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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초점/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와 ‘과정’으로서의 윤리/장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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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와 ‘과정’으로서의 윤리
장성규|문학평론가
1. 공전하는 비평, 부재하는 윤리
2000년대 문학에서 논쟁다운 논쟁이라면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에 대한 일련의 비평적 논의 정도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비평이 미시적인 텍스트 분석에 국한되거나 선험적인 서구 이론의 기계적 이입에 함몰된 것에 반해,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에 대한 비평들은 변화된 세계체제와 남한 자본주의의 위상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논의가 동일한 논의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점은 일견 기이하다. 예컨대 타자의 절대성에 대한 추상적인 강조나 타자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 혹은 탈근대적 주체로서의 다중에 대한 주목 등이 그러하다. 트랜스 내셔널 담론이 지니는 위험성에 대한 정치한 이론적 분석을 보이고 있는 황호덕은 결국 “타자를 절대적 타자성 안에서 다루는 일의 가능성을 물을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그 어떤 아포리아들”이라는 추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보다 구체적으로 텍스트에 기반하여 타자의 재현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는 복도훈은 “타자의 언어가 소설이라는 상징적 언어의 경제를 위기로 몰아붙이고 무너뜨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와 함께 타자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보인다. 이들과는 상이한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조정환 역시 현재의 탈국가적 현상이 자본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이를 통해 탈근대적인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류를 가능케 할 인류인”의 형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결론이 너무나 식상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세계체제의 변화과정과 이와 연동된 남한 자본주의의 위상변화에 대한 정치한 분석이 소거된 자리에 남는 것은 이미 상식화된 주체와 타자 간의 윤리의 문제나 탈근대적 주체성의 모색의 필요성 등이다. 물론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현재 우리 문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지니는 논제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트랜스 내셔널의 운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생략되었기에 이들의 논의는 추상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논의가 종종 우리 문학의 성과들에 대해 서구의 생경한 이론적 틀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정에 연유한다.
주체와 타자간의 관계맺음의 윤리는 선험적으로 ‘타자의 절대성’을 승인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간의 ‘충돌’과 ‘교감’에서 시작된다. 타자의 재현 가능성의 모색은 주체에 의한 타자의 일방적인 ‘전유’를 비판하기 이전에, 이 전유가 발생하는 주체와 타자의 ‘다른’ 위치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탈근대적 ‘유목주의’역시 추상적인 ‘다중’에 대한 환대가 아니라, 근대성의 합리적 핵심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남한 자본주의의 위상을 정치하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그 가능성이 질문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작업이 소거된다면,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에 대한 비평은 공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공전은 세계체제의 변화와 남한 자본주의 위상 변화에 따르는 우리 문학의 급속한 변화에 대해, 나아가 이를 통한 국경 ‘너머’의 타자와의 만남에 대해 어떠한 윤리도 생성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강조하는 타자성이나 탈근대적 주체성의 탐색은 역설적이게도 비윤리적인 진리-효과를 생산한다.
이는 비단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한계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경 너머의 타자와의 연대와 재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비평 역시 동일한 한계를 지닌다. 이들의 논의는 이주노동자나 난민, 탈북 인민들과 남한 인민이 지닌 동일성에 기반한 연대의 가능성에 집중된다. 예컨대 이명원은 복도훈과 황호덕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한국노동자의 타자는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의 메커니즘 그 자체”라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그의 논의는 최근 트랜스 내셔널 서사에 대한 비평들이 간과하는 “주체와 타자의 인식론적 비대칭성이라는 현학적인 담론의 배후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진짜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남한 자본주의의 위상 변화에 대한 인식은 소거되며, 따라서 타자와 주체간의 ‘차이’는 무화된다. 다만 모두가 자본의 ‘타자’이기에 서로가 ‘동일성’을 지닌다는, 지극히 타당하지만 그리하여 무의미한 진리-효과가 생산될 따름이다. 그러나 “현학적인 담론”의 층위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진짜 현실”의 층위에서 자명하게 나타나는 주체와 타자간의 간극은 이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해소될 수 없다.
