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7호(2010년/봄) 비비비(초점)/용기를 움켜쥔 시인의 운명/이성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17회 작성일 10-08-19 10:55

본문

|非․比․批|
용기를 움켜쥔 시인의 운명
―해방 이후의 임화
이성혁|문학평론가


임화, 그는 언제나 한국 문학의 중심에 있었다. 1920년대 중반, 다다이스트로서 한국시의 최첨단에 있었던 그는, 곧 카프에 가입하여 문학 운동을 전개하고 1930년대 초에는 카프 서기장에까지 오른다. 1934년 탄압으로 인한 카프 해산 이후에는 날카로운 비평을 통해 한국 문학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면서 임화는 1930년대 내내 문학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비평가로서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 임화 역시 그 중요성은 대단히 높다. 그는 한국시의 한 장르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그가 선보였던 ‘단편 서사시’는 ‘운동으로서의 시’가 단순히 시인의 정견을 거칠게 외치는 방식이 아니라 서정적이고 미학적인 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에는, 시집 <현해탄>에 실린 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 청년을 시적 화자로 내세워서 유장한 리듬으로 흐르는 장시를 시작詩作했다. 이 장시의 특성은 서사적인 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한 사람의 서정적 주체가 긴 호흡의 사상적 독백을 전개하는 시는, 한국 시단에서 낯선 것이었고 임화가 처음으로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식민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세계에 맞서려는 청년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이 시들은, 당시 한국 시단에 열정적이고 남성적인 육성을 불어넣었다.
임화는 1939년, ≪문장≫에 무제無題의 시(나중에 시집 <찬가>에 실릴 때는 「자고 새면」이라는 제목을 얻는다)를 발표하고는, 해방될 때까지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는 시인으로서의 임화의 정직성을 보여준다. 임화는 1920년대 중반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1939년까지 거의 시를 놓지 않고 있었다. 1, 2년 정도 공백기가 있긴 했다. 그 공백은 새로운 시작 방향을 모색하는 기간에 생긴 것이었다. 가령 임화는 1927년 「담」과 같은 강렬한 정치시를 발표하고는 1년 정도 시를 발표하지 않다가 1929년에 들어서야 시를 발표하는데, 그때 바로 단편서사시라는 새로운 양식의 시가 등장하는 것이다. 즉 1년의 공백은 새로운 시 양식을 개척하기 위한 모색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39년 「자고 새면」을 발표한 이후에는 그는 6년 동안이나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즉 그 긴 공백은 예전처럼 새로운 방향의 시작을 탐구하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어 문학 압살 정책 속에서는 시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화는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았던 것이고, 또한 소위 ‘국책’을 따르는 시를 차마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거류까지 했던 임화가 일본어를 모를 리는 없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일본어에 능숙했다고 할 것이다. 시인으로서 시를 쓰지 않는다는 일은 매우 뼈저린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임화가 시인으로서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시작을 계속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식민 정책에 대한 수동적이지만 의식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말기에 들어서면, 알다시피 일제의 식민정책은 더욱 악랄해져서, 아예 조선 문화를 말살하고 조선인 자체를 아예 피식민지인이 아닌 일본의 제2국민으로 흡수하려는 ‘내선일체’를 추진했다. 1940년대 초, 한국어 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당시 남아 있던 한국어 문예지인 ≪문장≫과 ≪인문평론≫ 역시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은 그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후의 한국 문학은 일본 문학의 한 지류로서 환골탈태되어야 했는데, 이를 밀고 나간 것이 최재서가 주간으로 있던 ≪국민문학≫이다. 1941년 말에 창간된 ≪국민문학≫은 1945년 해방 때까지 일본문학의 한 지류가 된 한국문학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2.
