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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초점/임규찬의 강의실 속 문학 이야기②/임규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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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717회 작성일 09-12-2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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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초점/임규찬의 강의실 속 문학 이야기②/임규찬

우리 것의 맛과 멋과 아! 황진이․




1.

나는 강의실에서 틈만 나면 우리 문학이나 예술, 혹은 문화 등이 발산하는 독특한 맛과 멋을 가능한 한 많이 이야기해주고자 한다. 그렇다고 내가 거기에 대해 어떤 일관된 지식과 이론을 갖추고 있다거나 혹은 그것을 목표로 체계적인 강의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틈나는 대로 이런저런 이야기거리 뒤에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곁들여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옛것에 되비추어보는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자 할 따름이다.

물론 최근 들어 우리 문예의 특수성이랄까 특질이랄까 이런 미학적 접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과거의 문화자산이 나이 탓인지 갈수록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재발견되는 지적 기쁨이 물큰하다. 뜻밖에도 젊은 기운 같은 것을 옛것이 길어온다. 그렇다고 기존의 어떤 방법론을 당장 이것으로 대체하고 싶다거나, 아니면 새롭게 체계화하여 하나의 온전한 어떤 틀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그저 좀더 자유롭게, 큰 틀에서는 큰 틀 차원에서, 아주 구체적인 대상 속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양상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것, 혹은 익숙해진 것, 혹은 확고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여 오늘 우리의 혹은 나의 어떤 틈새나 이면, 혹은 혼란이나 모순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지나온 역사와 나를 다시 살아보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강의실에서 단편적으로 삽화적으로 불쑥불쑥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차별화 전략이 내포하기 쉬운 독선적이고 과도한 측면에 대한 경계의 공부이기도 하고 또 성급한 이론과 체계가 가져다줄 자폐적인 측면에 대한 반면 교사의 수련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어떤 종합화로 수렴하여 견고한 구조적 성질이나 체계적 특성화를 말하려고 하기보다는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풍부하게 일반화하면서 개성화되는 문화의 확산과 의식의 신축성을 위한 열린 대화법에 가깝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멋의 성격은 서양 혹은 같은 동양권과의 비교를 통해 변별해낸 특별한 차이 같은 것도 있지만 때로 서양과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 다르기도 하는 것들, 또한 그것들은 같은 동양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에 반하는 것들, 혹은 우리가 별로 신경쓰지 않아 어느덧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정도로 내 안에 자리잡은 무지無知에 대한 비판이랄까 그런 일종의 자기 발견, 말하자면 우리 안의 우리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의 미학적 특질에 대해서는 한때 상당한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 등의 선구적인 작업을 거쳐, 해방 이후 50년대 조윤제, 신석초, 조지훈, 이희승 등의 노력과 70년대 김지하를 중심으로 한 민중문화운동의 재발굴 노력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시도나 접근들이 거의 사라진 듯하다. 세계 자체가 워낙 세계화되다보니 그런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세계화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안팎의 비교와 그것을 통한 적절한 조화와 창조적인 제3의 모색이 더욱 긴요할 듯싶은데 워낙 속도가 빨라서일까, 세계화의 주도적인 흐름에 일방적으로 끌려만 가는, 아니 때로 적극적으로 편승해가는 그런 형국 같다. 물론 상황을 탓하기 전에 과거의 접근방법이 갖고 있는 폐쇄적인 측면이나 자기모순의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미적 특질론이 우리 고유의 어떤 성질로 개념화되면서 이야기되어 왔다. 가령 신석초의 「멋설」(≪문장≫ 1941년 3월호) 가운데 한 발언을 보자.


우리는 멋지다 혹은 멋이 있다고 말한다. 이 어휘는 특이한 것이다. 지나支那(중국-인용자 주)에서 말하는 풍류風流라든가 낙취樂趣라는 것에 근사近似하지만, 스스로 의미가 다르다.


