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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서평/절창에 관하여:‘무너진 균형’의 두 양상/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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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25회 작성일 09-12-2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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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김일영,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실천문학사, 2009)

구회남, <하루 종일 혀끝에>(리토피아, 2009)



절창에 관하여:‘무너진 균형’의 두 양상

김대성|문학평론가

1. 득음得音에 이르는 길

절창絶唱은 완벽한 조화나 안정감 있는 구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절창은 어떤 흐트러짐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흐트러짐은 무질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한쪽으로 경사되어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절창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균형감이 아니라 어떤 ‘집중’에 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이것이 특정한 예술 분과에만 국한 되는 문제는 아닐 터, 예컨대 새로운 미적 척도는 균형과 조화가 아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비약적인 집중’에 의해 제기되어 왔음을 우리는 여러 예술가들을 통해서 확인해오지 않았는가.

절창은 발현되는 감정을 통제하고 그것에 균형감과 조화의 형식을 부여하기보다는 경사된 마음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에 집중한다.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져버렸다는 것은 내면의 상태가 제어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할 텐데, 그것은 곧 억압되어 왔던 것의 표출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절창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기울어진 마음과 감추어왔던 상흔의 드러냄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오롯이 남은 결여缺如의 자리는 흠이나 부족함을 현시하는 것일 테지만 그 여백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개입하기를 요청한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한쪽으로 경사되어 있는 결여의 표식은 ‘균형’이라는, 질서를 정립하고 강화하는 기왕의 규칙들을 회의할 수 있게 하는 표지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교감交感’은 무결점의 완벽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버릴 수밖에 없는 ‘무너진 균형’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이 시작될 수 있는 지반 또한 이렇게 ‘무너진 균형’ 위에서이다. 소통은 ‘나’와 ‘너’가 통함으로써 합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규칙을 회의할 수 있는 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너진 균형’이 언제나 기울어진 상태로만 있을 리는 없다. 그 결여가 비슷한 상흔을 가진 이들을 위무하는 자족적인 교감으로 귀결될 때 ‘무너진 균형’이라는 열린 형식이 익숙한 규약들을 (재)정립하는 회로에 빠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절창은 발화자와 수신자의 조화로운 합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아니 절창은 합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화자와 수신자의 경계까지 지워버린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창자와 청자의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 오롯이 ‘음’만이 남게 된다. 하지 못한 말들이 질서를 가지지 못해 속에서 생채기를 내며 구축한 침묵의 공간, 그 결여의 공간에서 새로운 음역대에 가닿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것을 득음得音의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절창은 하지 못한 말들을 토해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토해낸 말들이 일정한 질서를 가질 수 있는 지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결여된 그 ‘소리’들이야말로 새로운 음역대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는 사실에 있다. 시인은 ‘무너진 균형’과 ‘결여’, 그리고 ‘침묵’이라는 세 점을 이어 시적 공간을 구축한 뒤 그곳을 오랫동안 배회한다.

