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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산문/비운의 영화인이 부른 밤하늘의 부르스/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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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김영식의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은 근현대 인물사
비운의 영화인이 부른
「밤하늘의 부르스」
-영화감독 노필
망우리공원에 쓸쓸히 잠든 영화감독 노필(盧泌 1927~1966). 60년대의 대표적 음악영화 「밤하늘의 부르스」(1966)로 흥행에 성공하여 음악영화의 1인자로 불렸지만 그는 세 달 후 빚더미에 목이 졸려 세상을 버렸다. 당시 영화계의 구조적 모순과 불운한 자신의 삶을 향해 마지막 ‘컷’을 외친 노필 감독. 그를 비롯하여 많은 영화계 선배들의 비참한 종말이 지금 세계적인 한국 영화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누가 의심하리.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의 기억이 있는가. 혹은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의 트럼펫 소리가 기억나는가. 노필 감독의 영화 「밤하늘의 부르스」가 내 어릴 적의 어렴풋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소년의 여름 밤, 잠결에 뒷산에서 가끔 들려오던 애잔한 트럼펫 소리가 오랜 세월의 간격을 넘어 들려온다. 소리와 멜로디는 잊었지만 아련한 그때의 느낌이 들려온다고 해야 하나. 어느 밤에는 산을 오르는 트럼펫의 주인공인 청년을 발견하여 무턱대고 “아저씨, 같이 가요.” 하며 따라갔다. 바위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향해 트럼펫을 불던 그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노필 감독과 오버랩 된다.
트럼펫곡 「밤하늘의 부르스(Wonderland by Night)」는 심야의 음악방송 시그널에도 많이 쓰여 귀에 익숙하다. 이 곡명을 따서 만들어진 노필 감독의 「밤하늘의 부르스」는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성행했던 극장쇼의 면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가수와 코미디언, 그리고 무용단이 나오는 버라이어티쇼가, 탄탄한 멜로드라마와 함께 엮어져 ‘세미뮤지컬’이라고 불렸다. 이 작품은 현재 필름이 남아 있는 노필 감독의 유일한 대표작으로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혹은 영상자료원 인터넷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상수(최무룡)와 유미(이빈화)는 ‘원앙새 콤비’로 불리는 인기 듀엣. 유미는 상수를 사랑하지만 상수의 마음에는 유미의 이종사촌동생 경희(태현실)가 있고, 소속사(레코드사) 사장이며 나이트클럽 오너인 손 사장(박암)은 자기 클럽에서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희를 반지 선물로 유혹하지만 경희 또한 오로지 상수뿐이다. 상수는 사실 유미의 인기에 얹힌 파트너이므로 현실을 생각한다면 유미를 떠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현실적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순수한 사랑으로 상수와 경희는 결혼한다.
경희를 상수에게 빼앗긴 손 사장은 듀엣을 해산시키고 유미를 유혹한다. 유미 또한 실연의 아픔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손사장과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바로 그날, 택시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던 상수와 경희는 손 사장 사주에 의한 교통사고를 당한다. 경희는 가슴을 크게 다쳐 의사로부터 부부관계를 하지마라는 말을 듣는다.
생활이 어려워진 상수는 솔로로 나서기 위해 신곡을 취입하려는데 그 또한 교통사고의 여파로 노래 실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듣고, 또 손사장의 방해로 가요계에서 따돌림을 받아 간신히 지방 극장 무대에 서게 된다. 그러나 상수가 지방 무대에서 부르는 ‘좋은’ 팝송은 지방 관객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지방 무대에서 상수가 차분하게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부르자 관객은 집어치우라고 야유를 보낸다. 도중 퇴장을 당한 상수는 극장 사장에게 돈도 못 받고 모욕을 당한다. 그 장면을 우연히 훔쳐보게 된 경희는 상수의 장래를 위해 몰래 곁을 떠날 결심을 한다.
그때 파리에서 1년 만에 돌아와 컴백한 유미는 더욱 세련된 자태로 예전의 인기를 얻고 있는데, 경희는 유미를 찾아가 마음에도 없이 ‘지지리 못난 남편 지긋지긋하다’고 상수 욕을 하고, 상수에게는 다시 유미와 함께 듀엣 가수로 나서길 권한다.
유미도 경희에게 ‘버림받은’ 상수를 구하고자 자신의 높은 인기를 이용해 일류악단을 통해 상수를 끌어당기자 상수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유미와 재결합한다. 듀엣으로 새 출발이 결정된 그날 밤, 경희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거짓말을 하며 상수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다음날 상수가 부산 공연을 위해 떠난 후 경희는 편지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상수가 경희를 찾아 친정오빠(허장강)의 목장에 왔지만 오빠는 모른다며 돌려보낸다. 상수가 떠난 후 숨어서 지켜보던 경희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상수가 떠난 기차역으로 달려가지만 기차는 기적 소리를 울리며 저만치 떠나간다. 철로에 서서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오열하는 경희, 그녀 뒤로 한없이 뻗은 철로,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프게 아름다운 씬이 아닐까.
