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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이 시인을 다시 본다/재발굴/메주 외 4편/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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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메주 외 4편
그해 겨울 온 집안 수상한 냄새가 가득했다.
겨우내 아랫목 차지를 하던 증조할아버지
오래 누워있던 등허리 욕창이 번지고,
가끔 어머니와 할머니 마른 몸을 뒤적였다.
어느 날,
할머니와 어머니 불길한 징조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이명처럼 까마귀 울음을 들었던가.
한밤중 조심스레 마른 몸을 닦아 아랫목에 뉘이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짓을 훔쳐보곤 했다.
욕창의 자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다고,
시커멓게 자라던 속병의 뿌리가 겉으로 나온 것이라고,
씻어도씻어도 자라는 불길한 징조.
어느 깊은 밤
할머니와 어머니 마주 보며 도리질 하는 것을 보았다.
등허리에 오랜 시간 앓아온 욕창의 흔적들이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그해 봄이 오기 전 아랫목은 비워졌고,
그의 몸내는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 메주에 검은 곰팡이가 머리카락처럼 자라는 것은 발효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춘화春化, 혹은 춘화春畵
그녀 이름은 춘화. 꽃다지처럼 작고 이쁜 여자. 춘설 분분하던 밤 어미 치마꼬리 묻어간 여자.
우리 엄니 안산에다 보따리 풀었지. 그 웬수 같은 것 만날 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지. 그 눔, 아들 둘 딸 하나 알까듯 내질러놓고 야반도주 하더라. 새 새끼 같은 새끼들 굶길 수 없어 공사판 함바집 목숨줄처럼 쫓아댕겼지. 다른 생각 비집고 들어올 틈이 어딨어. 근데 새끼들 여나문 살 넘어가니 내 사는 게 뭔지. 함바집 끝내면 술 멫 잔 같이 하던 댓살 아래 총각 취중에 농담처럼 우리 한 번 사는 거맨치 살아나 보자고, 사글세방 두 칸 얻어 애덜이랑 제비새끼맨치 한 일이 년 새새거렸나. 열두 층 아파트 공사장 벽돌지고 올라가다 지가 무슨 낙화암 삼천궁녀라고, 벌건 꽃이파리 낭자한 자리 멫 푼 나온 위로금도 내 차지는 오덜 않더라. 보도 듣도 못하던 시누이 나타나 하나 밖에 없는 핏줄이라고, 그 눔 남긴 거라군 보증금 까먹은 밀린 사글세하고 구멍 난 난닝구 빤쓰더라. 끈질긴 게 목숨이라고, 한숨 몇 번 쉬고 술 몇잔 털어 넣고 몇 번 울다보니, 정강이 아래 오던 새끼덜 고갤 젖혀야 콧구멍 보이고, 내 말은 멕히지도 않아. 즈덜 끼리 컸다고 천지사방 제가끔 가고, 내 혼자 굴러 댕기다, 느즈막 만낸 게 가진 건 불알 두 쪽 서너 살 아래 호래비라 둘이 애쓰면 산 입에 거미줄 치겄냐, 식당 설겆이는 기본 함바집 밥쟁이야 워낙 이력이 분분, 건물 소제도 빽이 있어야 허겄드라. 유원지 쫓아댕기며 들병이는 안해 봤나. 그 눔 게으름이 오뉴월 염천에 개 셋바닥맨치로 늘어지고, 술 처먹으면 눈깔이 돌아 여편네 장작 패듯 하니, 이삼 년 견디
다 못해 도망치듯 나와 참새 목심만도 못한 거 살아 뭘 할까. 칵, 목이나 매야지. 소주 한 병 마시고 산에 올라가다 산길에서 만난 사내 길 옆 묏둥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 하며 이 묏둥이 죽은 마누라 뫼라. 죽은 마누라 잊자고 마지막 온 거라. 집도 한 채 있고 도라꾸도 한 대 있으니 죽을 결심이면 나랑 한 번 살아보자 두 손 덥석 잡기에, 목 매러가던 치마끈 집어던지고 그 남정네 뒤따라 나섰지. 알콩달콩 별 세상 다보며 사람대접 받으며 이게 사는 거구나. 내 살아생전 그 때만큼 살 맛 나던 세상 없었는기라. 대여섯 달 꿈같은 세월 보냈나. 일 생겼다고 한 동안 못 들어온다던 사내, 온다기에 육곡간 댕겨 쇠괴기 한 칼 끊어 대문 들어서 마루 끝에 막 신을 벗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새파란 여자 머리끄댕이 잡고 조리돌림 하면서, 낫살이나 쳐먹어 허구 많은 사내 중에 하필이면 여편네 있는 사내냐.
