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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책크리틱(서평)/‘즐거운 나의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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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크리틱|
■김종성, <마을>(실천문학사, 2009)
■김윤영, <내 집 마련의 여왕>(자음과 모음, 2009)
‘즐거운 나의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정현|문학평론가
1. 상품으로 변한 터전
인간은 누구나 안정된 자신만의 터전을 갖기를 꿈꾼다. 사회에 진출하고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부터 노년에 이른 이들까지 많은 이들이 월세나 전세방이 아닌, ‘자신의 집’을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안정된 터전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희망은 한국 사회에서 쉽게 배반당한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거주와 휴식의 의미를 상실하고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도시만이 아니라 도시 외곽지역과 농촌지역에서도 나타난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시행되는 뉴타운과 신도시 계획들, 편의시설과 도로의 확충, 골프장과 같은 위락시설의 건립 등으로 삽질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영화 <아바타>에 그려진 외계 행성의 원시 자연에 경탄하며 대기업과 정부가 행하는 무분별한 개발을 반사적으로 규탄하지만 자기 동네가 개발 대상에 선정되거나 집값이 오르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심리는 소박한 이기심이 지나지 않는다. 삽질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득을 보는 자들은 따로 있다. 모든 도박이 그렇듯이, 소수만이 이득을 챙기게 되는 이 불공정한 게임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럽기 때문이다. 부동산을 거래하는 것으로 몇 배의 이득을 합법적으로 남길 수 있다니,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 일인가. 도박에 중독된 자들이 잃을 가능성이 더욱 큰 사실을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듯이, 부동산에 쏠리는 사람들의 관심은 식을 줄 모른다. 판돈을 잃어버린 자의 한숨과 눈물은, 엄청난 이윤을 본 자들의 환호성과 화려하게 뒤바뀐 건물에 쉽게 묻혀 버린다. 2008년 가을, 미국을 시발점으로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가 거주 공간을 상품으로 취급하며 무리한 대출을 유도한 부동산 시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정부는 종합 부동산세와 양도세를 완화하여 부동산 시장의 거품으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역주행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와중에 타격을 입는 것은 대통령 자신이 그토록 위한다는, ‘서민’ 들이다. 서민들을 비롯한 대다수 국민들도 이 사실을 알지만 애써 외면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락’이라는 폭탄을 돌리는 이 게임에서 자신이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럴 때 주식을 사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자가 국가의 수장인 나라에서, 명백한 투기 사실을 부인하며 “단지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어이없는 진술을 하는 정치인들에 비하면 서민들이 부동산에 거는 기대는 차라리 순진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때로는 이 순진함은 적나라하기에 더욱 추악한 풍경을 만든다.
지난 해 겨울 출간된 김종성과 김윤영의 작품은 ‘터전’이 ‘상품’으로 전락한 우리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부동산을 바라보고 있어서 흥미롭다. 김종성의 <마을>(실천문학사, 2009)은 수도권 외곽의 ‘초림시’를 배경으로, 김윤영의 <내 집 마련의 여왕>(자음과 모음, 2009)은 서울을 배경으로 거주 공간이 철저하게 상품으로 변질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을 그리고 있다. 두 소설은 시종일관 웃음을 코드로 삼고 있지만 ‘집’과 ‘개발’을 둘러싸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목도하면 어떤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이 씁쓸함의 기저에는 주택 공급 과잉의 시대에, 상위 5%가 전국토의 절반 이상을 소유한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뛰어다녔고, 지금도 터전을 찾지 못한 많은 이들의 아픔이 존재한다.
2. 더 이상 '우리'일 수 없는 마을 사람들
김종성의 <마을>(이하 개별 작품과 쪽수만 표시)은 신도시 ‘초림시’를 중심으로 시세 차익과 개발 이익을 둘러싸고 원주민과 이주민들이 벌이는 연작으로 펼쳐지는 풍자극이다. <마을>의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 아니다. 10개의 연작 소설들은 초림시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 ‘드림랜드’와 그 주변에 거주한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사연은 제각각이다. 「전망 좋은 아파트」의 성준기는 아파트 단지 건설 공사가 부도로 중단된 상황에서 어렵사리 드림랜드에 이주한다. “매연에 찌들도 범죄가 들끓는 서울”(40쪽)을 피해서 초림시에 모인 사람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은 속물근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는 과도한 건립으로 떨어진 입주율을 높이기 위해 사기를 치는 건설업체들의 농간이 등장한다. 이 와중에 피해를 입는 것은 ‘친환경도시’를 꿈꾸며 이주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메뚜기」에서는 마을에 들어선 대형 골프장으로 인한 삼림의 훼손과 오염,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초고압선로를 둘러싼 원주민과 이주민들의 대립이 등장한다. 이러한 대립은 반복된다. 마을에 있는 개사육장에서 나는 악취와 소음으로 다투는 사람들(「종소리」), 분리 수거와 아파트 단지 도서관을 건립하고 ‘친환경’ 이미지를 굳혀서 집값을 올리려는 아파트 단지 주민들(「엘리베이터의 여자들」).
