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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집중조명-하두자/해설 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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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18회 작성일 11-03-11 14:26

본문

하두자

불안에게 들키다 외 9편



싸이프러스 나무의 허리 형광 빛 네온싸인 목을 끌어안았다

가장 먼 손끝에서 가장 가까운 가슴으로

카페라테향이 흘러내리는 밤

네 손끝에 흔들리는 밤

내 눈물이 보이지 않는 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쏟아지는 그 붉은 모래가

캄캄한 벽을 타고 내리는 밤

장미꽃 무늬가 넝쿨손을 뻗으며 하늘로 건너갔지

불현듯 이마에 스치는 두 개의 입술

조각별로 부서지고 있다네

철 지난 달력과 사소한 시집이

폭풍으로 별들이 아우성치고 있다네

너의 뒷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내 가슴을 태워버리기 위해

가물가물 한 줄기 연기로 흩어지고 있다네






거울놀이



비늘을 툭툭 털어내면서 달려 왔다고 했어 흩뿌린 가시를 밟으며 달려 간다고도 했지 스치듯 기억할 수 없는 얼굴이어서 눈인사도 나누지 못한다고 했던가

 

당신은 당신의 절반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고 나는 나의 절반을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어 백밀러 속으로 이정표가 자꾸 사라지고 탁자 위에 제랴늄은 한 눈금씩 말라가고 있지 당신은 벗어놓은 내 어깨를 지나 흘러내린 창틈으로 사라졌어

 

이리 떼가 마차를 끌고 가는 밤

유리창에 반사된 가면 속으로

당신의 심장이 툭툭 끓어지네요 

축축한 가면에 숨겨진 열 개의 거짓말

흘러드는 그림자는 누구의 얼굴인가요

한 장씩 열어 보고 싶어요

손목시계는 오래된 관객을 끌고 테이블로 사라지고 있구요

몇 개의 가면이 스팩트럼처럼 겹쳐지고 있네요






굿바이 안녕하세요



설레임으로 들어갔지요

와인마을 보르드에

프로방스와 친구하고 싶었죠

포도알갱이에 올려진 이름들

드라이, 스위트, 토카이 등 알고 싶었어요

달콤하고 새콤한 이름들을 알고 싶었죠

라이트바다 씨

낯선 그대가 휘파람을 부네요

미디엄바디 씨

달콤하고 가볍게 떠다니고 싶었어요

폴바디바디 씨

향기에 취해서 왈츠를 추고 싶었죠

흔들리다 돌아선 내 꿈에서

재잘거리는 포도방울 눈물도 마시구요

마법이 풀렸나요

이빨 소리를 내지 마세요

잔 높이 들지도 말구요

향기가 노을처럼 쏟아지네요

입술 자국은 남기지 않겠죠

뜨거운 혀 속으로 얼음을 넣지 마세요

안개가 미열처럼 온몸으로 스며요

맨드라미 붉게 부풀어 오르는 와인마을

물갈퀴가 달린 손을 내밀어도 좋아요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붉은 혓바닥

그대 비누방울처럼 잔을 높이 띄우고

셀 위 댄스





다시 13월, 그가 있었네



내 몸속의 물길은 종종 어두운 강이다 가을이 빠져나간 등뼈 사이로 에스트로겐을 먹는다 한 여자가 빠져 나온다 토막 난 13월은 비냄새를 뿌리며 절뚝이기도 했지 별똥별은 떨어져 13월의 유리창을 통과하고 공중에 걸린 수면양말은 잠을 뿌리기도 했을 거야

13월이 고여 있는 수족관에선 네가 보낸 핫메일이 형용사로 떠돌아다니고 있었지? 오랜 기다림이 더 단단함을 키운다고? 가끔은 절정으로 차오를 때도 있었지 바람을 잔뜩 먹은 가을강은 내 깊숙한 물길 따라 뼈들이 흘러가고 있었어

