은 며느리가 괜히 괘씸했다. 그녀는 두 팔을 다리 삼아 엉덩이를 바닥에 끌면서 방문 앞까지 갔다. 그동안 관절을 너무 썼다고 아예 구부리지도 못하게 만든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아직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구부러지기는 하는 왼쪽 다리가 큰 힘이 됐다. 그녀는 방문 손잡이와 플라스틱 서랍장에 의지해 일어서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엉덩이만 들썩거릴 뿐 몸이 사뿐히 들어 올려지지 않았다. 처음 맞는 상황이라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랐고 팔뚝의 근력도 부족했다. 젊은 사람 같으면 금세 거뜬히 일어날 수 있을 텐데, 그녀는 기력이 쇠한 자신의 육체를 한탄했다. 결국 일어서는 것은 일단 포기했다.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니 마당으로 나 있는 미닫이문의 반투명 창이 환했다. 냉장고 옆에 걸린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채널을 바꿔가며 볼 수 있는 아침 드라마 세 개를 다 놓쳤다는 게 좀 아쉬웠다. 그러나 드라마가 대수인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지금 그녀 자신에게 일어났다. 세상엔 별별 이상하고도 희한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걸까,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냉장고 안에 뭐라도 먹을 게 있나 살펴보았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콜라와 맥주, 우유, 치즈가 있었다. 아래 칸 야채박스를 열어보니 사과가 세 개 있었다. 우유의 종이팩을 벌려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시고 사과를 잠옷에 쓱쓱 문질러 닦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다 먹고 나서 냉장고에 기대어 앉아 끄어억, 길게 트림을 하고 나니 그제야 좀 허기가 가셨다.
이제 먹었으니 싸는 게 문제였다.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까지 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쓰는 요강이 미닫이문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은 지 오래된 집이라 화장실이 마당에 있어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다락에 있던 요강을 꺼내 쓰던 터였다. 아침에 꼭 비우라고 해도 종종 잊어버리고 그냥 나가는 며느리에게 늘 퉁바리를 놓았는데 상황이 이렇고 보니 오늘은 며느리의 건망증에도 다 감사할 지경이었다. 엉덩이 걸음으로 가서 요강 뚜껑을 열어 보니 오줌이 반 정도 차 있었다. 그녀는 잠옷을 허리 위까지 말아 올려 옆구리에 끼고 속옷을 내렸다. 그러고는 왼쪽 다리를 지지대 삼아 요강에 올라앉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아랫배가 빵빵하도록 갇혀 있던 오줌이 촬촬 소리를 내며 요강에 쏟아져 내렸다. 어이 씨언타, 라는 말이 깊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거동에 요강이 함께 옆으로 기우뚱 쓰러졌다. 그것은 내용물을 왈칵 쏟아 놓으며 옆으로 굴렀다. 그녀가 잽싸게 붙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망연해 할 틈도 없이 목욕탕 앞으로 가서 걸레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급한 대로 빨래 바구니에서 한 아름 옷가지를 꺼내 발로 밀면서 사고 현장까지 갔다. 아무리 서둘렀어도 엉덩이 걸음으로 오가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쏟아진 액체는 그 사이 마룻바닥에 알 수 없는 모양의 지도를 그리며 사방으로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빨랫감으로 그것을 막는 한편, 되는 대로 정신없이 닦았다. 냄새도 냄새지만 물기가 깨끗이 닦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놀란 데에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그녀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미닫이문에 몸을 기대고 난장판이 된 마루를 보니 기가 막혔다. 바닥에 쏟아진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입고 있던 잠옷이 다 젖은 줄은 모르고 있었다. 젖은 엉덩이로 바닥을 쓸면서 오간 흔적이 목욕탕 앞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도 더 이상 어찌 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릎에서 꽃은 여전히 하얗게 방싯거리고 있었다. 

