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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여름) 신작단편(이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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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56회 작성일 10-12-0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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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키스
이소망


하나 걸러 드문드문 연락이 닿았던 고등학교 동창아이가 결혼 소식을 보내왔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이를 교정하느라 웃을 때마다 시커먼 보철이 보였는데 청첩장에 박힌 동창은 어느새 가지런해진 새하얀 이를 내놓고 웃고 있다. 열아홉 살로 멈춰져있는 내 기억을 무안하게 할 만큼 그 아이의 얼굴은 한 가정을 꾸릴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웨딩촬영은 서울 청담동 어느 스튜디오에서 했다고 들었는데 식장이 인천이다. 청첩장을 훑어보던 눈길이 인천 남동구 부근에서 멈춰졌다. 그놈의 인천을 벗어나질 않는구나. 나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식장을 마저 확인하지 않고 청첩장을 책상 한 귀퉁이에 올려놓았다. 창문을 덮고 있는 커튼 아래로 방금 도착한 청첩장이 우울하게 그늘져 있다.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세 식구가 몸 붙이고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발품을 팔아 어렵게 구한 집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오래된 서향西向주택 이었다. 마당이 딸려있는 1층은 집주인이 살았고, 집안에 있는 계단 사이를 막아 만든 2층엔 나와 부모님이 살았다. 나무 계단 중간에 판을 덧대어 억지로 나눠놓은 층 때문에 2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중간에 뚝 끊겨있었다. 끊긴 계단을 볼 때마다 나는 마치 허공 위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서향으로 빠져있는 큰 방을 제외하고 다른 방은 그나마도 창이 좁고 해가 잘 들지 않은 북향으로 붙어있다. 젊은 애들은 빛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극성 덕에 안방으로 사용함직한 큰 방은 내 차지가 됐다. 서향 볕은 낮게 들어와 깊이 머물러 있는 빛이었다. 온 방을 휘감는 불그스레한 빛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매일 마주하는 붉은 볕은, 보기에 민망하고 감당하기가 벅찬 것이었다. 커튼이 필요했다. 서향 볕을 가려줄 두꺼운 커튼이.
큰 창밖으로 한강이 펼쳐지고 화려한 도시 야경이 눈이 부신, 그림 같은 도시 서울을 소개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나의 것은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볼품없다. 창문 바로 앞에 전깃줄이 뒤엉켜있고 낡고 허물어져가는 주택들이 빼곡하게 시야를 가로막고 서있다. 앞집이 슈퍼도 하고 문방구도 하는 가게인데, 덕분에 동네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거리에 버려놓은 온갖 쓰레기들이 골목에 갇힌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군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커튼은 부담스런 볕도, 갑갑한 풍경도 가려주는. 서울을 견디게 하는 나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어두운 방은 내게 익숙했지만 인천에서 갓 날라 온 새하얀 청첩장이 그늘에 눅져있는 꼴이 괜히 보기에 사나워 오전 내내 쳐놓았던 커튼을 걷혔다. 커다란 창문 사이로 정오에 걸려있는 시린 햇빛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나는 그만 눈을 감았다. 창밖은 볼 수 없었고 청첩장에 딸려온 핑크빛 리본이 빛을 머금고 반짝하는 모습이 눈가에 스쳤다.

“갈 거니?”
“글쎄, 잘 모르겠네. 아직.”
“왜 그 날 너도 일 있어? 안 그래도 애들이 하필이면 평일에 결혼한다고 말이 많더라.”
“아니……. 놀고먹는 백수가 일은 무슨.”
“그럼 가자. 청첩장도 보내왔는데.”
“생각해볼게.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민망해진다야.”
“너도 결혼할 때 되면 동네방네 사돈의 팔촌까지 다 찾아서 돌리게 될 거야. 품앗이 한다고 생각해.”
“결혼은 무슨, 아무튼 애들도 다 간다고 하면 생각해볼게 연락 줘.”
“알았어. 그때 보자. 나는 어차피 부모님도 인천에 있고 하니까, 예식 보러 가는 김에 집에도 들르고 하게. 그럼 연락할게.”