신석초는 이처럼 ‘멋’을 우리 민족의 독특한 미의식이라고 보았다. 이희승이나 조용만, 조지훈 등도 마찬가지였고, 이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말하자면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미의식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멋’에 대해 이론적인 접근을 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찾은 전통적 미의식이 결국 신석초의 경우 사대부적인 미의식 때문인지 도입부에서의 문제설정과는 달리 ‘멋=풍류, 낙취’로 귀결되고 만다. 신석초뿐만 아니라 대개가 특수한 것을 지칭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아주 일반적인 것으로 되돌이하는 모순을 노정하고 만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우리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때에 따라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특수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것이 문화인데, 따라서 여러 겹의 일반성과 특수성, 그리고 상대성이 한데 어울려 있는데 그것을 단원적이고 평면적 차원에서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길을 내고 만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김치’란 것도 지금으로서는 고추장을 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온 때가 대략 임진왜란 무렵이다. 16세기경 일본에서 처음 고추가 들어 왔고, 이후 여러 품종이 중국에서도 들어와 17세기 쯤에 일반에 널리 퍼져 18세기에는 본격적으로 고추가 우리 밥상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김치 자체도 이렇게 역사적으로 복잡한 성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은 단절의 시대에 필요한 작지만 의미있는 역사적 실천은 우리가 애써 키워왔던 것 가운데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혹은 다시 생각해볼 만한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는 우리 식의 ‘오래된 미래’를 여러 형태로 가능한 풍부하게 내보이는 일상적 노력이다. 사실 오늘의 우리를 스스로 되돌아보건대 현재의 상태야말로 뭐라 규정하기 힘든 잡종의 혼란, 가치관의 무정부상태가 아닐까. 가장 급격했던 세계의 격랑 속에서 좌충우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서구화에 휩쓸려 왔던 근현대사이기에 이제 우리의 옛 사상 혹은 동양사상은 가장 친숙한 듯하지만 가장 먼 것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강제적으로 전통의 단절을 겪은 공황상태에서 해방 후 미국의 상업문화가 급류처럼 밀려들어왔기에 면역력이 없는 체질에 이런저런 것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것이다.


2.

이상에 이야기한 것들을 우리의 일상에서 의외로 쉽게 가늠해주는 것이 바로 말, 언어이다. 흔히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언어가 다르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을 형성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단어에 대한 생각도 사물에 대한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말하자면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연이나 문화 양상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개념을 부여한다. 가령 에스키모 인들의 언어에는 우리가 ‘눈[雪]’이라고 말하는 총칭적 개념어가 없는 대신 ‘내리는 눈’, ‘쌓인 눈’, ‘바람에 날리는 눈’, ‘집을 짓는 데 쓰이는 눈’ 등으로 세분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영어에는 ‘말[馬]’의 종류를 나타내는 단어가 많고, 아프리카의 마사이 언어에는 소를 나타내는 단어가 무려 16개나 있다고 한다. 영어에서는 쌀과 관련하여 ‘rice’라는 말만 사용하는데, 우리는 그 상태에 따라 ‘모, 벼, 쌀, 나락, 밥, 메’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표현한다. 그런데 필리핀의 피루게오 언어에는 무려 쌀 이름이 20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언어와 그 사회의 문화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입증해준다. 말하자면 개별 언어권 사이에는 각기 나름의 일반화와 특수성이 있기 마련이라 비교의 작업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성급한 절대화는 경계해야 한다. 물론 개별적 차원으로 마냥 자유방임하자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상대화의 과정을 통해 그때마다 최선의, 최량의 것을 현재화하는 것이 과거를 살리면서 오늘을 더욱 오늘답게 만드는 바람직한 길이라는 뜻이다.