임화가 한국 문학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었던 시기는 바로 이 ≪국민문학≫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뿐이다. 한국 문학을 말살하려는 정책이 문인들을 억누르고 있던 정세 아래에서, 임화는 근대 한국문학의 성과를 정리하여 보존하고자 <신문학사>를 써나갔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 작업 역시 1940년대 초에 이르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가 되면 한국어로 글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고, 또한 한국문학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당시 ‘국책’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이 왔다. 그리고 임화는 다시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임화의 친우인 백철은 8월 15일 해방 직후의 문학인들의 풍경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문학인들이 8월 15일을 얼마나 감격하면서 맞이했으며 앞으로의 자유로운 창작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지 잘 나타난다. 8월 16일 저녁, 백철은 문학인을 소집하는 벽보를 보게 된다. 「격! 전 문학인에게 알린다」라는 제목의 그 벽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제 조선민족은 우리의 숙원이던 해방을 얻고 자주독립을 목전에 놓고 있다. 민족 해방과 독립은 곧 문화예술의 그것임은 말한 나위도 없다. 문학예술의 자유 만세! 그 자유를 누리고 새 역사 앞에 대행진의 때가 왔다. 우리는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곧 새 역사의 창조과제에 응해야 하겠다. 다들 모여서 이야기하고, 곧 창조작업에 착수해야겠다. 내일(17일) 오전 10시를 시하여 한청빌딩으로 모이라. 우리는 일제의 앞잡이로 민족을 팔고 있던 문인보국회를 접수하고 그 문 앞에 큰 글씨로 문학운동의 대간판을 갈아 붙입시다!

당시 문학인들의 감격과 기대가 잘 드러나는 격문이라 하겠다. 특히 그들이 ‘자유’에 방점을 찍고 있는 점에 주목된다. 그리고 다음날 문학인 대회에 가고 있던 백철이 만난 이태준 역시 “나도 이제부터 회고적인 감격조의 글이 아니고 앞을 내다보는 대낭만의 대작을 집필할 야심을 가져 보겠습니다.”(299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근대 자본주의 식민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것들과 뒤떨어지는 사람들을 정교하게 그려낸 ‘예술파’ 소설가 역시 해방이 가져온 새 환경에 대한 기대와 앞으로의 문학 활동에 대한 포부로 가슴 벅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백철이 30여명의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 갔을 때, 선언문을 기초하고 있었던 이는 임화였다. 이는 임화가 이 모임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임화가 이 모임에서 어떤 직함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모임의 성격을 알리는데 가장 중요하다 할 선언문을 임화가 기초했다는 것은 이 모임의 성격과 방향이 임화의 생각에 맞추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문인들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문학 활동에서 임화가 중심적인 위치에 서는 것을 흔쾌히 승인했음을 뜻한다. 백철이 기억을 통해 대략적으로 기록한 이 선언문의 서두는 이러하다.

이제부터 역사적인 출발을 보게 된 해방문학은 글자 그대로 해방된 문학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우리 문학이 지난 36년간의 일본제국주의의 쇠사슬에서 풀려났다는 해방의 뜻외에 이 문학은 누구 개인의 것도 어느 유파의 것도 아니며 온 민족의 감정과 사상을 전체로 대변하는 문학이며 그런 민족 전체의 문학의 이름으로서 세계 문학의 열(列)에 나서게 되었다…….(304면)

해방 직후 임화가 구상한 ‘해방문학’ 운동은 임화가 서기장으로 있었던 1930년대 초의 카프 문학운동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 전체의 문학’을 주창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태준도 스스럼없이 이 단체에 들어오게 된 것일 테고, 백철처럼 친일에서 자유롭지 않은(비록 강요된 것이겠으나) 문인에게도 임화는 그 모임의 서기장을 맡아줄 것을 권했던 것이다.(하지만 백철은 식민지 말기 떳떳하지 못한 행적 때문에 양심상 이를 고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유진오처럼 친일 행적이 뚜렷한 사람들도 모임에 참가했다. 