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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흐름진단(계간평)/차이의 수사, 범용성의 수사/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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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80회 작성일 10-08-19 10:58

본문

|흐름․진단/시|

차이의 수사, 범용성의 수사

장이지|시인



∙박상수, 「모노드라마」(≪문학동네≫, 2009, 겨울호)

최문자, 「갈대로 사는 법」(≪현대문학≫, 2010, 1월호)

허수경, 「옛 가을의 빛」(≪문학동네≫, 2009, 겨울호)

송재학, 「공중」(≪문학동네≫, 2009, 겨울호)

김소연, 「메타포의 질량」(≪세계의문학≫, 2009, 겨울호)

∙김승일, 「마녀의 딸」(≪문학과사회≫, 2009, 겨울호)




1. 루머와 평판 사이

2009년말 대학학보사에서 시평時評을 부탁 받아 「자기표현과 소통에 집착하는 문화」라는 글을 써 보낸 바 있다. ‘2PM 재범 퇴출사건’과 ‘어느 대학생의 루저(loser) 발언 파문’ 등 인터넷 시대의 세태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의 소통 문화를 점검한 글이었다. 우리는 참 시시콜콜하게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해프닝에 대해 자기의견을 피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인터넷은 누구나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게 했고, 개인들은 그 세계의 중심에서 자유롭게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기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인지 장담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회의가 불쑥 끼어든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자기표현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반성 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기대는 때가 많다.

학보 종강호가 나올 즈음 캐스 선스타인의 <루머>(On Rumours)를 읽게 되었는데, 캐스 선스타인 역시 인터넷에서 루머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확산되는가를 사회학적으로 조명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캐스 선스타인은 표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면, 사람들은 언젠가 더 합리적인 의견을 선별하고 지지하게 된다는 소위 ‘생각의 시장’ 개념의 이상주의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웹상에서 ‘동조화 폭포 현상(conformity cascades)’과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에 의해 루머가 증폭되고 공고화되는 과정을 여러 실험과 통계 자료를 통해 입증하려고 한다.

루머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비단 웹상에서만은 아니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청소년들만이 루머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신춘문예, 리뷰․비평, 문학상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온 문학계에서도 루머와 평판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소설 분과가 시장과 평론가 집단에 의해 비교적 믿을 만한 ‘평판’을 유통시켜 왔다면, 시 분과는 시장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시피 하고 전문 비평가 그룹이 잘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합리적인 평판을 도출해내는 데 여러 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계절에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되는 시의 편수는 실로 한 계절 안에 읽어내기에 만만치 않은 수준에 이르렀다. 많은 시인․평론가들은 대형 출판사가 주목하는 ‘새로운 상품’으로서 신인들을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트렌드에 민감한 전문가로서 다시 그들의 지위를 보장 받게 된다. 한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신인은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쓰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한때 주목 받던 신인들이 점점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날 시단의 추세는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 계간평 쓰기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루머를 퍼뜨리느냐 합리적인 평판을 만들어내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읽어야 할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있으며 경합해야 할 루머나 평판들이 지나치게 많다. 트렌드를 읽어야 하지만 트렌드 바깥에서 읽어야 한다.


2. 서정시의 장르적 매력

시적인 것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때 있었는데 이런 논쟁은 큰 의미를 얻을 수 없다. 시적인 것은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시적인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들마다 시적인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장르론의 층위에서라면 시적인 것이란 어떤 것인지 탐구해 볼 만하다. 이런 논의들은 대개 시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기본으로 돌아가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가령 처음에 우리는 왜 다른 장르가 아니라 ‘시’라는 것을 쓰기로 결심한 것인가 말이다. 어떤 시들을 암송하고 다녔고 공책에 어떤 시들을 적어 다녔으며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가. 어떤 마음에서 시를 쓰기로 한 것인가.