그 길로 나와 버린 게 여그꺼정 왔구먼. 나 우리 엄니 눈에 선혀. 아직 잊지 않고 있구먼. 구 시장 순댓국집 손님 끊어진 밤,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첫 사내 씹고, 두 잔 털어 넣고 담 사내 뱉아내고, 어느 사내앤지 냉이꽃처럼 해끄므레한 지지배 연신 에미 술잔 빼앗고.
진외할머이
우리 할머이 친정 어매 아들 내외 앞서 보낸 죄
손주 며늘애 보기 떫다고 사우집에 얹혀 살았는데,
그때 내 나이 여남은 살.
진외할머이, 나가 아를 낳기는 일곱을 낳았는디, 모다 산림감수로 보내뿌리고 여덟 번째 아를 낳을 재. 막달이 차 남산만한 배를 안고 콩밭을 매는디, 밭고랑에서 금방 아가 나오는기라. 호미 내던지고 아를 쑥 낳아 태를 갈라놓고 보이, 서방보다 중한 일소 저녁 꼴이 없는기라. 산후 국밥이 뭐시다냐. 봇도랑가에 실하디 실한 안들메가 생각나 가랑이 사이 핏물 줄줄 흘리며 봇도랑에서 꼴 한 짐 베어, 분명 외양간 소궹 앞에 내던졌는디 아 글씨, 여그가 어디메냐. 보도 듣도 못한 곳에 서 있는 기야. 허허 벌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디. 인가도 없는 저 만치에, 다 씨러져 가는 초가집 하나 보이는 기라. 언제 이엉을 덮었는지 지붕 위에 쑥대 한 질은 자라 까마구 둥지를 틀겠는 그 집에 주막집 등이 달린기라. 염치 불문곡직 안으로 들어 지시우 지시우, 불러싸니 헝클어진 삼베꾸리 같은 머리를 한, 코가 땅에 닿는 할멈 하나 나오는기라. 내가 집에 가야 쓰겄소. 갓난 아가 에미 젖을 찾고 있소. 허니, 부강지 끄슬린 숯검대이 강아지 한 마리 주문서, 이눔만 쫓아가면 길이 나올기니 놓치지 말라 하더라구. 고 숯검대이 강아지, 쫄래쫄래 꼬리 흔들며 할끔할끔 뒤돌아봄시 가는디, 이눔만 놓치면 집은 다 갔다 싶어 용을 쓰고 쫓아갔지. 허허벌판 을매쯤 가다보이 강이 나타나는디 내 여직 그렇게 무서운 강은 보덜 못했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도 근너 편이 보이질 않는 기야. 그 넓디넓은 강물 을매나 시퍼런지 엇찔엇찔한데 그 위에 낡은 섶다리 하나 아슬아슬 걸려 있는기라. 숯검대이 강아지 쫄래쫄래 뒤돌아 봄시 잘도 건너가는디 시상에 속은 울럭울럭하지, 다리는 허청거리지, 걸음마 배우는 아처럼 반쯤이나 건넜을까, 아 글씨, 앞에 가던 강아지 시퍼런 강물에 풍덩 빠지는 기야. 을매나 놀래. 아이코야 소리치며 두팔 휘저으니, 여기저기 살았네. 증말 살았네. 웅성웅성 하는 소리에 휘휘 돌아보니 개 껍대기 같은 누대기 속에 누웠더라. 데부짝 같이 부운 몸땡이 소궹 앞에 까무러쳐 사흘 낮 사흘 밤 죽어나자빠져 거적대기 말아 파묻을 참이었단다.
구십 하루 앞둔 진외할머이 스무 번도 더 들은 저승 가다 온 이야기.