시인은 ‘말’보다 ‘소리’에 집중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 시인의 귀는 ‘말의 소리’보다는 ‘소리의 말’에 집중한다. ‘말’의 영역에까지 가 닿지 못하는 그 ‘소리’들은 견고한 말의 질서를 흐트러뜨린다. ‘말’의 기율紀律이 무너지는 지점, ‘소리’가 그 자체로 의미를 획득하게 될 때,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언어’가 출현하는 순간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득음이 음의 경지에 가닿음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그 말에 새로운 언어와의 조우라는 또 하나의 용례를 추가해야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주의해야할 것은 이 새로움의 함의가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말뜻(new/新)의 가용 범위를 넘어서거나 때로는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경사되어 있는 내면은 ‘말’의 영역에 가닿지 못했던 탓에 말할 수 없었던 것들에 ‘말의 질서’를 부여하기보다는 그 소리들이 그 자체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공간(寺)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무너진 균형의 자리에 돌보지 못했던 ‘소리’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절창은 그렇게 나온다. 말이 되지 못한 그 소리들의 웅성거림에 몸을 뒤척일 때, 우리는 새로운 언어의 끝자락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득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2. 원통형 스피커를 닮은 귀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실천문학사, 2009)의 많은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김일영은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은 말 수가 적기 마련이겠지만 대신 그의 몸속에는 수많은 소리들이 넘쳐나고 있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들을 감지하는 시인의 예민한 귀는 몸속에 쌓여 있는 그 소리들에 ‘귀’를 떼지 않고 그것을 증폭시켜 다시 밖에 부려놓는다. 그런 점에서 김일영의 예민한 귀는 축음기의 원통형 스피커를 닮아 있다고 해도 좋다. 만약 김일영의 노래에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의 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말’에서 비롯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귀는 원통형 스피커를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면 오돌토돌한 돌기 같은 것 또한 돋아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LP판의 표면을 긁으며 음을 만들어내는 턴테이블의 바늘과 같은 것이 그의 귓바퀴 속 어딘가에서 쉼없이 돌아가며 시효가 만료되어버린 소리들을 재생再生해낸다. 몸속에 쌓여 있던 ‘소리’를 밖으로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귓바퀴에 돋아나 있는 바늘과 같은 돌기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김일영이 재생하는 ‘소리’가 “당신이 남긴 통증으로부터” 왔으며 “음악은 할퀴는 것”(이민하, 「바늘과 트랙」,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문학과지성사, 2008)이라고 했던 동시대의 어느 시인과 다른 어법으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목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김일영의 여러 시편들에서 유독 물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물은 누군가를 담고 싶은지 정오의 햇빛을 견디고 있어요”(「얼굴 없는 기억」)라고 할 때 햇빛을 ‘견디고’ 있는 물은 시인의 ‘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인의 귀가 소리를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소리들을 다시금 재생하는 것처럼 ‘고인 물’ 또한 “달빛을 삼키며 스스로 빛을 만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예민한 귀는 물의 표면과 같은 것이어서 비루하고 힘없는 것까지 담아낼 뿐만 아니라 미세한 파동까지 감지해낸다. 되받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비워야 한다. 그 텅 빈 공간에서 울림이 나온다. 시인의 귀는 공명통에 다름 아니다.


모든 불빛을 잃어버린 앰프는

비로소 제 성대를 울리는 소리를 얻었다

―「난파하는 오디오」 부분


‘타자’를 견딘다는 것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질서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서를 강화할 때가 아니라 그 질서를 회의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김일영의 귀에서 절창이 흘러나오는 것은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소리’들을 속에서 오랫동안 곰삭혀왔기 때문일 테지만 그것을 단순히 견딤의 시간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성대로 소리들을 잠식하고 환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통과해 나갈 수 있도록 제 속을 비워주는 것, 재생再生은 생의 반복이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생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일영의 몸속에 쌓여 있는 소리들은 김일영을 살게 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는 (숨)소리를 먹고 살아왔다. ‘말’이 되지 못한 웅성거림, 아니 그것조차도 내색하지 못했던 “소리가 되지 못한 메아리”(「소리의 방 2」)가 시인의 몸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김일영이 그토록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숨)소리’를 먹고 살아왔음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섬’을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배회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목숨의 깊이에 다녀온 어머니에게서 바람 비린내가 났다

씹던 밥알 서둘러 삼키며 고무옷 보따리를 받아 들었을 때

선주 몰래 건져온 휘바람 한 봉지를

간장 종지 같은 오누이 눈동자에 넣어주시며

어머니는 폐선 같은 얼굴을 껌뻑거리셨다

문밖에는 손이 곱은 바람이 언던 위 검은 솔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도 이제 솔 아래 묻힌 누렁이의 안부를 물어서는 안 될까

김칫국물 같은 노을이 얼굴에 묻을 때

바다에 던져 넣던 돌멩이는

아직 내 가슴에 가라앉아 있을까

내년에는 나도 죽는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또 가슴 아프다는 말들의 돌멩이를 건져봐야겠어

조각배 부딪치는 소리 가슴 치는 것처럼 들릴 때

내 생각이 끊기기도 전에 누이는 문을 닫는다

오래전 바다로 끌려간 사람들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생각들

어머니는 밥에 물을 부으시며

마지막 남은 휘바람을 우리 캄캄한 귀에 넣어주셨다

―「숨비소리 1」 전문


시인의 몸속에 쌓여 있는 소리는 어머니의 (목)숨소리다. 시인은 어머니의 (목)숨을 먹고 자랐다. 매일 목숨의 깊이까지 다녀오지만 어머니는 ‘말’이 없다. 물 밑에서 참았던 숨을 아이들의 밥공기에 부려놓고 그저 “폐선 같은 얼굴을 껌뻑거”릴 뿐이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은 끝내 ‘말’이 되지 못하고 시인의 캄캄한 귓속에서 옹이가 된다. 시인의 귓속에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박혀 있다”(「옹이는 썩지 않는다」) 시인의 귀는 연약하고 힘없는 것들의 소리를 좇고, 기거할 곳을 찾지 못해 한데서 오랫동안 헤맸던 그 소리는 시인의 귓속에서 비로소 안식을 구하게 된다. 귓속에서 가득 찬 ‘소리’들이 시인의 귀를 통과할 때, 바꿔 말해 그 옹이를 건드리며 지나갈 때 가빴던 숨은 휘바람이 되고 ‘소리-말’이 된다.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 참아 왔던 그 ‘소리’는 아마도 울음에 가까울 것이다.