장르론에서 서정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정적 자아의 독백을 시인이 최초로 엿듣는 양식으로 정의된다. 세계관이나 제시형식에서 이미 시적인 것은 규정된다. 아무리 현란한 언어를 동원한다 해도 스타일의 개신을 시도한다고 해도 시의 태생적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겨울에 발표된 시들 중에서 새로운 ‘이야기’에 집착한 시들은 매우 많았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고, 그래도 정서적인 면에서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시들이 여전히 안정적인 수준을 보여줬다.


요즘 나 말야 오래 입이 쓰고 내가 미워져 그런 날이 많아 막차를 보내고 집까지 자주 걸어와 TV를 소리죽여 켜놓고 커튼을 치고 숨만 쉬어 고마운 마음을 갖고 싶어 그런데도 손과 발가락은 움직이거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사를 가버리거나 맥박수가 달라서, 미안해요 시간이 없다고도 해 나는 거울을 많이 들여다보는데 내 속을 모르겠어 그럴 땐 음악을, 지하철을 타고 음악을 들으면 모든 걸 잊고 잠이 오고 못 가는 곳이 없거든 매표소에서, 너 요즘 어때? 아저씨가 물으면 괜찮아요 가을이 더 깊어지면 버섯을 따러 가야죠 생각하고 웃기도 해 설명할 수 없는 날씨가 있지 변덕쟁이 같아 그렇게 말해놓고 발만 동동 구르는, 그렇게 생각해놓고 잊어버리는, 내 방식은 아니지만 가끔 내가 먼저 전화를 걸 때도 있지 거긴 어때요? 자꾸만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기분, 옥상에서 숯불을 피우고 혼자 국수를 삶아먹고 내려다보면 골목길엔 아무도 없고 옆집은 차례차례 비어가고 껴안지도 못할 화분들만 늘어가 내일은 연극을 한 편 보려고 해 요즘 어때? 같이 밥 먹을까? 그렇게 말해주는 연극, 이런 분위기, 사실, 예전부터.

―박상수, 「모노드라마」(≪문학동네≫, 2009, 겨울호)


「모노드라마」의 제시형식은 ‘엿들어지는 독백’으로서 서정시의 전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자주 생각하며 지하철에서는 이어폰을 꼽은 채 음악을 들으며 잠시 세상을 잊는 내적 인간(inner man)이다. 이 시의 내용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제목에서부터 표방하고 있는 ‘독백’의 제시형식도 새롭지 않다. 은유나 상징이 시적 구성 원리로 내세워지는 형국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시는 세련된 느낌을 준다. 박상수는 단자화單子化된 현대 도시인의 생활양식을 덤덤하게 진술한다. 그것은 이미 우리들에게 익숙한 풍경이지만, 우리 자신이기도 한 내적 인간이 혼자 있을 때 의외로 자기감정을 능숙하게 말하는 것에 우리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외의 달변가는 고독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들을 매혹시킨다. 독자들 또한 서정적 자아가 경험하는 내적 혼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어서 슬픈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많은 말들을 하게 된다. “자꾸만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기분”, 그 기분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기분”을 우리 모두는 공유하고 있다. 이 시의 미덕은 그런 공감을 촉발시키는, 청각에 호소하는 서정성에 있다. 청각에 호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젊은 남자의 목소리(어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갈대로 사는 법」 역시 독백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그러나 「모노드라마」가 감미로운 슬픔이나 가벼운 멜랑콜리의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반면, 「갈대로 사는 법」은 이별의 극한 감정이라는 내적 경험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와의

이별은 가벼움으로 격해지는 것

비밀을 묻을 데 없어

가릴 것 없는 갈대로 사는 것

고요에도 뼈가 있다면

뼈처럼 사는 것

그해

습지 모퉁이에서 피를 다 쏟았다

꿇을까봐 아예 무릎을 없앴다

더 줄일 수 없는

가느다란 비밀만 남겼다

가끔

이별할 듯한 연인들이 찾아와 허옇게 피를 말리고 갈 때

아홉 번쯤 일어나 이빨 없는 치를 떨었다

갈대 속에서 세상이 흔들렸다

―최문자, 「갈대로 사는 법」 부분(≪현대문학≫, 2010, 1월호)