경희가 상수를 떠난 것은 결핵성 늑막염이 악화되어 몇 달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한동안 오빠 목장에서 요양하던 경희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상수와 유미 듀엣이 방송국 개국 3주년 기념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할 노래를 공모한다는 말을 듣는다. 경희는 상수에게 줄 마지막 선물, 그리고 자신이 받을 마지막 선물로써 노래를 작곡한다.
결혼 전에 상수가 지어서 들려준 가사에 곡을 붙인 악보는 죽음의 막바지에 가까스로 조카 손에 들려 방송국 개국 3주년 쇼에서 이제 막 노래를 부르려는 상수에게 전달된다. ‘경희 고모가 위독하니 죽기 전에 노래를 들려 달라’는 조카의 말에, 상수는 라디오를 통해 경희에게 죽지 말라고 곧 간다는 말을 하고 경희가 작곡한 노래 「밤하늘의 부르스」를 부른다. 경희는 병석에 누운 채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 숨을 거둔다.
적막이 스미는 밤하늘에
트럼펫 메아리 퍼지네
내 사랑 그대 고이 잠자라
저 멀리 떨어진 그대
포근히 잠들어라……
‘착한 영화인’의 ‘꿈은 사라지고’
이 영화에는 많은 인기 연예인이 ‘특별출연’ 했다. 이미자, 유주용, 위키리, 안성희, 남일해, 이금희, 조애희, 쟈니 브라더스, 박재란 등 당대 최고인기가수가 극중에 노래를 불렀고, 코미디언 서영춘(조연) 외에도 이기동, 남보원, 후라이보이(곽규석) 등이 사회자나 막간 쇼맨으로 나왔으며, 박춘석과 그 악단, 보난자 악단, 워커힐 악단, 이기송과 그 악단 등 당시 최고의 악단들이 번갈아 출연하였고, 워커힐 댄싱팀도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최무룡와 이빈화의 노래는 진송남과 권혜경이 대신 불렀다.
최초의 음악영화는 유동일 감독 가수 현인 출연의 「푸른 언덕」(1949)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나 혼자만이」(1958)를 만든 한형모가 본격적 장르의 개척자로 인정받았는데, 노필의 「꿈은 사라지고」(1959. 최초의 권투영화), 「사랑은 흘러가도」(1959)가 그 뒤를 이었고, 마침내 1966년에 개봉된 「밤하늘의 부르스」의 성공으로 노필은 음악영화의 1인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노필 감독은 석 달 후인 7월 29일 새벽 삼청공원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많은 정성을 들여 만든 「밤하늘의 부르스」가 4월 3일부터 20일까지 17일간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8만 6천명의 관객을 모았는데(지방은 통계 자료가 없다), 당시 흑백영화는 5만명선, 컬러영화는 8만명선의 개봉극장 관객을 모으면 적자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언제나 노필 감독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친하게 지냈던 주연배우 최무룡도 “흥행엔 성공한 것이라 돈을 모은 줄 알았는데……”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많은 영화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노필은 1927년 서울 화동에서 부잣집 4대 독자로 태어나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연세대 국문과를 다니다, 23세 때 「안창남비행사」(1949)로 영화계에 데뷰했다. 39세로 생의 막을 내릴 때까지 17년간 30여 편을 만들었고 대표작은 「꿈이여 다시 한 번」, 「꿈은 사라지고」, 「심야의 고백」, 「밤하늘의 부르스」 등이다. 비교적 양심적인 작품 활동을 고집한 그는 주로 음악영화나 멜로물을 만들었는데 한때는 제작자에게 잘 팔리는 감독이었으나 흥행 위주의 작품을 거부하며 제작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고, 더구나 그가 30대의 젊은 감독 김수용, 강대진, 김기덕 등 11인과 함께 순수예술영화 활동을 기치로 내건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하자, 제작자는 더욱 노필을 멀리하게 되었다.
가난한 감독 노필. 그는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기 돈으로 조감독을 장가보낸 일도 있는 인정 깊은 사람이었다. 평소 ‘차분한’ 음악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트럼펫곡 「Broken Promise」를 내세운 「검은 상처의 부르스’」964)와, 뒤이은 「애수의 밤」(1965)의 실패로 더 이상 제작자의 연출 의뢰가 들어오지 않자, 노필은 영화에의 열정을 불태울 곳이 없어 감독으로서는 외도 혹은 모험이라는 제작에 직접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아 처음으로 제작에 손댄 영화 「밤하늘의 부르스」는 화려한 출연진과 코미디의 혼합 등으로 흥행성도 가미되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 남은 돈은 단돈 80원(당시 설렁탕 한 그릇 값)뿐이었고 그가 진 빚은 갚을 수 있는 전망이 보이지 않아 죽음을 택하게 만들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관치 영화법의 부작용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영화법은 일정한 규모를 갖춘 영화사에게만 허가를 내주었기에 노필과 같은 군소영화업자는 높은 수수료(속칭 화명료畵名料)와 시설 사용료를 내면서 어쩔 수 없이 허가영화사의 이름과 세트장을 빌렸다.
