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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블라인드의 생 외 1편/이향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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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란
블라인드의 생 외 1편
딱딱한 생의 이면을 흔드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다
바깥으로부터 흘러들어와 번지는 온기, 그리고 다양한 색들의 너울거림, 번짐
노란 빛으로 떠오르다 순식간에 뒤척이며 붉게 물들이는 것
그러다가, 영영 무색의 얼굴로 굳어버리기까지
밖의 메신저는 눈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흰색에서 검은 색이 스멀스멀 흐르고
검은 색은 지지 않는 꽃을 태우며 휘감고 돌 때,
울어대는 몸의 곁으로 지나가는 바람
울리고 사라지는 몹쓸 이름 속엔 그 바람이 꼭 들어있다
진정한 몸의 통곡을 엿보려는 듯이
목을 매고도 누군가에 의해 계속 이끌리는 생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더욱 추워지는 생
공중 부양하며 허허로이 웃는 생生, 생生, 생生
나의 이름 뒤엔 항상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잘못 들어선 길을 빠져나오려 해도 이미 걸어온 길이 꽉 물고 서있는
저 편 어딘가에만 무게를 더하는 내 생의 추錘
볼 수 없는 그 곳을 위해
바람과 햇빛은 별의 언어를 흩뿌린다 무수히 빛나는
귀 기울이고 듣는 저 편의 심장소리
어쩌면 내 생은 가장 자유로운 날개로 솟구치는 지도 모르겠다
슬픔을 나르는 사다리차
이사를 간다
몸 안에서 쩌르르 돌며 점점 말라가던 슬픔이
세상의 찬바람에 신음하던 눈물이
눅눅한 지난 순간들을 포장해
보이지 않는, 만져지지 않는 세상으로 옮겨 간다
오로지 지상으로만 올려 보냈던 애절한 기원들
그 안개를 헤집고 굉음의 울부짖음을 뿌리며
먼먼 곳으로 떠나가는 물기들
제 안에 담지 못할 만큼 무거워진 슬픔의 무게
먼먼 마음의 오지에서 서서히 비어가는 집을 바라보니
오갈 데 없이 비행하던 바람이 이끌려나오고
찬 공기가 꼬리를 감추고
벌레에 물린 사과가 썩어가고 있다
어디든 가다보면 속삭임이 피어날지 몰라
가장 슬프다던 눈물은 가장 기쁜 웃음으로 다가와 손 내밀지 몰라
구멍 난 허공을 숨 가쁘게 버티고 서있는 저 사다리차는
언제 한 아름의 기쁨을 하강시킬 수 있을까
이향란∙강원도 양양 출생. 1993년 등단. 시집 '안개 詩', '슬픔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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