자신의 이득을 위한 속물들의 투쟁을 목도한 지식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마을>에 수록된 연작 소설들에 등장하는 이주민들은 대부분 배운 자들이다. 그들은 이사짐을 싸는 와중에도 <역사와 비평>을 읽는가 하면(「전망 좋은 집」의 성준기), 문화적인 식민주의를 비판하면서 E.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을 언급(「손님」의 정민)한다. 그러나 <마을>에 등장하는 먹물이 촉촉하게 배인 인물들이란 하나같이 무력하고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초림시에도 불어닥친 사교육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자식에게 주려고 영어 명작문고를 샀다가 사기를 당하는 「손님」의 정민, 한때 야학 교사를 하며 문학을 꿈꾸었으나 귀농하는 「색맹에 대하여」의 영식, 작은 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도시 근교 공장주들에게 광고를 수주하는 것이 주업무인 「춤추는 몬스터」의 형민. 이들은 모두 지식인이면서도 생활에 있어서는 모두 젬병이다. 친환경적인 초림시의 드림랜드로 '밀려난' 것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모두 정신적인 우월의식에 젖어 있다. 뒤늦게 할 수 있는 일들이란 아내가 연 가게에서 물품을 배달하거나 고지서를 들고 멍하니 서 있거나 <역사와 비평> 따위를 들춰보는 일이다. “먹물냄새”를 동경하며 공장을 뛰쳐나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채순은 초림시에서 예전의 약학선생이었던 영식과 조우하는 장면은 초림시로 이주한 무기력한 지식인의 곤혹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학교라는 게 뭘까?”
영식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글세…….”
명준이 말끝을 흐렸다.
“학교는 없이 사는 사람과 잘사는 사람의 구분 없이 모두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게 아닌가?”
“누군가 말했듯이 중세의 국교國敎와도 같은 존재인 학교는 세상의 모든 가치와 규범을 규정하는 사회의 재판소가 되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 학교는 마치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는 교회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어.”
“자네와 난 사십 대 중반이 된 나이인데도 그 썩은 동아줄을 놓지 못하고 있잖아.”
―「색맹에 대하여」 86쪽(강조는 인용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는 교회”는 초림시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빈 곳에서」의 허영환은 양재교회를 엄청난 규모로 부흥시킨 스타 목사이다. 허영환은 초림시에 있는 용담 마을의 저수지를 매립하여 교회를 세울 계획에 몰두한다. 그리고 교회 옆에 총회신학대학교 부설 사회복지대학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사회개발대학원’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허영환 목사는 용담마을과 드림랜드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한다.
“용담저수지에 간이화장실 몇 동 지어놓고 용담호수생태 공원이라고 이름 붙여놓았다 해서 관광객이 몇 명이나 오겠어요? 그리고 여자 엉덩짝만 한 땅에다 가로등 몇 개 달아놓고 초림농공단지라 이름 붙여놓았다 해서 어느 회사가 선뜻 입주하려고 하겠어요? 이따위 가지고는 한미 에프티에이 대책이 될 수 없어요.”
―「빈 들에도」, 147쪽.
허영환은 끊임없이 교단의 확장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꼭 될 것”(149쪽)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재무장한다.