하지만 이태준의 강한 반발 때문에 임화는 “따지고 보면 누구나 다 허물없는 사람이 있겠오마는 이렇게 이야기가 되고 보니 얼마동안만 좀 있다가 다시 같이 일할 기회를 봅시다”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300-301면) 자신의 단편 서사시에 대해 극찬했던 프로 문학 선배 김기진에게 멘세비키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던 카프 시절의 임화에 비하면, 장년의 임화는 이렇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요컨대 임화는 ≪국민문학≫에 복무하지 않은 이라면, ‘민족 전체의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해방문학 운동에 거의 모든 문인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리어 ‘예술파’인 이태준이 친일문인은 모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태준의 반발에 대한 임화의 말 중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누구나 다 허물없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문학인들에게 뼈저린 무엇이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문인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이 마치 자신들이 식민지 때에도 해방을 열렬히 원했던 것처럼 굴면서 애국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은, 식민지 체제에 길들여져 큰일이나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보신주의에 따라 적당히 살아 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은 ‘도둑처럼 온’ 해방에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다시 보신주의에 따라 애국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 올바른 정부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시기의 ‘허물’을 반성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지 않을 때, 해방 직후의 현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회주의가 판치게 된다. 그렇기에 누구나 다 ‘허물’이 있었다는 임화의 인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45년 12월에 있었던 「문학자의 자기비판」이라는 좌담회에서 문학자들이 다소 자기변호를 하는 분위기로 흘렀을 때, 임화는 자기비판의 근거를 “가령 이번 태평양 전쟁에 만일 일본이 지지 않고 승리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살아가려 생각했느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일본이 승리할 것이 틀림없다면, 친일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문인들도 역시 예전처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반성을 거치지 않고 새로운 민족 문학을 건설한다고 한다면, 상황에 따라 처신하는 기회주의로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 운동의 진정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임화가 생각한 근본적인 반성의 태도는 해방 이후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시 「9월 12일 - 1945년, 또 다시 네거리에서」에서도 엿보인다.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首領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 마냥 모여드는
천 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 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아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임화는 네거리 계열의 시를 네 편 썼다. 「네거리의 순이」(1929. 1), 「다시 네거리에서」(1935. 7), 그리고 이 시(1945. 9)와 한국 전쟁 시기에 쓴 「서울」(1950. 7)이 그것이다. 이 시는 그러니까 세 번째 네거리 계열의 시다. 서울에서 자란 임화로서는, 네거리는 그가 항상 생각하고 있던 ‘운명’과 대면하는 장소다. 첫 번째 운명, 「네거리의 순이」에 나타나는 운명은 무엇이었는가?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라는 구절이 그 운명을 보여준다. 운동을 위해 식민지 조선의 서울 도심으로 잠입하는 청춘, 이를 위해 헌신하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 그 아름다움이 그를 이끈 운명이다.(이 시에서 순이는 시적 화자의 누이 동생이다. 순이의 연인은 옥중에 있다.) 그 운명은 투사로서의 삶을 그에게 강제한다. 이때 문학은 투사로서의 삶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이며, 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한 하나의 무기이다.