혜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천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이 갈리면서 통 못 보던 동창이다. 그러다 그녀가 서울에 있는 모 회사에 취직을 했고, 지금은 신림 고시촌에 방을 얻어 혼자 살게 되면서 왕래가 잦아졌다. 워낙에 성격이 사교적인지라 동창들과의 연락도 활발하고 그들의 대소사도 일일이 챙기는 혜란이기에 그녀를 통해서 나도 종종 인천 소식을 듣곤 했다. 사실 소식이라고 할 것도 없다. 전해지는 소식이라곤 누구도 서울에 산다더라, 누구는 지방 어디에 갔다더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우리의 입에서 회자되지 않는 무수한 인간들은 아직 인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대학을 다닐 때였다. 명절 때가 되면 학교에서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모여 고향 가는 차편을 예약하는 행사가 있었다. 노천극장 앞에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등등의 출신들이 모두 끼리끼리 모여 그들만의 방언으로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나는 곧 내려갈 고향 얘기에 달떠있는 그들을 보며, ‘아이고 저 촌것들 아주 신났네.’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지나쳤지만 그들이 느끼는 유대감이 내심 부러웠다. 서울에서 지하철만 타면 한 시간 내외로 도착하는 내가 난 곳을 생각하면, 고향생각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저들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랜만에 갈 생각에 설레는 맛도 없고 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리운 것도 아닌지라, 그렇다고 또 서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내 고향이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나는 그때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 중이었다. 그나마도 내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인천에 살던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 오게 되면서 나에게 인천의 의미가 조금 더 어색해졌다. 엄마는 딸의 상경으로 시작돼 결국 온 가족이 서울에서 살게 된 것이 내심 좋았던 모양이다. 딸 덕분에 서울 구경하더니 우리가 서울사람 되려고 일이 이렇게 됐나보다고. 그렇게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는 내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 나 혼자만 감당하면 됐었는데 거기에 우르르 가족이 붙어버렸다. 인천에서 자리 잡았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서울로 쫓기듯 넘어왔지만 말 많은 딸년의 통학에 부담을 덜어 준다는 명분 아닌 명분까지 내세우며 부모님은 서울 생활에 긍정적이었다. 사실, 가족이 지금 이 변두리에 자리 잡으면서 나의 통학길이 더욱 고단해졌다. 인천에서 학교까지 1호선 한 번만 타면 곧장 다닐 수 있었는데 서울 집에선 두 번이나 지하철을 환승해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인천에서 다닐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수고와 시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나는 서울과 서울 사이의 거리가 더 멀 수 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반대로 인천이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는 것이 내심 씁쓸했다. 이제 나는 졸업도 했고 더불어 통학의 명분도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예식 전 날까지도 인천에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잡힌 인천행이 낯설었다. 초, 중, 고 동창들이 모두 인천 아이들이고 그들 대부분이 인천에서 살고 있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잡히는 동창모임이 모두 서울 어디에서였다. 덕분에 내가 인천에 갈 일이 점점 없어져갔다. 아이들은 서울에 살고 있는 나보다 서울 지리에 해박했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과 모 연예인들이 자주 간다는 카페를 꿰고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서울이라며 동창들의 서울행은 거침이 없었다. 그렇다. 인천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서울이었다.
나는 열아홉 살 이전까진 서울에 와본 적이 없다. 수능을 끝내놓고 하릴없이 학교를 오가던 삼학년 때, 학교에서 잠실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소풍을 보내줬다. 나는 학교에서 보내준 덕분에 처음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지하철을 타봤고 서울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이들 속에 섞여봤으며 서울거리에서 밥을 먹어봤다. 수능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고 대학 원서를 쓰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은 꿈꾸지도 않았을 때다. 서울에 관한한 나는 순진한 편이었다. 돌아다니길 좋아하고 날티가 났던 몇몇 아이들은 이미 신촌이나 명동 따위를 다녔었다. 그러나 태어나서 한 번도 인천을 벗어나본 적 없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서울바닥 좀 밟고 다녔다는 친구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우리는 경험이 있는 아이의 의기양양한 뒤태를 경이롭게 바라보며 낯설고 복잡한 서울 지하철을 옮겨 탔다. 그러다 무리에서 이탈 돼 홀로 남겨진 친구 하나가 울면서 전화를 했고 우리는 급히 점호를 하고 다시 하나로 똘똘 뭉쳐 울고 있는 친구를 찾아 나섰다. 
이제 나는 노선표를 머릿속에 그릴 수도 있고 환승쯤은 눈감고도 하게 됐다. 심지어는 어느 칸에 타면 환승 출구와 가까운가까지도 계산하고 다닌다. 여러 번의 환승을 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이 어느새 습관처럼 몸에 익었다. 나는 여유로워졌지만 노선표를 찾으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그들이 때때로 눈에 띌 때마다 차마 모른 척 하기가 어렵다. 나의 열아홉 살 겨울 때문이다. 나는 그날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때 뭉쳐서 돌아다닌 꼴이란. 울먹이며 전화를 건 그 아이는 또 어떻고. 