나는 2000년대 탈국경과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논하는 문제설정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논의들이 공전을 반복하는 것은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가 발현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과 이에 수반되는 남한 자본주의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분석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국경 너머의 타자와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주체성의 구성과 관계맺음의 윤리에 대한 모색이다. 그렇다면 우선 논의되어야 할 것은 주체와 타자의 위치를 변전시키는 메커니즘에 대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해명이다. 이를 통해 주체, 즉 남한 자본주의 하의 인민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타자와의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남한이 지니는 특수한 성격인 분단과 이로 인한 탈북 인민이라는 특수한 타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탈북 인민과의 연대의 문제는 기존의 통일문학의 규범으로 해명되지 않는 탈분단 문학의 문제설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국경 너머 타자의 재현은 세계체제 속에서의 반주변부로서의 남한에 대한 인식과 분단체제 속에서의 탈분단 문학의 모색이라는 문제설정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타자의 재현에 그친다면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확인에 그칠 뿐, 국경을 넘어서는 실존을 건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오히려 타자의 재현은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재현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동반하며, 이 마주침을 통해 타자의 재현을 넘어서서 주체 자체를 재구성할 때 비로소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는 새로운 미학적·실천적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현된 타자의 양상보다 중요한 것은 재현 ‘과정’에서의 주체의 재구성이다. 이를 통해서만 타자를 주체로 포획하지 않으면서 개체간의 ‘연대’를 고민할 수 있다.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다룬 비평들은 대부분 재현된 타자의 양상에 주목하고 있다. 즉 이주노동자나 난민, 탈북 인민들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가 중심적인 논의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비평은 정작 타자를 재현하는 주체가 재현의 과정을 경과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주체와 타자가 서로 충돌과 교감을 감행하며 새롭게 형성하는 관계의 윤리 속에서, 그 윤리에 기반한 주체성의 재구성속에서, 비로소 국경을 넘어서는 연대가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궁극적으로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의미화하고 국경 너머의 타자와의 연대와 그 윤리를 모색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는 것. 이것이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읽어내는 비평의 과제이다.
2. ‘낀 존재’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급격한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의 배경에는 자본의 세계화가 놓여있다. 이로 인해 트랜스 내셔널적 상황은 낭만적인 ‘세계시민’이나 관념적인 ‘다중’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형태의 ‘난민’을 생산한다.
이 난민의 형상화가 어려운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남한 자본주의가 지니는 이중적인 위상 때문이다. 남한 자본주의는 세계체제에서 반半주변부의 위상을 지닌다. 따라서 한 편으로는 미국 중심의 중심부 제국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주변부 인민에 대한 수탈의 ‘주체’로서 기능한다. 이 점이 우리 문학에서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재현하는데 가장 큰 난점으로 작용한다. 국경 너머의 타자와의 연대의 어려움 역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제국적 주체도 아니며, 동시에 주변부 인민도 아닌 ‘낀 존재’(in-between)로서의 반주변부 인민의 성격은 컨텍스트적 맥락에 따라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은 반주변부 남한 인민의 ‘낀 존재’로서의 위치를 정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순히 남한과 베트남 사이의 과거사에 대한 윤리적 접근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상 반주변부로서의 남한은 주변부로서의 베트남에 대한 중심부 제국의 착취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역사의 반복을 외면한 채 이루어지는 손쉬운 ‘화해’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세계체제 속에서 반주변부로서의 남한의 위상을 직시하며, 거짓 화해 대신 진정한 화해의 어려움을 형상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은 다시 독해될 필요가 있다.
그가 부르는 대로 두드린 다음, 모니터 위에 뜬 베트남어에 성조를 넣어서 읽던 재우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어의 신비는 성조였다. 6성의 언어구조는 성조에 따라 노래만큼이나 변화무쌍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그가 찾아낸 대사의 성조는 한국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매혹적인 어감을 부여했다. 단어들 위에 얹힌 성조는 짠돌이의 대사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슬픔과 익살이 일렬선상에서 뒤집어지며 이어지도록 만들어놓았다.