「다시 네거리에서」에서 나타난 두 번째 운명은 어떤 것일까? 1935년, 일제의 통치가 더욱 강압적으로 되면서 혁명 운동은 무너지고, 이제 네거리에는 “붉고 푸른 예전 깃발 대신에”“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지붕 위 벽돌담에 기고 있”을 뿐이다. 거리의 근대성을 차지한 것은 시위하는 민중에서 건물 위의 네온사인으로 바뀌었다. 청년들은 감옥에 들어갔고 순이의 어린 딸은 죽어갔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남기고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라면서 이 도시를 떠난다. 이제 거리에서의 정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임화는 쓰라리게 인정하고는, 거리를 떠나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좀 더 길고 넓은 공간으로 가서 벅찬 로맨티시즘을 내면에 충전시켜 주체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현해탄」과 같은 시가 바로 바다로 나아간 임화를 보여준다. 거리를 떠나 자신의 삶 자체와 대면하게 될 앞으로 몇 년 동안의 문학적 운명이 이 두 번째 ‘네거리 시’에 미리 드러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다시 임화는 종로 네거리에 서 있게 된다. 그런데 그는 「네거리의 순이」에서처럼 운동을 위해 번개처럼 골목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즉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깃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부끄러운/나의 생애의/쓰라린 기억이/포석마다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이 해방의 기쁨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그는 편안하지 않다. 일제말기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 부끄럽고 쓰라리다. 더욱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나의 누이”와 “그리운 동무”가 옥방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임화에게 해방은 기쁨만으로 오지 않고 이렇게 쓰라리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이 시가 해방기에 쓰여진, 감격에 들뜬 어떤 시들보다 감동을 주는 이유이고, 그래서 뛰어난 이유이다. 해방을 노래하기는 쉽다. 하지만 해방 속에서 이렇듯 깊이 있게 내면을 드러내는 시는 많지 않다.(오장환의 「병든 서울」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는 “모두 다 살아오는 날/그 밑에 전사하리라/노래부르던 깃발”을 바라보면서 정작 깃발 밑에서 전사하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뼈저리게 아파한다.
이러한 내면적인 반성과 회한이 있기에 “원컨대 용기이어라”라는 마지막 행이 더욱 절실하고 진실하게 느껴진다. 이 시행에서 ‘원컨대’라는 절묘한 시어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반성의 톤으로 이어지는 이 시에서 갑자기 용기를 다지는 진술이 돌출한다면 여기까지의 진술이 갖는 진정성이 온통 훼손될 것이다. 하지만 ‘원컨대’라고 겸손하게 말함으로써 저 용기를 가지려는 의지가 무리한 비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 말은 아직 자신이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용기를 가지길 원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흔히 말하듯이 ‘용기를 가지자’라든가 ‘용기가 난다’고 했다면 진실에서 오는 이 시의 감동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쓰라린 내면에서 솟아난 용기에의 의지이기에 그 겸손한 단어는 반대로 어떤 단호함의 울림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네거리에 서서 안으로 읊조리는 단호한 희망이 임화를 또 다른 운명으로 이끄는 것일 게다. 알다시피 해방 정국은 격렬한 좌우대립으로 나아갔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이승만을 등에 업은 친일파의 권력 장악 과정이기도 했다. 임화는 후에 남로당의 지도자가 되는 박헌영 파의 입장에 서서 그 격렬한 투쟁의 현장에 시인-투사로서 참여하게 되는데, 세 번째 네거리 시에서 표명된 용기를 품으려는 의지가 그러한 임화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9월 12일은 무슨 날이며, ‘위대한 수령’이란 누구인가? 9월 12일은, 해방 직후 조직된 인민공화국 수립을 경축하는 동시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재건을 알리는 대규모 시가행진이 벌어진 날이다. 이때 모인 1만명 정도의 군중은 ‘조선 공산당 만세’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종로에서 을지로와 광화문을 거쳐 중앙청을 휘돌아 행진했다고 한다. 임화는 이 시위 대열에 끼어 있었을 것이고, 그가 위 시에서 말하는 수령은 박헌영을 지칭할 것이다. 해방 직후 박헌영은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제 말기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일제에 저항했던 ‘경성 콤그룹’의 지도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해방되기 직전까지 그는 신분을 숨기고 벽돌공장에서 인부로 일했다. 이때까지도 ‘경성 콤그룹’ 조직은 점선으로 살아 있었다. 사실 국내에서 끝까지 항일 운동을 한 그룹은 ‘경성 콤그룹’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이 민중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임화가 위의 시에서 용기를 갖길 원할 때, 그것은 바로 저 불굴의 사회주의자들, 특히 박헌영 앞에서였다. 