가령 우리는 바늘의 위쪽에 뚫은 구멍, 즉 바늘구멍[針孔]을 ‘바늘귀’라 하는데 영어로는 ‘a needle eye’나 ‘the eye of a needle’로 표현한다. 성서의 유명한 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를 떠올리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마태오;19장과 마르코;10장, 그리고 루가;18장에 나오는 말인데 영어 성서에는 “It is easier for a camel to pass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이라고 쓰여 있다. 보기에 따라 그 구멍을 눈으로 보느냐 귀로 보느냐가 뭐 그리 대수겠느냐 할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보기에 따라 시각 중심이냐 청각 중심이냐 하는 문화적 차이까지 거론할 수 있다. 실제로 이규태 같은 경우는 과거 우리 선조들이 최고로 치는 문화적 행위가 시각문화에 그치지 않고 청각문화의 멋으로까지 고양하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른 새벽이면 돈의문敦義門 밖 서지西池에 모여 배를 띄우고 연꽃이 필 때 내는 소리를 듣는 청련계聽蓮契, 여름이면 나귀 타고 박석 고개 마루의 노송老松 아래 모여 솔바람 소리 들으며 시부詩賦를 짓고 논하는 풍입송계風入松契의 풍류는 압권이다.


연못에 작은 배를 띄워 연꽃 사이에 갖다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는 조용히 기다린다. 연꽃은 땅거미가 걷히면서 일시에 피어난다. 피어날 때 둔탁하면서도 청량한 미성黴聲을 내는데, 이 꽃피는 소리가 ‘청연화성聽蓮花聲’. 또 노송老松 밑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솔잎 사이를 가르는 솔바람 소리를 기다리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장중莊重한 소리라고 두보杜甫가 말했던 솔바람 소리, 12음계법音階法이라는 넓은 음역音域을 구사하여 이전의 작곡가들이 내지 못했던 갖은 소리를 다 낸 것으로 유명한 작곡가 쇤베르그가 이 소리만은 끝내 낼 수 없었다고 고백한 ‘풍입송風入松’. 이렇게 자연의 소리를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 생활화했던 풍류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영어가 워낙 대세이다 보니 우리말 어문도 영어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받아 영어 중심의 양상이 만연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주어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 어문은 주어의 생략이나 이중주어문 등이 말해주듯 영어의 문장처럼 간단명료하게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가령 “이 책은 표지가 예쁘다”와 같은 이중주어 문장을 굳이 주어가 둘인 잘못된 문장이라며 “이 책의 표지가 예쁘다”로 명사구로 만들어 단일주어문으로 쓰는 경향을 보라. 더 나아가 우리 문장을 ‘주어 + (목적어) +서술어’ 등 가장 기본적인 문형부터 잘 지키지 않는 것으로 손쉽게 치부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식당에서 “난 자장면이야” 하는 우리말이 보여주는 상황 중심의 문장은 특이한 사례로 제쳐두자. 어떤 유명 영어강사가 “만화는 집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라는 쉬운 문장을 예로 들어 우리말 어법의 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한 경우를 봤다. 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하면 “우리는 만화를 집에서도 볼 수 있다[We can see comic picture at the house]”라고 해야 되므로 주어, 목적어가 잘못되어 있는 문장을 버젓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한마디로 이 영어강사는 보조사 ‘은/는’을 ‘이/가’와 같은 주격조사로 잘못 알고 있다. 주격조사라면 ‘이/가’ 외에 ‘께서/에서’가 더 있음을, 거기에 이따금 보조사 ‘은/는’이 주격조사 노릇도 한다는 것을 온전히 알고 있지 못하다. 말하자면 주격조사 역할도 하는 보조사 ‘은/는’은 때로 바로 위에 거론한 문제의 문장에서처럼 목적격 조사 노릇도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보조사라는 우리의 독특한 문법 요소를 지워버렸다. 문제의 문장은 주어를 생략했지만 무엇보다 보조사를 활용, 즉 ‘다른 것은 몰라도 만화만큼’이라는 목적어를 남다르게 강조한, 미묘한 맛이 스며있는 문장인 것이다. 이처럼 조사, 어미가 발달한 ‘부착어’‘교착어’라는 우리말의 남다른 특성 들을 고려치 않는 일방적인 영어식 문법 위주의 사고나 태도는 마땅히 우리 눈으로 끊임없이 투과시켜 지킬 것은 지키고 보완할 것은 보완해 나가는 상대화의 길이 이 점에서도 필요하다.