빛이 없나 봐 연속으로 셔트를 눌러 봐 커텐자락에 찍혀있는 상처 줌렌즈로 풀었다가 당겼다 해 봐 닦을수록 붉게 번지는 통증, 상처에 뿌려지는 소금 같은 기억들 아프면 그냥 떠나가도 좋아

흔들리는 문장과 낡은 시집과 구부러진 볼펜은 땀으로 흘러내려 13월의 모니터엔 또 하루를 지워가는 나는 다시 태어나는 나이기도 했지

나보다도 더 빨리 뻥 뚫린 내 몸, 13월의 고여 있는 수족관에는 잡히지 않는 주파수가 들끓고 네가 보고 싶다는 말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사라져 가고 있었어 부드러운 혀로 말랑말랑한 공기를 부풀리고 있었지 도톰하게 만져지는 말들은 이젠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미안해, 사랑해



그렇게 날 노려보지 마 점잔을 빼면서 꼿꼿한 등뼈를 위해 먹어치운,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알고 있는 얼굴들이 비명을 질러대지 구멍 뚫린 뼈들을 위해 시침을 떼며 먹어치운 고양이 입마다 물고 있는 하얀 뼈들이 내 붉은 흉터를 들쑤시고 있어

울어 고양이가 울어 미친 듯 울어 노려보며 울어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고 심장마비로 죽은 고양이 지하실 쥐약 먹은 고양이 복병처럼 숨어서 내 뒤통수를 휘갈기다 머리통이 박살난 고양이 내가 죽인 아니 내 아버지 먹어치운 고양이들이 팽팽하게 울음주머니를 부풀리며 발톱을 톱날 같이 세우고 있어

도로에 널브러진 고양이 빠져 나온 눈알들이 나를 노려 봐 내 등뼈를 지탱하던 아버지의 뼈 나를 걷게 하던 어머니의 뼈 내 입속으로 들어와 몸속으로 퍼져나간 공명의 울음들 내 속에 우글우글,

몰라 저 고양이들

모르는 놈들이야 난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침을 퉤퉤 뱉었을 뿐이야 






던져봐, 럼주 쵸코렛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고양이 발자국처럼

금 가지 않는 말랑말랑한 사랑

사뿐사뿐 커튼자락 밑으로 미끄러지며

스며드는 재즈 아니,

사무치는 아리랑처럼

 

침샘은 마르지 않았고

거품처럼 녹아내리는 발렌타인데이

맆스틱을 바르고 빨간 하이힐을 신었지

리본을 뜯는 순간

녹아내리는

달콤한 눈물이 매달린 쵸코렛 대롱대롱

  