그 용기는 구체적으로 사회주의자로서의 박헌영과 운명을 같이하고 투쟁 활동을 해나가리라 다짐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박헌영과 운명을 같이 한다. 알다시피 북한에서 박헌영이 사형을 선고받은 직후, 임화는 곧바로 처형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임화는 ‘해방문학’ 건설을 ‘민족’의 이름 아래 대부분의 한국 문인과 같이 하길 원했다. 박헌영을 따르는 사회주의자로서 어떻게 그러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국민문학≫ 파와 같이 한국문학을 말살하고자 한 부류, 즉 조선 문화의 말살을 도우면서 적극적인 친일을 한 문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인을 받아들이고자 한 임화의 구상은, 박헌영의 정치 구상과 친화력이 있었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하는데, 그는 그 테제에서 조선의 당면 혁명은 부르주아적 성격의 것이며, 또한 그것은 민족 해방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혁명을 위해서 친일 민족 반역자와 일제에 영합했던 반半봉건 세력들을 제외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 전망은 빈 말이 아니었다. 여운형이 해방 이전, 비밀리에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중도파를 막론하여 가담시켜 조직한 건국동맹이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인민공화국(인공)으로 전화되어 나갔다. 이러한 인공으로의 전화 과정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결정적이었는데, 조선공산당은 인공의 주석으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추대했을 정도로 유연하고 광범위한 통일 전선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인공의 제의에 대해 이승만은 초기에 호의적으로 반응했으나, 미군정이 인공을 인정하지 않고 인공이 좌익의 헤게모니 아래 있다고 판단해서인지 그 제의를 결국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이승만은 친일파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좌우의 합작이 실패로 끝나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안이 결정되자 정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극심한 대립이 벌어진다. 신탁통치 안은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일종의 후견인이 되고 모든 민주주의 세력이 참여하는 임시정부가 조선을 통치하는 안이어서 통일 국가를 이루는데 현실적인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조선공산당(조공)은 처음에는 이 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김상룡 같은 경성 콤그룹 출신의 거물은 신탁통치 안이 제기되자 개인적으로 그 안에 반대하는 글을 신문에 싣기도 했다. 하지만 1월 초 소련의 설명과 압력을 받은 박헌영은 삼상 회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러자 주로 우익을 중심으로 반탁파가 형성되고, 반탁파는 찬탁파에 대해 조선의 또 다른 식민지화를 꾀하는 매국노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이 벌어지게 되고, 그 결과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 재력 있는 친일파들이 지지하는 한민당 같은 우파가 점차 한국의 지배세력이 된다. 그리하여 우파인 김구와 같은 임시정부 파까지 제거되고, 조선 공산당, 그리고 그 후신인 남로당 같은 경우는 미군정과 1948년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과 한민당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1946년 말에 들어서면 박헌영은 벌써 체포령이 떨어져 월북해야 했고, 서울의 시인 임화 역시 1947년 말에 이르러 월북해야 했다.

3.
그렇다면 월북하기 이전까지 임화의 시는 어떠한 변모를 보여주고 있을까? 1945년까지는 주로 옛 동지를 회상하거나(「길」), 북으로 진주한 소련 군대에 대해 환영을 표하는 시(「발자욱」), 1945년 12월 11일 결성된 ‘전국청년단체동맹’에 바치는 시(「헌시」), 귀국한 학병을 환영하는 시(「학병 돌아오다」) 등을 발표한다. 해방 후의 열기 아래 열린 다수의 행사에서 낭독되는 축시를 이 시기의 임화는 주로 쓴 셈이다. 이러한 시작은 밝고 희망찬 마음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1946년 1월 19일, 경찰과 조선학병동맹회관에서의 충돌 과정에서 죽은 세 명의 학병에게 바치는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임화 시는 급격한 변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좌우대립이 심각해지고, 친일 세력이 미군정을 등에 없고 다시 권력을 쥐기 시작하자 그는 옛 카프 시절처럼 선전 선동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그에게는 시 쓰기가 다시 투쟁의 일환이 되게 된다. 그가 절실하게 찾았던 용기는, 그로 하여금 투쟁의 전위에 서게 하였고, 투쟁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카프 시절 임화의 선전 선동시가 서사 구조를 도입하여 풍부한 내용을 확보하고 독자들이 로맨틱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쓰여졌다면, 해방 이후의 선전선동 시에서 임화는 짧게 처리된 행의 단속적인 전개를 통해 말과 침묵 사이의 긴장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시에서 어떤 팽팽한 힘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좌우대립이 격화되고, 우익이 여러 단체를 설립하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1946년 초에 발표된 「3월 1일이 온다」를 읽어본다.