통상 화명료가 30만 원선인데 「밤하늘의 부르스」는 어쩐 일인지 50만 원으로 계약되었고(더군다나 영수증도 받지 못하는 돈), 지방 흥행사와의 계약 미스로 50만 원의 손해를 보았으며, 더구나 경영비의 예산 오버로 150만 원의 출혈이 있었다고 한다. 빚의 규모에 관해서는 설說이 분분하지만 대중잡지 <로맨스>(1966.10)는 이 영화로 노필이 ‘백만 원의 빚만 안게 되었고 급한 빚 20만원 때문에 고민하다 저승길을 택했다’고 했고, ≪영화잡지≫는 ‘표면적으로는 50만원이지만 배후에는 훨씬 더 많은 3,4백만 원의 빚을 짊어졌다는 얘기가 타당할 것’이라 하였다.
제작과 비즈니스 경험이 없는 예술가가 영화법이라는 핸디캡을 안고서 인간성 부재의 냉혹한 자본 및 도박의 세계에 뛰어들었으니 그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죽음은 군소영화업자의 고민을 처절하게 대변한 것이었다.
노필은 죽기 며칠 전 ‘여보! 내가 없어도 저 애들 삼형제를 당신 힘으로 기를 수 있겠지?’라는 말을 하여 부인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남편은 평소 착실하고 차분한 성격에 집에서는 바깥의 고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 차마 자살이라는 엄청난 결과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노필은 집을 찾는 채권자를 피해 집을 나가 전전하는 날이 많았는데 불쑥 하루 전에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는 ‘벗은 옷 빨 필요 없다’는 말을 던지고 쫓기듯 집을 나간 다음날(29일) 오후, 부인은 남편이 삼청공원의 숲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삼청공원은 경기중학 시절 노필이 영화의 꿈을 키우던 곳. ‘꿈이 사라진’ 예술가는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일까. 그는 피우다만 파고다 담배 한 갑과 라이터, 그리고 장례비로 쓰라며 시계를 판 돈 3,600원을 호주머니에 남겼다. 그리고 그는 죽은 후의 모습이 흉하지 않도록 감독다운 계산으로 위치를 잡아 두 발을 곱게 땅에 디디고 서 있었다고 한다.
유서는 두 장을 남겼는데, 채권자와 지인들 앞으로는 구구절절 ‘미안하다, 죄송하다, 용서해 달라’는 말이, 그리고 후에 부인 앞으로 우편으로 발송된 유서에는 ‘……내가 있음으로 오히려 집 한 칸 있는 것마저 날라 갈 지경이니 차라리 내 한 목숨 죽음으로서 집이나 지니고 애들 길러가는 편이 당신 고생은 되겠지만 날 것 같구려……’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날 30일 오후, 흐린 하늘에 간간이 부슬비가 내리는 날, 노필의 장례식은 영화감독협회장으로 거행되었고, 그 4일 후인 1966년 8월 3일, 정부는 제2차 영화법을 법률 제 1830호로 공표하였는데 이에는 국산 극영화 의무 제작편수 15편을 2편으로 줄이는 등의 등록요건 완화와 대명제작 금지의 조항이 포함되었다.
어느 잡지 기자는 노필감독 기사에 아래와 같은 비명을 적어 자기 마음에 새겨두었다. “여기 젊은 방화계의 중견 감독 노필은 그의 의욕을 다하지 못한 채 죽음을 안았다. 만일 노필을 아는 사람이 이 비석을 지나갈 때 「밤하늘의 부르스」가 그의 마지막 음악 작품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기를 바란다. 그리고 외국감독 ‘마빈 드로이’를 퍽 좋아했던 감독이라는 것도…….”
노필 감독의 비석은 마치 콘크리트로 만든 듯 초라하지만 예술가다운 형태로 아담하게 조각되어 있다. 앞면에 ‘영화감독 교하노공필지묘交河盧公泌之墓’, 옆면에는 ‘영화인 일동’이라 새겨져 있다. 묘는 순환로 반환점이 되는 정자의 뒤편으로 직진하여 오른쪽에 있다.
참고문헌:신문-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아일보, 한국일보 1966.07.30. 잡지-영화잡지, 로맨스, 아리랑 1966년 10월호. 단행본-한국영화사,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2008. 한국영화 100년, 호현찬, 문학사상사, 2003. 영화-밤하늘의 부르스, 노필, 한국영상자료원.
김영식∙1962년 부산 출생. 2002년 ≪리토피아≫ 수필 등단. 번역서 모리오가이의 <기러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일본문학취미’ 사이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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