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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서평/서정의 모순, 상상적 돌파의 가능성/손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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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85회 작성일 09-12-2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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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차승호 <소주 한 잔>(2009 애지)

김지연 <늑대별>(2008 리토피아)

서정의 모순, 상상적 돌파의 가능성

손남훈|문학평론가

1. 서정의 자기 모순

서정은 흔히 주체와 타자의 동일성으로 정립되는 것이라 한다. 이를 주체를 주어로 삼아 재규정 하면, 서정은 주체가 타자와 동일시되고자 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서정적 주체는 타자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고, 타자의 몸을 통제하며, 타자의 상황을 주체 자신의 맥락으로 끌어 옴으로써 타자와 동일화 되기를 욕망한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죽음’에 대한 불안 또는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몸’에 새겨지기 시작하는 주름은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이 곧 닥쳐올 것임을 예감하게 하며,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지인知人의 죽음은 자기의 죽음을 되비추게 하는 거울이 된다. 때문에 주체는 ‘몸’이 갖는 한계상황을 돌파하고 ‘영원’에 대한 향수를 현실의 물적 토대에 접목하려는 몸부림을 통해, 제 존재의 가치 바꿈을 실현하려는 상상적 방책을 수립하려 한다. 늙은/낡은 주체, 시인은, 젊은/새로운 시작/시작詩作/始作을 통해, 자아의 확장을 꾀하며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을 향한 벡터를 수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서정의 상상력이 흔히 ‘근원’과 ‘본질’을 지향하는 것은 서정적 자아가 존재의 영원성을 상상하는 것과 상관물이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의 자아 확대는 타자에게는 폭력이 된다. 타자에 대한 주체의 사유思惟 형식들은 사유私有 욕망의 근사한 자기 정당화이다. 은유의 수사들이 주체의 낡은 몸을 새로운 몸으로 바꾸려는 욕망의 현실태라면, 환유의 수사들은 인접한 몸들을 주체의 몸 안으로 우겨넣으려는 식욕의 변형태이다.

문제는, 주체의 욕망(시인의 의도)은 욕망의 결과물(시, poem)을 언제나 배반한다는 데 있다. 주체는 타자를 욕망하지만, 타자는 주체의 욕망 속에 완전히 사로잡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는 주체를, 그리고 타자를, 위태로운 상황으로 몰고간다. 타자를 포섭하려는 주체의 욕망과 그럼에도 온전히 포섭되지 않고 잉여로 남는 타자, 그리고 유령이 되어버린 타자의 주체를 향한 엄습, 동일성을 욕망하는 현대시가 오히려 ‘분열’만을 확인하며, 파토스로 정서적 귀결을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서정시는, 동일성을 욕망하고 영원을 지향하려는 하나의 벡터와, 이를 끝끝내 배반하는 타자의 벡터, 두 지향들 사이의 갈등이다. 자아의 변형-확장의 상상력과 이에 포섭되지 않는 잉여들 간의 동일 불가능성, 회피될 수 없는 충돌의 결과물이다.

차호석과 김지연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시의 지형도는 분명 다른 지질학적 구성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시편에 ‘서정’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대상과의 동일성을 상상하면서도, 동일화 되지 못하는 잉여로 남는 모순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모순들이 그들의 시가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의 자기 모순성은 자못 진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2. 모순의 자기 증명서―차승호 시집 <소주 한 잔

소주는 소주燒酒, 즉 불타는 물이다. 상극인 불과 물이 맑고 깨끗한 액체로 알싸하게 변성되기, 차승호의 시가 소주를 닮았다하면 욕된 말일까? 서로 다른 요소들의 자기 합성과 변성이 소주가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면, 차승호의 시는 시라는 결과물 속에 그 과정들을 녹여놓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차승호의 시는 그 자체로 “소주 한 잔”이다.


출마허남, 생뚱맞게 거제도는 왜 가 있댜?