언어상의 직접적인 특징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말이 갖는 질적인 특성 또한 오늘과 같은 혼란시대에는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가령 우리는 천사하면 영어로 Angel 즉, 유태교와 이슬람교에 나타나는 천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가운데에서도 대개 날개를 달고 있는 아기를 떠올린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천사는 매우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난바, 때로 건장한 남자의 형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개 날개 여섯을 가지고 두 날개로는 얼굴을,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아다니거나, 각각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등 그 형상이 매우 기괴하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에 날개가 달린 괴물 형상이다. 그런데 그런 ‘천사’와 닮은 우리네 말은 무엇일까? 아마 동화 ‘나무꾼과 선녀’를 쉽게 떠올리지 않을까? 그리고 서양의 날개에 견줘 하늘하늘 너울거리는 날개옷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어령은 일찍이 그 점에 착안, “서양의 천사는 날개를 달고 있지만, 동양의 선녀들은 펄럭이며 나부끼는 옷자락의 리듬으로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역시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이한 문화적 차이를 여러 각도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실제로 상상적인 인물 형상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서양의 경우는 대개 인간과 동물을 직접 이종교배하여 태어난 듯한 제3의 괴물로 형상화되는 반면, 우리의 경우는 그 형상 자체가 변하지 않은 채 옷 등으로 감싸거나 혹은 천년 먹은 여우처럼 변신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불교의 전생담이나 업보 등 우리네의 오랜 순환적 사유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천사라는 말만 횡행하지 선녀라는 말은 아예 보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악하게 살면 벌을 받아 귀신이나 벌레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사유관에서 차차 멀어지는, 그리하여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옛것은 없어지고 새것은 아직 자리잡지 못하는 그런 혼란의 한 징표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요즘 무지개 색깔은 몇 가지 색이냐 하면 어린 초등학생부터 누구나 다 ‘일곱 가지 색’ 하며 ‘빨주노초파남보’를 말할 것이다. 그런데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오색무지개라고 했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색깔을 좀더 세분화한 거지 뭐 별거냐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하늘과 바다와 들판을 형용할 때 뭐라 하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누구나 하늘이 푸르다(파랗다), 바다가 푸르다(파랗다), 들판이 푸르다(파랗다)고 할 것이다. 진짜 과학의 잣대로 재면 ‘푸르다’, ‘파랗다’, 청색靑色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왜 신호등 가운데 하나는 녹색인데, 우리는 ‘푸른’ 신호등이라 할까? ‘오색’ 무지개에 담긴 우리네의 어떤 정서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이 또한 무의식적인 혼란의 징표이다.

사실 무지개를 오색으로 보는 데는 우리네의 남다른 청색 관념이 내재해 있다. 칠색 가운데 ‘초파남’을 ‘청색’으로 묶어내는 광역의 색상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이규태에 따르면 백(天)․적(地)․청(生)․흑(地下) 등 사분법을 기본 색상으로 가진, 그리하여 동(靑)․서(白)․남(赤)․북(黑)이며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 등 모든 방위나 계절 감각, 입맛, 사람의 덕목이나 강상網常, 그리고 사람의 이름이나 운명까지도 사색으로 나타내는 철학이 거기에 깔려 있다. 따라서 사색 문화권에서는 물이건 식생植生이건 지상의 모든 생명은 모두 ‘푸르다’로 묶어내는 포괄 개념이 생긴 것이며 그 큰 철학색에서 굳이 청과 녹을 가릴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청색역靑色域을 누린 이유도 태극의 푸른 하반부가 말해 주듯 한국인의 우주관에서 비롯됨직하다. 또 물빛[靑]과 초목빛[綠]을 분화시키지 않은 것도 푸르다는 생명력을 ‘물’로 여긴 데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봄에 신록이 싹틀 무렵 우리는 나무에 ‘물’이 오른다고 한다. 물빛과 초목의 나무빛이 같다는 발상은 바로 생명사상에 기반한 생태주의의 발로이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시대적 표지로 등장한 서양의 ‘녹색사상’보다 오히려 우리의 ‘청색사상’이 그 범위나 포괄성에서 훨씬 넓고 깊은 것이 아닌가. 설혹 과학적 접근에 따라 색깔에 대한 선명한 분화의 지식은 확대할지언정 그 기본바탕에 깔린 이런 문화나 철학은 쉬 버릴 일이 아니다.


