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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흐름진단(계간평)/하염없는 거품의 바벨탑/김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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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진단/소설|
하염없는 거품의 바벨탑
김동윤|문학평론가
∙김종성의 「종소리」(≪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겨울호)
∙윤승완의 「악행의 자서전」(≪리토피아≫, 2009년 겨울호)
∙손홍규의 「투명인간」(≪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1.
얼마 전 박명림 교수가 쓴 ≪한겨레≫의 ‘세상읽기’ 칼럼에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진단을 읽었다. 글 제목은 「한국사회의 근본문제와 근본개혁①」이었는데, 화려하지는 않아도 거시적 안목에서 명쾌하게 맥을 짚어내는 그의 여느 글처럼, 매우 예리한 견해였다.
박 교수가 한국사회의 근본문제에 대해 꼽은 첫 번째의 진단은 ‘과두지배체제’라는 것이다. 개인 삶과 전체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 영역이 모두 소수의 최상위 몇몇 구성요소로의 거대화․집중화․과점화로 치달으면서 우리 사회의 부와 권력과 가치와 의견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두지배구조에 포함되기 위한 진입 경쟁은 살인적인 초경쟁화를 요구하고 있기에, 이 과두체제에 포함되지 못한 요소들과 삶은 거의 몰락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칼럼의 뒷부분에서 그는 살인적으로 바쁜 자신의 일상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과연 스스로의 영혼과 이상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길 권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물질과 재화를 신봉하는 교환가치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음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주식과 증권에 관한 갖가지 정보들이 연일 주요 뉴스로 장식되는 세상이 과연 정상인가. 신문마다 부동산면을 마련하여 아파트 분양과 땅 시세 등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쏟아내며, 대학에도 부동산학과가 개설되어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실은 또 어떤가. 영어가 출세의 길이라고 정부까지 나서 부추기고 사람들을 영어스트레스 속에 몰아넣으면서 영어산업이 엄청난 호황을 이루는 사회가 정녕 코미디가 아닌가. 돈이 된다면서 산을 까부수고 강바닥을 긁어내는 일을 서슴지 않는 사회가 너무나 기막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박 교수가 말한 과두화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겨울에 읽은 소설들은 과두지배체제의 하늘처럼 을씨년스러운 잿빛이다. 루카치가 말했듯이, ‘문제적 개인’들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선험적 고향상실성’의 양상을 여실히 드러내어 준다.
2.
김종성의 ‘마을’ 연작의 열 번째 작품인 「종소리」는 서울외곽의 도농복합지역에 사는 인간군상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초림시 용담면 사곡마을에서는 아파트 주민과 원주민과의 대립이 끊이질 않는다. 거기에다 젊은이들의 취직난과 사랑의 변주가 함께 얽혀 있다.
면지역 마을과 아파트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의 아파트는 마을 안에 있으되 공중에 뜬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나 다름없다. 아파트 주민의 생활 터전이 대부분 거기에 있지 않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높은 데서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나 낮은 데서 사는 원주민들이나 다 같은 사곡마을 주민”(124쪽)이지만 서로가 아주 다르다. 주민등록상의 주소만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지 서로가 이질적인 세계의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두 집단의 대립은 애당초 피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사곡마을에 들어선 아파트의 이름은 드림랜드다. 하지만 꿈세상과는 거리가 있다. 시골 아파트니 입주민들도 그리 잘나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과두寡頭 축에는 아예 못 끼면서도 과두지배체제가 잉태한 행태를 고스란히 좇으려 든다. 부녀회장인 금순을 비롯해서 미라엄마, 데이빗엄마, 1007호 여자 등 아파트 아줌마들은 “자발없고 채살머리 없는 여자들”(115쪽)이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요즘 중산층 주부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지녔을 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원래 사곡마을 사람들은 농사도 짓고 닭과 개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아파트 주민들이 농민들에게 가축을 키우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닭똥 냄새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문을 못 열겠다고 아우성이다. “아파트 바로 앞에 개사육장을 그냥 놔두면 우리 아파트 값이 똥값이 되는 건 시간문제”(125쪽)라고 그들은 침을 튀긴다. 삶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돈인 셈이다.