미닫이문에 기대어 한참 동안 맥없이 앉아 있던 춘복 씨는 기운을 차리려고 애썼다. 냄새 때문에라도 문을 열어야 했다. 쌀쌀한 바깥 공기를 마시니 가슴이 시원했다. 마당엔 봄볕이 환했다. 그리고 초록색으로 가득했다. 겨우내 마루에 들여놓았던 화분을 지난 일요일에 모두 마당에 내놓았다. 마루 미닫이문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이파리가 넓고 키가 큰 것들부터 수돗가 근처에 오종종히 모여 있는 작은 것들까지 모두 오랫동안 가꾸어 온 것들이었다. 비만 오면 흙바닥이 질척거리는 것이 싫다고 아들이 몇 년 전 시멘트를 발라놓은 땅바닥은 계절에 따라 몇 번씩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곳곳에 금이 갔지만 그 틈바구니에서도 잡풀들이 뿌리를 내리고 초록색 이파리를 뾰족뾰족 내밀고 있었다. 옆집과 맞닿은 담을 따라 서 있는 모과나무도 얼마 전에 겹꽃 같이 생긴 연한 초록색 새순을 마디마다 조그맣게 피워내더니 하루가 다르게 이파리를 키웠다. 자목련은 꽃봉오리를 달고 있었지만 활짝 피우지는 못하고 아직 옹그린 채 금방이라도 꽃을 터뜨릴 태세였다. 그 아래 개집에 몸을 반쯤 내놓고 개가 엎드려 있었다. 이태 전 앞집에 살던 영식이네가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주고 간 놈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누가 제 앞을 지나갈 때나 한 번씩 컹 짖을 뿐 누가 건들지만 않으면 대체로 만사가 귀찮은 듯 길게 누워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먹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어찌나 성미가 급하고 사나운지 밥을 줄 때 특히 조심해야 했다. 빈 개밥 그릇을 멀찍하니 끌고 와 개밥을 부은 후 발로 재빠르게 밀어주어야 한다. 일단 그릇에 내용물이 들어 있으면 그것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그게 밥을 주는 사람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기 때문에 개 앞에서 그릇에 밥을 부어주었다가는 물리기 십상이었다. 영식이네가 키울 때부터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밥을 주는 자신에게조차 이를 드러내는 꼴을 보자니 어이가 없었다. 정나미가 뚝 떨어져 다음부터는 밥이고 물이고 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며느리가 그 사실을 잊고 개밥을 주다가 된통 놀란 후로는 주로 춘복 씨가 개밥을 담당해 왔다. 서 여사는 제 밥줄을 쥐고 있는 주인도 몰라보는 저런 개새끼는 내다 버리라고 했다. 그래도 그녀는 저도 좀 먹고살겠다고 저러는가 싶어 불쌍한 생각도 들고 밥 줄 때만 조심하면 되지 싶어 개가 사납게 굴어도 심하게 야단치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개집 옆 화단에 심어놓은 사루비아 꽃을 따먹었을 때에는 빗자루로 개집을 몇 대 후려쳐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사루비아를 심지 않았다. 개가 꽃을 따먹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사루비아 꽃술 속에 들어 있는 그 단물 맛을 개도 알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제 너, 내 밥 얻어먹긴 다 틀렸구나. 춘복 씨는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개는 앞발에 얹어 놓은 머리를 들지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춘복 씨는 다시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점심 먹을 때가 되기도 했다. 그때 대문에 열쇠 밀어 넣는 소리가 들리더니 삐거걱 새된 소리를 내며 녹색 대문이 열렸다. 서 여사였다. 허리가 잘록 들어간 연보라색 재킷에 하늘하늘 늘어진 미색 바지를 입은 모습이 멋쟁이가 따로 없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서 여사는 부엌이 하나 딸린 셋방으로 이사 오면서도 떵떵거리며 살던 시절의 옷은 다 챙겨 와 남부럽지 않게 입고 다녔다. 서 여사가 들어오자 개가 개집에서 나오더니 앞발을 버티고 서서 서 여사를 경계했다. 이놈의 개새끼가. 서 여사가 손을 치켜들며 겁을 주었다. 개는 뒤로 주춤 물러나 서 여사를 시선으로 좇으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며칠 전 정호의 실내화 주머니를 덥석 물었다가 서 여사에게 빗자루로 맞은 후로 저러기 시작했다. 그날 정호는 평소처럼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며 개를 약 올렸다. 정호의 실내화 주머니를 향해 연신 뛰어오르던 개는 바짝 약이 올랐다. 그러다 개줄을 바닥에 고정시켜 놓았던 죔쇠가 어느 순간 헐거워지면서 개가 실내화 주머니를 덥석 물었다. 실내화 주머니를 놓치지 않으려던 정호가 넘어지긴 했어도 다행히 다친 데 없이 조금 놀라기만 했을 뿐이었다. 평소에도 저 사나운 개새끼 좀 어디에 팔아 치우든지 된장을 바르든지 하라고 하던 서 여사는, 오 그래 너 잘 만났다, 소리치며 빗자루를 들고 설쳐댔다. 개가 얼른 개집 속으로 숨어버려 정작 개는 한 대밖에 못 때리고 개집 지붕만 두들겨댄 것이 분해서 서 여사는 한참 동안이나 씩씩거렸다. 
“왜 그러고 혼자 앉아 있어? 지은이는 자나?”
서 여사의 금테 안경다리에 걸린 안경줄이 찰랑거렸다. 서 여사는 춘복 씨 옆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코를 찡그렸다. 
“아이고, 이게 다 뭐야?”
“오늘은 일찍 왔네.”
“어, 그 집 마나님이 친구들하고 뭐 꽃구경을 간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아침 먹은 것만 치우고 대충 청소만 해놓고 왔지. 아니, 정말 무슨 일 있어?”
“자기도 꽃구경 좀 하고 싶어?”
