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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서평/두 겹의 삶, 존재변환의 경계 위에서 소요하는/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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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10회 작성일 09-12-2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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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늑대>(창비, 2009)

홍명진 <숨비소리>(삶이 보이는 창, 2009)



두 겹의 삶, 존재변환의 경계 위에서 소요하는

이훈|문학평론가

1. 고독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전성태의 <늑대>는 멀리 떠나온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낯선 곳에서 고독하다. 아니 예전부터 고독했으나 이제 상황을 보다 정확히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고독은 낯선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낯설음에 고독을 느낀다. 어찌할 수 없이 스며 나오는 내면의 파괴적인 힘과 불분명한 동기, 확실하다고 믿고 있던 관념이 사소한 것에도 여지없이 뒤집어지는 기이함들. 소설을 둘러싼 문제의식은 우리를 이끄는 모순적 동기, 욕망과 행동이 정확히 완성되려는 순간 왜 스스로를 배반하는지에 관한 탐구이다.

가령 표제작 「늑대」는 검은 늑대를 쫓는 사냥꾼들의 이야기이다. 사업성공과는 상관없이 “뭔가 주물럭거리는 재미”를 잃은 한국인 노인과 그의 여자, 여행자를 위한 서비스로 생계를 이어가는 몽고인과 그의 딸이 등장한다. 그들이 쫓는 늑대는 “다른 맹수들처럼 주린 배만 채우고 물러”나지 않는다. 늑대가 동물을 죽이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살생을 즐기는 이빨을 갖고 나지 않았다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노인이 늑대를 쫓는 이유도 구체적이라기보다는 증후적이다. 이를테면 “나는 늑대 앞에 숙명적인 라이벌처럼 마주서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은 늑대와 노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위치를 암시한다. 낯선 몽고의 풍경아래 그들이 마주하는 건 낯익은 자신의 운명이다.

늑대가 “분명 인연의 모순이며 혼돈 그 자체”라면, 소설은 설명할 수 없는 이 동공에서 멈춘다. 우리를 이끄는 욕망은 생각만큼 자명하지 못하다. 타인도 마찬가지이다. 다들 자신이 쌓아놓은 기괴한 틀 안에서 서서히 소진한다. 노인이 여자를 결국 몰랐던 것처럼 몽고인도 딸을 모른다. 딸이 남자 손님을 향해 얼굴을 붉힌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노인의 여자이다. 성급한 속단과 달뜬 욕망위로 운명은 어긋난다. 노인이 늑대를 못 잡는 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다. 그토록 잡으려던 늑대는 다른 사람의 실수로 사살되고 노인은 여인과 엉긴 또 다른 여자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어긋난다. 소설은 일인칭 서술의 계속되는 교차로 개인이 갇혀있는 오해의 간극과 심연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늑대를 향한 노인의 집요한 집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늑대는 존재에 대한 알리바이를 확증해주는 대리물일 따름이다. 몽고에서 새로 써커스 사업을 시작한 노인은 써커스를 향한 열정을 “육체의 한계가 피워낸 꽃”으로 설명한다. 써커스는 변수라는데 유의해야 한다. 그 자리에는 늑대, 혹은 “숙명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무엇이든 가능하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기위해서 행동할 뿐만 아니라 하지 않기 위해서도 행동한다. 노인이 보여주는 광기어린 행동의 연쇄는 중요한 결락을 감추는 전략이다. 말하자면 파악할 수 없는 문제를 매끄럽게 수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밀쳐두고 안하는 게 아니라 절박한 외양으로 되풀이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그것만이 유일한 출구인 듯 한 행위들. 그렇다면 늑대는 믿고 있는 ‘현실’의 환상이다. 늑대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이름의 ‘현실’로 끊임없이 도주할 뿐이다. 마치 쫓듯이 말이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충동과의 조우는 「남방식물」에서는 고구마의 끔찍한 생명력으로 반복된다. 소설은 사랑의 ‘전사’로 살아온 화자가 지닌 사랑의 정체가 얼마나 기괴한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제자와의 스캔들, 식당의 여급 ‘명화’를 향한 이성적 호감은 타인을 향한 무관심과 겹쳐진다. 그리고 모든 걸 던졌던 사랑은 이제 사소한 의심으로도 기꺼이 대상을 버리는 모순으로 귀결된다. 그는 과거에 “졸업한 제자와의 스캔들로” 끝까지 아내의 자존심을 짓밟고 계속 “사랑에 대한 진실만을 폭력처럼” 휘둘렀다. 그런 그가 “명화라는 처녀로 기운”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부탁을 외면한다.