3.

우리말의 멋진 형상은 ‘쓰레기’와 ‘시래기’와 같은 변용에서 단연 빛난다. 어원부터 따져 각기 어떻게 나왔느냐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두 말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그 말 맛이 절묘하다. 이런 예로 방금 말한 ‘맛’과 ‘멋’ 또한 제외할 수 없다. ‘쓰레기’와 ‘시래기’가 다같은 물질 내에서의 변용이라면, ‘맛’과 ‘멋’은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상호 변용과 승화가 일어난다. 닮은 듯 구별되는 이런 말의 변화야말로 우리 말의 멋 가운데 하나이다.

실제로 ‘멋’이라는 말은 음미할수록 맛있고 멋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평가 내지 비평적 용어 가운데 최고로 치는 말이 아닐까. 이와 유사한 용어로 우리는 아름다움[미], 고움[아] 등을 들 수 있다. 아마도 학문적 용어라면 단연 아름다움[미]을 가장 많이 사용할 것이다. 더욱이 번역어로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막상 일상적으로 가장 최고의 것과 만났을 때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말은 ‘멋’이다. 마치 앞서 푸르다[청색]를 우리들이 은연중 애호하는 것처럼…….

그래서일까, 이미 앞에서 소개한 미적 특질론 상당수가 ‘멋’이라는 말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멋을 부렸다’라는 말이 양면적이듯이 ‘멋’으로 모든 것을 과도히 끌어안으려는 것도 문제인 듯싶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 고움, 멋 등의 여러 개념을 두루 안고서, 또 맛과 멋의 변용도 넘나들면서 서양미학이든 중국미학이든 만나야 하지 않을까. 또 만나서 함께 하기도 하고 구별하기도 하는 다차원적인 작용을 이제 모색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럴 때 오히려 ‘멋’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더욱 또렷해지지 않을까. 가령 ‘멋’론의 구체적 미학은 지금까지 주로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직선보다는 항상, 곡선에 멋이 있다. 그러나 또 과도하게 곡절된 물체는 결점밖에는 볼 수가 없다. 또 정지의 상태보다는 동작의 상태에 멋이 있지만, 그러나 과도히 움직이지 않는 율동의 상태에서라야만 더 멋을 느낀다. 말하자면 직립한 자세의 수목보다는 표풍飄風에 흔들리는 수목의 가지가 멋이 있고, 그보다도 춘풍에 나부끼는 수류垂柳 더 멋이 있다. (신석초, 「멋설」, ≪문장≫ 1941년 3월호)


에서 멋을 찾은 석초는 나아가 그 최고의 경지를 조선 춤에서 찾는다. “조선무용의 주요한 일 특징은 그 어깨에 있다. 어깨의 후부後部에 있다. 유연히 선회하면서 어깨를 잠깐 올리고 미동의 상태로 흔드는 포즈는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순수한 멋이다.”