촛불을 켠 11시



벨벳 같은 어둠을 뜯는 순간

나는 내 안에 너는 내 안에

부드러운 입술과 달콤한 은유를 핥고 있는 

마법의 쎄레나데 럼주 쵸코렛

달콤한 악마가 내 속으로 흘러드네 

스트레스 명상법

가끔은 너를 해장국에다 말아 먹을까

내 광기 번뜩일 때 국물도 함께

허겁지겁 허기가 돌 때

뼈 사이사이 들어 있는 살점까지 파내며

맛있게 떠먹어 볼까

적막이 물컹거리는 내 영혼의 블랙홀

벌겋게 물든 골수도 파내어 봐야지

꿈틀거리는 저, 눈알

가슴에 엉켜있는 너를 곰삶아

자작하게 졸인 국물에다

시뻘건 총각무까지 얹어서 말이지

말초신경 하나가 덜컹거려도

괜찮아

자, 덤빌 테면 덤벼 보시지






옥시토신



나는 그녀의 달콤함을 먹어야 하네 동전이 필요해 나는 꽈리처럼 부푼 그녀 앞에 앉아 목질이 혓바닥 같은 쵸코릿이 되기 위해 무심한 척 롤렛을 돌리고 있었어 사랑의 묘약을 찾아가는 머신 앞에 얼굴을 파묻어 보았지 그 순간, 포옹의 물질이 혈청처럼 파고드는 풀뿌리를 발견했어 나는 많은 동전을 갖고 싶어 창문에 거꾸로 매달린 룰렛을 돌려야 해 하늘에 핀 곰팡이꽃을 생각했어 헛제사밥이 생각나는 허기진 날들이네 빨간 눈을 비비며 눈물을 자꾸 받아먹네 동전이 쏟아지고 내가 쏟아지고 아이디가 생각나지 않는 나를 전송하네 바이오 라듬을 타고 찌르르 흔들어 깨우는 동전이 필요해 나는 그녀와 함께 붉은 카펫을 밟아야 하네





욕지도*



늑대 혓바닥 같이 늘어진 섬을 떠 올렸네 툭툭 끊어지는 수평선에 밑줄을 긋고 연필로 덧칠 했던 기억을 생각하네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 당신, 바람이 불고 나는 잠들어 있었구요 당신의 속삭인 말들이 창밖 플래카드에서 혼자 펄럭이고 있던가요 파도에 떠밀려 천 리 만 리 날아갔던 말들, 지적이다, 지적 욕구다, 열망이다, 욕심이다 욕지도의 뜻말을 웅얼거리며 난 웅크린 한 마리 짐승 욕지도를 쓰다듬고 있었네 섬을 떠난 남자가 길 위의 여자를 업고 어디론가 흘러들 것 같은 욕지도, 지루한 이야기와 지적인 이야기와 음습한 이야기 틈새, 애써 유쾌한 척 무심한 척 인칭을 서로 바꾸어 불러 보기도 했지 섬과 섬 사이 꽃은 피고 벽 속에 갇힌 가파른 절벽은 프로펠러가 되기도 했던가 내가 욕, 이라고 입을 벌리면 대답 대신 입천장에 박힌 잔 이빨들이 제기럴, 지랄, 미친, 젠장 등등의 욕들을 바닥에 흥건히 뿌려 주기도 했다 모든 길은 바다가 아닌 어둠 속으로 길을 낸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또 누군가가 안경을 벗어두고 쉴 새 없이 두 눈알만 굴리고,


*욕지도:통영항에서 뱃길로 32km거리의 남해 쪽으로 위치한 섬. 해안이 푸른 숲으로 덮여있으며, 기암절벽과 갯바위,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과 함께 해안풍경이 아름다운 섬.






정직하다 나는, 사소한 운명에도



우리는 눈을 감은 채 비밀을 말하지 나는 부정적으로 말 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긍정적이진 않지만 찾았니? 책갈피 속에 숨은 엽서 말이야 녹색 자전거를 타는 여름이 오면 기억을 바퀴에 달아 줄 거야 당신은 나의 균형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면서 웃고 있어 나는 핸들을 잡은 척하며 칼날을 다듬지 나는 당신의 혈액형 따윈 궁금하질 않아 내 등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며 은밀하게 포장하지만 당신을 비추는 CCTV, 나 몰래 근사한 표정이라고 낄낄거릴지 모르지만 당신에 대한 그 부정문은 사라지지 않고 있거든 옆구리 지퍼를 열어 봐 호리병 속으로 일그러진 당신이 타오르네 나는 관리하지 정직한 비밀과 함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소문에 대하여, 사슴목처럼 우아하게 버튼을 누르며 목을 세워야 하거든 아직 두 눈을 감고 있어 부탁이야