한편 초림시에 원래 존재하던 ‘용담마을’ 사람들은 이주민들과 개발열풍에 맞아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분리수거와 개사육장 문제를 가지고 드림랜드 주민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용담마을에도 개발의 떡고물이 떨어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는가 하면 「동제」 임한덕 같은 인물은 아버지가 동제의 제관을 맡긴 것을 외면하고 장례용품 독점판매권과 수억대 보상금을 챙겨준다는 말에 화장장 건설을 적극 추진하며 같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골프장, 초고압 송전철탑, 화장장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력한 지식인들처럼,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늦기 전에 개발 계획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한 푼이라도 이득이 되는 길을 찾는 일 뿐이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 「동제」에서 임노인이 그토록 유지하고자 했던 동지는 결국 붕괴되고 만다. 개발 과정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에 눈이 먼 아들이 동제의 제관을 맡기를 거부하고 허영환이 동제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비판하는 설교한 시기와 맞물려 마을 뒷산에는 불이 난다. 당집이 불길에 휩싸이는 광경을 보며 임노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무력하고 속물근성에 젖은 지식인들과 나름의 삶을 위해서 개발에 동참하는 지역 원주민들, 그리고 ‘배움’과 ‘종교’, ‘바뀐 세상의 유행’을 들먹거리며 용담면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가는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조세희의 ‘난쟁이’ 연작들, 이문구의 ‘우리 동네’ 연작들, 김원일의 <도요새에 관한 명상>, 그리고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 등에서 우리는 이미 개발의 열풍이 도시를 넘어서 농촌까지 집어삼키는 풍경을 목도한 바 있다. 최근에는 이시백의 연작소설 <누가 말을 죽였을까>(삶이 보이는 창, 2008)에서도 우리는 연작의 형태로 구성된 농촌의 총체적인 붕괴, 무지와 무력함이 어우러진 풍경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개발광풍으로 인하여 침해당하는 농촌을 그리는 소설들이 대개 ‘연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농촌의 붕괴를 다루는 많은 소설들이 연작의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연작의 형식에 담겨 있는 뜻은 이러하다. 골프장, 온천, 관광편의시설, 송전탑 건설, 교육과 종교의 확장, 보상 이득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촌극들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농촌을 침입해 들어가려는 욕망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는 자각 때문이다. 유달리 높은 교육열과 신앙심(종교)은 오히려 확장과 공격적인 개발을 부채질하며 농촌을 지켜야 할 사람들도 개발 이익에 쉽게 굴복 당하지 않는가. 여기에 결정타로 타인의 주거공간을 단순한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 우리의 ‘부동산관’이 작용한다. “내 땅에서 내 집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극단적인 부동산관은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사람일수록, 부동산으로 많은 이윤을 취한 사람일수록 강력하다.
인간이 집을 짓고 머물러 산다는 것은 땅 위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세계 안의 존재가 되는 것일진대, 집과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여기는 행태 속에서 이러한 인식은 용담 마을의 당집이 붕괴되는 것처럼, 속절없이 사라지거나 약해지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부동산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뿌리 깊은 사상이 같은 마을 사람이나 같은 교육을 거친 사람들끼리도 ‘우리’라는 인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도록 만드는 것에 존재한다. E.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을 읽는 지식인들과, 야학 교사를 하며 문학을 꿈꾸던 문학청년조차도 개사육장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는 부녀회의 주장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풍경을 관통하면서 ‘드림랜드’ 아파트 단지와 친환경적 신도시 초림시는 기만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뒤바뀐다. 이 기만적인 공간은 외곽의 신도시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대한민국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 타인의 거주 공간을 철저하게 거래 대상으로 여기는 폭력은 작년 초 용산에서 뜨겁게 분출한 바 있다. 1년 가까이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소리를 높여도 사람들의 반응은 무심하다. 임 노인의 아들 임한덕은 과연 소설 속의 인물일 뿐일까. "청계천처럼 4대강 사업이 완료되고 나면 모두들 좋아할 것" 이라는 대통령의 '구라'를 무감각하게 들으면서 보상비와 시세차익에 눈이 먼 우리들과 소설 속 인물들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이 서늘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우리들은 오늘도 부동산 시세표에서 눈을 뗄 줄 모른다. 이렇게 자신의 여물통만을 중시하는 현실 속에서 연대나 개혁, 저항 같은 개념이 설 자리가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말은 언제나 상황 논리의 수사로 전락하고 만다.