이런 정도의 예시만으로 우리는 곧바로 조지훈의 시 「승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 역시 “곡선 중에도 현란한 곡선이 아닌 직선의 미묘한 변화로 휘어져 넘는 은은한 곡선과 반월형半月形의 호선弧線이 아마도 대표적일 것이다. 건축의 지붕과 부연, 추녀의 날아갈 듯한 선, 소반, 그릇 등의 일상의 도구에서 찾아내는 곡선미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반월형의 호선이다. 그 전형은 저고리의 깃과 소매 끝, 버선의 코와 뒤꿈치, 태극선 그림의 청․홍․황이 서로 물린 머리모양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미학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가장 먼저 제출한 바 있다. 문제는 ‘비애의 미’로 환유되어 식민지 민족과 연결됨으로써 우리에게 거부감을 갖게 해준 측면이 없지 않지만, 중국과 일본과 우리를 각기 형태와 색채와 선으로 대별하여 그 주된 성격을 이야기한 점은 여전히 탁발하다.

그런데 이 선의 미학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가령 시 「승무」만 하더라도 정중동靜中動의 정지된 어떤 형상에 그쳐 있지 춤 자체가 갖기 마련인 동적인 차원의 역동성에 대한 무엇이 빠져 있다. 물론 70년대에 들어서 민중문화운동에서 탈춤 등을 근거로 하여 ‘신명’의 미학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의 접근들이 모두 도자기나 춤 등 특정한 대상의 형상에서 그 미적 특성의 한 요소를 찾으려 했다. 이를테면 조지훈은 멋의 미적 내용으로 형태미, 표현미, 정신미가 있다고 했다. 형태미로서의 멋의 특징에는 정격正格을 초월한 변화의 묘가 들어가 성립된 비정제성非整齊性, 단조롭고 무미건조함에서 탈피한 다양성, 그리고 율동성의 특징이 있고, 표현미로서의 멋의 특징에는 어떤 끈질기고 피나는 자기수련을 통하여 진정으로 발산할 수 있는 원숙성圓熟性이 있으며, 정신미로서의 멋의 특징에는 조화와 흥취를 추구하는 화동성和同性과 질서와 통일의 바탕 위에 새로움을 창조하는 중절성中節性의 요소가 있다고 했다. 이런 조지훈의 접근에 따르더라도 여러 세분화된 어떤 속성을 부분적으로 적용한 것이 지금까지 미적 특질론의 구체적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쪼개고 저렇게 쪼개고 부분부분 해체해서 그 구성품을 풍부하게 펼쳐놓으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바로 멋의 전체성과 유기체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개념이나 해설, 정의를 이용할 경우 사물의 깊은 곳에 도달하기 어렵다. 또 전체로부터 분리된 부분은 더 이상 전체의 부분이 아니다. 장파의 말마따나 분할되어 나온 부분을 고찰, 연구, 투시하여 더 정확하고 명료한 것을 얻어내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원래의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기神氣인데, 해부하면 신기가 훼손되니 그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식 독특함이 배어있는 것이라면 동양적 미학론에 근거한 접근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바로 멋론 역시 동양의 큰 미학에 근거해서 보면 ‘기운생동氣運生動’‘초이상외 득기환중超以象外 得其環中; 표면적 형상 밖으로 초월해야만 그 묘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등과 같은 수준에서 이야기될 내용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의 ‘멋’론은 지나치게 서양적 분석론에 가까이 서 있었고, 또 형식적이고 형상적인 측면의 구조나 질료에 붙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어라 할 수 있는 도나 인에 대해 그 주된 저작에서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라. 도가의 ‘도(道)’는 <노자>에서 수시로 거론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어느 곳에 없다. 다만 이렇게 첫 시작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 불변의 도가 아니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 영원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또 ‘인’도 <논어>에서 무려 109번이나 나오지만 어느 곳에서도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멋’ 또한 진정 높고 깊은 비평적 언어라면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그런 만큼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옛사람이 말한 활법活法, 신회神會, 심령心領의 공부일 것이다. 