노가다 현장 따라 거제도면 거제도 강원도면 강원도 안 가는 데 없이 다 다닌다는 내 친구

난 전국구 아닌가베, 자네처럼 하루 죙일 책상 앞에서 좀살궂은 지역구허구는 스케일버텀 틀린 겨

들냄시 풀내 나는 농촌 졸업하고 망치 자루로 전국을 평정한 사내 프러포즈를 프로-스팩스로 알고 있는 유쾌한 사내

베트남은 왜 안 갔어? 가스 프로-스팩스 좀 허고 오지 이 사람, 넘이 나라 사람 데려다 고생시키고 국제적으루 망신 살 일 있능감

스케일이 국가 위신에까지 닿아 있는, 거시기 거미줄치도록 전국을 누비는 마흔댓 살 아라리 청춘/워뗘, 세류리 공천 줄 테니 한번 나서볼텨?

―「전국구」 전문


차승호의 시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충청도 사투리이다. 그런데 그의 사투리는 ‘듣기’나 ‘말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충청도 사투리로 구성지게 뽑아낸 위 시는 독백보다는 대화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의 자의적 편집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대화 양상들을 기록해놓은 듯한 거친 질감은 마치 선술집에서 두 농투성이가 농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처럼 그의 시는 눈으로 읽히어서는 제 맛을 찾을 수 없고, 시 속 ‘농투성이’들과 같은 언어로 대화할 때에야 비로소 시를 읽었다/말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차승호 시인이 구사하는 사투리는 단지 토속성 · 현장성의 강화를 위한 시적 전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시인(또는 시적 화자)이 부산에 살고 있는 충청도 사람이라는 사실(“나는 멀리 부산에서 사네”, 「호박」)과 관련이 있다.

시인은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부산 거주자이다. 또한 위 시에서 시인의 친구는 “망치 자루로 전국을 평정한” “전국구” 충청도 “사내”다. 즉 위 시가 보여주는 것은 충청도에 속한 것도,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두 사람의 충청도 사투리 대화이다. “전국구”라 주장하는 친구의 충청도 사투리는 도리어 전국구가 아님을 증명해버리고, “스케일버텀 틀린” “지역구”인은 도리어 “전국구” 친구라면 당연히 구분해야 할 “프로-스펙스”와 “프러포즈”의 의미도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전국구가 전국구가 아니고 지역구가 지역구가 아닌 그 둘의 충청도식 대화는 기실, 차승호의 이번 시집 전편에 걸쳐, 시적 화자가 발화하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짐작케 한다.

시인은 외부인이면서도 동시에 내부인이자, 내부인이면서도 동시에 외부인이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부인이고 싶은 외부인이자 외부인이기 싫은 내부인이다. 그렇다면 그의 충청도 사투리 구사는 그가 ‘충청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청도인이고 싶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충청도 사투리를 통해 충청도 고향 마을 사람들과 동일화 되고픈 시인의 욕망이, 역으로 동일화 되어 있지 않음을 증명해버린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를 벗어나는 주체의 이러한 자기 모순성의 발화는 더더욱 동일화에 대한 욕망을 고양시킨다.


서울로 명절 쇠러 간 아무개네 빈집 지나

어둑어둑한 논두렁을 걷는다

울퉁불퉁 두렁길 어색한지

여전 헛발 디디는 어린것들 일으켜 세우며

촌구석 시집오는 게 아니라는 마누라 불평

바람소리로 흘린다

철지난 원두막처럼 불빛 없이 웅크린 마을

걸리다 못해 들쳐 업은 막내딸년은

얼마나 남았냐고 칭얼대는데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한다

그래 어디까지 왔는가, 명색이

들판의 장남인 나는 대처로 떠돈 십수 년 동안

동구까지는 돌아왔는가

넌 이담에 연애를 해도 도시 사는 놈하고 해야 된다

바람소리로 흘리지 못할 투정이 뒤통수를 긁는다

새겨듣지 마라, 네 뿌리가 여기란다

여기가 네 뿌리란다

―「연어」 전문


대화가 아닌 자기 독백적 표현이 두드러질 때, 그는 좀처럼 사투리를 구사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투리 대화는 내부인이고자 하는 외부인의 일시적인 내부인화를 상상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그가 자기 독백적 표현을 사용할 때, 그는 “뿌리”와의 동일화를 강하게 지향한다.(“새겨듣지마라”) 그런데 독특한 점은, 동일화의 강한 욕망이 동일화의 대상(“들판”)에 대한 맹목적인 ‘이상화理想化’가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시가 지닌 장점이다. 왜냐하면 동일화에 대한 열망이 타자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김없이 제거해버리는 폭력성으로 치닫기 쉬운데, 그의 시에서는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대화’를 시적 형식으로 채택하면서 주체의 폭력과 이에 대한 타자의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갈등을 예리하게 비껴간다.