언 살결에
한층
바람이 차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오는 날
봄보다
먼저
3월1일이
온다
불행한
동포의
머리 우에
자유 대신
‘남조선
민주의원‘의
깃발이
늘어진
외국관서의
지붕 위
조국의 하늘이
각각刻刻으로
내려앉는
서울
우리는
흘린 피의
더운 느낌과
가득하였던
만세 소리의
기억과 더불어
인민의 자유와
민주조선의 깃발을
가슴에 품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오는 날
봄보다도
일찍 오는
3월1일 앞에
섰다.

‘남조선/민주의원’이란 1946년 2월 14일에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민주의원’을 가리키는데, 그 단체는 원래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라는 의도로 조직된 것이지만 점차 우익의 전위정치결사체가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화는 이 시에서 이 단체에 대해 적대감을 표하고 있는데, 자유대신 저 민주의원의 깃발이 날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리고 이 시에서 처음으로 임화는 미군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외국관서’란 분명히 미군정의 관서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 지붕 위의 서울 하늘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각각으로’) 내려앉는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 시에 어떤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시에서 임화는, 미군정과 저 우익단체 때문에 조국은 시시각각 붕괴될 위기에 빠지고 있어서 “눈을 떠도/눈을 떠도//티끌이 날려오”고 있는 중이고, 그렇기에 1919년 3월 1일은 여전히 당대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민주조선의 깃발을/가슴에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1919년 3월 1일 당시 “가득하였던/만세 소리의 기억과 더불어” 그때의 시위자들이 “흘린 피”의 여전히 “더운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3연이 반복 변주되는 마지막 연의 “봄보다/일찍 오는/3월 1일 앞에/섰다”란 구문은, 조국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민주의원’과 미군정에 맞서 1919년 3월 1일 때처럼 투쟁해야 한다는 당위를 강력하게 제시한다. 그 구문은 해방을 뜻하는 봄이 오기 위해서는 1919년 3월 1일의 투쟁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행의 ‘섰다’라는 시어는 이미 봄으로 가기 위한 그 투쟁의 장에 우리가 서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이제 “가슴에 품고” 있던 깃발을 손에 들고 흔들며 거리에 나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는 의미 역시 내포한다. 이 시는 짧고 단속적인 구문의 전개와 함축적인 구문의 의미심장한 반복을 통해 강렬한 느낌을 주는 선전 선동시의 걸작이다. 이러한 형식의 선전선동 시는 그때까지 한국시에서 볼 수 없었다. 임화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아래에서, 그 정세를 지렛대 삼아 새로운 시 양식을 창출했던 것이다. 「깃발을 내리자」 역시 이러한 양식으로 쓰여진 선전선동시의 걸작이다.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의
늙은 종들이
광목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 왕궁廢王宮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우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神聖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1946년 5월 19일에 발표된 이 시에서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이에 따라 폭발하려는 울분을 동반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위대한 혁명가’를 강도 취급하여 체포하는 현실, 미군정의 경제 정책의 실패와 더불어 미군정과 결탁하여 친일 봉건 세력이 백성들을 약탈하는 현실, 친일파 우익 테러집단이 살인을 자유롭게 행하고 이를 언론이 부추기는 현실을 분노 어린 목소리로 간략하게 단 몇 줄로 솜씨 좋게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욕된 하늘” “더러운 하늘” 아래에서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으니 “동포여/일제히/깃발을 내리자”고 시적 화자는 주장한다. 이제 태극기가 나부낄 수 있는 해방이 되었지만, 현실은 그 나부끼는 국기에 합당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즉 현실이 식민지적인 상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깃발을 내리자”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으로 임화는 격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선전선동 시에서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깃발을 흔들자”라는 식의 다소 공허한 표현을 하게 마련인데, 이 시는 발상을 거꾸로 하여 “깃발을 내리자”라고 말하면서 더욱 강한 분노를 표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임화는, 위에서 인용한 두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짧은 행으로 현실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강렬한 구문을 반복 변주하여 배치하는 수법으로만 시를 쓰지는 않았다.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나 「제사」와 같은 시는 위에서 인용한 시들과는 달리 시인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거침없이 산문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의 일부를 옮겨본다.