그는 그녀가 건 낸 쪽지를 탈북요청으로 오해하고, 쪽지를 몽고의 서낭당인 ‘어워’에 올려놓는다. 이때 주인공의 행위는 두 번의 배신이다. 한번은 과거에 주장했던 사랑의 무조건성에 대한 배신이며, 또 한 번은 사랑을 어워라는 일반적 상징체계로 탈각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그는 낡은 관습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다던 사랑의 진실과 상징체계사이에서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편리하게 반대쪽으로 날아간다. 스스로도 모순적인 화자의 습성은 그래서 그토록 썩은 내를 풍기며 “음습한 기운”으로 뻗어가는 기괴한 생명체, 고구마인 것이다.

소설은 계속 타인이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 화자를 맞닥뜨린다. 그는 한국으로의 취업을 도와달라는 청년의 요청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만적인 모습을 회피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바로 승낙과 거절 둘 다의 부정이다. 태도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며 지연하는 이런 전략은 미국 정부가 테러용의자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는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일관하던 방법이기도 하다. 도와주지 못하겠다는 거절은 쌓아온 이미지에 대한 모욕이며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와주기는 싫은 이중성 말이다.

문제는 행위의 결과를 타인은 모를지언정 스스로는 알고 있다는데 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못하든 말이다. “설령 그의 마음 한구석이 알 수 없는 격정으로 저릿”해도 “죽음으로 기울어 있든 삶으로 구부러져 있든 그것은 오로지 저만의 일”이라는 다짐은 죄책감이 엄습할 때 되뇌는 주문이 된다. 다시 말하건 데 주체에 대한 믿음은 유동적이다. 「코리언 쏠저」에서 다소 희극적으로 보여주는 ‘진정한’ 시인되기의 실패담, 「중국산 폭죽」에서 무례한 몽고부랑아를 대면할 때 미세하게 흔들리고, 한없이 무능할 수밖에 없는 ‘자애로운’ 목사, 혼혈아로 오해받아 겪던 사회적 차별을 오히려 역이용하는 짝퉁 영어강사(「이미테이션」) 등도 연장선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늑대가 사라지는 경험이 알려주듯이 우리는 존재변환의 지점으로까지 스스로를 육박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가령 「목란식당」에서 평양일류요리사가 약속대로 오지 않자 목사는 “사실을 호도하는 자나 거짓을 두둔하는 자”로 식당 측을 번역하고, 식당은 “우리는 그저 흔들림없이 최상의 맛과 써비스로 조국의 요리를 선사”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경우와도 같다. 소통불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화자의 삼촌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북한화가를 향한 관심과 대비되고 있다. 삼촌의 이해가 구체적 대상을 향한다면 다른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층위에서만 수평이동할 뿐이다.

당연하게도 안온한 기존의 해석체계와 작별을 고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혼자 떨어져 나가는 지점에는 끔직한 고독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감내해야 함을 전성태는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두번째 왈츠」는 이런 기존 해석체계와의 분리에 관한 섬세한 이야기이다. 작품은 정확히 「늑대」의 패턴을 반복한다. 표면적으로 사람들은 “유목민이 된 이방인”, 몽고에 정착한 북한할머니를 찾아가는 과정에 놓인다. 여행에는 몽고의 유명한 음악가의 미망인 ‘냐마’, 그녀에 대한 마음을 부인하고픈 화자가 함께 한다. 냐마는 남편 때문에 몽고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그녀의 사진은 박물관에서 죽은 남편과 함께 나올 정도이다.

죽은 남편의 이름은 사회의 상징적 등록소에 등재되어 있으며 그 자체가 상징체계의 은유이다. 언어는 사물의 죽음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허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냐마는 상징체계에 완전히 포박된 상황이다. 냐마는 어디를 가도 죽은 이의 아내로 호명된다. 예술가집단을 향한 그녀의 관심도 후원자라는 명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녀의 여정은 처음에는 충실한 상징궤도를 따른다. 그러나 표면적 여정은 이내 그녀와 그가 빚어내는 사랑으로 인해 여백을 만들며 균열한다. 북한할머니를 찾는 게 점점 힘들어지지만 냐마는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이상한 집착을 보인다.