3. ‘즐거운 나의 집’을 위하여
프랑스 지리학자 줄레리 발레조(Valerie Gelezeau)는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연구서에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였다.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 2007). 그러나 줄레리 발레조의 연구서 제목은 그녀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다. 모두들 오래 전부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문화와 개발독재, 그리고 좁은 땅과 많은 인구라는 정치․사회적 배경을 지닌 채 진화한 우리의 주거 문화, 다시 말해 부동산 문화가 이 외국인 연구자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춰졌으리라. 우리 문학은 지금까지 철거민을 비롯한 도시빈민의 삶과 가난의 문제에 주목하면서도 정작 부동산의 시세가 어떻게 형성되고 누가 이득을 보는지에 관한 문제들은 통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정치가들과 대기업 산하의 토건회사들, 부동산 중계업자들 같은 ‘숫자에 해박한 자’들의 몫이라고 치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를 배경으로 ‘부동산’에 관련된 세태를 적나라하게 그린 소설이 등장했다. 바로 김윤영의 <내 집 마련의 여왕>(이하 쪽수만 표시)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유명하지 않은 소설가인 주인공 송수빈은 보증을 잘못 서서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돈을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던 수빈에게 갑자기 구원이 찾아온다. ‘정사장’이라고만 알려진 어느 늙은 갑부가 수빈의 집 문제를 해결해준다. 이런 선심에는 으레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대가가 무엇일까 긴장하는 수빈에게 정사장은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노인은 산더미 같은 부동산관련 자료집과 동영상를 주면서 부동산 거래에 관한 모든 것을 속성으로 익힐 것을 주문하며 능청스럽게 말한다.
“이봐, 송 선생. 한국에서 경매만 마스터해도 부동산에서 부를 쌓을 수 있다네. 알아 알아, 자네 경매한다 그러면, 꼭 망한 사람들 집 뺏어서 돈 버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편견을 버려야 해. 꼭 경매에 들어가지 않아도 실물경제를 알려면 꼭 익혀야 된다네. 자네한테 무리한 걸 시키려는 게 아니니 걱정 말게.”(47~48쪽)
젊은 시절, 베트남 전쟁에서 한 몫을 챙긴 노인은 수십 년에 걸쳐서 부동산을 사고 파면서 천문학적인 재산을 긁어모을 수 있었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긴 이후에 생각이 달라졌다. 노쇠해서 움직이기 어려운 자신을 대신해서 '좋은 일'을 해줄 사람을 찾던 중 소설가 송수빈이 낙찰된 것이다. 송수빈에게 던져진 책무는 서울 시내 곳곳의 부동산 시세와 경매를 분석해서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집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가격의 집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꼬박꼬박 통장에 월급도 넣어준다. 집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던 한 여자가 졸지에 부동산 경매 전문가로 변하기까지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는다. 송수빈은 꼼꼼하게 부동산 지식을 익힌 후에 현장에 투입되어서 괄목할 성과를 낸다. 부모를 잃고 형제 둘이서 어렵게 살아가는 형제에게 6천만 원의 싼 값(!)에 집을 구해주는가 하면 간호사로 평생을 살았던 노인, 지진아 훈이를 홀로 키우는 여자에게도 적절한 가격의 집을 마련해준다. 수빈은 치고 빠지기, 집단 경매로 바람 잡기, 경매 대상인 집을 살피고 결점을 잡아 가격 깎기, 주변 시세와의 비교 등 오늘날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자들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상 밖의 성과에 고무된 정사장은 점차 수빈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마음을 열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빈의 마음은 편치 않다. 자신의 외국인 남편 그렉이 태국에서 실종 되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인데다, 사람이 사는 터전인 집값이 그토록 쉽게 오르내리도록 손을 쓰는 특정 집단과 사람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자신에게 무한한 도움을 주는 정사장도 알고 보면 ‘투기꾼’에 불과하지 않은가. 수빈이 태국에서 실종된 남편 그렉과 사랑을 키웠던 곳은 바로 인도의 빈민촌이었다. 그 곳에서 빈민들을 치료하고 빨래와 설거지를 돕는 그렉을 보면서 수빈은 한심해하지만, 곧 “철딱서니 없고 순진하기만 한 자원봉사자들”(273쪽)에 섞여버린다. 그들은 그 후로 아프리카의 오지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면서 “연인이 아니라 동지와 같은 감정”(275쪽)을 통해서 사랑에 빠진 부부였다. 그랬던 남편이 태국에서 탈북자들을 돕다가 실종된 채 소식이 끊기고 딸 지니는 실어증에 걸린 상태이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정 사장은 수빈에게 긴 편지를 남기고 죽는다.