농민들은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다고 야단이다. 그들에겐 환경이나 재테크가 아닌 생존권이 달린 문제다. “도농복합도시 초림의 마을에 와 살면 그 정도는 감수하고 살아야지. 농촌이니까 개 짖는 소리도 나고 닭 우는 소리도 나고, 고향다방에서 오양이 색쓰는 소리도 나고…….”(120쪽) 파출소의 이 순경이 이렇게 농민들의 입장을 두둔하는 말도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환경단체 회원이며 드림랜드아파트 입주민회장인 성준기로서도 주민들끼리의 대립 문제에 관한 한 뚜렷한 대안이 없다. 비록 강경한 태도로써 무례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니어도 그로서는 아파트 입주민의 처지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법적으로도 원주민들은 보호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강짜를 놓거나 인정에 호소하는 것도 임시방편이다. 결국 음지뜰 양계장 주인은 부동산투자개발회사에 양계장을 팔아넘기고 20년 생업을 접기로 했다. 개를 사육하는 사우디영감의 버티기가 오래 못갈 것은 자명하다. 거대한 콘크리트덩이에 여지없이 잠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초림시만이 아닌 온 국토의 문제다. 대도시의 팽창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서울의 팽창은 가공할 정도다. 막을 도리가 없다. 힘도 돈도 모두 그들이 움켜쥐었는데 어쩔 것인가.
아울러 이 작품은 청년 김진수를 중심에 놓고 읽을 수 있다. 작품을 여는 이도, 닫는 이도 진수이므로 작가가 그에게 부여한 역할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그런데 진수 자신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사와 가족이 처한 상황은 무척 초라하다. 요마적에 시빗거리가 되었던 말로 ‘루저’들이라고나 할까.
진수는 대학을 졸업했으나 취업하는 것을 포기하고 할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청년이다. “가랑이에 가래톳이 설 지경으로 뛰어다니며”(112쪽) 입사지원서를 20군데나 내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수 할아버지가 하는 일이 바로 식용 개 사육이다. 진수 할아버지 김석민은 마을사람들에게 사우디영감으로 불린다. 젊었을 때 사우디 건설현장에 다녀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사우디에 가서 벌어온 돈으로 논을 사들였다. 그런데 아들이 그걸 팔아서 돼지농장을 크게 하다가 돼지값이 똥값이 되는 바람에 다 털어먹고 말았다. 좌절한 아들은 농약을 마시고 죽고, 며느리는 핏덩어리를 놔두고 떠나버렸다. 진수는 부모 얼굴도 모른 채 할아버지 손에 키워지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까지 마치고도 취직이 안 되었으니 할아버지에게 면목이 없다. 진수 친구 용철도 잔밥통이나 들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이른바 반듯한 직장에 다니는 건 아니다.
한나영은 진수의 여자친구다. 역시 대학을 나오고도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인근 샹그릴라 골프장의 캐디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골프장의 정 이사의 도움으로 아파트에 산다. 말하자면 정 이사와 내연의 관계다. 아파트 아이들은 그녀 뒤에다 대고 노래한다. “원숭이 똥구멍을 빨개./빨간 건 캐디./캐디는 맛있어.”(116쪽) 아파트 아줌마들은 입주민 회의석상에서 말한다. “우리 아파트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캐디들은 추방해야 한다니까요. 애들 교육상 안 좋아요.”(127쪽)
이들이 사는 곳은 드림랜드도 아니고 샹그릴라도 아니다. 꿈을 잃고 살아가는 땅이요, 고통스러운 현실일 따름이다. “드림랜드 아파트에서 사는 게 꼭 칼산지옥 속에서 사는 것만 같”(131쪽)다고 털어놓는 나영은 자주 악몽에 시달린다.
그나마 작품의 말미에서 청춘남녀에게 포착되는 산사의 ‘종소리’는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진수는 “바위서리에서 칡을 캐다가 미륵보살의 머리 부분을 수습”(111쪽)한 적도 있으니 좋은 일에 대한 기대도 가져볼 만하다. 한동안 소원했던 진수와 나영은 산사에서 뜨겁게 껴안는다. 그때 “미륵보살의 웃음소리가 종소리 속으로 번지고 있었”(132쪽)으니 아직 가느다란 희망은 남아 있는 것이겠다.
작품에 불만도 없지 않다. 연작이어서 그러겠거니 여기면서도 좀 답답하다. 갈등의 양상이 그다지 긴박하게 전개되지 않아 호소력이 약화된다고나 할까. 작품 속의 사건들이 변죽만 울리면서 나열되다가 청춘남녀의 사랑 확인으로 안이하게 갈등 해소를 추구해 버린 느낌이다. 주민간의 대립과 취업난 문제가 그다지 긴밀하게 맞물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품 전반의 맥락은 작은 불만을 충분히 덮을 만하다.