그 당시에 우리 사이에서 한창 뽕머리가 유행이었는데, 머리를 정갈하게 묶은 다음 손가락을 살짝 굽혀 머릿속에 넣고 일부러 머리를 한 줌 빼내면 완성이었다. 정수리 부근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뽕 위로 헤어스프레이를 살짝 뿌려주면 금상첨화. 쉽게 말하자면 정갈한 머리를 일부러 헝클어트리면 되는 것이다. 한 번 유행이 돌면 모두가 따라 해야 했다. 그것은 불문율이다. 뽕머리를 하지 않는 자는 우리 무리의 수치였고 낙동강 오리알보다 더 지독한 미움을 받았다. 교복을 최대한 줄여 입고 그때 역시 유행하던 발목까지 올라오는 흰 운동화를 신어야 했으며 가방 역시 같은 명품 메이커에 같은 모델을 메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은 짝퉁이었다. 이 모양새가 바로 우리사이에서 유행에 민첩하고 최고로 세련된 모습이었다. 뽕, 발목운동화, 짝퉁 명품가방으로 곱게 단장한 우리는 인천을 거침없이 활보하고 다녔다. 우리가 무리지어 돌아다니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 그러나 그렇게 당당히 들어선 서울이란 도시에서 우리는 묘한 경멸감을 느껴야 했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 다녔다. 당시 최신 유행을 선도하던 우리들인데, 서울 아이들은 면바지와 큰 티셔츠를 입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가방을 메고 다니며 우리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비아냥거림이 묻어나는 웃음을 흘리는 것이다. 서울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아이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분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과는 다른 기운이 우리를 싣고 인천으로, 인천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그 기분을 자격지심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뽕머리를 하지 않았고 면바지를 사 입었으며 제 몸보다 큰 티셔츠를 사느라 용돈을 모았다. 결국 나는, 나를 분하게 만든 건 서울이 아니라 인천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고향이 인천이라 하지 않으셨어요?”  
“아…… 네…….”
“잘됐네요, 이번에 인천 방문의 핸가 뭔가 때문에 팸플릿에 쓸 인천 사진이 좀 필요한데, 몇몇 군데 대표적이고 유명한 데 있잖아요. 왜, 인천항이라던가, 아니 뭐 워낙에 작가님이 잘 아시겠지만, 사진 좀 몇 장 찍어 보내주세요.”
작가님은 무슨, 인천항은 또 무슨, 잘 알기는 개코나 알아! 몇 번 일을 같이 했던 여행 잡지 쪽에서 연락이 왔다. 메이저 잡지가 했던 기획을 재탕하거나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행사를 기회삼아 한 몫 잡으려는 소규모의 이름 없는 회사다. 말이 좋아 작가님이지 나는 그들에게 저렴한 값으로 고용되는 아르바이트생일 뿐이다. 나는 일이 들어올 때마다 카피라이터 이름이 기재되지 않는 사진을 열심히 찍고 다녔다. 이름 없는 회사에서 고용하는 이름 없는 나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아무 일이나 걸러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내게 주문한 사진은 적당한 선에서 사용되고 폐기 됐다.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일은 꽉 찬 나이에 변변한 수입이 없던 내게 고마운 일이다. 한 푼이 아쉬운 나로서는 굳이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인천이라니. 인천항은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인천에서 이십 년을 넘게 나고 살면서 인천항에 자의적으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부모님을 따라 수산시장을 가는 길에 스치듯 지나가거나, 대게 학교에서 견학 내지는 소풍으로 등 떠밀듯 보내는 곳이 인천항이다. 그러니 그간 그곳에 찾아갈 특별한 이유도, 잊지 못할 추억도 없었다. 

“갈 거지?”
“일이 생겼어.”
“뭔데?”
“으응……. 사진 찍어서 넘길 일이 들어왔네?”
“언제까진데? 내일 하루도 시간 못내?”
“글쎄. 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냥 와. 내가 말도 다 해놨단 말이야. 너 인천 가는 거 진짜 오랜만이지 않아? 한 십 년 됐나?”
“그렇지. 벌써 그렇게 됐네.”
“그럼 와. 너도 참 무심하다. 인천에 한 번을 안 다니냐? 와서 애들 얼굴도 보고, 애들이 학교 앞에도 놀러갔다 오자는데, 왜, 우리 잘 먹던 쫄면 있잖아. 그것도 먹고.”
“야 예식하면 뷔페 먹을 텐데 무슨 쫄면이야.”
“원래 우리 입맛이 좀 싸구려잖니.”
“근데 혜란아, 인천 하면 대표적인 게 뭐가 있을까?”
“대표적인 거? 뭐냐, 뭐지? 몰라.”
“우리가 특별히 자주 찾아갔던 데는 있었나? 어디였지?”
“쫄면집?”
“됐다.”
“그럼 내일 봐.”
“모른다니까.”
“그만 짜증나게 굴고 와, 아니, 그래 오지 마. 너 내일 인천바닥에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눈에 띠기만 해봐.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시간 봐서 갈게.”
“됐어, 오지 마!”
혜란의 윽박을 뒤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방안이 적막에 잠겨있다. 오늘따라 문방구를 오가는 동네 꼬마들의 기척도 안 들린다. 엄마의 잔소리에 할 수 없이 아침 경에 커튼을 걷어 놓았는데 어느새 해가 지는지 방안은 주홍빛이 한가득이다.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다. 눈썹 위로 손끝으로 발등으로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붉은 몸뚱이를 가진 나는 빛이 어디서 들어와 어디로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빛이 나를 통과하는지 내 몸에서 빛이 새어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온통 주홍이었다. 

예식은 오후였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사진 찍으러 군데군데 돌아다니다 얼추 예식 시간에 맞춰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침이 되서야 잠드는 습관이 있었고 사진은 내일 당장 찍어 급하게 넘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혜란이 정말 나를 죽일 수도 있으니까 몸을 사릴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같잖은 핑계도 만들었다.