언제나 너와 함께 가는 풍경들, 함께 기다리고 함께 넘어지고

그것들의 울음을 함께 울어준다면

―「함께 우는 섬」 부분


그것들의 울음을 함께 운다는 것, 문제는 ‘그것’들의 범주가 될 텐데, 만약 ‘어머니의 숨’이 숭고한 원형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면 그것의 재생은 곧 섬/가족 공동체의 복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때 ‘섬’은 신화적 공간이 되고 만다. 신화는 다른 신화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해본다면 시인의 노래는 섬 밖의 ‘소리’는 밀어내버리고 마는, 또 다른 배제를 낳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될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김일영의 많은 시편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원형의 공간을 희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눈과 귀는 섬에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섬 밖의 힘없고 나약한 것과 몸을 섞어, 밖으로 흐른다.


어둠 속을 흘러온 물이

부둥켜안은 소리

로션도 안 바른 맨얼굴의 별들이

떨어져 살얼음의 강 수면을 깨뜨리는 소리

빛나는 것들은 어둠이 깊어

물드는 깊이만큼 빛나는데

저 맑은 어둠 속에 내 몸을 묻으면 내게도

반딧불만 한 빛이 떠오를까

그 빛 따라 새벽까지 걷다 보면

이슬에 바짓단이 젖는 언덕,

따끈한 구들장을 품은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서서

슬픔으로도 갈라지지 않게 목청 다듬어」

노래 한 곡 뽑아볼 수 있을까

때까치 소리 반주 삼아

아우라지 강물이 흐르는 소리로

고개를 숨긴 산들의 중모리장단으로

고이지 않기 위해 산과 마을을

아리랑 아라리 가슴에 묻고

아무렴 그렇지 낮게 흐르는 힘으로 흐르는

남한강 아우라지 물줄기처럼

―「아우라지 물줄기처럼」 전문


세계의 폭력에 속수무책인 존재들의 신열, 그 미세한 신음은 ‘말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했거나 그러한 질서를 가지지 못한 존재들의 ‘소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부서진 집들이 움켜진 어둠 속에서도/몇 개의 불빛들 아직 밝다”(「남아 있는 불빛들」)라거나 “노인들만 가득한 마을,/낡은 슬레이트 지붕에서 푸짐한 연가기 오른다”(「직박구리의 선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결여를 감출 수 없는 존재들에 시인의 마음이 경사될 때, “살려고 했던 절실함이 살리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변화”(「시인의 말」)하고 그렇게 고여 있던 물이 흘러나와 “산과 마을을”, 저기와 이곳을, 그때와 지금을 휘감아 돈다. 휘어지고 경사가 심한 곳은 그만큼 흠이 많겠지만 그곳을 흐르는 물줄기는 저 스스로가 알지 못했던 힘으로 굽이 칠 것이다. 시인이 부르는 노래의 ‘울림’이 무너진 균형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3. 혀끝의 탄력과 시적 언어의 조탁