「갈대로 사는 법」은 이별의 상처를 갈대의 형상으로 치환하는 은유적 시선의 깊이로 인해 아름답다.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의 견인적堅忍的 삶은 갈대의 형상을 얻음으로써 미적으로 승화된다. 시인은 점증하는 이별의 고통과 절망감이 실연 후의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형․왜곡할 수 있는가를 절규하듯 형상화해간다. 가장 슬픈 것은 점점 야위어가는 갈대와 같이 안으로 삭이는 그 견인의 자세가 오히려 고통과 절망의 크기를 배가한다는 진실에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갈대 속에서 세상이 흔들렸다”라는 이 시의 마지막 한 줄은 끝까지 견뎌냄으로써 흔들리는 것이 서정적 자아 자신이 아니라, 다시 말해 ‘갈대’가 아니라 ‘세상’임을 역설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안으로 분노를 쟁여놓는 갈대의 강함이야말로 시인이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갈대로 사는 법」 역시 새로움보다는 이별시의 전통적 문법을 안정감 있게 이어받은 작품이다. 이 시에 내장한 동일성의 시학은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방식이 자연과 닮아 있음을 확인시킴으로써 모종의 인지적 충격을 주기도 한다. 「바이칼시편」(강우식, ≪문학과창작≫, 겨울호), 「진흙들―침묵의 그늘」(오정국, ≪현대문학≫, 1월호)도 같은 방면에서 유려한 경지를 보여준 작품들로 기억될 만하다.

한편 「옛 가을의 빛」은 무료했던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특권화한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랏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 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로 살아났다

벙어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인 눈물 빛

―허수경, 「옛 가을의 빛」부분(≪문학동네≫, 2009, 겨울호)


「옛 가을의 빛」에서 정체감과 불안감을 유발하는 저수지는 ‘살’로 만져지는, 양감이 있는 물질로 기억된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의 빛은 후각적 이미지와 분간할 수 없으며 가지가 익어가는 마당에 고여 들던 어둠은 가짓빛의 색감을 띠어 간다. 할머니의 담배 연기에서는 죽음의 빛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빛들은 과거의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신화화된 기억 속에서 인간은 빛의 줄기로 자연에 이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동일성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고유한 시간을 빛의 이미지로 복원하는 이 아름다운 작업도 기실 서정시의 구성 원리로서 비유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음은 물론이다. 훌륭한 비유가 반드시 좋은 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에는 훌륭한 비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정시의 본진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3. 은유에 대한 질문:차이의 축

고대 수사학에서 원래 은유는 친숙하지 않은 것을 친숙한 것으로 바꾸어 말하는 의사소통의 한 기술이었다. 원관념이 청자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청자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보조관념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 곧 은유의 원리이다. 그러던 것이 현대 시학으로 내려올수록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게 되었다. 저녁이 하늘을 등지고 번지는 모습을 “수술대 위에 누워서 마취되어 가는 환자”의 의식에 비유했을 때(「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두 관념 사이의 동일성은 즉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성과 위트의 도움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전통은 이처럼 ‘차이’를 만드는 시학을 정전화해 왔다. 그럼에도 이 ‘차이의 시학’은 여전히 동일성의 원리를 강조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지만, 두 관념은 여전히 한 극단에서는 서로 만나는 지점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 공통분모를 찾음으로써, 서로 멀게만 여겨왔던 것들이 사실은 가까운 것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사람들은 인지 확장의 쾌미를 얻는 것이다. 이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공통분모가 너무 쉽게 찾아지는 것은 매력이 적다.