3.
자서전에 선행이 아닌 악행이란 수식어가 붙다니. 은승완의 「악행의 자서전」은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킨다. 시작부터 궁금증을 유발한 작가의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독자들을 끝까지 긴장하게 만든다.
‘나’(‘정 작가’로 불리는 화자話者)는 경력 10년의 자서전 대필 작가다. 이번에 맡은 자서전의 주인공은 1년 매출 몇 조 원대 기업체의 황갑수 회장이다. 양심적인 기업인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자서전 집필과 간행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이뤄질 터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집필 도중에 황 회장은 젊은 시절 악마에게 선행에 대한 고해를 한 적이 있다는 발언을 한다. 선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뉘우치는 의식으로 악마에게 고해했다는 것이다. ‘나’는 황당한 그 말을 취중발언이라고 여기며 넘겼었는데, 자서전 초고 집필이 다 끝났을 무렵에 사건이 터지면서 그게 술주정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아들 황 사장과 심복 최 부장이 걸러내고 다듬은 자서전 원고를 읽은 황 회장은 말한다. “나는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을 도저히 나라고 인정할 수가 없어. 나는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89쪽) 자서전의 당사자가 그 내용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서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는 “번드르르한 내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자랑스럽기는커녕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89쪽)라며 자신의 악행을 하나하나 털어놓는다.
“나는 하나의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꼭 그만큼의 선행을 했네. 중소기업을 협박해서 첨단기술을 가로챈 뒤 억지로 도장을 찍게 한 날,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결정을 내렸지. 세금 포탈 사실을 폭로한 기자를 구워삶은 며칠 뒤에는 문화재단을 설립하기로 결정을 내렸어. 공장의 폐수를 무단 방류해선 안 된다고 직언하는 간부직원을 작살나게 두들겨 패 몇 개월 병원신세를 지도록 한 적도 있었어. 그 다음날 무얼 했는지 아나? 간부직원의 부인을 만나 일 년치 연봉을 전달했네.”(90쪽)
여기까지는 ‘나’가 담담히 경청하였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기업 총수치고 그만한 비리를 저지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 회장의 마지막 고백에서는 충격을 받는다.
황 회장은 부도난 협력업체 사장의 아내를 사랑했다. 처음에는 부도를 막아주는 대신 그녀를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와 남편이 몰래 관계를 지속하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되자 더 큰 악행이 저질러졌다. 질투심에 불탄 나머지 남편을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청부살해한 것이다. 급기야 남편이 죽은 뒤에 여자는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여자가 죽고 난 뒤, 나는 장애인들을 위한 사설 복지센터를 만들었네. 복지센터 한쪽에는 무료급식소를 갖춘 노숙자들의 사설 쉼터를 만들었어. 공교롭게도 그게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어. 그때부터 내겐 가난한 자, 장애인들의 대부라는 타이틀이 붙었지.”(91쪽)
황 회장은 그러한 악행을 전부 포함하는 내용으로 자서전을 다시 써주기를 ‘나’에게 부탁했다. “내 악행을 드러내는 것. 그것만이 최고의 선행임을 깨달았어.”(92쪽)라면서, “자넨 내 자서전을 다시 써야 해. 그래야만 내 삶이 용서받을 수 있어.”(91쪽)라고 했지만, 그것은 끝내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 회장이 죽은 후 자서전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내용만 담은 채 <당신의 삶을 리폼하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타계한 황갑수 회장에 대한 추모와 K그룹의 건설업 진출 자축 이벤트를 겸하는 자리”(83쪽)가 성대하게 열렸다. ‘나’는 그 행사에 참석했다가 슬그머니 나오면서 한 무리의 철거민들과 마주친다.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누구보다 강조”한 인물로 알려진 황 회장의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건물 앞에서는 “K건설이 아파트를 짓게 될 재개발 지역의 밀려난 철거민들”(84쪽)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축하와 추모가 함께 진행되고 있음은 선행과 악행이 함께 맞물려 있으면서 악행이 선행으로 포장되는 현실을 드러내며, 화려한 행사와 처절한 시위가 동시에 열리고 있음도 같은 의미로 읽힌다.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고, 우리 삶의 본질부터가 그러한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는 황 회장과 ‘나’를 포개놓았음을 읽는 것이 핵심적인 맥락이다. 이는 황 회장의 경우를 특정 인물의 사례로 국한시키지 않고 보편성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가 황 회장의 악행 중 마지막 고백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단지 그 정도가 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게 자신의 경험과 상당부분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선배의 아내 허윤을 사랑했다. 빈민운동을 하던 김 선배가 철거용역의 폭력에 의식불명으로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 갔다가 그녀의 처연한 표정을 보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 선배는 결국 한쪽 팔다리를 가눌 수 없어 휠체어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나’는 선배를 돕는다는 구실로 그녀에게 돈을 건네주는 일을 계속하면서 그녀의 육체를 탐닉하게 되었다. 선배는 휠체어를 타고 베란다로 가서 10층 아래로 투신하고 말았다.