차승호의 시에 나타나는 “들판”이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간직한 이중적인 공간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그의 시에 흔히 나타나는 해학적인 상황 또한 마찬가지다.)


신나는 일이다

아산만 매립도 하지 않고

바위배기 개간도 하지 않았는데

농지 늘어난다/ 남으 땅 빌리기 별따기더니

휴경농법 도입해야 되는 거 아닌가

자꾸 농지가 늘어난다

들판 내려갈 때마다 황당한 부음들

멀쩡하다고 잊고 살았던 이빨이

어떤 때는 두 개씩 흔들리고 빠진다

농지만 남기고

한 집 건너 아는 이 사라진다

―「농지 늘어나다」 전문


위의 시는 전형적인 아이러니의 어조를 띠고 있다. 겉으로는 “농지 늘어”나는 상황을 “신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황당한 부음”이라 여겨질 정도로 “한 집 건너 아는 이 사라”지는 상황을 시인은 안타까워한다. 자연의 대리물로서의 농촌, 생태학적 대안으로 제시되는 공동체로서의 농촌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 농촌이 뿌리라 생각하는 시인에게 이는 “이빨이” “흔들리고 빠”지는 것 같은 뿌리 뽑힘을 체감해야 하는 절망적 공간이 되고 있다.


이 땅의 족속들 아직도

상강이면 둘러앉아 태양초 다듬고

늙은 호박 긁어 뱃구레 뜨뜻하게

호박죽 나눈다

대설과 소설 사이

한 접씩 두 접씩 김장 절이고

서울 사는 큰딸년 부천 사는 작은딸년

수원 사는 막내아들놈

택배로 한 동이씩 겨울 건건이 부친다

징하다, 징해

개화하지 못하고 깨지 못하고

가을마다 허방 빠지는 농사짓는다

깨잇늠으거, 접으먼 그뿐이여

말로는 골백번 작파를 해도

무식하게 우직하게 이 땅의 족속들 아직은

진행형으로 남아

―「진행형」 전문


그럼에도 농촌에는 “가을마다 허방 빠지는 농사 짓는” “이 땅의 족속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농촌은 떠난 자들이 흔적만이 남은 공간이 아니라 남은 자들의 고통과 공존하는 공간, 완료와 진행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떠난 것도, 떠나지 않은 것도 아닌 시인이 바라보는 불균질의 농촌 공간에 대한 녹취록, 차승호의 시가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의 질감을 살려내는 이유는 표준어로는 번역될 수 없는, “깨잇늠으거”라는 말이,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속에 “진행형”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며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차승호의 시는 모순적인 주체의 모순적인 대상에 대한 동일시의 모색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차승호가 점유한 서정의 지형도가 지닌 독특성과 다채로움이 여기에 있다.


3. 시리우스를 향한 눈 먼 사랑―김지연 시집, <늑대별>

차승호의 시는 주체의 모순성을 전제한 채 모순적인 대상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때문에 그의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성을 회피할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김지연의 시는 자기 구원을 위해 대상과의 동일화를 꾀하면서도 대상을 타자화하지 않는 독특한 시적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서정의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 시집의 제목, <늑대별>은 이를 예표한다.

‘늑대별’은 흔히 ‘시리우스’로 알려져 있는 별로, 밤하늘을 수놓는 매우 밝은 별 중 하나이다. 시리우스의 사전적 의미는 ‘불타는 별’이라는데, 겨울철, 태양이 뜨기 직전 동쪽 하늘에 밝게 빛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별이 사실은 하나의 별이 아니라 두 개의 별이라는 사실이다. 시리우스는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밝은 시리우스(시리우스A) 주위를 회전하는 어둡고 작은 시리우스(시리우스B)가 함께 있는, 쌍성雙星이다. 밝은 빛에 가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시리우스, 김지연의 시에서 우리가 밝고 빛나는 시리우스A 뿐 아니라 어둡고 작은 시리우스B 또한 감각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어두운 별이 밝은 별에 대비되면서 더더욱 김지연의 시 전편에 흐르는 어떤 정서와 욕망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면, 거기서 김지연 시의 모순성이 지니는 독특한 의미들을 포착할 수 있으리라.