송재학의 비유는 낯설다. 그는 독창적으로 말한다. 그의 시는 어쩌면 통사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송재학, 「공중」 부분(≪문학동네≫, 2009, 겨울호)


「공중」은 비어 있다고 생각한 ‘공중’의 실체를 새들의 생리를 통해 유추하는 것을 시상詩想으로 하고 있다. 유추하고 있기 때문에 ‘공중’과 ‘새들’은 닮아 있다. 랑그의 층위에서 볼 때, 양자는 유사성에 의해 닮아 있는 것은 아니고 인접성에 의해 닮아 있다. 양자는 연상 관계로 서로 묶여 있다. 언어 행위의 층위에서 볼 때, 양자는 어휘를 선택하는 수준이 아니라 어휘를 결합하는 수준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의 원관념(‘공중’)에 여러 보조관념이 엮여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확장은유를 활용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환유를 기본 비유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문상으로는 조건문과 등식문장(정의문)이 눈에 띈다.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조건문은 하나의 잠언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잠언의 함의는 ‘공중’이 스스로 내부를 비움으로써 그 본질에 가까워지듯이 인간도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공중’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 새점을 배워야겠다는 엉뚱하게 들리는 결론에 귀착한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다”라는 등식문장은 새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허공의 실천’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다. 이 등식문장은 사실 고대 수사학에서 말하는 은유에 아주 가깝다. 물론 보조관념은 친숙한 것이지만 다소 엉뚱하다. 원관념이 보조관념보다 낯설기 때문에, 원관념 자체가 원관념을 감춘 상징(‘공중의 문명’)이기 때문에(액자비유), 이 시는 신비해 보인다.

송재학의 복잡한 구문이 그래도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김경주의 어떤 시들이 끊임없이 비문 시비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읽히며 감동을 주는 것은 송재학의 경우처럼 그의 구문 역시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타포의 질량」은 제목 그대로 은유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은유에 대한 질문이 곧장 시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 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맨 처음 우리는 귀였을 거예요 아마. 따스한 낱말과 낱말이 포켓 사전처럼 대롱거리는 귓불이었을 거예요 아마. 그때 우린 사전의 속살을 들춰 보았죠. 여긴 두 페이지가 같네요? 파본인가요? 그다음 우리는 그릇이었을 테죠 어쩌면. 아이스크림을 컵에 담듯 살아온 날들의 독백이 녹아 흘러내리지 않게 자그마한 그릇처럼 웅크려야 했을 테죠. 그때 우리는 맛있었죠. 그때 우리는 양 손바닥처럼 밀착되었을 테죠. 고해와 같았을 테죠 어쩌면. 딸기 맛과 멜론 맛이 회오리처럼 섞일 때면 하루가 저물었죠. 그런 후에 우리는 서로의 기록이었죠. 손목이 손을 놓치는 순간에 대해, 시계가 시간을 놓치는 순간에 대해, 대지와 하늘이 그렇게 하여 지평선을 만들듯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그렇게 하여 침묵을 만들었죠. 등 뒤에서는 별똥별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내렸죠. 그러곤 우리는 방울이 되었어요. 움직이면 요란해지고 멈춰서면 잠잠해지는, 동그랗게 열중하는 공명통이 되었죠. 환희작약 흐느낌, 낄낄거리는 대성통곡. 은총과도 같이 도마뱀의 꼬리와도 같이. 우리는 비로소 물줄기가 되었죠. 우리는 비로소 물끄러미가 되었죠. 이제 우리는 질문이 될 시간이에요. 눈먼 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시간이죠. 덧없지 않아요. 가없지 않아요. 홀로 발음하는 안부들이 여울물처럼 흘러내리는 이곳은 어느 나라의 어느 골짜기인가요. 이것은 불시착인가요 도착인가요. 자, 우리의 질문들은 낙서인가요 호소인가요, 언젠가 기도인가요?