“만날 수 없대요. 그 여자는 죽었대요.”

내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내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더니 마음먹고 울기로 작정한 여자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굴뚝 연기 잦아든 게르를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어떤 극심한 외로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그리고 두 여자를 두고 어떤 질투심마저 들었는데 그 심리상태가 어디에서 연유하고 딱히 무어라 명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워한 듯 그녀를 품에 안고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진심으로 자문했다.

―「두번째 왈츠」(p155)

여행이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냐마가 알게 된 건 무엇일까. 그건 결국 자신이 찾고자 하는 건 북한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북한할머니의 게르에 도착한 뒤 냐마는 “여자는 죽었대요.”라고 말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북한 할머니는 그들이 기대했던 어떤 위대함 없이 어렵게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자’는 더 이상 상징적 존재로 살아가지 않는 북한 할머니이면서 동시에 나먀 자신이기도 하다. 일종의 선언이다. 늑대가 사라지듯 할머니도 사라진다. 유명인의 아내로 행동하는 게 결국 환상에 붙잡힌 거짓임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마음을 연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냐마는 “내 품으로 쓰러졌다.” 첫 번째 왈츠가 오로지 상징체계와 기존의 관념적 주체의 틀에서 이루어진다면 두 번째 왈츠는 선택과 자각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유명 작곡가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향해 걷는 시간이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화자 또한 지금까지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한다. 소설은 우리에게 나먀와 같은 자기선언의 시간과 대면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성태 소설은 존재변환의 경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관념의 회로를 벗어나 우리가 믿는 환상들의 공백을 뚜렷하게 가시화한다. 그래서 스스로가 그것을 횡단하도록 유도한다. 주체와 관련해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상징체계는 없다. 각자 나름의 계수와 환상으로 상징체계의 만들어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 의미의 이유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우리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정념과 욕망을 설명해주는 이유는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의 이유는 없다. 현실에서는 오직 두 번째의 왈츠만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두 번째의 불가능함, 현실의 난경들, 우리가 취하지 못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두 번째 이후 만들어진다. 전성태는 <늑대>에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2. 고통 뒤에 열리는 숨소리

홍명진의 <숨비소리>는 제주도 해녀이야기이다. 이제는 늙어버린 해녀가 자신의 사진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일생동안 생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엄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야말로 그녀에겐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지상명령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해보거나 행동할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간단치 않은 현실과의 악전고투 속에서 상황은 지난하지만 동시에 간단명료하게 정리된다. 말하자면 살아남으라는 낙인은 그녀의 이마 위에 찍힌 ‘주홍글씨’인 셈이다. 그녀는 가혹한 현실이 던져놓은, 어쩌지도 못하고 피할 수도 없는 현실을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이제 앞에 놓은 사진은 정언명령과도 같은 생존의 주문에서 잠깐 벗어날 거리를 던져준다. 몸 여기저기의 흉터와 상처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관한 하나의 책이다. 이야기는 그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하나씩 풀려나온다.

그녀는 제주도 북쪽의 논깍 마을에서 태어난다. 일제 강점기를 겪고, 해방공간의 혼돈과 4․3사건, 60,70년대의 산업화 시기 등을 지나온다. 소설은 결코 역사적 사실의 재구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험난한 시기 어떻게든 여린 생명들을 보듬고 키워낸 한 명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생은 외적 충격과 조건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주체적인 선택의 가능항은 조건으로부터는 결코 찾을 수 없다. 가령 자식 많은 가난한 집의 딸,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른들의 결정으로 다른 마을로 시집가게 된 일, 첫 번째 남편의 비명횡사, 두 번째 남편의 주벽과 무책임, 딸의 병사, 아들이 마을의 유지 딸을 사랑하게 된 일,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일로 인해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 등등이다. 가혹한 조건은 옴짝달싹 못하게 찾아와서 충격적이고도 꾸준히 삶을 갉아 먹는다.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세계에서 오직 어떻게든 살아가야한다는 의지로 버티고 버틴다.