아아 너희는 또다시 가져가려 한다

우리들의 어버이가 미어진 잔등에 짐짝과 더불어
우리를 업고 고향을 떠날 때
너희들은 어디에 있었느냐
우리들의 어린 것이 낯선 도시에 와서
호올로 눈물지으며 외로이 잠자던 공장에서
너희들은 어떻게 살았느냐
우리들의 동무가 주림과 박해에 못 이겨
성난 이리처럼 싸움에 일어났을 때
너희들은 무엇을 하였느냐
너희들은 국외에서 싸우지 않고 승리를 기다리었고
너희들은 우리의 교만한 주인으로 행복하였고
너희들은 능히 일본군경의 양우良友이었다
아아 모처럼 돌아오려는 자유를 찾아 깃발을 날리는 메이데이
오늘에 또다시 이빨을 갈며 달려드는 너희는 데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
이러한 표현방식은 1946년 9월 총파업 때에 쓰여진 시 「우리들의 전구」에서 한층 격렬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부분을 소개한다.
사랑하는 전우여 여기는 기관구의 경비선
남조선 철도파업 투쟁사령부가 있는 곳
전선 철도노동자의 온갖 명예가 걸려 있는
아아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을 영광이
가는 곳마다 흩어져 있는 우리들의 전구戰區
침입하는 모든 적에게
잔인한 운명을 선사하고
발자욱마다를
야수들의 피의 또랑을 만들자
기관구는 우리들의 불멸한 성곽이리라.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현실 속에서, 시적인 응축을 통해 울분을 내면으로부터 일으키고자 하는 방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임화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앞에서 인용한 시들과는 달리, 위의 시들은 시인의 격렬한 육성이 거침없이 격문처럼 산문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임화가 해방의 이상이 짓밟히는 데 대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표현은 그 이상이 빨리 실현되기를 희망하는데 있어서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 초조함이 구체적인 투쟁에 직접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시를 창작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임화의 희망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국제적인 상황이 냉전으로 접어들면서 미군정은 좌익을 더욱 거세게 억압하였다. 남한의 총파업과 인민 봉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결국 좌익이 제거된 채 남한에는 단독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제주 4.3 봉기’가 일어나고, 제주의 봉기에 대한 진압 명령을 받은 군대가 도리어 반정부 봉기를 일으키는 ‘여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난다. 이러한 봉기들 역시 철저하게 진압당하고, 패주한 군인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유격대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6. 25가 발발한다. 이렇듯 급박한 사태 전개 속에서, 임화는 삼팔선에 가까운 해주에 머물면서 시 창작을 통해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에 힘을 실어주려고 노력했다.
4.