“내 팔자에 무슨 꽃구경. 그것도 다 팔자 늘어진 여편네들 얘기지.”
춘복 씨가 슬그머니 잠옷을 걷었다. 서 여사의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정호야,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다.”
“어머, 이게 뭐야? 꽃이잖아? 이거 뭔 일이니? 언제부터 이런 거야? 어제만 해도 멀쩡하더니만.”
“지금도 멀쩡하긴 해. 잘 걸을 수 없는 거 빼고는.”
“걸을 수가 없어? 왜?”
“몰라. 이상하게 다리가 안 구부러져.”
“웬일이니, 웬일이야. 세상 말세다, 이거.”
“말세는 무슨……, 오히려 통증이 없어져서 좋아.”
“정말? 아주 죽겠다 죽겠다 하더니만.”
“그러게. 신기하게 통증이 싹 없어졌어.”
“그런데 다리는 왜 안 구부러지는 거야?”
“글쎄, 꽃이 피니까 다리가 나무가 됐나?”
춘복 씨가 피식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그냥, 너무 어이없잖아.”
“야, 나는 아무리 통증이 없어진대도 이러고 싶지는 않겠다.”
“자기는 요즘 좀 괜찮은가 보지?”
“괜찮긴, 아주 죽을 맛이지. 봄 되니까 그 집 마나님이 대청소한다고 사람을 아주 잡았잖아.”
“참, 그랬지.”
“좀 괜찮다 싶더니만 한 번 아프니까 잘 낫지도 않고 아주 죽겠어. 자기 딴에도 미안했는지 오늘은 자기도 없으니까 일찍 가라고 하더라고.”
“이게 뭐 낫는 병인가.”
서 여사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밥도 못 먹었겠네?”
옷을 갈아입고 온 서 여사가 마루를 치우고 나서 춘복 씨를 욕실로 데려가 씻겨주었다. 서 여사에게 몸을 맡기고 있자니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다. 늙어서 거동이 불편해지는 게 이런 건가 싶어 심란해졌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까봐 늘 두려웠었다. 불과 한 두 시간 전에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던 것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를 씻기는 동안 서 여사는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녀의 벗은 엉덩이를 찰싹 치면서, 으이구 이 쭈글탱이, 라고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물에 젖어도 멀쩡한 꽃이 신기하다고 감탄을 해댔고, 일하러 다니는 집의 주인 여자 얘기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보았던 일까지 시시콜콜 늘어놓느라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춘복 씨는 서 여사의 그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렇게 마르지 않고 에너지가 나오는지 궁금하고 부러웠다. 에너지. 그녀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것도 힘들긴 했지만 하루 종일 아이들과 눈을 맞춰주고 놀아주는 것은 정말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잠들 때까지 그녀를 자기들의 놀이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 했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싱싱한 기를 불어넣어 주기는커녕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기운마저 야곰야곰 빼먹었다. 자식이 부모의 피와 땀, 그리고 결국은 등골까지 빼먹고 자란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렇게 자식을 키웠다. 그러나 그것도 젊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제 누구에게도, 그게 금쪽 같이 귀하고 예쁜 손주 새끼들이라도, 내어줄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는 차에 이런 일이 생겼다.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들어 그녀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세면대를 붙잡고 엉거주춤 서서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서 여사가 말했다.
“하루아침에 반병신이 됐구려.”
그 말을 듣자 꼭 막고 있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쪼그리고 앉아 수건으로 물기를 닦던 서 여사가 놀라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춘복 씨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서 여사는 수건을 들고 망연히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내가 좀 입방정이라.”
얼른 울음을 그친 그녀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부축하려는 서 여사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혼자 절룩거리며 욕실을 나왔다. 다리를 질질 끄느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오후에는 점심 장사를 마친 아들이 다녀갔다. 서 여사가 차려준 점심을 먹고 한숨 자려고 누웠는데 뒤늦게 밥을 싸들고 와서는 저녁에 윤정형외과 의사가 오기로 했다고 전해주었다. 춘복 씨는 저녁을 먹기 전부터 의사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서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그가 몸소 이 허름한 주택가 골목까지 행차하리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꼭 와주기를 바랐다. 어쩌면 호기심이 동해서라도 올 것 같았다. 의사가 아니라 무슨 학자처럼 책속에 파묻혀 있었으니 이런 특이한 데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9시 뉴스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의사가 도착했다. 아들이 가게 문을 닫고 오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아들의 부축을 받은 의사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면서 마루로 올라왔다. 춘복 씨는 의사도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며느리가 그녀 곁에 와서 앉았고 서 여사까지 건너왔다. 
춘복 씨는 부끄러운 듯 천천히 치마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렸다. 의사의 고개가 무릎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꽃을 살살 만져보다가 무릎 주변을 꾹꾹 누르며 아픈지를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허벅지와 종아리를 잡고 다리를 구부려보려고 했다. 그녀의 다리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기만 했다. 잠시 후 그는 다 살펴보았다는 듯 허리를 폈다. 방안에 있던 눈들이 모두 그의 입을 향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가 심상한 말투로 말했다.