시작메모

떠도는 물렁뼈를 위하여


한순간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일회성이 견딜 수 없어,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모래성을 쌓기 위해 떠도는 것은 아니었을까. 너무 많은 것을 모른 척하며 스쳐왔다 무심히 스쳐 지나친 것들에게 지금도 바람에 내 몸을 맡기며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떠도는 것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꿈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다시 꿈으로,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나를 가름할 수 없다. 눈치껏 흘리고 눈치껏 버렸던 부끄러움의 깊이도 알 수 없다. 황사가 몰아치고 황량한 모래풍경이 내 뼈 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모래가 날리다가 내 발끝에 쌓인다. 내 뼈는 모래조각처럼 부서지고 깨어져 흘러내린다. 아는 길도 휘돌아오고 길 끝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너무 멀리 흘러온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아득한 계단을 바라보면서 휘날리는 꽃잎들을 만져본다. 비릿한 냄새가 난다. 흙 한 줌의 온기조차 느낄 수 없는 계단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나는 무심하게 스쳐 지나온 것들에 대하여 하나씩 이름을 간절히 불러본다. 그의 이름을 불러놓고도 이내 지워버렸던 지난날들이…….

이름이 없어 더욱 황량한 모래의 길을 나는 걷는다 . 애초에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손을 내밀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버리지 못하고 보아야 할 것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발붙일 곳을 찾아 떠도는 영혼에게도 사죄하고 싶다. 떠돌아 다닌 내 길의 배경이 되어 주었던 메마른 풍경과 허허롭게 불던 내 마음의 뼈에게도 이제는 뜨겁게 달아오른 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

빈 집을 밝히는 소신공양이 되리라. 사라진 것 들을 불러 모아 내가 걸어온 모든 길과 스쳐 지나온 길들에게 다정한 이름을 붙여 주리라. 돌아보면 모두 한 순간 순간이 너무 소중했던 기억들에게.





C:\DOCUME~1\ADMINI~1\LOCALS~1\Temp\DRW000006284c04.gif |해설|

‘비밀’과 ‘소문’-‘거울놀이’의 무한 변전變轉

―하두자의 시세계

백인덕|시인





여성 안에는 언제나 최소한 약간의 좋은 모유가 늘 남아 있다. 여성은 흰 잉크로 글을 쓴다. -엘렌 식수.


1. 확장擴張인가, 순환循環인가?

단 하나의 시어, 즉 ‘거울’과 같은 상징을 출발점으로 해서 ‘정신분석적 해석’을 진행하는 것은 요즘의 ‘비평적 글쓰기’에서는 하나의 공식이 되었다. 덧붙여, ‘몸’과 관련된 ‘이미저리’가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한다면, 이는 곧바로 층위를 달리해 ‘여성적 글쓰기’라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연결된다. 물론 이런 작품들은 필자들의 부담을 한결 덜어주는 동시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도록 북돋는 효과까지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작품 외적인 요인들이 대상 작품들의 지평地平과 심도深度를 결정해주지는 못한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소재주의’의 변종일 뿐 오늘의 시의 현장, 전선戰線을 제대로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두자 시인의 신작 10편은 ‘집중조명’에 값하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며, 시적 고민의 치열성을 드러내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절반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고 나는 나의 절반을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어 백미러 속으로 이정표가 자꾸 사라지고 탁자 위에 제라늄은 한 눈금씩 말라가고 있지 당신은 벗어놓은 내 어깨를 지나 흘러내린 창틈으로 사라졌어