부도난 협력업체 사장의 아내를 사랑하여 남편을 청부살해하고 그로 인해 그녀가 아이와 함께 투신자살케 한 황 회장과, 철거용역에게 맞아 팔다리를 못 쓰게 된 선배의 아내 허윤을 탐하여 몸을 섞음으로써 선배의 투신자살을 유발한 ‘나’는 과연 무엇이 다르던가. ‘나’는 과연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황 회장은 ‘나’에게라도 고해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은가.
급기야 ‘나’는 “내가 고백했으니 이제 당신도 고백하라.”(94쪽)는 황 회장의 소리를 환청으로 듣는다. 그 후에 ‘나’의 앞에 나타난 악마를 보게 된다. 악마는 ‘나’에게 자신에 대해 고해하고 기업인들의 악행 자서전을 쓸 것을 요청한다. ‘나’는 악행에 관한, 자서전이 아닌, 소설을 쓰겠다고 답한다. “아마도 그건 황 회장의 고백이면서 나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며 “그 누구의 고백도 아니지만 또한 모든 이들의 고백이 될지도 모른다”(98쪽)고 여기면서.
‘나’는 문득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 악마에게 고해를 한 적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99쪽) ‘황 회장’이 ‘그’로만 바뀌었고, 나머지는 똑같다. 이는 물론 소설이 ‘나’의 고백이면서 모든 이들의 고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대필 작가를 그림자 작가(shadow writer), 유령 작가(ghost writer)라고도 하는데, 이 소설의 ‘나’는 그림자나 유령이라는 수식어가 딱 알맞다. 정 작가는 황 회장의 그림자요 유령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그림자요 유령이기에 그러하다.
신예작가인 은승완이 건네는 촉수는 우리들을 바닥에서부터 성찰하게 한다. 후원금이나 성금을 좀 낸 것으로 사회에 대한 기여를 했다면서 인간본연의 자세를 방기하고 스스로 저지른 온갖 악행을 제멋대로 용서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에 헌금하고 절간에 불전을 낸 것으로 자신의 악행을 감추는 따위의 자위행위에 익숙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들은 악행의 불감증 환자가 아니던가. 악행에 대해 고해할 생각을 잠시라도 가져 보기나 했던가.
4.
손홍규의 「투명인간」이 주는 울림은 의미심장하다. 장난이 현실이 되어, 그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인식되는 끔찍한 실상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 시대의 우리는 현실을 장난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일종의 해프닝이랄 수 있다. 48번째 생일을 맞은 아버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자는 이벤트가 나머지 세 식구에 의해 즉흥적으로 기획되었다. 그런데 이런 농담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서, 가족의 실체를 섬뜩하게 확인하는 계기를 만든다.
장난으로 아버지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키로 한 것이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마약 같은 시간”(165쪽)이었다고 표현되는바, 이는 아주 철저히 빠져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준비 단계에서 오갔거나 떠올려진 말들이다.
“아빠는 엄마 서방이지 제 서방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는 아버지 마누라지 제 마누라는 아니잖아요.”
“쟤는 네 동생이지 내 동생은 아니잖니.”(165쪽)
장난기가 섞인 말들이지만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도대체가 서로의 상관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각자가 깊은 곳에 간직했던 말들을 슬쩍 건네는 느낌이다.
드디어 퇴근한 아버지가 현관에 나타났다. 생일 축하 투명인간 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동생은 “아빠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오빠, 가서 문 닫아버려.”(166)라고 소리 지른다. 놀이를 넘어서서, 평소에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던 생각의 반영임이 감지된다.