구회남의 시는 탄력이 넘친다. 마치 신 음식을 봤을 때 입안에 가득 고이는 맑은 침처럼 그 탄력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한다. 탄력적인 시인의 자태는 호기심에 가득 찬 고양이를 닮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인이 구사하는 탄력적이고 기교 넘치는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세계의 불모성과 마주하게 된다는 데 있다. 현실이 갑갑할수록 그곳을 벗어나려는 열망은 커져만 간다. 우리는 구회남이 구사하는 감각적이고 탄력적인 언어들과 마주할 때 그만큼 폐쇄적인 세계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려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탄력은 단순히 기교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과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회남의 탄력은 오랫동안 참았다가 튀어오르는 도약이 아닌 방법적인 가벼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비워버림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열망의 표출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령, “나는 고대, 채워지기를 기다려/나는 텅 빈 들판”(「고고와 디디」)이라거나 “나도 나를 뒤집고 파헤치는 중이네/나를 새로이 명명하기 위해서/허허로운 곳에/낡은 문장을 지우려고 왔네”(「셀수스 도서관」)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스스로를 텅 빈 들판처럼 비우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낡은 문장을 지우고 새로운 문장을 쓰고자 하는 열망이 시인의 ‘혀’를 탄력적이게 만든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탄력적인 혀가 만들어내는 ‘언어’ 역시 탄력적일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가 아닌 ‘너머’를 지향하고 있는 태도의 표출인 재기발랄한 비유와 시어의 구사는 구회남의 특기이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탄력적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혀의 탄력이 정작 중요한 ‘언어’를 만드는 데 있어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플라톤의 동굴의 벽 안에 갇혔는데요/파놉티콘에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블랙홀」)라는 시인의 호소는 자신의 심정적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는 기능하겠으나 정작 중요한 블랙홀과 같은 현실과 시인이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폐쇄적인 세계의 구조에 대한 탐구가 그다지 정치하지 않은 연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시인이 열망하는 ‘너머’의 형상 또한 자족적인 열망의 표출로 귀결될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현실에 대해 갑갑함을 호소하는 다른 시편에서도 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거미줄 가운데 앉아 있는데

그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데

거미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데

검은 사슬에 묶여 있는데

다리는 여럿인데

한 다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

옴짝달싹 할 수가 없는데

중심을 벗어날 수 없는데

―「5월의 여왕」 부분


똥이 마린데

나오지 않아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어

뒤로 물러설 수도

앞으로 나가지도 못해

오른 손의 약은 수렁 속에

털어 넣지 못하고

왼손의 물은

삼키지 못해

―「패닉」 전문


구회남은 중심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 현실의 논리에 의해 구축되는 조화와 균형으로부터 이탈하기를 열망한다고 할 수 있겠다. 구회남에게 있어 외려 중심이야말로 자신을 옭죄는 감옥과 같은 것일 터이다. 중심에 대한 이탈이나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대한 토로는 시인을 둘러싼 세계가 그만큼 폐쇄적이며, 따라서 그를 옥죄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만 현실과 시인의 불화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그가 조탁하는 언어 속에서 발광할 것이다. 억압적인 현실로부터 도약하려는 그 탄력 또한 언어의 긴장감을 동력으로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인의 혀끝에서 맴도는 언어의 밀도는 현실을 벗어나려는 그 강력한 열망을 지탱해내지 못한다.

가령, “세계인이 가수 비를 믿듯이, I do, I do, I do(네)”(「자유공원에서」), “핸드폰이 사정한다”(「팔팔한 날 아침」), “클림트의 황금빛 유디트에 취해 에쎄담배 한 모금 깊이 있게 빤다”(「팜므파탈」), “인터넷보다 더 빠르게”(「태양을 피하는 방법」), “산야는 브리지를 하고 뽐내는데”(「4월」) 등과 같은 대목을 보라. 특정 구절들을 이렇게 따로 떼어내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한 방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용구들은 하나 같이 죽은 표현이자 비유들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현실을 도약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은 오롯이 그가 구사하는 ‘언어’를 통해서만 발현 가능할 터인데, <하루 종일 혀끝에서>의 많은 시편들에서 빈번하게 확인되는 밋밋한 비유와 자족적인 감상에 머무르고 있는 심리의 과도한 표출은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거나 현실과의 긴장감을 떨어트리는 기능만을 할 뿐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행동이 앞서갈 뿐이고/인식할 뿐이다”(「고양이」)라는 입장의 표명처럼 ‘탄력적인 생의 표출’을 떠올리고 솟구치게 하는 데 집중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지만 그 솟구침의 표출 도구인 ‘언어’를 다시금 매만지고 또 부수는 작업,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언어에 시인의 열망이 집약될 수 있을 때 “배고프고나 배부른 자여/메스, 메스를 오른손에 들어/군더더기를 잘라 콜라주하라/찢어 덧댄 부분에 자꾸 가는 마음의 길/의문, 의뭉스러움이여/구부러진 길로 들어서라”(「마니아의 겨울」)와 같은 대목에서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구회남 시의 가장 큰 특징인 현실을 도약하려는 탄력적인 에너지가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중심이 행사하는 폭압적인 구조들과의 갈등을 통해 구현되는 긴장이 직조하는 새로운 질서는 그것의 토대인 ‘언어’를 다듬고 매만지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김대성∙2007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DJ, 랩퍼, 소설가, 그리고 소설」, 「고통의 공동체」 1 · 2 · 3, 「문학적 순교자의 독창적인 패배」 등이 있다.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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