그리고 밤을 샜다. 책을 읽고 카메라 렌즈를 닦고 마음에 드는 사진기를 새로 사려면 얼마가 필요한가. 계산도 해보다가 인천에 가서 대체 뭘 찍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 티비를 보다 다시 책을 읽어도 밤은 더디게 흘렀다. 그 밤이 결국은 해묵은 고등학교 졸업앨범까지 들춰내게 만들었다. 졸업하고 단 한 번도 꺼내보지 않던 앨범이었다. 내가 지금 이 짓까지 하게 된 건 정말로 밤이 더디게 흘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졸업앨범을 들춰보며 잊고 있던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수치심마저 이 밤이 덮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시간이 늘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밤이 책임져 줄 것이다. 그 어둠이, 그 무게가 짐짓 모르는 척 덮어주었다가 아침이 오면 다시 나를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오늘 밤 만큼은 시간의 전지전능함을 믿고 싶었다. 나는 말없는 밤을 향해 부끄러움의 화살을 끈질기게 쏘아 올렸다. 

일관된 뽕머리와 비슷하게 줄여 입은 교복들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아 어쩌면 이렇게 촌스러울 수가. 지금의 내가 옛날 그 시절의 나를 비웃을 수 있는 게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가. 더 이상 내가 인천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불쾌한 질문이 속에서 넘실댈 즈음  잊고 있던 사진이 눈에 들어 왔다. 그때 우리들은 동백 곁에서 무리지어 조별 사진을 찍었는데, 당시에 나름 콘셉트사진이라며 자유로운 포즈를 취하게 했었다. 우리는 동백에 입맞춤을 하는 제법 요염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당시엔 그 사진이 교복에 가린 속살을 들춰내듯이 민망하면서 온몸이 간지러운 게 그렇게 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중에 사진을 다시 찍으라고 하지 않을까?’ 아이들끼리 말도 많았지만 결국 그 사진은 졸업앨범에 실렸다.
학교엔 목련나무가 흔했다. 교화이기도 한 목련은 이미 한창 피어나고 떨어지는 중이었다. 목련은 잎이 떨어지면 검게 변하는 것이 마치 썩은 바나나 껍질 같아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목련꽃잎을 발바닥으로 질겅이며 사진을 찍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평범한 건 용서치 않던 우리는 조금 더 이색적이고 특별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학교를 이 잡듯이 뒤지다가 결국 발길이 뜸해 보이는 뒤뜰에 정리되지 않은 화단을 발견했다. 각색의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피어올라 화단을 채우고 있었는데, 화단 한 귀퉁이에서 동그랗게 피어오른 동백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 천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 가운데 동백을 만나니 그저 신기하고 반가웠다. 눈길 닿지 않는 학교 뒤뜰에 오롯이 올라와 있는 모양도 우리 마음에 콕 들었다. 얕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다른 것들과 달리 동백은 단단하고 풍만해 보였고, 그것이 지닌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리고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선홍빛이 참으로 고귀해 보였다. 그것은 줏대 없이 떨어지는 목련과는 풍기는 기운이 다름을, 다만 가만히 피어있음으로 도도하게 내보이는 꽃이었다.
이제 막 피어오른 동백에다 입을 갖다 대니 온 몸이 아찔한 게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왔다. 동백꽃은 깊이 들이마시면 지린내가 났는데 그 지린내마저도 알싸한 것이 좋았다. 부드럽고 지릿하고 그러면서도 향긋한 게 입가에서 살랑이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게 그저 온몸이 간지러웠다. 동백에 입맞춤을 했던 우리는 사진사의 오케이 사인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 화장실로 달려가 오줌을 누었다. 동백향이 입가에 내내 남아있어서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고, ‘야. 느낌이 되게 이상하지 않냐?’ 하고 동백과의 입맞춤을 ‘이상하다’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줄 몰랐다. 우리는 그 오묘한 느낌이 생각이 나 자꾸만 오금이 저렸다. 생전 처음 느껴본 야시시한 기분에 사로잡힌 우리는 교실에 오래도록 매어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틈타 우리 동백무리들이 교실을 빠져나왔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학교는 해가지면 다른 빛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불 밝혀진 교실 창가를 제외한 교정은 온통 어둠에 쌓여있었지만 자율학습시간이 끝나면 운동장을 밝히는 가로등을 켜주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교정이 어둡다고 느껴본 적이 없던 우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옷깃에 의존하며 조심스럽게 뒤뜰에 있는 화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이지 새카만 어둠이었다. 