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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책크리틱(서평)/수평의 나무와 지상의 별/장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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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크리틱|
■손제섭 시집, <오, 벼락같은>(리토피아, 2010)
■유혜영 시집 <풀잎처럼 나는>(리토피아, 2009)
수평의 나무와 지상의 별
장성규|문학평론가
1.
문학이 사회적 제도의 일부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지금 ‘문학’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근대와 함께 ‘만들어진’ 특정한 개념이다. 그러니 우리가 시적 상상력이라고 인식하는 것 역시 한국근대문학의 특수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무언가일 따름이다.
굳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글에서 다루려는 손제섭과 유혜영의 시들이 완고한 시적 상상력을 독특한 방식으로 변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제섭의 시집을 관통하는 모티프가 나무라면, 유혜영의 시집을 관통하는 그것은 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나무와 별이 고정된 시적 상상력의 범주를 일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조주의적 원형 비평의 방법론을 따르자면 나무는 식물적 상상력과 수직적 상상력의 상징으로 이해될 것이고, 별은 광물적 상상력과 천체의 상징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기실 이와 같은 방법론에 의해 한국근대시 연구의 중요한 성과들이 도출된 것 역시 사실이다. 예컨대 윤동주의 시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별을 천체적 상징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일제 말기의 엄혹한 시대상황을 버티는 이념형으로 평가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러한 해석이 거둔 문학사적 성과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은, 그리고 시적 상상력은 사회적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개념이다. 따라서 최근 창작된 시들에 등장하는 나무와 별 역시 고전적인 상징체계와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손제섭과 유혜영의 시집이다.
2.
손제섭의 시를 관통하는 것은 나무 모티프이다. 그런데 그의 나무는 일반적인 나무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나무는 하늘을 향해 오르는 수직성을 특성으로 한다. 반면 그의 나무는 수평성을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와 구별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작품을 보자.
무슨 연유로 백양사 입구 수령 삼백을 넘은 상수리나무들은 뿌리와 뿌리가 얽히고 가지와 가지들이 설 킨 채, 서로 바라보며 서 있는가. 발아래 부스러져간 시간들을 견디며 바라보는 일이 무슨 공덕이나 되는 줄 알고
―「응시」 부분
그의 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와 뿌리가 얽히고 가지와 가지들이 설 킨 채, 서로 바라보며 서 있는” 존재이다. 수직성의 나무가 고고한 주체의 의지를 보여준다면, 수평성의 나무는 관계맺음을 통해 존재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모색을 보여준다. 이 나무가 나무일 수 있는 것은 곧 “서로 바라보며” 서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주체성은 하늘의 추상적 가치를 지향하는 존재가 아닌 “발아래 부스러져간 시간”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 시는 예컨대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거대한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 사소한 부스러진 존재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복원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아래 부스려져간 시간”은 어떻게 시화詩化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동시에 당연하게도 그것은 어려움을 승인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부스러진 존재는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서로의 관계맺음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 형식의 모색은 시적 주체의 발화가 전면화되는 고전적 서정의 아포리아를 넘어서는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제섭의 다음과 같은 발화는 정직하다.
힘에 겨운 짐을 지고 너의 등줄기를 기어올랐다. 구부러진 너의 목덜미 근처에서 미끄러졌다. 내 손바닥이 젖고 주름살이 더 늘었다. 가볍고 환한 너의 몸속에 들어가기 위해 말갛게 눈 뜬 너를 깨트릴 순 없었다.
―「빈병」 전문
수직성의 주체는 부스러진 이야기들을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재구성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정작 부스러진 이야기들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서정에 필요한 것은 “가볍고 환한 너의 몸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말갛게 눈 뜬 너를 깨트”리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구부러진 너의 목덜미 근처에서 미끄러”지는 것, 그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힘에 겨운 짐을 지고 너의 등줄기를 기어”오르는 것이다. 이 과정을 경과할 때, 비로소 온전한 수평성의 상상력이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손제섭의 시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특히 형식적인 측면에서 시적 주체의 발화가 다소 거칠다는 점이 그렇다.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시적 상황에서 과도하게 서간체를 도입한다든가, 구어체가 그대로 텍스트에 노출되면서 언어적 긴장감이 풀어진다든가 하는 점은 다소 아쉽다.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불교적 사유가 다소 돌출적으로 텍스트에 삽입되는 점 역시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3.
유혜영의 시를 관통하는 것은 별의 모티프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별이 천체가 아닌 지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다음을 보자.
그를 버린 세상을 세어본다.
2홉들이 참이슬 1, 2, 3, 4, 5…….
지구가 휘청거리더니
길이 일어서서 박치기를 한다.