―「거울놀이」 부분 


비록 ‘놀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경쾌함’과 ‘긍정성’을 포장했지만, 이 ‘전투’의 실상은 참담하다. ‘놀이’가 즐거운 이유는 ‘규칙에의 자발적 참여’와 ‘가면의 착용’이 자연스럽게 허용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로제 카이와’였던가? 그러나 이 작품의 ‘놀이’는 ‘거울’이라는 강력한 전제 아래 구속되면서 그 ‘자발성’과 ‘자연스러움’을 상실한다. 이때 ‘놀이’는 ‘규칙이라는 이름의 억압’과 ‘가면이라는 허위의 그림자’들의 무대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자각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오늘의 ‘거울’이 ‘모니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은 층위를 바꿔, ‘여성적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기로 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은 여성을 분석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만을 위한 무대를 설치했다. 비약해서 말한다면 ‘모권제’를 폐기하고, ‘가부장제’를 인간적 자연의 기초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 ‘남성/여성’의 분할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적극성/수동성’이라는 대립을 확고히 했다. 이 작품의 ‘당신()’은 “당신의 절반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고” 있고, 그 와중에 ‘비늘’을 털어내고, ‘가시’를 밟고,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을 감내하는 ‘의지’적 인물이다. 반면에 ‘나’는 “나의 절반을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는데, 그 때는 “이정표가 사라지고”, “제라늄은 한 눈금씩 말라가”는 무의지적 순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 ‘계단/키보드’의 대립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남성/여성’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비한다. ‘계단’은 목표(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은 목표 없는 무상한 행위를 표상할 뿐이다.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봤자 ‘모니터’ 위에 아무 것도 새길 수 없다. ‘모니터’란 ‘흐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시인은 다른 작품에서 “흔들리는 문장과 낡은 시집과 구부러진 볼펜은 땀으로 흘러내려 13월의 모니터엔 또 하루/를 지워가는 나는 다시 태어나는 나이기도 했지”(「다시 13월, 그가 있었네」)라고 자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모니터’ 위에서 지워지고, 다시 태어나는 ‘나’는 진정한 ‘생성生成’의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 라깡식으로 얘기해서 ‘거울=모니터’의 단계, 즉 ‘상상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상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화자는 ‘문장’, ‘시집’, ‘볼펜’의 이미지로 구체화된 ‘언어의 세계’, 즉 ‘상징계’에서는 ‘땀’을 흘리는, 곤혹스러움과 마주하게 될 뿐이다.


내 몸속의 물길은 종종 어두운 강이다 가을이 빠져나간 등뼈 사이로 에스트로겐을 먹는다 한 여자가 빠져 나온다 토막 난 13월은 비냄새를 뿌리며 절뚝이기도 했지 별똥별은 떨어져 13월의 유리창을 통과하고 공중에 걸린 수면양말은 잠을 뿌리기도 했을 거야

13월이 고여 있는 수족관에선 네가 보낸 핫메일이 형용사로 떠돌아다니고 있었지? 오랜 기다림이 더 단단함을 키운다고? 가끔은 절정으로 차오를 때도 있었지 바람을 잔뜩 먹은 가을강은 내 깊숙한 물길 따라 뼈들이 흘러가고 있었어

―「다시 13월, 그가 있었네」 부분


구조적으로 정형화된 ‘남성-이성 중심주의’의 이분법에서 ‘감각적 지각’은 여성이 우세하고, 남성은 ‘이성적 인식’에 보다 적합한 존재로 그려진다. 단순하게 말하면, 여성은 ‘몸’의 존재고, 남성은 ‘정신’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몸’이라는 ‘물질적 표상’에 묶어 놓은 이유는 물론 남성이 여성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관념에 기반하고 있다. 감각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위험’하고, 너무나 ‘가변可變적’이므로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여성은 자신의 ‘몸’을 의식할 수는 있지만, ‘주체’가 될 수는 없다. 그 의식을 인식의 차원에서 관리, 조종하는 것은 언제나 ‘(거짓)타자’, 남성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정을 ‘13월’이라는 부재의 시간을 통해 보여준다. 거기에는 주체인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부재의 계절에는 계속적으로 ‘에스트로겐’을 먹어야 한다. 여자라는 자기 확인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서술어미의 변화에 의해, 외부에서 강요된 ‘여성’의 목소리와 내 ‘몸’인 나의 육성이 교묘하게 구분되어 있다. 육성은 “오랜 기다림이 더 단단함을 키운다고?”라는 부정의문문을 내 뱉는다. 그 기다림이란 것이 “닦을수록 붉게 번지는 통증, 상처에 뿌려지는 소금 같은 기억”의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뼈로’ 알아버렸기 때문에 시인은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몸’ 위에 새겨지는 그의 ‘기표’는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그녀는 알고 있다. 따라서 ‘놀이’는 상상계에 갇혀 ‘부재의 현현顯現’을 꿈꾸는 것이 아닌 ‘위반의 놀이’로 변질된다. 속이는 자들에게 속아주는 놀이, 속아줌으로써 속이는 자를 되레 속이는 전략적 ‘놀이’가 되는 것이다.


