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7호(2010년/봄) 신작시/저만치 외 1편/양태의
페이지 정보

본문
양태의
저만치 외 1편
그랬다
그림 같은 시인의 집, 검정개 순둥이는
저만치에서 기다려주었다
저만치에서 꼬리쳐주고 저만치에서 컹컹 울어주고 저만치에서 길길이 뛰어주고 쫑긋 귀를 세워 저만치를 지켜주면서 스스로 저만치가 되어갔다
우리가 다가가면 이만치 반가웠고 우리가 다가가야 이만치를 핥아대어서, 우리가 더 다가가서 이만치가 되어야 했는데
저만치에서 꿈길에 들고 잠을 깨고, 저만치에서 밥을 먹고 오줌똥을 가리고, 저만치에서 앉고 서고 걷고, 저만치에 목이 메어 저만치만 맴돌다가 날 저물어, 저도 늙고 달무리 아련히 병을 받아들이며, 바람을 뒤적였다
미지근한 노구를 이만치 끌어와, 대처 큰 병원 찾아간 지 사흘 만에, 싸늘하게 식어 돌아와 시인의 가슴속 언덕위의 구름 한 장, 저만치 펴, 뉘였나니
왔던 길이 때때로 두 팔 벌려 반기는 ‘와락’이었고
간 길 망연히 눈 감은 ‘자실自失’이더라도
그래, 잘 자라
말끄러미 손에 잡힐 듯 어른대는 이만치와
발길 돌려 아득해지는 멀찌감치 사이, 저 저만치
갑바도기아
모르지요
월아천 건너 명사산 울음 삼키는 타클라마칸 어디
무릎 꺾고 주저앉는 모래바람은 아니었는지
한반도 강마을 벼랑바위에 암각화 새기던 돌짜개질 같은 거,
혹은 저쪽 알타미라 동굴 벽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던
들소의 뜀박질은 아니었는지
창칼은 잔인하고 말씀은 혹독하여서
살벌한 추위 속 쫓기는 심념 하나로
여기 좋은 말馬이 있다는 장군의 포도밭에 이르렀어요
나 당도하기 전, 뾰족 바위 숭숭 뚫은 임대아파트는
비둘기들에게 동나고
깊은 우물, 지하도시는 피난 내려온 초저층 어둠들이 문을 잠가
나는 보이지 않는 곳, 요정의 굴뚝에 새 신전을 파는
한 마리 개미가 되어가고 있어요
요술나라 이야기처럼 신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상천외한 풍경에 화들짝 놀랄지 모르지만
일상은 여전히 헉헉대는 헐떡거림뿐인 걸요
해 지는 중앙 고원에 올라오는 낙타들의 그림자와
습습한 바람이 아니었다면
칠흑의 밤 우뚝 불뚝 솟은 삿갓지붕 위로 빗금 그어주는
푸른 별빛이 아니었다면
세상천지에 어매! 일출이 엎질러놓는 불바다
그 황홀한 불씨만 아니었다면
신실하고 충직한 청지기가 아니어서 나는
칙칙한 절벽 어지러이 괴발개발이나 끼적거리며
당신의 초상이라 우겨대고 있어요
미안해요
양태의∙2002년 시집 <어오러지어오러지>로 문단 활동 시작. 시집 <이명耳鳴>.
- 이전글37호(2010년/봄) 신작시/저녁에 문득 외 1편/진해령 10.08.18
- 다음글37호(2010년/봄) 신작시/무적의 스파링 파트너 외 1편/김중일 10.08.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