베트남의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레지투이는 한국어를 베트남어로 옮기며 베트남어의 “6성의 언어구조”를 통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재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베트남어를 통한 재현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한국어로는 재현 불가능하며 따라서 재우가 탄성을 지르는 것 역시 “6성의 언어구조”의 문법 내에서만 가능하다. 위의 인용문은 표면적으로 ‘번역’을 통한 공통감각의 복원과 이에 기반한 화해를 형상화한 것으로 독해될 수 있다. 그러나 기실 이 화해란 베트남어의 문법구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다시 한국어로의 번역과정에서 그 문법은 해체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은 역설적으로 번역의 어려움이 표상하는 진정한 화해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6성의 언어구조”를 통한 화해란, 현재 남한 자본이 진행하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착취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한의 반주변부적 성격은 베트남어의 독특한 문법마저도 포획하려는 욕망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방현석의 성과가 베트남에 대한 과거 남한의 폭력에 대한 성찰과 화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성과는 반주변부로서의 남한과 주변부로서의 베트남 사이의 화해의 어려움에 대한 인식에 있다. 화해란 동등한 두 주체간의 충돌과 교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남한과 베트남이 세계체제 속에서 엄연히 위계서열화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손쉬운 화해란 오히려 새로운 착취의 은폐로 귀결되기 쉽다. 「존재의 형식」이 중요한 것은 이 화해의 어려움을 언어와 재현의 문제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현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베트남이라는 타자의 재현의 어려움에 머물지 않는다. 타자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주체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점, 이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한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이 모색된다는 점이 그의 진정한 성과이다. 「존재의 형식」의 주인공 재우는 과거 변혁운동에 대한 회의와 창은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베트남으로 ‘도피’한 인물로 설정된다. 그러나 레지투이와의 충돌과 교감을 통해 재우는 비로소 도피를 넘어서는 주체의 윤리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 작품이 흔한 후일담 문학을 넘어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남한 자본의 입장에서는 “기피의 대상을 넘어 저주의 대상”(45쪽)으로 호명되며, 베트남 인민의 입장에서는 “자네들 지금 내 앞에서 돈자랑 하는 건가?”(34쪽)라고 비판받는 낀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 이 낀 존재는 불투명하지만 주체와 타자간의 관계맺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기에 정직하다. 관념적인 화해나 섣부른 당위의 주장 대신 낀 존재로서의 반주변부 인민의 정체성에 대한 지난한 탐구를 전개한다는 점이 방현석이 지닌 최대의 미덕이다. 그것은 비록 “마음가짐”(70쪽)이라는 소박한 층위를 넘어서지 못하지만 그 마음가짐은 주체에 의해 선험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충돌과 교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쉽게 폄하될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닌다.