이리 떼가 마차를 끌고 가는 밤

유리창에 반사된 가면 속으로

당신의 심장이 툭툭 끊어지네요 

축축한 가면에 숨겨진 열 개의 거짓말

흘러드는 그림자는 누구의 얼굴인가요

한 장씩 열어 보고 싶어요

손목시계는 오래된 관객을 끌고 테이블로 사라지고 있구요

몇 개의 가면이 스펙트럼처럼 겹쳐지고 있네요

―「거울놀이」 부분


시인은 사실 이미 “축축한 가면에 숨겨진 열 개의 거짓말”을 알고 있다. 남성 콤플렉스의 대명사인 ‘거세 위협’은 경쟁자인 ‘아버지’나 욕망 대상인 ‘팔루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소한 ‘페니스’를 감추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남성의 뒤, 그림자에서 늘 지켜보고 있는 늙은 어머니로부터 온다. 부재, 상대가 없음 혹은 미지未知는 말 그대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과 같다. 아마도 시인이 알게 된 사실은 이런 것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가면’은 남성들로부터 강요된 ‘여성성’이라는 의미와 ‘불안’을 숨기기 위해 남성들이 뒤집어쓴 ‘가면’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스펙트럼처럼 겹쳐지고” 있는 ‘가면’들, ‘거짓말’ 속으로 흘러드는 ‘그림자’를 한 장씩 ‘열어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보다 먼저 필자가 궁금한 것은 ‘가면-그림자’들의 개별적 형상이다.

2. 길들여지기, 혹은 ‘유령’되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했다. 아니다, “여성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무엇으로, ‘유혹’과 ‘설득’을 통해서이다.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위협’은 직접적인 수단이라기보다는 최후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협’은 남성에게 더 효과적이다. 잘못하면 ‘여자처럼 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협박’ 아래 사내들은 오늘도 무의미하게, 무식하게 죽어나간다. 엘렌 식수는 여성을 길들이는, 또는 여성이 길들여짐을 내면화하게 되는 심리적 핵심 전략을 ‘반-나르시시즘’으로 정의했다. ‘반-나르시시즘’이란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사랑받도록 만듦으로써만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을 뜻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반-사랑’이다. 여성이 여성을 증오하도록 만들고, 오히려 ‘남성성’을 지향하거나 거기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불현듯 이마에 스치는 두 개의 입술

조각별로 부서지고 있다네

철지난 달력과 사소한 시집이

폭풍으로 별들이 아우성치고 있다네

너의 뒷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내 가슴을 태워버리기 위해

가물가물 한 줄기 연기로 흩어지고 있다네

―「불안에게 들키다」 부분


이 글의 방향이 ‘서정의 새로운 조명’ 정도였다면, 대표시처럼 다루어졌어야 할 작품이다. 이 시가 환기하는 정서는 “네 손 끝에 흔들리는 밤/내 눈물이 보이지 않는 밤”이라는 구절에서 확인되듯이 애틋한 ‘그리움’으로 읽힌다. ‘입술’, ‘별’, ‘시집’, ‘연기’ 등 사용된 시어도 모두 이러한 정서를 환기하는 서정적 어휘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시적 언술 전체를 감싸 안고 있는 「불안에게 들키다」라는 제목이다. 불안, 어떤? 우선 표면적으로 유추해 보면 “너의 뒤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내 가슴을  태워버리기 위해” 화자가 겪게 되는 이별의 ‘불안’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에게’라는 조사에 부딪쳐 중지된다. 위와 같은 이해라면 ‘-에게’보다는 ‘-을’이 문맥상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비약이 될 진 모르겠지만, 이 글의 방향과 결부시킨다면 이러한 작품을 쓰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자연스러움을 질적으로 다른 ‘자아’, 즉 ‘불안한 자아’에게 들켜버렸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하두자 시인은 ‘서정적 자아의 자연스러움’, 즉 ‘반-나르시시즘’을 벗어던지려는 의도를 언뜻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치열한 양상으로 접어들기 전에, 일상적인 ‘유혹’의 ‘혀’를 먼저 살펴보자.