“삶은 따뜻하고 축축하지만, 죽음은 차갑고 건조하지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물기라곤 없는 이 말라비틀어진 다리에서, 이렇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뭔가 생명이 자라난다는 사실에 감명 받았다고나 할까요.”
“선생님, 감명은 천천히 받으시고요, 이게 왜 이런 것 같나요? 그 말씀을 먼저 해주셨으면…….”
“숲에 가 보면 말입니다…….”
“네, 숲에요.”
그의 말이 너무 굼뜨고 말과 말 사이의 호흡이 길어서 참지 못하고 날름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죽는 일은 없습니다. 에, 그러니까, 인간은 생명이 끊어지면 그걸로 딱 끝인데요, 나무는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네, 그런데요?”
“나무는 더 이상 생명의 징후가 없어도 오랫동안 숲 속에 서 있지요. 그러다 결국 쓰러지고 또 결국 썩어 없어지겠지만, 그 죽어가는 긴 시간 동안 굉장한 일을 합니다.”
“선생님!”
참다못한 아들이 끼어들었다. 의사는 아들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죽어가는 나무의 수액을 먹으러 온 개미나 사슴벌레, 심지어 딱따구리 같은 것들을 먹여 살리기도 하구요, 곰팡이나 버섯의 포자가 달라붙어 제 영역을 넓히기도 하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나무가 쓰러진 후의 일인데요, 숲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나무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방해할 생각을 못하고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쓸모없는 것처럼 보여도 숲에 얼마나 유용한지 모릅니다. 평평한 땅에는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무들이 땅에 울퉁불퉁하게 쓰러져 있으면 물기를 품고 있게 된단 말입니다. 홍수나 산사태가 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거지요, 삶은 축축한 것으로부터 나오니까요.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그는 말을 다 마친 듯 입을 다물었다. 방안에 있는 사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춘복 씨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의사의 말을 한참 듣고 있자니, 자신의 다리도, 꽃도,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이 모든 상황도 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들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 말씀이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란 말씀입니까?”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환자분의 다리가 죽은 나무처럼 말라가고 있지만, 여기에서 꽃이 핀다는 건, 뭐랄까……, 숲 속의 그 위대한 나무처럼 생명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이게 왜 그런 것 같으냐고요? 무슨 의학적인 설명을 해주셔야죠. 과학적으로 이게 가능한 일이냔 겁니다.”
의사가 아들을 돌아다보았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과학이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녀는 간신히 힘을 짜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의사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쫙 펴서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는 뭔가 대단히 심각한 말을 할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두고 봅시다.”

잠자리에 누워 의사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그가 의사다운 말을 한 것은 마지막 말뿐이었다. 두고 보자는 말은 의사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다. 환자로서는 의사의 그런 말이 답답하고 무책임하게 들렸지만, 어쩌면 정말 두고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늘어놓은 말들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렇게 꽃이 피었다는 게 경이롭다는 뜻인 것 같았다. 죽어가는 나무에 빗댄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병원에서처럼 그에게 서운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늙어가는 자신이 뭔가 굉장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두렵기는 했다. 그의 말처럼 두고 보아도 알 수 없을 때는 어쩌나 싶었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아 뒤척이다 보니 오늘 치의 묵주신공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다른 날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도 하루 종일 꽃에 골몰해 있느라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창문 아래 벽에 바짝 붙여 놓은 조그만 상 위에서 우윳빛의 성모상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비로운 얼굴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성모상은 그녀에게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이 모든 일이 성모님의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물론 기적을 믿었다. 세 아이 앞에 나타난 루르드의 성모님이나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상의 기적 같은 것들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었다. 그것에 비하면 못난 자신의 다리에 생긴 몇 송이 꽃쯤이야 기적이랄 것도 없었다. 어쩌면 한계에 다다른 자신을 위해 성모님이 이런 기적을 행하신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신이 성모님의 은사를 몰라보는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성모님을 향해 한참 동안 기도를 했다. 성모상 앞에 무릎도 꿇고 싶었지만 그건 좀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 일어나보세요!”
춘복 씨는 무릎에 통증이 없어서 밤사이 한 번도 깨지 않고 모처럼 깊은 잠을 잔 터라 기분 좋게 깨어났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며느리에게 살짝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 정호 할머니도 무릎에 꽃이 피었어요!”