사람 멩命이 사람 맴키로 안 되는 기라.
아들 내외 멩命까정 이어 받아 여직 사는 게라고.
도가니탕
만물상 장돌뱅이로 새우잠을 자는 박씨.
온종일 장마당 지키다
먹다만 무 쪽 같은 달을 씹으며
종일토록 절은 몸 반 평 여인숙에 뉘인다.
오그린 잠속 육십을 넘긴 무릎이 아프다.
장돌뱅이도 옛말이지. 텔레비전 안에서 사고파는 요상한 세상에 어떤 시러베 아들놈이 장바닥에 펴놓은 개뼈다귀 같은 공구들 들여다보기나 할까. 오늘도 공치나 했더니 허름한 바깥노인네 쁘라이어 도라이바 셋트 신기한 듯 들여다 보다 오백원을 깎는다. 그래 오랫만에 목구녘 때나 벗기지. 우거지 같은 만원 한 장 받고 동전 하나 거슬러주고.
삶은 오래 될수록 누린내가 난다.
살점 다 떨군 뼈다귀에서도 이런 진국 우러나는데
도가니탕 한 그릇 앞에 놓고 자꾸 무릎이 시큰거린다.
오금이 물러앉기 시작한 것이 아마 그때부터였나보다.
차라리 못 본체 할 걸.
벌건 대낮 방문 열어젖히자 삶은 국수발처럼 얼크러져 있던 년 놈들.
그 길로 마누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뽀얀 국물 속에서 팅팅 불은 국수발을 건져 올리며
내가 너무 머언 길을 돌아왔지.
가마솥에 잠긴 무릎뼈가 자꾸 시큰거린다.
슈림프 피쉬, 서점을 가다
열린문고 앞 하수구를 찾지 못한 빗물들이
대형 수족관이 된 길 위를 출렁거린다.
올 풀린 청바지를 입은 여자
물구나무서기로 헤엄치는 슈림프피쉬처럼
바지 끝자락 아가미 곁의 지느러미가 되어 흔들린다..
회청색 물고기 유유히 물 위를 유영한다.
펄쩍, 수족관을 뛰어넘는 슈림프피쉬
물이 없어도 그녀의 지느러미는 쉬지 않는다.
열린 문고 안 훅, 풍기는 물비린내
후두둑, 떨어진 물비늘들이 바닥에 흥건하다.
김영희∙ 1994년 ≪강원작가≫로 등단.
소감/
새롭게 출발하며
울 옆집 사내 두 번째 결혼식이라고
슬그머니 초대장을 보냈다.
그 사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축가를 불렀다.
열 살 아래 두 번째 아내의 어린 딸이 축가에 맞춰 몸짓을 보여 줬다.
두 번이라는 명사가 왠지 서러운 날이었다.
두 번째이기에 폼 나는 글을 쓰고 싶다./김영희
추천평/
누구도 부정 못할 언어적 천품 타고난 시인
문예지나 시집에 발표 되는 시를 보면 대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십여 년 전부터 부쩍 많아진 문학 교육기관을 통해 학습된 시들과 둘째는, 드물지만 날 때부터 시적 천품을 가지고 태어난 시인의 시이다. 그 어느 편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별재능이 없이 학습된 방법으로만 시를 쓰는 경우 대부분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와 언어적 역량의 부족을 기교로 커버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이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시적 천품을 가지고 태어난 시인의 시들은 아무리 어둡고 험한 이야기를 해도 마치 어두운 색깔의 비단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중후한 깊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김영희의 시는 대부분 스토리 시인데 그 속에는 입으로는 이루 다 못할 이 나라 여인들의 한이 짙은 운무雲霧처럼 서려 있다. 그녀의 시에는 아무리 시詩에 문외한門外漢인 사람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누구도 부정 못 할 언어적 천품이 담겨있다. 문화적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들 사이에서 이렇게 스스로 가진 재능의 소환에 의해 활화산처럼 분출된 시를 만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나는 그녀의 늦은 문학적 출발이 절대로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것은 깊고 다양한 문학적 서사를 위한 필연이었다고 믿고 싶다. 대성을 빈다./이경림(시인)-글, 장종권(시인,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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