1940년대 말에 시작을 통해 행한 남로당의 선전 선동 활동의 연장선에서, 임화는 한국 전쟁 시에도 북측의 종군 시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여 시를 쓴다. 그리하여 1951년,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출간한다. 이 시집에는 주로 ‘적’에 대한 증오를 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승만 도당’들과 미국에 승리할 것이라는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인민군’의 전투 활동을 독려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 시집에는, 위에서 언급한 마지막 네거리 계열의 시 「서울」과 그만 전쟁 통에 헤어지게 된 딸 혜란에게 바치는 서정적인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가 실려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미제 간첩으로서 처형당하게 될 임화가 처음 비판받기 시작했을 때 단서로 사용된 시가 바로 「너 어느 곳에 있느냐」다. 그런데 그 비판은 사실 「서울」에서 보여준 임화의 ‘서울 중심주의’를 암묵적으로 겨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군의 서울 함락 직후에 쓰여진 「서울」에서 임화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구히/서울은 우리 인민의 거리이고/어떠한 먼 미래에도 또한 영구히/서울은 우리 조국의 수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김일성 파에 대해 서울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남로당 파의 우위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양이 중공군에 의해 재탈환된 이후인 1951년 2월에 쓰여진 시인 「평양」(이 시 역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실려 있다)은, 평양이 “전선으로 사는/차 위에/가슴 아퍼/바라볼 수 없는 이 폐허가/우리들의 도시”라고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수령의 이름부르며/사랑하는 우리/평양 거리로/돌아오리라 돌아오리라”라고 쓰여져 있지만, 저 활달하고 희망찬 느낌을 주는 「서울」의 서울과 폐허가 된 평양 사이의 낙차가 예민한 북한 권력자의 눈에 어떤 불쾌감과 의구심을 가지게 했을 것은 분명하다. 물론 임화의 처형은 남로당 대숙청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지만, 숙청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표적이 되어 비판받은 이는 임화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두 시 「서울」과 「평양」이 북한의 권력자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의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항상 마음 아프던/엄마를 생각하여/해 저무는 들길에 섰느냐”라는 표현이었다. 이 표현에 대해 1959년에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문학통사 현대문학편>에서는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 사상을 설교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신비평에 비추어 작품성을 중시하는 문학자인 김용직도 인정하듯이,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새로운 스타일에 입각한 보기 드문 걸작”이며 “상당히 탄력적인 가락으로 이루어”진, “북쪽 전쟁시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고 본다. 허나 무시무시한 스탈린주의적 숙청 논리에서 작품성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 결국 임화는 미제 간첩이라는, 어쩌면 가장 치욕적인 죄명 아래 폭력적으로 사형당한다. 물론 그만이 아니었다. 일제시대부터 비타협적으로 투쟁해온 거의 모든 남로당 계열 혁명가들은 그 죄명으로 죽거나 오지로 추방당해야 했다. 해방을 맞아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원했던 임화, 엄혹해진 정세 속에서 그는 이 용기를 움켜쥐고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한때 애국가보다 더 많이 불리어졌다는, 김순남이 작곡하고 임화가 작사한 「인민항쟁가」의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는/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과 같은 구절처럼, 그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각오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보다 더욱 비극적이고 잔인했다. 임화의 용기는 결국 그가 선택한 북한 체제에서 온갖 치욕을 안고 처형되는 운명으로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가 희망하고 실제로 건설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민주주의 조국’는 결국 잿더미로 화했다. 전쟁 이후 남북의 체제는 독재로 치달았다. 해방 이후 임화의 운명을 살펴보면, 엄청난 비극을 가져온 분단에 대해, 그리고 그 분단을 만든 국내외 상황에 대해 슬픔과 울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상황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떤 경각심을 갖게 된다. 분단 상황은 지금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북한은 지금도 역시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은 사회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이룩한다는 임화의 희망은 해방이 이루어진 후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희망 위에 구축된 임화의 해방 이후 문학은 여전히 한국문학에 해결할 과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임화는 지금도 한국문학의 중심에 있다고 말하게 된다.

이성혁∙1999년 ≪문학과 창작≫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불꽃과 트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명대학교 출강.

추천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