며느리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절룩거리며 밖으로 나와 보니 서 여사가 아랫방 툇마루에 다리를 쭉 뻗치고 앉아 있었다. 머리에 분홍색 헤어롤을 잔뜩 말아 붙인 것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얼굴은 아주 심각했다. 정호와 지영이가 그 옆에 앉아 호기심이 만발한 얼굴로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 여사의 꽃은 연분홍색으로 코스모스처럼 꽃잎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이었다. 크기는 춘복 씨의 꽃보다 조금 큰 것 같았다. 춘복 씨가 옆에 와서 서 있는데도 서 여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춘복 씨는 며느리에게 정호 아침을 먹여 지영이와 함께 학교에 보내게 했다. 그리고 요강을 닦아서 그녀 방에 갖다 놓고 상 위에 두 사람 분의 밥을 챙겨 놓게 했다. 아들에게는 저녁에 올 때 쓸 만한 지팡이를 두 개 구해 오라고 일렀다. 아들은 당장 아쉬운 대로 쓰라며 마당에 있는 빗자루의 자루 부분을 떼어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오늘도 지은이는 제 엄마와 집을 나섰다. 다행히도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아줌마의 여동생이 집에서 놀이방을 하고 있다며 당분간은 지은이를 거기에 맡기기로 했다고 했다. 지은이는 오늘도 춘복 씨를 쳐다보며 조금 떼를 부렸지만 그녀는 어제보다 마음이 덜 괴로웠다.
모두들 나간 후 아들이 가져다 준 나무 지팡이에 의지해 일어서보았다. 아직 낯선 동작이라 무게중심을 잡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 못할 것도 없었다. 발을 끌며 마당도 걸어보았다. 느리긴 해도 어쨌든 혼자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좀 길고 제대로 된 지팡이만 있다면 걷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간밤에 숙면을 취한데다 많은 문제가 해결된 듯해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랫방 앞에 서서 서 여사를 불렀다. 그 사이 서 여사는 방에 들어가 있었다.
“서 여사, 좀 나와 봐.”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춘복 씨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방문을 두드렸다.
“정호야, 밥 먹어야지.”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 여사는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다. 서 여사의 기분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춘복 씨는 잠시 잠자코 앉아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응되면 괜찮을 거야. 나도 오늘은 어제보다 한결 낫지 뭐야. 통증이 없으니까 밤새 얼마나 푹 잤는지, 컨디션도 아주 좋아. 자기도 아파서 죽겠다고 그랬잖아. 이제 아프진 않지?”
“…….”
“정호야,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밥도 먹고 그래야 기운도 생기지.”
갑자기 서 여사가 몸을 일으켰다. 춘복 씨는 좀 거들어주고 싶었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하기는 힘들었다. 옷장에 기댄 서 여사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기운 생기면? 적응되면? 그 다음엔 어쩔 건데? 내가 자기랑 지금 사정이 같애?”
“아니,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이게 다 자기한테 옮아서 그런 거잖아!”
“아이고, 소리 좀 지르지 마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이게 옮는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럼 멀쩡하던 다리가 왜 이래, 갑자기?”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죽겠다 죽겠다 해놓고. 그리고 나도 뭐, 이러고 싶어서 이랬어? 이게 왜 내 잘못이야?” 
춘복 씨의 말이 한 치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서 여사도 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서 여사는 치마를 걷고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말없이 그것만 바라보던 서 여사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 정호는 어쩌냐.”
“어쩌긴, 이제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다니면 되지. 그건 걱정하지 마.”
급한 김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것은 아들 며느리와 상의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춘복 씨는 짐짓 걱정이 되었다.
“밥이 문젠가? 그럼 이제 누가 벌고?”
“정호 아빠 보상금하고 합의금 꽤 된다며, 그거 벌써 다 쓴 거야?”
“그게 어떤 돈인데 그걸 막 써? 그리고 그게 얼마나 된다고, 곶감 빼먹듯이 다 빼먹고 나면 정호 대학은 무슨 돈으로 가르치고? 나중에 대학 등록금 하려고 은행에 잘 넣어두었단 말이야.”
춘복 씨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서 여사가 울기 시작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 주위로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눈물을 훔쳐내는 손도 쭈글거렸다. 손등은 검버섯이 피어 희미하게 얼룩덜룩했다. 영락없이 초라한 할망구였다. 아무리 자기 전에 헤어롤을 말아 붙이고 아침마다 하늘거리는 옷들을 차려입고 나서도 늙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춘복 씨는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싶어, 꽃은 머리에도 만발했구먼, 이라고 농담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서 여사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면서 한탄을 했다.
“아이고……, 우리 정호 불쌍해서……, 애비란 놈은 사업한다고 집안 재산 다 말아먹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다 비명횡사하고……, 에미란 년은……, 그 나쁜 년은, 새끼 버리고 시집가고……, 이제 어떡하냐……, 우리 불쌍한 정호…….”
서 여사는 분에 못 이겨 자기 가슴을 막 쳤다가 옷을 잡아 뜯었다 하면서 계속 울었다. 머리에 붙은 헤어롤도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냈다. 저러다 머리칼까지 다 뽑겠다 싶어 춘복 씨가 말렸지만 서 여사는 막무가내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춘복 씨도 속이 상했다. 그러나 아무런 위로의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서 여사는 급기야 꽃까지 잡아 뜯었다. 