설레임으로 들어갔지요

와인마을 보르드에

프로방스와 친구하고 싶었죠

포도알갱이에 올려진 이름들

드라이, 스위트, 토카이 등 알고 싶었어요

달콤하고 새콤한 이름들을 알고 싶었죠

―「굿바이 안녕하세요」 부분


안정된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유혹하는 대상(타자)’이면서 동시에 ‘유혹해야 할 대상(객체)’이 된다. 이를 위한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여성’을 ‘소비의 주체’로 호명하고, 그 위상에 걸맞게 각종 ‘기호’의 ‘마법’을 동원한다. ‘라이트바디’, ‘미디엄바디’, ‘풀바디바디’ 씨 등을 만나는 ‘빈티지 마법’을 통해, ‘미각’의 행복이 마치 ‘전존재’의 행복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는 ‘럼주 초콜릿’을 감미하는 ‘발렌타인 데이’(「던져봐, 럼주 초콜릿」) 따위의 축제일을 통해 일상적 범주 안에 단단히 묶어놓는 것이다. 시인이 그려낸 이런 ‘유혹’의 양상은 너무 실제적이어서 ‘시’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일반화 되었다는 의미이리라. 앞서 언급한 ‘길들이기’의 두 가지 전략 중에서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그러므로 좀 더 심각한 병증病症이 바로 ‘설득’이라는 전략이다. 윽박지르기, 달래기, 고무하기, 깎아내리기, 모호하게 하기, 재확인시키기 등등. 따라서 이 방법은 ‘몸의 욕구’라는 물질-심리적 층위가 아닌 ‘자기 인식’이라는 언어-인식적 층위에서 사용하고, 그만큼 은밀하면서도 집요하다. 시인이 이러한 ‘사실’에 대한 자각을 표면에 ‘노출’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시적 지평의 확장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늑대 혓바닥같이 늘어진 섬을 떠 올렸네 툭툭 끊어지는 수평선에 밑줄을 긋고 연필로 덧칠 했던 기억을 생각하네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 당신, 바람이 불고 나는 잠들어 있었구요 당신의 속삭인 말들이 창밖 플래카드에서 혼자 펄럭이고 있던가요 파도에 떠밀려 천 리 만 리 날아갔던 말들, 지적이다, 지적욕구다, 열망이다, 욕심이다 욕지도의 뜻말을 웅얼거리며 난 웅크린 한 마리 짐승 욕지도를 쓰다듬고 있었네 섬을 떠난 남자가 길 위의 여자를 업고 어디론가 흘러들 것 같은 욕지도,

―「욕지도」 부분


이번에 접하게 된 하두자 시인의 신작들의 형식적 특징 두 가지를 이쯤에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특징들이 어떤 ‘기획’ 아래 제작된 것이고, 이러한 제작이 시인 개인의 시적 지평을 확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시단의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바람직한 작업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제목과 내용’과의 관계가 매우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위 ‘서정시’의 ‘제목’ 남용이 심각할 때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리라. 또 하나는 시적 언술에서 ‘남성-문어체/여성-구어체’의 구분이 비교적 선명하다는 점이다. ‘몸의 말’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여성적 글쓰기’의 가장 큰 자산資産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 작품도 이러한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천 리 만 리 날아갔던 말”의 존재고, 화자인 ‘나’는 ‘잠들어’ 있었던 ‘몸’의 존재, 그래서 “웅크린 한 마리 짐승 욕지도를 쓰다듬”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즉, 당신의 ‘지적’인 ‘설득’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내가 욕, 이라고 입을 벌리면 대답대신 입천장에 박힌 잔 이빨들이 제기럴, 지랄, 미친, 젠장 등등의 욕들을 바닥에 흥건히 뿌려 주기도 했다”는 시적 진술을 통해 극적으로 확인된다.

