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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수첩, 알래스카 외 1편/서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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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정
수첩, 알래스카 외 1편
빨간 불, 미나리 사러 가다 은행 앞 계단에 걸터앉았더니
신호등 건너편엔
웬 여전사가 갈기처럼 검은 머릿칼을 날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며 십자로 둘러맨 가방
생활과 꿈이 동시에 똘똘 뭉쳐진 듯 표정이 하도 당차선
어디 알래스카에 혼자 빈손으로 떨어트려 놓아도
곰을 잡아 팔아 당장 냉장고라도 지고 올 것만 같다
푸른 불이 켜지고 횡단보도를 물씬물씬 건너온다
배고플 때 기다리던 짜장면 곱빼기가 저만 하였을까
아파트 단지에서 장애아들을 보살펴 주는 아가씨다
치렁치렁 막 감아 덜 마른 머릿결에서 풍기는
성에꽃 향기 따라 엉거주춤 일어서다
갑자기 골이 띵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람도 산을 넘을 땐 방향을 조금씩 다치기도 하는 걸
도대체 심판이 없는
수급과 백수의 나날, 날 좀 봐요 하마터면 부를 뻔 했다
창천蒼天
놓아버리지, 왜 지는 꽃잎을 붙들고 늘어지는 거니
꽃잎은 바람을 세지 않듯, 한 꽃잎이 지고
두 꽃잎 세 꽃잎 몸서리치는 전율을 따라 가
외상도 거래이듯 그저 한 목숨 떠밀려 가야 하는 것이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한물간 장단에 꿍짝 맞추며 아싸 아싸라비야
살과 뼈를 깎아도 시원치 않을 우리 삶이 쳐진 자리
저렇게 복받쳐 복받쳐서 흩날리는
벚꽃은, 꽃이 아니라 아득한 깊이다
초극이 아니라면 꿈도 사랑도 없는 걸
바닥에 주저앉아 꽃 사태로 얼버무린 처사가 슬퍼
일렁일렁 얼비친 저 벚꽃나무 위 창천으로 나는 가야만 해
다 걷지 못한
지상의 노래를 절고 또 절며 구부야 구부구부 구구 만 리
서규정∙ 1991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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