―김소연, 「메타포의 질량」(≪세계의문학≫, 2009, 겨울호)


「메타포의 질량」은 김소연의 <눈물이라는 뼈>(2009)의 궁극적인 질문을 형이상학적으로 변주한다. 이 시는 두 개의 관념이 어떻게 만나 은유를 형성하는가를 유추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시인은 ‘A=B’로 표시되는 은유의 도식을 되풀이 설명하기보다 이 등식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시인은 두 관념이 동일성(유사성)을 획득하는 순간의 항구성을 부정한다. 은유는 동일성의 획득 혹은 확인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동일성이 극히 짧은 순간의 접점에서만 가능하다는 동일성에 대한 회의에 의해서 성립한다. 두 관념은 ‘딸기 맛’과 ‘멜론 맛’이 회오리로 섞이는 아이스크림처럼 만났다가 어느 순간 서로를 ‘물끄러미’ 관조하는 격조한 거리로 멀어진다. 김소연은 이 ‘차이’의 확인/의심을 결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메타포의 숙명은 서정적 자아와 시인 사이의 숙명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는 것을 통렬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벗어버린 허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곤충처럼 시인은 서정적 자아를 본다. 서정적 자아와 완전히 섞여 있다가 서서히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시인의 존재론에 가 닿는다. 이 숙명은 언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구원은 한없이 연기되면서 기도가 멈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왠지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기분”(「모노드라마」)은 묘하게도 이 경우에도 들어맞는다.


4. 알레고리적 (시)쓰기 현상:범용성의 축

월간 ≪현대시≫는 1월호 특집으로 ‘문제는 환상이다’를 마련했다. 「왜, 환상인가」에서 원구식은 ‘미래파’로 불리곤 하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환상파’로 재규정하고자 하는 뜻을 내비친다. 이런 논의들은 나름대로 요즘 시의 특이성을 해명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특집의 필자들은 왜 그 동안의 시 연구에서 ‘환상성’이 그렇게 소홀히 다루어져왔는가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환상파’라는 명명은 젊은 시인들의 지형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 ‘환상파’ 안에 ‘동화파’가 있다는 것은 ‘환상파’라는 명명이 ‘동화파’와 같은 세부 지류의 차이를 균질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특집에서 이창민은 환상론은 장르론보다는 주제론으로 전개해야 더 생산적이며, ‘환상시’의 가능성을 서정주의 「서풍부」에서 시사적詩史的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풍부」의 환상성은 요즘 시에 자주 나타나는 환상의 양상과는 ‘장르론적으로’ 달라 보인다. 「서풍부」의 환상은 예외적 개인의 정신 현상이다. 「서풍부」의 ‘나’는 세상과 다르다는 ‘차이’를 티 나게 내세웠던 세대적 전통 속에 놓여 있다. 그에 반해 요즘 시에 나타나는 환상은 그런 실존적 의식을 경유했다기보다는 ‘이야기’의 한 축으로 동원된다. 요즘 시에 나타나는 환상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알레고리에 수반하는 환상이 아닌가 싶다.

지난계절에 김승일은 「미안의 제국」(≪세계의문학≫, 겨울호), 「마녀의 딸」 등 알레고리로 된 시들을 발표했는데, 어느덧 이 신인의 개성이 알레고리와 대화체로 서서히 굳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솥 안에서 눈이 녹는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실 만큼 모이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장작이 모자란다.

왜 눈밭에 얼굴을 문질렀니? 때를 벗기려고요. 동상에 걸려서 이마가 부풀었다. 내가 너무 더러워서 친구들이 따돌렸어요. 잘했다. 한동안 학교엔 못 가겠구나.

줄줄.

마실 물도 없는데 울면 어떡해. 마실 물이 있다면 씻을 거예요. 정 그렇다면 눈물로 세수를 하지 그러니. 줄줄줄줄 터진 볼이 쓰려서. 나는 더 많이 울었다.

겨울이 끝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네 엄마를 태워 죽였어.