그러나 방현석은 종종 화해에 대한 욕망을 지나치게 작동시킨다. 이때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한 주체의 재구성 대신 주체에 의한 타자의 전유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화해의 과정이 지니는 지난함 대신 화해의 순간이 지니는 희열이 텍스트에 기입되는 순간, 이 새로운 윤리성의 모색은 다시 후일담 문학이 지니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으로 환원된다. 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소거시킨 채 강박적인 화해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화해와는 거리가 멀다. 이와 같은 한계는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엄밀히 말해서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는 「존재의 형식」의 레지투이와 같은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 건석의 애인인 리엔이 등장하지만 리엔은 타자성을 담지한 인물이 아니다. 건석은 한 편으로는 과거 ‘라이 따이한’인 형의 죽음에 대한 화해를 욕망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베트남 인민인 보 반 러이와의 화해를 욕망한다. 문제는 이 화해가 타자와의 충돌을 통한 주체의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건석의 애인인 리엔이 지닌 추상적인 층위의 여성성을 통해 손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라이 따이한인 형의 죽음은 베트남 여성인 리엔과의 결혼을 통해 보상되며, 보 반 러이와의 화해는 리엔의 외삼촌인 팜 반 꾹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리엔이 “에데족이었고, 에데족은 지금도 모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랍스터를 먹는 시간」, 168쪽)는 건석의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엔은 철저히 이 ‘모계사회’의 성격‘만’을 담지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리엔의 고유한 타자성은 소거되며 그녀는 오직 여성성과 모성성의 담지자로서만 기능한다. 건석의 이중의 화해가 손쉽게 처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존재의 형식」에서 보여준 타자와의 충돌과 교감을 통한 주체성의 재구성 대신, 정형화된 리엔을 통해 타자와의 긴장이 해소되는 것이 이 작품의 결정적인 한계인 것이다. 이는 비단 방현석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리얼리즘 문학의 문법이 지니는 한계이기도 하다. 모순을 극대화시켜 제시하고 이 해결의 지난함을 증언하는 문법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와의 동일화를 통해 모순을 해소하고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려는 리얼리즘의 문법이 이와 같은 한계를 낳은 것이다.
트랜스 내셔널이 추상적인 심급이 아닌 현실모순의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는 오수연이다. 오수연은 트랜스 내셔널이 구체적인 자본의 운동과 결부되어 ‘위로부터’ 작동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그녀는 위로부터의 트랜스 내셔널을 ‘아래로부터’ 재구성하기 위한 작업의 지난함 역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분명 아래로부터의 트랜스 내셔널의 ‘연대’는 우리 시대의 정언테제이다. 그러나 이 정언테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로 위계서열화 되어 있는 강고한 자본의 세계체제를 내파해야 한다. 이 작업이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영역에서 재현의 난점으로 공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수연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트랜스 내셔널이 현학적인 담론의 층위나 추상적인 연대의 층위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임을 매우 뛰어나게 보여준다.
인근 회원들이 다 모이는 전체회의에서 한 남자가 내 앞에 의자를 놓고 앉은 적이 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건만 둥그렇게 둘러앉은 줄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대학원마저 중단하고 대서양을 건너온 그 행동가는, 마찬가지로 회의에 참석하여 의자 하나 차지하고 있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에게 나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얼굴색이 조금 더 짙어 이곳의 고통받는 민중이었다면, 그는 내 앞에 앉지 않고 서서 내게 선량하게 알은채를 했을 것이다. 나는 애매했다. 여기 와서 위험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는 그는, 신경을 소모하지 않고 내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간편히 생략해버렸다. 그 순간 나는 자칫 과민하게 반응할까 봐 고민이 됐다. 그런데 그는 내가 고민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계속 떠벌리면서 다른 사람, 또 다른 용감한 행동가 곁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여전히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내 앞에 의자 하나 남겨놓은 채. 그는 내가 영어로 말하면서 관사를 틀리기만 해도 이마에 주름을 잡는 두 명 중 하나이기도 했다.
주변부의 인민도 아니며, 그렇다고 중심부 제국의 일원도 아닌 나. 반주변부의 인민인 나는 제국의 침략에 맞선 연대의 장에서도 낀 존재일 따름이다. 이는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낀 존재로서의 남한 인민의 이중적 성격에 대한 뛰어난 환유로 독해될 수 있다. 오수연에게 트랜스 내셔널은 전쟁으로 표상되는 구체적인 현실이며, 연대는 세계체제 속에서 위계서열화된 반주변부 인민의 지난한 과정이다. 따라서 트랜스 내셔널과 국경 너머 타자와의 연대라는 문제는 곧 세계체제 속에서 ‘나’의 위치를 절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소설은 자신의 위치를 정치하게 인식하며, 이 위치로부터 타자와의 연대가 가능한 구체적인 지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연대의 좌표는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의 위로부터의 위상도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위상도를 설정함으로써 비로소 생성된다.