“이놈의 것, 이 쌍놈의 것!”
꽃이 너무 쉽게 뽑히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서 여사가 울음을 뚝 그쳤다. 춘복 씨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서 여사는 남아 있는 꽃대도 하나하나 다 뽑았다. 왼쪽 무릎에 쌀알만 한 구멍이 송송 생기면서 천천히 피가 새어 나왔다. 서 여사는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고 머리칼은 어지럽게 헝클어진 서 여사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그래!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서 여사는 천천히 무릎을 구부려보았다. 뻑뻑하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무릎이 구부러졌다. 서 여사는 맥이 쪽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나았나 봐.”
춘복 씨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여사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 여사가 이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
“자기도 해 봐.”
춘복 씨는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서 여사가 재촉했다.
“얼른.”
“생각 좀 해 보고.”
“얼씨구, 생각하고 말고가 어딨어? 아니, 지금 이게 더 좋단 말이야?”
춘복 씨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기도 자기 마음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부자리에 흩어져 있는 꽃잎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춘복 씨는 마루에 앉아 서 여사가 어제보다 더 화사한 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보리색 스카프로 리본 모양의 매듭을 커다랗게 묶어 얼굴이 환해 보였다. 조금 전에 산발한 머리로 엉엉 울어대던 할망구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차림으로만 보아서는 남의 집 살림을 해주러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 여사는 일할 때 입는 옷은 그 집에다 두고 늘 그렇게 차려입고 다녔다. 그녀 앞을 지나면서 서 여사는 잘 생각해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서 여사가 나간 후 그녀는 잘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뭐에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는데, 밤사이 자신이 이 사태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흔들리게 되었다. 정말 이대로 살아도 좋은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그런데 그런 질문은 너무 낯선 것이었다. 일생동안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더 나은 뭔가를 선택해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평생 자신에게 닥쳐오는 세월을 허덕허덕 헤쳐 나가기에도 바빴다. 쨍하고 해가 뜰 날이 멀지 않았고 꽃 피는 봄날이 곧 올 거라고 흰소리만 치던 남편이 위암으로 죽고 나서 시장통에서 밥장사를 하며 남매를 키워냈다. 잠자코 앉아서 앞으로 어떤 인생의 행로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건 저기 하느님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두 가지 길을 놓고 저울질을 하자니 두 손에 들려 있는 저울이 몹시 무거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꽃을 꺾기만 하면 전처럼 자유롭게 거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몰랐다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소문이 골목 안에 퍼지는 데에는 하루면 족했다. 동네 여자들이 삼삼오오 꽃구경을 하러 왔다. 다음 주에 단체로 꽃구경을 하러 가기로 했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전야제라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부터 춘복 씨가 지팡이를 짚게 생겼다는 것을 딱하게 여기는 사람, 자기도 좀 무릎에 꽃이 피어서 손주를 안 키웠으면 좋겠다는 사람까지, 모두들 신기해하며 탄성을 연발하고 소란을 떨다가 돌아갔다.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옆집 성호네는 남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여자들만 우르르 왔을 때와는 달리 춘복 씨는 다리를 드러내놓기가 좀 부끄러웠다. 어제 의사에게와는 또 달랐다. 안 그래도 성호네는 여자들 다니는 마실에 꼭 끼려고 한다며 방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남편을 타박했다. 성호 아버지는 도박판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춘복 씨는 저런 인간을 어떻게 참아주나 싶었지만 성호네는 남편이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차라리 고마웠다고 한 적도 있었다. 돈을 벌어 갖다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고 집안 세간을 들어먹지 않은 것만도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꽃을 본 성호 아버지는 손가락 마디가 툭 불거진 비쩍 마른 손으로 연신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야……, 말로만 듣던 걸 이렇게 보게 되다니…….”
춘복 씨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물었다. 
“들어본 적이 있다구요?”
“네, 전에 잠깐 노름판에서 놀 때…….”
“잠깐 놀 때?”
성호네가 끼어들었다.
“형님은 좀 가만 계셔 봐요.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다구요?”
아내의 눈치를 보며 성호 아버지가 말했다.
“아니, 직접 본 건 아니구요, 아 왜 그런 데 돌아다니는 전설적인 얘기 같은 거 있잖아요. 물론 썰 풀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늘어놓는 구라도 많지만.”
“말 좀 점잖게 합시다.”
성호네가 눈을 내리깔며 남편에게 눈치를 주었다. 춘복 씨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요?”
“아주 전설적인 인물이 하나 있었어요, 흑장미라고. 아, 그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 나중에는 무릎에서 꽃이 다 피었다고 하더라고요. 뭐 아주 새빨간 장미였다던가, 그래서 흑장미라고 불렸다고…….”
“말도 안 돼!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노름하다 죽은 귀신이 무릎부터 썩는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그런 괴상한 말은 처음 듣네.”
