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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인상(수필부문)/비가 오는 날의 기억/박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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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인상(수필부문)
박예송
비가 오는 날의 기억
저녁 무렵 퇴근 준비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공부를 함께하고 있는 동생이었다. 어? 웬일이니, 잘 계시죠? 응. 나야 뭐 그렇지. 누님 놀라지 마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예, 상희 형이 사고가 생겼어요. 웬 사고? 교통사고요. 떠났어요. 너무 놀란 가슴이 마구 쿵쾅대고 있었다. 떠나? 죽었어? 어디야? 강화 가는 길목요, ○○○ 장례식장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덜컥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2005년 봄,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이십여 년이 훌쩍 넘은 다음에야 나는 다시 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직원이래야 너덧 명도 안 되는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나는 너무 많이 내 자신에게 답답했다. 주먹구구식의 단순한 경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렇게 무료하게 보낸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다시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면서 별다른 성과도 없이 세월만 흘러갔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이 답답함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답답함에서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 달라 할 수도 없었다. 어쩌다 누군가가 한 수 지도해주기도 했으나, 내 영역과는 다른 이의 조언이라서 내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 풀 길이 없어 경영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방송통신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에 필요한 서류는 성적증명서 그리고 생활기록부였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이가 많아 합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은 일반 직장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영업자였다. 뒤늦게 공부를 해보겠다고 나섰으니 나와 비슷한 크기의 종류의 돌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만나는 순간부터 우리들의 마음은 활짝 열렸으며, 같은 학번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따라 누님, 형님, 동생으로 깎듯이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어울려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중 나는 나이가 제일 많은 탓에 열심히 사는 동생들에게 누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덩치가 산만한 동생들이었으나 내 앞에서는 모두 양순한 양처럼 온순했다.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해왔지만 그렇게 좋은 대접을 받은 자리는 없었다. 그런 생활은 나를 모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 중 유난히 나를 잘 따르던 동생이 있었다. 그는 외모는 비록 산적처럼 거칠게 생겼지만 그런 외모에 비해 마음은 너무나 약하고 따뜻했다. 그래서 누가 보아도 어떤 여자가 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 멋진 녀석이었다. 머리는 부드럽게 파마를 했으며, 웃을 때에는 잇몸이 모조리 드러나 보였는데, 작고 고르게 난 그 이는 덩치에는 좀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웃을 때에는 어린아이가 웃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 녀석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유난히 나를 잘 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고향이 같다는 점이 편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하나 있다면 그가 자신의 집안에서는 늦둥이 막내이다보니 나이 차이가 많은 친형 친누나보다 내가 좀 편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건 내 생각이다. 그에게 물어본 적은 없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힘이 드는 사업에 대한 푸념이 늘어갔다. 혼기를 넘긴 나이 때문에 좋은 아내감을 찾지 못해 힘들어했다. 이런저런 복잡하고 어려운 사업과 생활의 이유들이 그를 좀체로 편하게 놓아두지 않는 듯했다. 나 역시도 생각보다 사업이 녹록지 않은 상태에 바쁘기만 한 처지여서 대화 상대로조차도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처음 입학 했을 때 만났던 동생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졸업학년이 되었을 때 남아있는 사람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도 마지막 학년 봄학기를 끝내 등록하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았다. 뻔한 대답이 나올 것이고, 그것은 그에게 아픔만 더 곱씹도록 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그가 사전 연락도 없이 점심시간에 사무실에 찾아왔다. 그날따라 나는 점심식사를 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거래처에 일들이 밀려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왔느냐 말 한마디 던지고 납품할 물건 챙기느라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나의 하는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누나, 그냥 지나가다 얼굴이나 보려고 왔어요. 응, 그런데 어쩌지, 누나가 많이 바쁜데……. 얼굴 봤으니까 갈게요. 응, 그래, 다음에 보자.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인사가 되고 말았다. 점심이나 들었느냐 물어볼 걸,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전화연락도 없이 왜 왔을까? 전화를 걸어봐야지. 잠시 생각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나는 급한 일 처리하느라 잊고 말았다. 그리고 겨우 며칠이 지났는데 사고 소식이라니. 며칠 전 그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4년 동안 그와의 즐거웠던 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부리나케 장례식장으로 향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내 손을 붙잡으며 누군가가 울부짖었다. 상희오빠 죽은 게 맞아요? 전광판에 이름이 나왔네요. 돌매로 아무리 때려도 쓰러질 것 같지 않았던 그의 이름이 전광판에 故자를 달고 지나간다. 이미 도착한 동생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가야 하는 지도 잊고 있었다. 동기들 뿐만이 아니라 벌써 위아래 선후배들이 장례식장을 꽉 메우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보다 그는 훨씬 더 따뜻하고 의리가 있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를 실은 영구차는 부평 화장장으로 향했다. 그날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많은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다. 떠나는 그를 위한 기도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이름과 함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는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배웅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떠날 것을 미리 알았는지 며칠 전 문득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사진관엘 들렀다는데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말았다. 사진 속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 고여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그에게 물었다. 서른아홉 해 살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니? 그렇게 견디기 힘들 정도였니?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갈 길을 이렇게 빠르게 가야 하겠니? 그 날 이후 그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실없이 전화번호를 눌러보기도 했지만 익숙한 컬러링만이 귀 안을 맴돌다가 나가버렸다.
그가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다. 내가 이렇게 그를 기억하고 잊지 못하는 것을 그는 알까? 오늘도 부평의 납골당 천마총을 지키고 있는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오늘도 그가 보고 싶다.
당선 소감
고향 서검도의 아름다운 정취가 잊혀지지 않아
방문을 열면 듬성듬성 소나무가 서있는 부드러운 비탈 사이로 바다는 언제나 잔잔했다. 저녁 무렵 굴뚝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날 때 쯤 바다 저 멀리 흡사 신발짝 모양을 한 배가 서서히 섬을 향해 다가왔다. 밭두렁의 냉이는 된장과 함께 버물려 뚝배기 속으로 잠기고 가마솥에서는 숭어 냄새가 연기와 함께 피어오른다. 구수한 냄새가 솔솔 부엌문을 나서면 집으로 들어오는 발길이 구름 위를 걷는다. 나도 구름 위를 걷는다.
나의 일에 항상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신 동인들과 지도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당선자 박예송
추천평
열려 있는 눈과 가슴
산문 역시 자연스럽고 소박한 것이 좋다. 인생이 단순할진대 글이 어려울 필요는 없다. 복잡한 인간이 표현하는 세계는 무한대이나 아무리 복잡한 세계라도 결국에는 단순한 종결로 마감된다. 주변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따뜻하다. 문학의 소명이 무엇이든간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칼끝은 날카로움이 아니라 무딤으로 다져진 넉넉함과 따뜻함이다. 문명과 경제 발전의 찬란하고 황홀한 시대에 와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따뜻한 본연의 인간성으로 돌아가고자 애를 쓴다. 꾸밈도 없고, 가감도 없이 세상을 향하여 열려있는 눈과 가슴, 그리고 우리가 찾아야 하고 가꾸어가야 할 분명한 우리의 정신적 고향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찬사를 드린다. /추천위원 장종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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