세상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는 서쪽을 동쪽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밀려와서 가르쳐주었다. 너는 중심이 아니고, 멀고 먼 동쪽 끄트머리라고. 그런데 그 멀고 먼 동쪽 끄트러미는 어디인가. 나를 중심으로 놓고 방향을 가늠해볼 수 없으므로, 내게는 동쪽도 서쪽도 남쪽도 북쪽도 없다. 내가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거리를 재볼 수도 없으므로, 내게는 세상 어디도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중심 아닌 나머지 세상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229쪽)
아래로부터의 연대는 타자의 위치를 주체의 위치를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타자의 위치로부터 주체의 위치를 탐색하는 지점에서 가능하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은 그래서 소중하다. 이 인식은 타자와의 충돌과 교감을 통해 주체의 위치를 재설정하는 과정으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국경 너머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이 연대야말로 2000년대 한국문학이 거둔 최대의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되어야 한다. 정치경제학적 층위에서의 반주변부로서의 남한에 대한 인식과 존재론적 층위에서의 타자의 인식을 통한 주체의 재구성이라는 두 겹의 사유가 겹치는 지점에서, 오수연은 국경 너머 타자와의 연대의 윤리를 생성한다. 이 윤리는 주체의 위치와 타자의 위치 사이의 새로운 좌표의 설정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와 이에 따른 새로운 윤리의 모색이 지니는 무게에 값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오수연의 작품이 알레고리의 형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미메시스적 재현이 주체에 의해 파지된 객관 현실의 형상화에 적합한 형식인 반면, 알레고리는 주체의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현실을 형상화하는데 적합한 형식이다. 주체가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타자의 세계는 둘 간의 충돌과 교감을 통해 징후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미메시스적 재현과는 달리 알레고리는 이 징후를 단일한 인식론적 틀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알레고리의 환유적 성격은 주체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타자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난함을 증언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징후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차연의 형식으로 현현한다. 이 차연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미학적 모색이 알레고리라는 형식적 실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미학적 실험을 통해 오수연은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타자와의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계기로 변증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고통이 편재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는 모두가 중심인 동시에 주변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 나 역시 중심이 아닌 주변부 인민과의 충돌과 교감을 통해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그 연대의 지점을 “여기는 어디의 동서남북도 아니고, 어디로부터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문」, 36쪽)는 ‘과정’으로서의 좌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 오수연의 성과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하는 알레고리적 형식은 리얼리즘적 규범이 간과하기 쉬운 주체-중심에 의한 타자-주변의 포획과 좌표의 일방적인 설정을 넘어서기 위한, 그리하여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국경 너머 타자와의 연대로 변증시키기 위한 현실적이며 미학적인 고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문법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는 그녀의 연대가 정치적인 층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인 층위의 것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리얼리즘이 더 이상 유효한 현실 인식과 재현의 가능성을 담지할 수 없는 지금, 그녀의 소설이 소중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3. 통일문학을 넘어서는 탈분단 문학의 가능성