성호네의 말에 성호 아버지가 눈을 흘겼다. 겨우 노름꾼한테 일어난 일이었다니 춘복 씨는 좀 실망스러웠다. 그녀의 안색을 알아챘는지 성호네가 남편에게 퉁바리를 놓았다.
“어디다 노름꾼을 찍어다 붙여? 상스럽게…….”
“상스럽다니, 이 사람아. 모르는 소리 마. 그게 다 사리 같은 거라고, 사리. 알아?”
“사리? 어이구구, 사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돌로 만든 부처님도 깔깔 웃을 소리지.”
“이 사람이 지금! 그 조그만 돌멩이가 금 쪼가리도 아닌 게 왜 귀하겠어? 다 거기에 붙은 의미 때문에 귀한 거라고. 사리가 뭐 별 건가, 한 가지 일에 전념하면 그렇게 된다구. 스님들이 가부좌 틀고 안아서 정진하잖아. 노름이라고 당신이 우습게 생각해서 그렇지, 줄창 앉아 있는 건 똑같다구. 그 정성에 대한 상이란 말이야. 뭘 알기나 해, 당신이?”
“어이구, 그러셔? 그렇게 정성을 쏟은 당신도 죽으면 사리가 댓 말은 나오겠구만. 그거 보려면 당신보다 오래 살아야겠어.”
“아이고, 그만들 하세요, 괜히 저 때문에 싸우지들 마시고.”
성호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전설이 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지 입을 다물었다. 춘복 씨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 말이 맞는지도 몰라요. 이 무릎 말이에요, 접었다 폈다를 하도 열심히 했더니 이렇게 됐나 봐요.”
성호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 무릎에 꽃 안 필 사람이 있나?”
춘복 씨가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맞아요, 형님도 조심하세요. 내일 아침엔 무릎에 꽃이 필지도 몰라요.”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 춘복 씨는 다시 이부자리에 누웠다. 역시 생각은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자기가 조금씩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다시 그 괴로운 통증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에 대한 대가로 관절염보다는 그래도 꽃이 낫지. 이게 더 아름답잖아? 그녀는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아들과 며느리가 서 여사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는 춘복 씨에게 꽃을 꺾을 것을 주장했다. 당연한 것을 가지고 왜 입 아프게 하냐는 듯한 아들의 태도에 그녀는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한 번쯤은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줄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야속했다. 내 속으로 난 내 새끼도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들의 압박이 흔들리던 그녀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마 아들이 그녀의 고민을 존중해주고 그녀의 뜻대로 하라고 했다면 오히려 그녀가 먼저 미안해하며 아들의 말을 따랐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들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확실하게 못 박는 망치질이 되었다. 그것도 모른 채 아들은 계속 주절거리다 결국 제 분에 못 이겨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며느리도 다시 한 번 간절한 표정을 짓고는 남편을 따라 일어섰다. 엄마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래?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애들이라도 봐줘야 할 거 아냐? 아들이 이렇게 말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는 했다. 사실 그녀도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무가내인 아들에 대한 서운함이 더 컸다. 그녀는 이제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오늘은 잊지 않고 묵주신공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이제 뭐 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낼까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설렜다. 우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참석하고 싶었다. 주일에 성당에 가는 것으로는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처녀 시절에는 열심히 하던 레지오를 결혼한 후로는 여유가 없어 하지 못했다. 자식들 다 키워놓으면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덜커덕 그녀의 손에 손주들이 떨어졌다. 이젠 지팡이를 짚고라도 다닐 생각이었다. 그 다음엔 성서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집에서 혼자 성서를 읽는 것 말고 성당에서 하는 성서공부 모임에 나가면 수녀님의 강의도 듣고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을 터였다. 전부터 꼭 하고 싶던 것이었다. 처음이니까 「창세기」반에서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그녀는 문득 이마를 쳤다. 얼마나 그럴듯한가, 창세기라니!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리고 태초에 꽃이 있었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혼자 빙긋 미소를 짓다가 다시 일어나 문제의 그 꽃들을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간밤에도 춘복 씨는 잠을 잘 잤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지 않아도 되니 천근만근 무겁던 몸도 가뿐해졌다. 이제 차츰 변화된 생활에 적응이 되고 있는 것 같아 기분도 산뜻했다. 며느리는 드러내놓고 뾰로통해 했다. 그 표정이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며느리가 얼마나 피곤할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손을 좀 덜어주려는 마음에 지은이 머리도 묶어주고 옷도 입혀주고 밥도 먹였다. 새벽에 장을 보러 나간 아들은 여느 때와 달리 아침 먹을 때까지 들어오지 않더니 느지막히 들어와 밥도 안 먹고 며느리와 지은이만 데리고 다시 나갔다. 춘복 씨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흥, 그녀도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평생 한번은 내 마음대로 좀 살아보자는 다짐이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조용한 가운데 드라마를 보니 꿀맛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애 밥 먹이랴 자기 밥 먹으랴 대충 눈으로만 훑곤 했을 텐데 말이다. 개 짖는 소리가 나더니 벌컥 미닫이문이 열렸다. 