글이 너무 앞서 나가버렸지만, ‘길들이기 전략’의 일환으로서 ‘설득’은 가까운 ‘인칭’에서 시작되고 뿌리내리게 된다. 그것은 교회나 학교, 또래 집단이나 사회적 위계에서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의 “도로에 널브러진 고양이 빠져 나온 눈알들이 나를 노려봐 내 등뼈를 지탱하던 아버지의 뼈/ 나를 걷게 하던 어머니의 뼈 내 입속으로 들어와 몸속으로 퍼져나간 공명의 울음들 내/ 속에 우굴 우굴,”(「사랑해, 미안해」)과 같은 구절은 시인의 인식의 ‘치열성과 진정성’을 드러내는 단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3. 최후의 ‘저격수’를 위하여

더 이상 ‘시의 위상位相’을 말하는 것은 서글픈 정도를 지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일이 될 것이다. 저 신들의 시대에 ‘예언자’에서 내려와 계몽의 ‘전도사’를 자처했다가,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감 때문에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마저 밀려나, 이제는 ‘히스테리’ 사례분석에나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는 존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연대’해야 한다. “어떤 혁명도 순전히 개인적인 독창성의 결과는 아니다. 그런 독창성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는 광기이다”라는 존 버거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참담한 전선戰線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필자는 ‘저격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간혹 든다. 좌, 우, 뒤 어느 방향에도 우군은 없는, 퇴로마저 없는 ‘위치’에서 오직 전방으로만 총구를 겨눠야 하는 ‘저격수’. 굳이 묻는다면, 어느 위치에서? ‘비밀’과 ‘소문’ 사이, “등뼈를 꼿꼿히 세우고/침을 퉤퉤 뱉”(「미안해, 사랑해」)는 자세로 잔뜩 웅크려 빛과 어둠에 번갈아 시달리는. 같은 상황을 다른 ‘버전’으로 하두자 시인은 이렇게(시인, 또는 그 어떤 층위로 생각해도 무방한) 노래했다. “나는 관리하지 정직한 비밀과 함께 정체를/드러내지 않는 소문에 대하여”, 그리고 “핸들을 잡은 척 하며 칼날을 다듬지 나는 당신의 혈액형 따윈 궁금하질 않”다고. ‘길’을 보았으니, ‘걸어가거나’, ‘기어가거나’ 매 한 가지일 것이다. 앞 인용 구절들의 시 ‘전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사소한 운명임에도 정직하지 못했던” 이 글의 끝맺음을 대신한다.


우리는 눈을 감은 채 비밀을 말하지 나는 부정적으로 말 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긍정적이진 않지만 찾았니? 책갈피 속에 숨은 엽서 말이야 녹색 자전거를 타는 여름이 오면 기억을 바퀴에 달아 줄 거야 당신은 나의 균형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면서 웃고 있어 나는 핸들을 잡은 척하며 칼날을 다듬지 나는 당신의 혈액형 따윈 궁금하질 않아 내 등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며 은밀하게 포장하지만 당신을 비추는 CCTV, 나 몰래 근사한 표정이라고 낄낄거릴지 모르지만 당신에 대한 그 부정문은 사라지지 않고 있거든 옆구리 지퍼를 열어봐 호리병 속으로 일그러진 당신이 타 오르네 나는 관리하지 정직한 비밀과 함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소문에 대하여, 사슴 목처럼 우아하게 버튼을 누르며 목을 세워야 하거든 아직 두 눈을 감고 있어 부탁이야

C:\DOCUME~1\ADMINI~1\LOCALS~1\Temp\Hnc\BinData\EMB000006284c02.jpg ―「정직하다 나는 사소한 운명에도」 전문



백인덕∙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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