우리 문학에서 가장 빈번하게 형상화되는 국경 너머의 타자는 탈북 인민이다. 남한이 세계체제 속에서의 반주변부라는 성격과 함께 분단체제라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와 독립된 범주가 아니라, 자본의 세계화와 연동되어 운동하는 개념임을 고려한다면 기존의 통일문학이라는 규범 역시 내파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탈북 인민을 다룬 작품들에 대해 “6·15 시대 문학의 환경변화를 가장 먼저 알리는 ‘탈북’에 관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통일이 아니라 이산과 해체의 이야기”이며 “문학적으로 통일은 여전히 쉽게 통합될 수 없는 해체와 이산의 고통을 말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다시 사유될 수 있다”는 서영인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분명 탈북 인민의 삶은 분단체제의 모순과 직결되어 있으나, 이들의 삶의 “해체와 이산의 고통”이 내셔널리즘적인 통일을 통해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남한 자본의 확장에 의한 흡수통일이 가시화되는 지금, 통일문학은 더 이상 그 진보성을 담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세계체제와 분단체제의 변화 속에서 통일문학이라는 규범 역시 탈분단 문학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정도상의 <찔레꽃>은 규범으로서의 통일문학이 현재 놓인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탈북 인민의 삶에 대한 핍진한 재현과 통일문학이라는 당위 사이의 팽팽한 간극이 이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생성한다. 이로 인해 <찔레꽃>은 텍스트의 균열을 내포하는데, 기실 표면적인 스토리보다 이 균열이 발생하는 미학적·실천적 맥락을 고찰하는 것에서 통일문학을 넘어서는 탈분단 문학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
통일문학이라는 규범은 작가의 세계관의 층위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예컨대 분명 삶의 곤궁함으로 인한 강제적 ‘추방’으로서의 탈북이 현실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데도, 주인공 충심은 중국의 인신매매단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그녀가 “사실 나는, 어리석어서 그렇지 일부러 조국을 배신한 것은 아니거든요.”라고 발화하며 북한 체제에 대한 옹호를 보이는 것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이 통일문학의 규범에 의한 그녀의 발화가 텍스트 내에서 모순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충심은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음에도 왜 북한으로 귀환하지 않는가? 그것은 남한 자본주의의 경제적 우위 때문이다. 충심은 “찔레꽃 붉게 피는 북쪽나라 내 고향”(208쪽)이라고 노래하면서도 북한의 어머니에게 “백만원을 송금하면 그중에서 삼십만원은 수수료를 떼고 나머지 칠십만원을 중국돈으로 바꿔 엄마의 손에 건네주는 장면”(209쪽)을 생각하며 남한에서의 신산한 삶을 지속한다. 그리고 이 돈을 통해 “달구지를 끌고 돼지밥을 구하기 위해 온 함흥을 뒤지고 다니는 어머니를 위해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64쪽)는 북한에서의 충심의 소박한 소망은,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비참하게도 비로소 실현된다. 그럼에도 납치로 인한 강제적인 탈북과 중국에서의 인신매매를 거쳐 남한의 노래방 도우미로 귀결된 충심의 인식은 작품 초반부의 분단체제에 대한 거친 인식, 즉 “미국, 미국은 왜 우리를 이다지도 못살게 하는 것일까?”(48쪽)라는 북한 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작가의 통일문학에 대한 지향과 이로 포괄되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극이 충심의 모순된 형상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간극을 통일문학의 규범으로 봉합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역으로 텍스트 내부의 균열을 비판하며 탈북 인민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도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통일문학의 규범과 현실의 탈북 인민의 삶의 간극으로부터 새로운 탈분단 문학의 가능성을 추출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다. 정도상의 <찔레꽃>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통일문학의 규범으로 포획되지 않는 탈북 인민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핍진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심이 지니는 모순은 이에 기인한다. 탈북 인민을 바라보는 통일문학의 관점으로 충심은 해명되지 않는다. 북한 체제를 긍정하면서도 남한 체제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탈북 인민의 삶이란 추상적인 분단모순과 민족통일의 담론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분단제체를 통해 서로 기묘하게 공생하는 남북 양쪽의 지배 메커니즘에 억압된 인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 정도상의 성과가 있다. 북한의 지배 메커니즘에 의해 최소한의 생존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추방되어야 하는 존재, 동시에 남한의 지배 메커니즘에 의해 ‘2등국민’으로 호명되며 경제적·젠더적·문화적 층위에서 전방위적으로 억압되는 존재. 이러한 존재로서의 충심의 삶을 경화된 통일문학의 틀로 환원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정도상의 <찔레꽃>이 거둔 최대의 성과이다.