“이 고집 센 할망구야!” 
잘 차려입고 나선 서 여사였다. 개 짖는 소리를 들으니 며느리가 개밥도 주지 않고 나갔다는 것이 생각났다. 춘복 씨는 서 여사와 길게 말하기 싫어 웃으면서 눈을 흘기고는 일어섰다. 
“재롱이 밥 줘야 돼.”
그녀가 싱크대에서 개밥을 만드는 동안 서 여사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계속 지껄여댔다.
“늙을수록 자식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어쩌려고 그래?”
“…….”
“그래서 결국 그러기로 했단 말이지?”
“…….”
“애도 안 보고 하루 종일 뭐 하려구?”
“할 거 없을까 봐?”
“그래, 차라리 잘 됐네. 아예 이참에 영감이나 하나 만나든가. 이제 자식하고 틈났으니 말년에 영감이라도 있어야…….”
“안 늦었어? 오늘은 왜 이렇게 해찰이야?”
춘복 씨가 냄비를 들고 현관으로 나가자 서 여사가 핸드백을 마루에 놔둔 채 일어섰다.
“이리 줘. 아직 잘 걷지도 못하면서……. 내가 착한 일 좀 한 번 하고 가려고 기다렸다, 왜?”
춘복 씨는 못 이기는 척 냄비를 내밀었다. 서 여사가 냄비를 들고 개집 쪽으로 다가가자 개가 몸을 낮추고 경계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개새끼야, 너 밥 주려고 그런다. 이 돌대가리 같은 게 밥 주는 사람도 몰라보고…….”
서 여사는 거침없이 개집 옆으로 가서 빈 그릇을 개에게서 멀찍하니 떨어진 곳까지 발로 툭툭 차서 가지고 왔다. 자주색 구두에 채인 빈 그릇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릇에 개밥을 부은 후 서 여사는 다시 발로 그릇을 밀었다. 그러다 갈라진 시멘트 틈에 구두굽이 걸리면서 그릇이 심하게 흔들렸다. 국물이 출렁이면서 그릇 밖으로 조금 흘렀다. 서 여사의 구두에도 국물이 튀었다. 안 그래도 으르렁거리던 개가 무섭게 짖기 시작했다.
“아, 그 개새끼 정말, 조용히 못해? 누가 개밥 뺏어 먹냐? 자, 처먹어라, 처먹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러 구두를 턴 서 여사가 허리를 굽히고 그릇을 들어 개 앞에 던지듯 휙 갖다 놓았다. 그릇을 개 앞에 놓고 허리를 펴려는 순간 개가 서 여사의 오른손을 덥석 물었다. 서 여사의 구두굽이 갈라진 시멘트 틈에 걸리던 때부터 불안한 마음으로 쳐다보던 춘복 씨는 갑자기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 마당에 나동그라졌다. 한 번 넘어지자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에 짚고 일어날 만한 것도 없었다. 서 여사는 비명을 지르며 왼손으로 개의 머리통을 미친 듯이 때렸지만 화가 난 개는 한 번 문 것을 놓지 않았다. 춘복 씨는 자기도 모르게 치마를 걷고 정신없이 꽃을 쥐어뜯었다. 그러고는 힘겹게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잠시 휘청거린 그녀는 수돗가에 있던 빨래판을 들고 절뚝거리며 달려가 개의 머리통을 갈겼다. 

춘복 씨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봄볕을 쬐며 「창세기」를 읽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누구가 8백 년씩 9백 년씩 살았다는 얘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다가 책을 덮어버렸다. 자꾸 아이를 낳는 것도 보기 싫었고, 그렇게 지겹도록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적막한 마당에 내리쬐는 봄볕이 아주 환하고 따뜻했다. 몹시 나른했다. 아이를 돌보는 것도 아니고 걷기에 불편한 것도 아닌데 자꾸 눕고만 싶었다. 놀이방에는 이미 한 달 치의 돈을 냈으므로 그때까지는 그녀도 더 쉴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 환불해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 가라는 아들의 알량한 배려를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문득문득 그 괴짜 의사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나무가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얼마나 굉장한 일을 하는지 생각했다. 늙고 병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자신이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써도 뭔가 좀 미진한 게 남았다. 세상에 나와 이렇게 살고 있으면 됐지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너무 쓸모 있기만 한 인생은 좀 피곤하다는 생각도. 
서 여사는 앰뷸런스에 실려 갔고 개는 개장수의 트럭에 실려 갔다. 춘복 씨의 새로운 창세기는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녀는 활짝 벌어진 커다란 자목련 꽃잎을 보며 생각했다. 올해는 사루비아를 심을 수 있겠구나.

노재희∙1972년 생.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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