마음으로 진정 이해하고 깨닫고자 하는 공부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방향을 달리하여 생각하면 ‘멋’에 상응하는 대상부터 다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 미학은 위진 시대의 인물 품평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곧 형과 신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모두를 간결하면서도 전면적으로 개괄하는 데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작품평으로 이어져 미적 대상의 특징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내면의 정신과 기운을 함께 파악하고자 하는 전통이 생겼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자 문득 ‘아! 황진이’ 하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멋에도 격이 있을 터, 상중상의 멋이야말로 그 실감의 진면목일 터, 그녀의 이름을 발하는 순간 단숨에 뭔가를 뛰어넘는 자유의 지평이 떠오른다. 그녀 앞에 아름답다거나 곱다는 말을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모자라다. ‘멋진 황진이’해야만 뭔가 아귀에 딱 맞지 않는가. 맞다, 그러고 보니 지난호에서 이야기한 파블로 네루다에 맞세울 만한 멋진 인간이다. 시대가 달라서 그렇고 정치성이 빠져서 그렇지 영혼의 인간적 움직임으로만 본다면 네루다보다 나으면 낫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황진이와 황진이의 시조로부터 나의 멋론을 시작하고 싶다. 자 기존의 인물평부터 몇가지 보자.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이태준) “황진이 이후에 황진이 없다”(김동욱). “한국의 짧은 풍류는 진랑眞娘보다 나온 것이 없다.… 남자의 짧은 풍류로 송순宋純이 있었다지만 진랑眞娘의 풍류를 따를 수 없었다.”(여증동) “진이는 영롱한 언어의 마술사인데다가 아울러 지·정·재·예의 철철 넘치는 멋과 사랑을 살다가 간 요정으로 우리들 인식 속에 영혼히 보듬겨드는 영원의 여상女像인 것이다.”(유주현) 사람이 그렇다면 그녀의 문학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리가 물려받은 몇천 수 시조를 몽땅 내어놓고 바꾸자 해도 바꿀 수 없는 시조.”(이병기) “절절하고 애끓는 순정과 별리別離의 애곡哀曲, 연모의 지정至情이 담긴 여심으로 이루어진 시조가 있는가 하면, 생명의 유한有限함이나 허무虛無를 노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 때로는 남성도 못 미칠 호방한 기개가 넘치는 노래들이 있다.”(허영자) “황진이의 행적은 이인異人의 칭을 들을 만큼 기이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위는 세속의 굴레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했던 불기不羈의 성벽性癖에서 온 것일 뿐, 불가능의 것이 아니다. (중략) 탈속脫俗의 경지를 가면서도 세속과의 조화를 잃지 않은 그의 생활처럼 그의 문학도 여성으로서 기녀로서 느껴야 했던 정한情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이를 기저로 멋의 세계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 그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가 있는 것이다.”(이신복) “그의 시는 본질에 있어서 송강松江이나 윤선도尹善道보다도 뛰어나고 그의 스승인 송순宋純보다도 훨씬 훌륭하다. 시어의 구사에 있어서 그렇고, 시 내용에 있어서 그렇고, 인간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다.”(이가원)

한마디로 이러한 평가들이 환기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이야기하는 저 위풍당당함이 삼절 속의 폭포처럼 과연 거침 없지 않는가. 많은 유명 소설가들이 과거에도 지금에도 부단히 황진이의 소설화 작업을 해왔지만 아직도 황진이는 온전히 살아난 것 같지 않다. 인간 황진이가 담지한 다양한 성격과 인간적 면모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역사적 인간상으로 고양해내는 일은 그 점에서 아직 미완의 과제이다. 솔직히 민족문화적 상상력이라 이름붙일 만한 ‘멋’과 ‘한’, 그리고 ‘풍류’와 ‘자연’의 미학을 다른 누구보다도 인간 황진이와 황진이의 문학에게서 찾고 싶다.

주어진 지면이 다한 탓에 황진이의 문학에 대한 구체적인 탐사나 그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음호에 계속 이어나가기로 하자.



임규찬∙1957년 보성 벌교 생. 평론집으로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작품과 시간>, <비평의 창>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 <한국 근대소설의 이념과 체계>, <문학사와 비평적 쟁점> 등이 있다.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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