어머니와 동생만 그런 게 아니다. ‘나’도 똑같다. “어쩌면 나는 이런 식의 상황을 오랫동안 꿈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싶었던 욕망이 무의식 속에 잠복했다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며 활개를 치는 것인지도 모른다.”(166쪽)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이런 물음을 던져 보게 된다. 이 가족의 놀이가 우리 실제 현실의 단면은 아닌가. 우리는 혹시 가족을 장신구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족이 실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인데 그걸 걸치고 있으면 폼이 나니까, 갖추고 있어야 남 보기에 그럴듯하니까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소설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모종의 연극이 실연중임을 눈치 채고 기꺼이 속아주려고 했다가 그것이 오래 지속되고 지나치다고 느껴지면서 당황해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껴안자 어머니는 “치한을 떨어버리듯 몸을 비틀어”(168쪽) 아버지 품을 벗어나 버린다. 졸지에 남편이 치한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난 네가 그런 짓을 할 때마다 소름끼쳐.”(171쪽)라며 동생을 꾸짖는 그녀의 발언도 섬뜩하다. 실은 아버지를 향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식구들의 도를 넘는 장난에 이제 지쳤다. “거실 한구석에 아버지는 말라죽은 고목나무처럼 섰다.”(172쪽) 식구들은 “아버지가 좀더 고분고분하길 바랐”(172쪽)지만 그러지 않아서 곤경에 처해버렸다고 책임을 돌려 버린다.
이로써 그들은 공동체로서의 가족이 아닌 낱낱의 개인이다. 식구들은 “간단한 대화에서조차 (…) 행성들처럼 멀리 떨어진 존재라는 걸 확인”(173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집에 있으나 없으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173쪽)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는 가족과의 소통을 위한 시도를 계속한다. 휴대전화를 걸어보기도 하고,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필담까지 시도해 본다. 하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 역시 장난을 넘어서는 장면이다. 소통부재의 일상이 투명인간 이벤트에서 불거졌을 뿐이다.
“아버지가 투명인간이 된 것 말고는 어떤 차이점도 발견하지 못했다.”(176쪽)는 대목에서 보면, 장난이 일상과 진배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나는 왜 그를 나와 같은 생명체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까.”(177쪽)라는 반성도 해보지만 그뿐이다.
아버지는 이제 혼자 살기 시작한다. 혼자 촛불을 끄고 소파에 앉아 게걸스럽게 케이크를 먹는다. 혼자 포도주를 마시다가 아무데나 드러눕는다. “한번쯤은 그래보고 싶었다는 듯 만족한 얼굴”(178쪽)이다. 아버지는 생일에 다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이튿날엔 하루 종일 빈둥대었다. 식구들은 각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다뤘고 쏘파에서 굴러 내려왔다. 포복해서 냉장고 앞까지 갔으며 반쯤은 흘리면서 물을 마셨다. 어머니는 동창모임에 나갔고 동생은 친구들을 만나러 갔으며 나는 구립도서관에 다녀왔다.”(179쪽)
다시 다음날에는 아버지가 외출하여 온종일 공원과 야산 등지를 홀로 거닐었다. 어둠이 깔리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울먹이며 친구와 통화한다. “집에 아무도 없어. 식구들이 사라졌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182쪽)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가족들에게 철저히 외면되어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듯이, 아버지 역시 가족들에 의해 투명인간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다. 가족이 더 이상 피의 유대와 자연스러운 애정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물질적 효용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체제임을 「투명인간」은 다시금 드러내었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에게 진정한 가족이 있는가, 무슨 이유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가. 가족 간의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 실체를 진지하게 들여다본 일이 있는가. 손홍규의 「투명인간」은 모두가 투명인간일 수도 있음을 확인시켜준 면도날 같은 소설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소통, 가장 끈끈한 체제 내부에서의 소외 문제를 가슴 철렁하게 우리 앞에 던져놓았다.
5.
우리의 욕망은 물질과 재화에 의해 끊임없이 부풀려지는 거품과 다름없다. 마을도, 기업도, 가족도 마찬가지다. 마구 부풀려지는 거품 속에서 소통을 차단하는 벽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이런 거품의 바벨탑은 어디까지 올라가야 무너지게 될까.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루카치, <소설의 이론>)는 정녕 회복될 수 없는 것일까.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의 행복은 정녕 꿈속에서나 누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요즘 새봄을 앞두고 이런 부질없는 상념에 빠져 있다.
김동윤∙1964년 제주 출생. 2001년 ≪리토피아≫를 통해 본격적인 평론활동 시작. 저서 <우리 소설의 통속성과 진지성>․<기억의 현장과 재현의 언어>․<제주문학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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