무섭다고 돌아가자는 아이도 있었는데 우리는 뭐에 홀린 듯이 화단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둠을 가로지르고 도착한 곳이 낮에 봤던 화단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제각각 어지럽게 피어난 봄꽃 향기들이 한데 섞여 동백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웠다. 손을 뻗어 더듬더듬 만져지는 느낌만으로 꽃인지 풀인지 나뭇가지인지 구별해야 했다. 그러다 아이들 손이 뒤엉키고 각기 서있는 자세가 섞이면서 내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어둠 속에서 중심을 잃은 나는 옆에 있던 아이와 함께 꽃밭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 비명이 미처 입 밖으로 새어나오기도 전에 둘이 무언가와 입을 맞추게 된 것이다. 나는 ‘동백을 찾았다!’ 라고 말했고 나와 함께 쓰러진 친구는 ‘방금 누구랑 뽀뽀를 한 것 같아.’ 라고 말했다. 나는 동백이라 주장했고 친구는 입술이라고 우겼다. 나는 동백이 분명한 것 같았다. 낮에 그것보다는 조금 차가웠는데 스치듯 부딪힌 그것의 질감이 분명 동백이었다. 지릿한 향기와 꽃잎의 싱그러움이, 아찔한 순간이라는 표현이 뭔지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자신에게 닿은 것은 입술이라며 기분이 더럽다고 했다. 이 소란으로 결국 아이들은 동백꽃 키스를 포기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나와 함께 넘어진 아이는 그 날 이후부터 왠지 모르게 나와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더니 이제는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조금 억울했다. 분명 나는 동백과 키스를 했는데 너는 왜 나를 불편해 하는가. 내 입술에 스친 게 정말 너의 입술이란 말인가. 나는 동백이라 확신하면서도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거칠게 침을 뱉었다. 그 뒤로 우리는 금세 다른 친구가 생겼고 다른 무리를 형성했으며 그렇게 서로 잊고 잊히면서 동백꽃 사건을 함구했다. 

졸업앨범을 모두 다 봤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이 왔고, 방문을 열어본 엄마가 ‘네가 웬일이니 이 시간에 다 일어나있고.’ 하며 커튼을 시원스레 걷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햇빛이 한꺼번에 방안으로 쏟아졌다. 빛에 제압된 방안에서 나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이 따가워 밖을 볼 수 없는 이유도 있었지만, 길고 긴 밤이 지났어도 여전할 창밖 풍경도 싫었고 졸업 앨범 하나로 밤을 새버린, 아직도 인천에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기가 싫었던 이유도 있다. 결혼식 참석 여부도, 사진의 콘셉트도, 찍을 장소도 정하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모든 자괴감을 밤에 떠넘기고 시간에 맡겼건만 되돌아온 아침은 모든 고민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밤새 쏘아올린 화살을 어둠이 잡아두었다가 다시 시린 햇빛 사이로 후드득 내리쏟는 것 같았다. 

인천으로 들어가는 지하철은 1호선뿐이다. 몇 가지 노선이 인천 근교까지 가긴 하지만 결국은 1호선으로 갈아타야만 한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을 할 때, 긴 시간 동간 지하철에 타고 있으면서 저 사람은 인천사람, 저 사람은 서울사람. 구별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구별의 기준도,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왠지 내 느낌엔 그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옷매무새가 조금 촌스럽거나 매너 없이 행동하는 사람, 지하철 노선표를 뚫어져라 보는 사람은 인천사람이었고 세련된 정장을 입었거나 책을 읽는 사람, 다른 이와 여유롭게 대화하는 사람은 서울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을 벗어난 지하철이 인천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온통 인천사람만 남았고 나도 그 속에 남겨져야 한다는 사실에 갑갑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사는 도시에 왔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려 품안으로 꼭 쥐고 있던 가방을 슬며시 손에서 내려놓고 마는 것이다.
오랜만에 탄 1호선에서 나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았다. 구별되지 않았다. 옛날, 속으로 그런 짓거리를 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무척 쪽팔리고 부끄러웠는데, 그래서 다시는 하지 않겠다 했던 것이 이제는 뒤섞인 사람들이 구별되지 않음이 내심 속상했다. 저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명색이 친구 결혼식이 있다는 날인데, 정장은커녕 돌아다니기에 편한 옷을 주어 입기 바빴다. 진흙의 잔해가 묻어있는 황토색 등산화, 낡은 청바지, 목이 늘어난 푸른 티셔츠에 회색 후드자켓, 양 어깨 걸린 비대한 카메라 가방과 트라이포트 가방까지. 아마 옛날의 내가 이 꼴을 봤다면 어김없이 인천사람이라고 도장을 찍었겠지.

“사진을 정확히 언제까지 보내드리면 될까요?”
“아 뭐 그렇게 서두르실 건 없고 다음 주 중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진이 필요하신지…….”
“거, 저번에도 말했지만 인천을 대표하는 거 말이에요. 왜 인천항도 있고, 인천 출신이니 더 정확하게 아실 테지만, 살면서 인천항 자주 가지 않았어요? 인천 하면 항구도시라니까. 차이나타운도 있다고 하던데, 사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인천을 소개하는 거니까요. 좋은 걸로 잘 좀 찍어서 보내주십쇼. 이왕이면 재미있는 사진이면 좋겠네요. 뭔 말인지 아시겠죠?”