직립한 것들이 돌려차기를 하고
시간이 빙빙 돌리다가 패대기친다.
산다는 것은 도리깨질 속에서 콩알로 튀는 거다.
별을 띄우는 공정이다.
지하도 바닥 여기가 목이 좋다는 것은
모두가 돌아가는 길목이라는 거다.
돌아가는 길이 이곳을 통과한다는 거다.
―「환승하는 별-별1」 부분
그녀의 시집의 첫머리에 수록된 작품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별은 지상의 존재로 설정된다. 별은 천체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 즉 “도리깨질 속에서 콩알로 튀는” 공정을 거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별을 만드는 행위는 바로 “지하도 바닥”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이 존재들이 통과하며 경로를 환승하는 곳이기에 그러하다. 바꾸어 말하면, 별은 지상의 존재들이 변이하면서 생성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녀의 별은 현실과 밀접하게 결합된 새로운 시적 상징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획득한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의 시 곳곳에 한국문학사의 주요 시인들의 영향이 표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다음의 작품을 보자.
나는 차라리 풀잎처럼 땅 위에 누워 버리고 싶어. 풀잎은 바람이 사나워도 쉽게 넘어지지 않지. 산을 몽땅 밀어낸다 해도 풀잎은 풀잎으로 남아있지. 누구라도 나를 손쉽게 건넜으면 해. 그래서 산보다 더 가파른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면, 풀잎처럼 나는.
―「풀잎처럼 나는」 부분
순이 아버지는,
밤마다 아들이 군에 간 사이
새 며느리의 방을 찾았단다.
늑대는 달이 떠오르면
달 하나 잡아먹고
어둠 속에서 울부짖고는 했는데,
달이 몇 번 몸을 바꿔치기 하던 어느 날,
요강에 농약을 토해놓은 며느리는
땅속 깊이 숨어버렸단다.
순이 아버지는 날마다
며느리 찾아 산으로 가고,
대낮에도 날뛰는 늑대 한 마리
동네 사람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그만 그녀의 무덤 앞에서
목숨을 끊고 말았단다.
어릴 적 들리던 그 늑대의 울음
달밤이면 가끔 내 머릿속에서 살아나곤 해.
―「늑대의 울음소리」 전문
첫 번째 시에서는 김수영의 영향이 드러난다. “풀잎은 바람이 사나워도 쉽게 넘어지지 않지”라는 진술은 물론 제목에서도 김수영의 「풀」을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다. 두 번째 시에서는 서정주의 영향이 드러난다. “(……) 달이 떠오르면/달 하나 잡아먹고/어둠 속에서 울부짖고는 했는데”라는 진술과 강한 리비도의 분출에서 서정주의 「문둥이」로부터 영향받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향이 단순한 모방에 그친다면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려울 것이다. 유혜영의 시가 주목되는 것은 그녀가 이들의 시적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변용시키고자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첫 번째 경우에서 두드러진다.
김수영이 날카로운 현실비판인식을 매개하기 위해 풀의 이미지를 사용했다면, 유혜영은 타자와의 교감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주체성을 형상화하기 위해 풀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그녀의 별이 바로 “모두가 돌아가는 길목”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녀는 앞서 살펴본 「환승하는 별-별1」에서 별이 만들어지는 장소를 위와 같이 말한바 있다. 그런데 장소는 진술되었지만 별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한 시적 진술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 방법이 서술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작품이다. 주체와 타자간의 위계질서 대신 “누구라도 나를 손쉽게 건넜으면 해”라는 진술이 이루어지면서 이 작품에서는 타자와의 교감이 전면화된다. 즉, 그녀는 자신만의 시적 상상력을 진술하기 위한 방법으로 김수영의 ‘풀’을 새롭게 변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유혜영의 시가 거둔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유혜영은 보다 나아갈 필요가 있다. 우선 시적 사유의 측면에서 보다 정치하게 자신만의 시각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녀는 종종 모성성이나 생태학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 사유가 자신만의 목소리로 나타나기 보다는 다소 일반적인 층위의 것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모성성이나 생태학적 상상력이 종종 현실로부터 유리된 공허한 담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점은 이후 그녀의 작품에서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보인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선배 시인들의 영향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시각을 통해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치열한 자의식이 동반되지 못한 영향은 자칫 모방에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여전히 시적 상상력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과거와는 다른 현재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미적 조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과거의 시적 상징이 지니는 함의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손제섭과 유혜영의 시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적 상징의 의미를 변주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시가 온전히 새로운 시적 상상력의 한 전범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경청해야 한다. 우리에겐 수평의 나무와 지상의 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성규, 문학평론가,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재 광운대, 경기대 등에서 문학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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