그러나 정도상은 과거 통일문학의 규범을 넘어서는 새로운 분단모순의 문학적 대응논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고민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가 통일이 아니라 분단체제로 인한 남북한 인민들의 삶의 억압이라면, 지금 우리 문학에 필요한 것은 탈분단의 문제설정을 통해 기형적으로 공생하는 남북의 지배체제를 동시에 내파하는 미학적·실천적 고민이다. 이런 맥락에서 권리의 <왼손잡이 미스터 리>는 탈분단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 문제성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탈북 인민과 분단체제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의 주제와 사이버 공간의 환상성을 통한 서술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결합에 대한 낯설음이 기존의 비평적 독법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이 작품에서 주제와 형식간의 결합은 종종 매끄럽지 못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작가의 목소리가 소설 내적인 장치들을 통해 충분히 육화되지 못한채 생경하게 끼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권리의 <왼손잡이 미스터 리>는 탈분단 문학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탈분단 문학은 통일문학의 규범으로 환원되지 않는 남북한 인민들의 삶을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민족이나 통일 등의 추상적 심급이 아니라 남북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동시에 기능하고 있는 분단체제가 구체적인 개체로서의 인민들의 삶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다. 그리고 분단체제가 은폐하는 남북의 지배 이데올로기간의 동일성을 인식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인민들의 삶의 원리를 모색하는 것이다.
탈북 인민들은 이러한 분단체제에 의해 북에서 추방되고 남에서 억압되는 존재이다. 이들에게 남과 북은 동일한 지배 메커니즘일 뿐이다. 기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의사/국가 사회주의는 강력한 내셔널리즘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에 각각의 개체를 동일성의 논리로 포획한다. 탈북 인민은 북에서는 “수령절대주의”에 의해 추방되며, 남에서는 “탈북자고 이등인”(111쪽)으로 호명되며 억압된다. 이 지배 이데올로기는 강고한 “‘민족주의 교敎’”(173쪽)에 의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남과 북 양쪽에서 모두 추방된 탈북 인민들은 어떠한 삶의 구성원리를 모색할 수 있는가? 권리는 탈북 인민 ‘왼손잡이 미스터 리’를 “카오스모폴리탄”(321쪽)으로 명명한다. 남과 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그것이 공통적으로 탈북 인민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에 분단체제가 단지 한반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체제와 연동되어 운동하기는 개념이기에 민족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삶의 존재양식이 요구된다. 따라서 ‘왼손잡이 미스터 리’의 삶은 일차적으로 ‘코스모폴리탄’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현재 코스모폴리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자본에 의한 위로부터의 세계화이기에 ‘오른손잡이’가 아닌 ‘왼손잡이’인 탈북 인민은 코스모폴리탄으로부터도 추방된다. 여기서 탈북 인민의 삶은 오른손잡이로 표상되는 지배 체제에 편입된 안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분단체제와 세계체제로부터 이중으로 추방당한 카오스적 성격을 획득한다. 즉, 민족 국가 단위를 넘어서며, 동시에 세계체제의 지배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탈북 인민의 삶의 구성원리인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카오스모폴리탄’이다. 남과 북이 공유한 내셔널리즘을 넘어서며, 자본에 의해 위계서열화 된 세계체제를 극복하는 것. 비록 그것이 지난한 작업일지라도 바로 그 지점에 탈북 인민, 그리고 분단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탈분단 문학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카오스모폴리탄’의 언어는 ‘코스모스’의 언어와는 다른 형식을 지닌다. 그 언어는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남북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인 “우리는 원래 하나이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혹은 “‘민족대단결’, ‘자주통일’, ‘우리 민족끼리’”(116쪽)등의 언어와 판이하게 다르다. 동시에 “영어, 일본어, 한국어”(104쪽)순으로 중심부 제국을 정점으로 위계 서열화된 언어와도 판이하게 달라야 한다. 따라서 카오스모폴리탄은 “제3의 언어”를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서 “익숙해져 있는 언어들을 과감히 깨야”(104쪽)한다.