차라리 오늘 당장 사진을 달라고 했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구체적으로 요구했다면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은 내게 원치 않는 결정권을 준다. 내가 인천에서 태어나게 된 것도, 서울에서 살게 된 것도 내가 결정한 바는 아니지만 인천에 돌아가는 일을, 서울에서 살아남는 일을 결정하게 만든다. 수동적으로 부여받은 바를 능동적으로 이해하며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동인천역이 가까이 오자 가방을 바짝 조여 맸다. 동인천역에서 내려 배다리를 걸쳐 월미도에 들어가는 동선을 만들었다. 월미도 가기 전에 조금 더 걸어 신포시장에 들러볼 수도 있겠고 배시간이 맞춰진다면 월미도에서 영종도로 배를 타고 들어갔다 나와도 좋겠다. 월미도를 나와 인천역 방향으로 가면 인천항이 있을 텐데 누구 말처럼 인천하면 항구도시라니까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차이나타운을 올라 자유공원 쪽으로 돌아 나오는 길도 괜찮아 보인다. 오랜만이란 낯설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새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다. 버스노선이라던가 길의 방향이 약간씩 헛갈렸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눈이 멎는 대로 정거장에 내렸다. 기억은 가물가물했어도 직감적으로 반응하는 몸은 정확했다. 
나는 인천에서도 시청이 있고 백화점이 들어섰던 나름 세련된 동네에서 살았다. 그 사실은 동인천 근처 구시가지를 혐오하는 웃기지도 않은 우월감을 주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도 집 가까이에 있어 동인천 근처를 배회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아이들은 기분이 우울하거나 신나게 놀고 싶을 때면 이 동네를 찾았다. 월미도에 있는 월미랜드 디스코와 바이킹은 안전점검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안전바라던가 안전밸트가 조금씩 헐거웠다. 우리는 갖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생명의 위협을 다분히 느끼게 하는 놀이기구를 탔다. 당시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던 디스코란 무엇인가. 둥그런 원판처럼 생긴 기구인데, 원판 가장자리를 따라 사람들이 앉으면 입심 좋기로 유명한 디제이 오빠들이 흥겨운 음악을 틀어주며 운행을 시작한다. 짓궂고 말 잘하고 더러는 잘생기기도 했던 오빠들이 우리를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리다가 한 번씩 원판을 뒤흔들어 주는데 그때마다 몸이 제멋대로 통통 튀어 올랐다. 어른들 말처럼 허리가 작살나는 줄도 모르고 그 오빠들의 화려한 멘트에 가슴이 울렁거려 자꾸만 타게 되는 것이다. 디스코 위에서 폴싹거리는 교복치마는 디제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들은 교복차림의 우리가 타기만 하면 디스코를 일부러 더 거칠게 운행해서 치마 속에 감춰진 속옷을 보이게 만들었다. ‘어, 저기, 자주색 교복 회색치마 입은 학생, 왼쪽에서 세 번째, 그래 너. 오늘은 꽃무늬 팬티를 입었네요.’ 라는 멘트가 나와야 디스코 운행이 슬며시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때 그건 꽃무늬가 아니었다. 생리 중이였던 아이가 디스코에 휘둘리다 그만 팬티에 흘린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 됐건 디제이들은 ‘팬티가 어쩌구네요.’ 라고 멘트를 날렸고 그때마다 우리는 ‘야, 이 개새끼야’를 외쳐댔다. 그러다 나중엔 그 개새끼와 사귀는 아이도 생겼다. 
저녁 즈음엔 편의점에서 말아온 오백 원짜리 컵라면을 황토물이 철벅이는 바다와 마주하고 먹었다. 한 번은 누구의 생일 기념으로 월미도 바닷길을 따라 늘어선 횟집에서 회를 먹기로 했다. 호객 행위에 열을 올리는 아줌마들 사이를 의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며 근처 횟집을 기웃거렸는데 교복 입은 우리들은 삐끼 아줌마들 사이에 가능성 있어 보이는 손님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줌마들의 그런 태도가 민망했다. 결국 우리는 회를 포기했다. 횟집을 뒤로하고 황망히 바닷길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우리 중 누군가가 물었다. ‘얘들아 저 쓰레기가 떠다니는 바닷물 좀 봐. 저기서 건진 물고기를 사람한테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아이가 받아쳤다. ‘월미도에서 회 먹는 사람 중에 인천 사람은 하나도 없다더라.’ 우리 모두는 그 대화에 깊이 동조를 했고 그날 역시 오백 원짜리 컵라면을 말아 먹었다. 
월미도에서 바라보던 서해의 저녁놀은 당시 우리를 센티하게 했지만 그것을 축복이라 느낀 적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약간 촌스러운 기분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먹다 남은 라면 찌꺼기를 갈매기에게 던져주고 바다가 새카만 어둠에 잠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바다가 버스 안에서 잠깐 조는 사이에 거대한 빌딩천지가 돼있었다. 