말없는 강물처럼 두 귀를

아래 아래로 내려놓는 날은 시를 쓰고 싶다

그저 조용한 귀퉁이 차고 앉아

찬찬히 고개 숙이고 손끝으로 나오는

발긋한 언어들을 받아 내고 싶다

어둠을 털고 일어선 여린 풀들에게

내 마음 들키고 싶다

멀게 바라볼수록 빛나는 물방울 집에는

반짝이는 것들만 살겠지

그 빛나는 유혹에 빠져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이내 윤곽 뚜렷한

더 큰 집을 짓고 마는 물방울

뒷모습 챙기려 물방울은 스스로

제 몸을 터트린다

―「귀를 내려놓다」 전문


“빛나는” 것들은 시인을 순식간에 눈멀게 한다. 더욱이 그 “반짝이는 것들”은 시인의 “마음”마저도 “들키”게 하며, 시인을 “빛나는 유혹에 빠”지도록 한다. 그것은 시인이 “두 귀를/아래 아래로 내려놓는” 방심한 상태를 틈입하고 시인의 마음을 장악하며, “조용한 귀퉁이 차고 앉아” “발긋한 언어들을” “받아 내”게 한다.

하지만 시인의 눈 먼 육체는 그 빛나는 것과 온전히 동화될 수 없다. 시인의 “손가락”은 그 “빛나는 물방울”을 “터트”리고 말 뿐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는 시만이 빛나는 것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시는 “멀게 바라볼수록 빛나는 물방울 집에는/반짝이는 것들만 살겠지”라는 예감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 다시 말해, “발긋한 언어”를 생산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빛남을 지향하는 눈멂, 또는 눈먼 자의 빛남에 대한 외사랑, 그리고 그 빛남에 도달하기 위한 견딤은 김지연의 시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시적 태도이다.


낳으면 낳을수록 욕망이 커졌어

280일을 기다려 낳은 피처럼 소중한

아이를 보며 나만의 귀한 언어들을

자궁이 아닌 가슴으로 낳고 싶었어

시를 가지기 위해

한 남자의 추억이 되기도 하고

한 점 부끄럽지 않을 태동을 느끼기 위해

칼바람 맞으며 걷기도 했지

겨울 뒤에 올 봄을 생각하며

곰 인형의 목에 리본을 달아주었어

하나 둘 세상의 그늘로 떨어지는 것들은

내게 큰 부조가 되어 자양분을 만들고

시를 기다리는 시간은 알싸한 연애 맛이었어

순풍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시를 생각하며

마중물을 퍼 올리지

끝없는 몽상 상상 환상이라 해도 괜찮아

이미 난 오래 전 시를 잉태해버린 걸

허상이 판치는 세상에 쑥 나와 보렴

미련스레 껴입은 누드의 언어로

이 간뎅이 큰 세상에, 어서

―「내가 낳은 세상」 전문


“나만의 귀한 언어들”은 “자궁이 아닌 가슴으로 낳”아야 한다. “시를 가”진다는 것은 곧 반짝이는 것, 나를 눈멀게 한 것을 껴안게 된다는 말이다. 시인은 “시를 기다”려 “잉태”하려 한다. 시인에게 시는 “알싸한 연애 맛”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면서 또한 그 이상의 체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시인의 체험을, “시를 기다리는 시간”을, “끝없는 몽상 상상 환상”이라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시에 대한 상상 임신을 통해 “세상”을 “허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누드의 언어”로 시와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시’라는 지향점을 외부의 사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산하는 것으로 상상함으로써, 마치 모성이 자식을 바라보듯, 시에 대한 강한 애착을 정당화할 수 있다.