그래서 우리 집엔 물이 없지요.

하지만 아빠. 나는 알 수 없어요. 팔 하나가 잘리면 천국에서도 팔 하나가 없듯이. 잿더미가 된 엄마는 천국에서도 잿더미인가요? 그렇다면 할머니가 불쌍해. 여든 살에 죽었으니까. 차라리

나도 크면 십자가에 매달릴래요. 그렇지만 딸아. 장작이 모자란단다. 마을에 숲이 하나 더 있다면 우리는 겨울을 끝낼 겁니다. 이것은 아빠의 말이었지.

―김승일, 「마녀의 딸」(≪문학과사회≫, 2009, 겨울호)


2000년대 이후 시의 알레고리 편향에는 얼마간 걱정되는 면도 없지 않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알레고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놀랍게도’ 세계의 구조이다. 시인들은 패악한 구조를 폭로하기 위해 알레고리를 동원한다. 그런데 이 알레고리에는 더 이상 윤리적인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의 패악함은 이제 감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이나 게임 서사에서처럼 그것은 드러나 있다. 많은 시인들이 이 공공연한 세계의 비밀을 원관념으로 감춘 채 ‘이야기’를 만드는 데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그 이야기들은 속악한 세계의 구조로 접근하는 길을 따라 전개된다. 고급독자들은 더 이상 시를 ‘물끄러미’ 보려 하지 않는다. ‘질문이 될 시간’(「메타포의 질량」)을 용납하지 않는다. 시를 읽기는 읽는데 읽고 나서 기억나는 구절이 없다. 왜냐하면 고급독자들조차 시를 읽는다기보다 이야기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이야기(스토리)의 층위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는데, 큰이야기(주제)의 층위에서는 모든 것이 범용할 따름이다.

「마녀의 딸」에서 중요한 것은 ‘마녀의 가계’라는 설정이다. 이 이채로운 혈통은 주제론적으로는 서정주의 「자화상」이나 「문둥이」 계열의 작품과 관련을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녀’는 ‘종’도 아니고 ‘문둥이’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문학의 하위개념으로서의 판타지가 아니라 대중문학에서 새롭게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판타지문학으로부터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유입된 것이다. 유하․장정일의 세대가, 모든 차이를 무화하고 중심을 해체하는 고도소비사회의 범용성을 넘어서기 위해 대중문화를 순수문학에 접합함으로써 상대적 차이 짓기에 골몰했다면, 김승일의 세대는 고도소비사회의 범용성에 이미 적응하여 차이 짓기가 아니라 범용성의 수사를 재창조하고 있다. 「마녀의 딸」의 ‘나’는 자신의 저주 받은 가계를 원망하거나 부정하지도 않고 기왕에 죽을 바에야 좀 더 젊었을 때 폼 나게 죽고 싶다고 고백한다. 천형의식을 물려받은 예외적 개인들의 서사 전통은 「마녀의 딸」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 진지해야 되는 상황에서 김승일은 너스레를 떤다. 그는 마술과 마법, 마녀와 마왕이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온 자답게 개연성보다는 아이템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그의 대화체는 다소 듬성듬성해 보인다. 그 대신 솥 안에 눈을 녹이는 마을, 동상凍傷, 집단따돌림(박해), 죽는 순간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천국에서의 삶, 십자가 등과 같은 아이템에 더 정성을 기울인 듯하다. 그런데 이와 같이 데이터 수준으로까지 분해했을 때 「마녀의 딸」의 세계는, ‘위험한 마술’과 ‘아름다운 마술’이 경합하고, “마술사들을 사실의 음모로 몰아 죽이는”(박해) 「천 개의 학을 입에 문 날들」이나 “나는 욕조에 눈을 담아 끓이는 계절에 태어났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 「어느 몽상가의 욕조―에드몽송 씨에게」(김경주, 이상 ≪문학과사회≫, 겨울호)의 세계와 차별화될 만한가의 과제를 남긴다.