사람들을 홀릴 만치 신선한 봄날이었다. 기지배, 날씨는 한 번 잘 골라가네. 일을 끝내기 전엔 결혼식 생각은 안 하려고 했건만 봄빛으로 물들어 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뱉어진다. 일부터 하자는 심사로 카메라 바디에 렌즈를 끼워 맞췄다. 
월미도도 그렇고, 차이나타운도 그렇고 그 동안 많이 세련되진 느낌이다. 시市에서 만들어 정갈하게 닦여진 새로운 길도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그럴듯한 이미지를 찾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나는 애초에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렌즈 뚜껑을 닫았고 끔뻑이는 두 눈만이 거리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걷는 거리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후미지고 낡아졌다. 멀리서 갈매기의 끼룩거림이 들려오고 콧구멍으로 비린 갯바람이 들어오는 동네. 어딜 봐도 바닷가 촌동네인데 여기서 조금만 더 벗어나면 대형 공단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만 더 벗어나면 서울 강남이 부러울 것 없는 초호화 아파트가 즐비하고 매출이 전국 10위 안에 든다는 대형 백화점이 위엄을 떨치고 있다. 이 도시가 인천이다. 우리의 폐는 바닷바람과 백화점 에어컨 바람을 동시에 흡입하며 호기했다. 그것은 뜨내기들의 호흡이었다. 어른의 몸으로 생리를 흘리는, 동백꽃에 키스를 하고 오줌을 싸야하는, 갯바람을 쐬고 살지만 아파트가 익숙한.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의 중간지점에 붕 떠있는 뜨내기들이었다. 그리고 붕 떠있으면서도 잘 먹고 잘 살았다.

동창의 예식이 있다는 백화점 근처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결혼식에 얼굴을 내밀기엔 꼴이 누추했지만 잘 아는 것들끼리의 재잘거림이 그리웠다. 밤을 탓해보고 일을 탓했지만 결국 화살은 내게로 와서 꽂혔다. 인천에 돌아와서야 그 화살을 조금씩 뽑아낼 수 있었다. 박힌 화살이 뽑힐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쑤셨다. 월미도 바다를 보면서, 자유공원을 오르면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화살이 주는 통증을 묵묵히 감내했다. 그것은 반가운 아픔이었다.
백화점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여러 개였는데 구태여 고등학교를 지나는 버스를 골라 탔다. 중간에 내리지 않고 곧추 타고 가야 제시간에 예식장에 도착하겠지만 이번엔 발작적인 몸의 반응이나 나도 모르던 본능 때문이 아니었다. 

정문을 지나 체육관을 끼고 콘크리트로 발라놓은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야 운동장이 보인다. 아이들이 수업중이라면 조용히 학교를 둘러보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운동장 초입부터 소란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몸이 순간 위축되는 듯 했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졸업앨범 촬영이 한창이다.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학교 곳곳을 점령하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목련의 인기는 여전하다. 학교 본관을 둘러싼 목련들이 톡톡 잎을 떨어뜨리는 중이었는데 그 밑으로 아이들이 대거 모여 조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학교에 들어서기엔 낯선 이방인이었지만 들고 있는 사진기 덕에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학교 풍경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덧없이 사진기를 들이대며 딴청피우다 슬슬 학교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운동장에서 눈에 띄는 모든 공간은 아이들이 붙잡고 있었는데 역시 뒤뜰은 한적해 보인다. ‘조금 더 뒤져봤어야지 녀석들.’ 나는 특별함을 느꼈던 옛날을 떠올리며 뒤뜰에 들어섰다. 자연스러운 척 하며 들어서긴 했지만 보는 사람 없이 부끄러워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화단을 둘러보았다. 한참동안 마른 흙을 신발코로 긁으며 서성이고 서있었다.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챘는지 뒤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들킬까 무서워 얼른 화단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때, 화단 끄트머리에서 붉게 물들어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등골을 따라 식은땀도 흘렀다. 앉은걸음으로 그것을 향해 뒤뚱뒤뚱 걸었다. 형체가 점점 가까워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쓰레기다. 학교 매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껍질이다. 와플처럼 생겨 하나 사서 두 놈이 나눠먹기 좋은, 그래서 아이들이 자주 찾는 아이스크림 껍데기였다. 어떤 자식이 여기에 쓰레기를 버렸나. 이름 모를 후배에게 한바탕 욕이라도 해줄 참이었는데 자꾸만 실소가 터진다. 퍼진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아예 자리를 잡았다. 가슴이 뻥 터진 듯 시원했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한껏 쳐들고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아무리 찾아도 동백꽃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세요?”
앞으로 그림자가 지나나 싶더니 뒤통수에서 소리가 난다.
“얘들아 이리 와봐.”
아이가 ‘선생님!’ 하고 외치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기 나는, 내가 누구냐면……. 근데 여기에 누가 쓰레기를 버렸니?”
“모르겠는데요, 전 아닌데요, 누구세요?”
“혹시 말이야, 여기 꽃 안 피니? 동백꽃이라던가.”
“안 피는데요, 여기 분리수거장 옆인데, 근데 누구세요?”