주체의 내부에 있는 또 다른 타자(“잉태”)를 상상하고 이를 화자의 지향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시인이 타자를 욕망하면서도, 욕망의 대상을 시각을 통해 폭력적으로 사유/사유私有/思惟하지 않음을 뜻한다. 오히려 시인에게 타자는 ‘눈 먼 사랑’의 대상이다. 내 몸과 함께 붙어 있기에 그것은 거리를 전제로 하는 시각의 폭력성에 노출되지 않으며, 둘이서 한 몸이 되는 온전한 사랑의 양태를 구현할 수 있다. 대상은 시인에게 타자이지만 그것은 타자화되지 않은 타자인 것이다. 시인은 타자와의 합일을 통해 자기 구원을 꿈꾸는 종교적 열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 타자는 내 몸이 아니라는 점에서 외부성을 지니고 있고, 동시에 내 몸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내부성도 지니고 있다. 마치 예수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듯이, 시인에게 타자는 눈부심과 반짝임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그려지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느낄 수 있을 뿐 볼 수는 없는 존재로 나타난다. 시리우스가 시리우스 A의 밝음과 시리우스 B의 어두움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중적 내지는 모순적 존재이듯이 내부와 외부,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점유하는 시인의 시는 필연적으로 모순성을 띤다.


오늘 아침도

네 안부를 묻다

반쯤 젖은 말들을

햇살에 펼치자 화단 나뭇잎이

초록 음성으로 내 말을 흉내냈다

가슴 묵직한 언어마저

쉽게 읽어내는 나무가 얄미워

내 몸에 줄을 맨다

포르릉 날아온 새가 줄에 앉아

나를 짐짓 쪼기 시작한다

들판 곡식을 쪼아 먹듯

심장과 멈춰버린 혈관을 쪼아

기어이 마른 피를 먹는다

남은 살이라도 먹이가 될 수 있다면

살들을 비벼 환丸을 만들었다

새는 품어 온 안개를 내려놓고 날아가고

다음날 아침도

그 다음날 아침도

안개를 품고 올 새를 기다리며

나는 새의 먹이를 준비한다

―「해피 투데이」 전문


하지만 시인의 시가 지닌 모순성은 오히려 모순이기 때문에 구원의 시작/시작始作/詩作이 될 수 있다. “가슴 묵직한 언어마저/쉽게 읽어내는” 단순함은 나를 포박할 뿐이다. 김지연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비상飛上 이미지들은 시인의 자기모순성과 결합할 때, 구원을 향한 치열한 자기 정신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비상하기 위해서 우선, 시인은 육신의 무거움을 벗어야 한다. “포만감”은 시인의 언어를 “애처롭게 쓰러”지게 할 뿐이다(「부목을 대고 싶다」). 시인은 자신의 몸을 기꺼이 “새”에게 먹이로 줌으로써 새처럼 비상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육신의 희생을 통해 구원에 도달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읽어”지는 언어일 때에만 유효하다. 시인에게 시는 나=새가 되기 위한 먹고 먹힘의 상상력,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점유하는 모순의 상상력을 통해, 새 아닌 나와 나 아닌 새가 동시에 하늘을 향해, 구원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희생이나 폭력성이 틈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모순의 점유를 통한 비상하기, 비상 불가능한 육신을 비상 가능한 존재로 바꾸는 서정의 상상력을 펼치면서도 시인의 시에는 타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나타나지 않는 시적 전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모순을 점유하는 서정

서정은 동일성으로 매끄럽게 정의되지 않는다. 서정은 모순 투성이의 시적 정서이자 태도이며, 그 때문에 다채로운 ‘그 무엇’으로밖에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정의되지 않은, ‘부정관사’이다.

서정은 상상될 수 있는 어떤 ‘본질’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다중 또는 다겹의 가능성이다. 때문에 서정적 자아는 타자를 지배하려 하면서도 도리어 완벽한 지배의 불가능성을 노출하며, 완전한 의도를 구현하려 하면서도 도리어 완벽하지 않은 결과들을 귀결시킨다. 가능성과 가능성들, 상상력과 상상력들,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논리정연한 인과로 구축되지 않고 겹쳐져 서로 삐걱거릴 때, 서정은 더욱 서정답다. 서정의 다채로움과 독특성, 영속성이 보장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차호석, 김지연 두 시인은 서정의 이러한 자기모순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주체와 대상 상호 간의 모순성을 시 속에 노출함으로써, 역으로 서정의 동일성 또는 영원성을 점유하려 한다. 그것은, 지독한 서정주의자들인 그들이 앞으로 그 모순을 어떤 식으로 자기화하면서 갈등의 결과물들을 ‘서정시’의 형태로 제출할 지 지켜보는 일이 흥미로울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손남훈∙2008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인제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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