권리가 사용하는 새로운 형식은 이 카오스모폴리탄의 언어를 직조하기 위한 실험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현실’로 믿게하는 단단한 담론의 형식을 지닌다. 우리가 이 언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배 담론에 내재하는 균열을 탐색해야 한다. 얼핏 단단하고 매끈해보이는 지배 담론의 형식은 그 안에 수많은 모순을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은폐된 모순들은 ‘징후적으로’ 현현한다. 이 징후는 지배 담론과 같이 스스로를 단일한 ‘현실’로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현실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 카오스모폴리탄의 언어이다.
이 작품이 환상의 형식으로 구성된 것은 이에 기인한다. 환상은 억압된 언어들이 폭발하는 카니발의 형식이다. 억압된 언어들은 온전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형식을 지닐 수 없다. 이미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언어 형식 자체가 일정한 규범에 의해 승인된 지배적인 발화 형식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폐제된 카오스모폴리탄은 명징한 발화 형식을 획득할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의 발화는 투명한 현실로 유통되는 지배 담론에 균열을 가하는 다른 형식을 지닌다. 이 작품의 환상을 통해 기존의 자명한 것으로 인식된 지배 언어들이 전복되며, 단일한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분출한다. “무질서가 최고조”이며 “엔트로피가 최대”(128쪽)인 지금, 여기의 삶은 환상의 형식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생성한다. 이 카오스모폴리탄의 언어는 지배 담론 너머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인식하기 위해 “일부러 글자를 뒤집어 놓은”(69쪽)언어이다. 권리가 보여주는 환상의 형식은 이 언어를 표출하기 위한 새로운 문법이다.
권리는 이미 <싸이코가 뜬다>를 통해 내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코스모폴리탄의 존재 양식과 그 윤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싸이코가 뜬다>는 그 코스모폴리탄을 규정하는 지금, 여기의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다.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에 의해 복합적으로 규정되는 우리 현실의 중층적인 성격은 <왼손잡이 미스터 리>를 통해 비로소 그 구체성을 확보한다. 나아가 내셔널리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통일문학을 넘어서는 탈분단 문학의 가능성을 카오스모폴리탄의 언어를 통해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 권리의 성과가 존재한다.
4.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와 ‘과정’으로서의 윤리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는 2000년대 한국 문학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문제는 이 징후를 정치경제적, 존재론적, 미학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문학과 현실의 관계맺음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는 것이다. 정치경제적 층위에 반주변부 인민으로서의 낀 존재로서의 자기인식과 동시에 분단체제 속에서 탈분단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존재론적 층위에서 주체와 타자간의 충돌과 교감을 통해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하는 것. 미학적 층위에서 주체에 의한 타자의 전유가 아닌 타자의 고유성을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형식을 극한에서 실험하는 것. 이 세 겹의 과제를 논리적인 언어로 밝혀내는 것이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를 형상화한 작품을 다루는 비평의 몫이다.
이 글에서 이 과제들을 충분히 해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에 대한 일련의 비평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주체와 타자간의 관계맺음의 ‘윤리’의 문제가 그것이다. 주체에 의한 타자의 포획이 폭력인 것처럼 타자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주체와 타자간의 관계맺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그 순간 타자는 고정된 타자성의 영역으로 환원되며, 주체에게 어떠한 변화도 야기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 자체가 붕괴된 지금, 비평의 몫은 주체와 타자의 충돌과 교감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징후를 통해 새로운 윤리를 모색하는 것이다. 나는 방금 ‘과정’이라는 표현을 썼다. 윤리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이나 존재론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주체와 타자간의 우애로운 마주침,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미정형의 가능성에 윤리가 존재한다. 비평이 텍스트로부터 이 윤리의 가능성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주석적 해설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바로 여기, 트랜스 내셔널의 징후와 ‘과정’으로서의 윤리를 모색하는 비평의 출발점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 비평만이 공전하는 비평과 부재하는 윤리라는 역설적인 비평의 빈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장성규∙1978년 서울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한국현대작가와 불교>(공저). 가톨릭대, 세종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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