“그렇구나.”
하는데 교복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야 누구야?”
“몰라? 누구래?”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몹시 불순하다. 나는 급히 사진기를 들이댔다. 
“저기……. 얘들아 니들 오늘 졸업 사진 찍는 날이지?”
교복 입은 아이들의 의심스런 눈빛은 여전했지만 카메라 렌즈를 끼우는 사이 어느새 아이들이 자리를 잡는다.
“야 근데 꼭 여기서 찍어야 되는 거냐?”
“그냥 찍어. 썩은 바나나 보다는 낫다”
나는 아이들끼리 말을 주고받는 사이 셔터를 눌렀다.
“아 뭐예요. 다시 찍을래요.”
“그래 그럼 포즈를 잘 취해봐, 찍는다. 하나, 둘, 셋!”
아이들은 요새 인기 아이돌 스타가 자주 하는 손가락 모양을 따라했다.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하며 얄궂은 손짓이 우스워 보였지만 당사자들은 만족한 듯했다. 나는 셔터를 몇 번 더 누르고 찍은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겠노라 약속을 하고서야 조용히 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 

부랴부랴 예식장에 도착했지만 예식은 이미 끝나는 분위기다. 멀찍이서 혜란이 내 쪽으로 눈을 흘긴다. 나는 입모양으로 ‘미안해’를 뻐끔거리고 사진기를 꺼내 들었다. 부케를 던질 준비가 한창이다. 순백색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친구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프레임에 들어온 부케 꽃이 붉다. 멀리서 사진기만 들이대고  있는 나는 그것이 장미인지, 아닌지, 어쩌면 동백인지, 역시 아닌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붉은 꽃을 뒤로 넘기는 친구를 렌즈에 담았다. 부케를 받는 친구는 따로 정해져 있었지만 옆에서 멍청히 서있던 다른 친구에게 붉은 꽃이 엉뚱하게 내려앉았다. 
예식이 끝나고 뷔페를 먹는 아이들에게 적당히 먹으라는 혜란의 지시가 내려졌다. 쫄면을 먹으러 가기 위함이었다. 촌스러운 우리는 쫄면을 위해 뷔페를 기꺼이 포기했다.

쫄면을 입안에 한가득 넣고 혜란이 말을 꺼냈다.
“얘들아, 쫄면 먹으러 온 김에 학교에 들렀다 갈래?”
“해져서 컴컴한데?”
“뭐 어때.”
“그럴까? 우리 옛날에 졸업사진 찍을 때, 그 동백 아직도 있을까?”
“그런데 그게 동백이 맞긴 맞나? 난 아직까지도 동백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동백꽃 아니었어? 우리는 왜 동백꽃이라고 했던 거지 그럼?” 
“동백이니 뭐니 지금 꽃이 있어도 지금은 보기 어려울걸? 어두워서 그때도 못 찾았잖아.”
“맞아. 우리 못 찾았었지?”
“야! 내가 찾았다고 했잖아.”
아이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내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고추장 양념이 잔뜩 묻은 입술을 날름이며 혜란이가 되받아 친다.
“그거 입술이라며.”
“동백이라니까?”
“야! 너 만날 침 뱉었잖아.”
“동백이었다니까. 그래 좋아. 가자. 가서 확인해보자고.”
동백은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낮에 다시 와보자며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다시 오겠다는 아이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서울에 돌아갔다. 낮고 길게 드리우는 붉은 볕이나 창문 밖으로 엉킨 전깃줄, 문방구 앞 쓰레기나 빼곡한 주택들은 여전하다. 잡지 회사에선 사진을 다시 찍어 달라고 했다. 인천사람이라 잘 해 올 줄 알았는데 기대에 못 미쳤다고. 나는 인천사람이 그렇게 해와 미안하다고 했다. 
학교에서 졸업사진을 찍던 아이들에게 보내주기로 한 사진을 고르는 중에 저희들끼리 웃고 까부는 사진이 눈에 들었다. 다시 찍자고 으름장을 놨던 장면인데, 아이들의 뾰족하고 빨간 주둥이가 햇빛을 먹고 반짝이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따로 빼놓아 거치적거리는 커튼을 치우고 창틀에 붙여 놓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사진 밑에는 카피라이터의 이름이 필요해질 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것은 정신을 알딸딸하게 만들었던 동백꽃 지린내가 떠오르고 다시는 없을 나의 첫 키스를, 그 민망함과 아련함을, 찝찔하고 싱그러움을 실감하게 했다. 또 그것은 잘 아는 것들끼리 모여 먹던 쫄면이 그리워지고 월미도의 낙조를 기억하게 했다. 
그 기억은 내 속에서 큰 창문이 있는 방과 그 창에서 쏟아지는 빛을 담담하게 견딜 수 있는 용기를 만들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언젠간, 창밖에서 들어오는 붉은 볕 위로 갯바람을 덧씌워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다시 뜨내기의 호흡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는 여기서 옛날처럼 붕 떠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소망∙200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추천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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