5. 문학주의의 폐허(ruin), 범속성 시의 기념비

지난겨울에는 <눈물이라는 뼈>(김소연), <시차의 눈을 달랜다>(김경주),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김민정) 이상 세 권의 시집을 번갈아 가며 읽느라 참 행복했다. 심정적으로 내가 가장 친연성을 느낀 것은 <눈물이라는 뼈>였다. 이 시집에는 “흰 약처럼 쓰디쓴 고백들”(「폭설의 이유」)이 울음과 함께 쏟아지고 “이동력이 없는 것들”의 운명에 대한 연민이 위안의 말이 되기도 하는(「위로」) 정경들이 들어 있었다. ‘한숨, 약속, 통곡, 선물, 고통, 소원, 상처’(「너를 이루는 말들」)와 같은 말들로 이루어진 사람의 감성에 나는 공명되어 처음으로 시를 썼는데, 그런 원장면들이 자꾸 뇌리를 스쳤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르니까 우선 써야만 했던, 쓰면서 찾아 헤매야 했던 근원적 장면의 여운들이 길게 따라 붙었다.

<시차의 눈을 달랜다>로 김경주는 세 권의 시집을 갖게 되었다. <기담>(2008)에서 형태적 아방가르드와 낭만적 위악을 걷어낸 것이 <시차의 눈을 달랜다>라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담>의 ‘기’는 어쩌면 현대판 전기문학傳奇文學인 판타지문학에 그 탯줄을 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방면으로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세 번째 시집으로 달려가 버렸다. <기담> 판타지의 중심에는 ‘인형사人形師’가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 언젠가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차의 눈을 달랜다> 역시 앞선 시집들과 크게 다른 세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시에는 아직 ‘문학주의의 폐허’가 남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먼저 자고 있어 곁이니까」 등의 진솔한 육성이 특히 그러하다. 낭만적 아이러니의 세계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점에서 김경주는 ‘2007년 이후’(<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출간 이후)에 등장한 ‘범용성의 축’과는 또 다른 경계선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김민정의 두 번째 시집인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는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2005)의 메르헨적인 세계와는 또 다른 범속성의 세계를 열어젖히고 있다. 거의 모든 시들이 인간관계 속에서 튀어나온 것들이란 점은 경이롭다. 그녀는 속물들의 세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압수당한 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 그녀는 은유나 알레고리와 같은 시적 구성 원리들보다는 자기가 직접 체험한 일들의 현장성에 가치를 두는 듯하다. 어찌 보면 어떤 리얼리스트보다 사실주의적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대중가요와 광고 등 패러디적 요소들마저 상대적 차이를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일상의 배음으로 깔려 있다. 여자 남자 통틀어서 최근 백 년 사이 김민정이 가장 화통한 입말의 시를 썼다. 범속성 시의 한 ‘기념비’라고나 할까.

2010년의 한국시는 여러 모로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차이의 수사’가 몸에 맞지만, 시장은 ‘범용성의 수사’에 좀 더 높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시 장르의 실속失速과 더불어 시의 본질이나 근원에 대한 물음은 더 다양하게 제기될 것이다. ‘범용성의 시인들’도 이 물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이 서 있는 지점의 좌표를 혼자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2005년 이래 미래파에 집중된 관심은 미래파 주축 시인들의 세계가 어느 정도 자리잡혀감에 따라 2007년 이후 등장한 신인들에게로 분산될 조짐이 보인다. 시장의 관심에서 벗어난 ‘미래파 세대’가 어떻게 자기 세계를 지켜나가고, 어떤 지점에서 ‘전향서轉向書’를 쓰며, 앞으로도 계속 시 쓰는 자로 그 정체성을 유지해나갈 것인가를 지켜보는 것도 분명히 흥미진진할 것이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2007), 편저로 <이수복 시 전집>(2009)이 있음.

추천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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