여기서 영화 같은 반전이 기다린다. 그리고 사실감 넘치게 부동산 정세에 대한 분석이 흘러넘치던 소설은 갑자기 대책 없는 ‘해피엔드’로 치닫고 만다. 정 사장은 죽기 전 이미 수빈의 남편 그렉을 찾은 상태였으며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렉을 치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수빈은 남편과 재회하고, 당연하게 딸은 입을 열게 된다. 수빈은 정사장이 곧 크게 집값이 뛸 것이니 “절대로 팔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집을 미련 없이 팔고 가족들과 다시 긴 여정에 오른다. 이러한 결말에 이르면 부동산 거래 세태를 고발하던 소설은 한 여자의 진심이 수전노를 감동시킨 평범한 성공담으로 전락하고 만다.
“당신들 아직도 머리가 이상한 거 아냐? 아직도 여기 실정을 감 못 잡는 것 같은데…… 여긴 미국이 아니야! 코딱지만 한 땅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이라고. 지금 바닥 치고 다시 집값 꾸역꾸역 올라가고 있는 거 안 보이슈? 2009년은 다시 대세 상승의 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부동산공화국이야. 부동산이 투기라고? 누가 그래? 길 막고 물어봐, 부동산은 보험이라구, 아냐? 아니 왜 망해? 부동산 떨어지면 대한민국 거덜나는데, 경제 디폴트 몰라?”(330쪽)
정 사장의 비서였던 정 실장이 펄펄 뛰면서 떠나는 수빈에게 던지는 말은 어쩌면 평범한 대한민국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빈과 그렉, 딸 지니는 결연히 부동산 담론으로 넘치는 대한민국을 떠난다. “한 괴짜 노인의 공상와 같은 소망이 이 빡빡한 세상에 그래도 희미한 불빛이 될 수도 있”(322쪽)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알고 있는 것과 실천의 간극이 넓을 때, 지나치게 현실감이 떨어질 때 우리는 텍스트의 행복한 결말에 쉽게 동화되지 못한다. 작가의 상상과 바람으로 직조되는 텍스트와는 달리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견고하기 때문이다.
김종성과 김윤영의 소설은 분명한 ‘세태 소설’이다. 최근 소설들에 담긴 소시민들의 일상은 정치적인 알레고리를 담은 농담(장정일, <구월의 이틀>)과 혁명 같은 변화는 꿈꾸지도 않는 지리멸렬함(박금산,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김연경, <고양이의 이중생활>) 등을 그리며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동안 우리 소설이 간과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일상과 문제적인 에피소드들은 바로 거주 공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간단한 사실이다.
요즘 시대에 위기의 진정한 개념은 관념적인 사상의 대립이나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듯하다. 1997년 경제 위기 이후에 서민들의 삶은 이제 거주 공간의 존립 그 자체까지 위협받고 있다. 부동산이 거의 전 재산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화두나 사상의 문제는 불필요하거나 어려운 관념의 영역에 불과하지 않을까. 미국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굳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거주 공간이 무차별한 상품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더 이상 ‘집’이란 ‘즐겁고 안락하고 휴식을 주는 공간’이 아니다. 지금 청춘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현실도 자신만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연결되어 있다. 잔혹한 현실에서는 ‘정사장’과 같이 마음을 바꿔 선한 일을 하는 수전노도, 상승이 보장된 집을 버리고 자원봉사를 떠날 수빈과 같은 여인도 존재하기 어렵다. 세속이란 어리석음과 욕심을 매개로 하는 인간들의 굳건한 관계망이다. 이 관계망의 족쇄를 푸는 해법은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즐거운 나의 집’은 존재하기 어렵다. 김종성과 김윤영의 소설은 그러므로 세태소설인 동시에 우리의 현실을 관한 우화로 읽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소설 속 인물들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을 때, 교육과 종교가 출세나 입지 굳히기의 수단에서 벗어날 때, 부동산을 가지고 숫자놀음을 벌이면서 불안과 공포를 조작하는 이들을 언론과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이 딛고 있는 공간은 ‘즐거운’ 삶의 터전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두 작가의 세태 소설을 그러한 제언提言으로 확장하여 독해하고 싶다.
이정현∙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추천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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