사는 건 뜨겁지도 않고 그저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과 같은데 가슴에 고여 있는 것들이 저들끼리 엉겨서 끓고 끓다가 차갑게 식어 딴딴하게 굳었다. 사는 건 그렇게 조금씩 굳어 가면서 단단해지는 것인가 보았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거, 생각이라는 거, 단단한 가슴속에 뜨거운 그것이 남아 맹물 끓듯 저 혼자 끓다가 식어 가는 것, 그래서 늙어 쭈그렁 바가지가 되어도 마음은 푸른 댓잎같이 창창하다 했던가. 댓잎처럼 푸르게 살아서 내 가슴 안에 푸른 바람 소리를 내며 고여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숨비소리」(p167)

소설은 우리에게 풍성한 제주도의 풍속사로 주의를 끈다. 해서 주어지는 외적 조건만을 쫓아서 소설을 읽기 쉬운데 그럼에도 곳곳에 풍성한 해석의 숲으로 들어갈 입구가 열려있다. 위의 구절은 작품 전체에 대한 상징적 열쇠이다. 먼저 미지근함이란 외적 충격으로부터 거리감을 획득한 마음의 평정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을 담그고 있는” 건 주어진 현실이 ‘내’가 벗어나고 싶어서 벗어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상징한다. 상처가 난 지점은 격심한 고통의 충격으로 차츰 떨어져 나와 어느 정도 물화된다. 위에서 ‘저들끼리’라는 표현에서처럼 상처는 객관화된다. 물이 흘러가듯 쌓이다 어느 순간 서서히 침전된다. 상처로부터 놓여나는 지점은 주어진 부자유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상처가 몸을 돌도록 수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데, “저 혼자 끓다가 식어”가는 영역을 발견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저 혼자” 활성화하는 지점은 끓는다는 데 있다. 외적 상황은 차가워지고 대조적으로 아마 주체의 자리라고 이름붙이고 싶은 이 지점은 끓는다. 한 번의 차가움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차가웠던 게 뜨거운 자가 동력의 활동을 시작한다.

절망적인 조건의 수용 뒤에 열려서 “푸르게 살아”있는 그것은 바로 ‘나’이다. “푸른 바람 소리”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숨비소리 인데, 숨비소리는 해녀가 잠수 틈틈이 수면 위로 올라와 내쉬는 호흡소리이다. 작품에 따르면 사람마다 숨비소리는 다 제각각이다. 화자의 딸들은 숨비소리만으로도 어머니를 구별해낸다. 살아온 내력이 다르니 각자가 내는 생의 소리도 다를 수밖에 없다. 숨비소리는 고된 노동으로 점철된 삶의 바다에서 그래도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음이요, 주체화의 기호들인 셈이다.

화자를 비롯한 제주도의 해녀들을 생존을 위해서 무시무시한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해녀복을 입기 전에는 누구의 엄마, 딸로 불렸을 그들이 옷을 입는 순간 모두 해녀로 불린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입어야 한다. 인간이 사회화하는 과정의 은유이기도 이 장면에서 그녀가 입은 건 자신의 역할이다.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역할은 일종의 거세이다. 상황에 포획되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호명되는 기능을 받아들인다. 거세는 스스로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타이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거세는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즉자화된 주체와 불리워지는 상징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이는 데서 사회화의 도정에 진입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음 고무 잠수복을 입었을 때 몸에는 피부병이 생긴다. 피부는 짓무르고 살은 갈라진다. 그래도 그녀는 잠수복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해서 바다 속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다는 화자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자유는 숙명의 수용 이후에 열리는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아쉬움은 “비참한 삶에 결박된 나머지 다른 삶의 가능성조차 내비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얼마간 자연주의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황광수)는 평가와 맥을 같이 한다. 물론 전망부재의 이유에서가 아니다. 일차적으로 조망 받을 대상으로 선정된 여인의 시선으로 작품이 진행되다 보니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해석의 교직짜기가 그리 수월치 않고 게다가 여인의 시선에 의지하게 되는 서사전략이 선택과 집중의 원칙보다는 다소 평면적으로 배열된 느낌이다. 모든 걸 담으려하기보다는 중요한 오브제에 서사를 겹쳐놓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굴곡진 현대사를 일별하는 느낌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작업들은 이미 많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작품이 의도하는 바도 그런 방향은 아니다.

소설은 “나는 한 번도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은 적이 없지만 내가 새로 뿌리를 내리고 산 이곳 역시 나에게나 남편에게나, 내 자식들 모두에겐 또 하나의 섬이었다.”는 결말로 되짚어 읽어야 한다. 화자는 많은 상처를 입고 가족과 함께 빈 몸으로 육지로 나온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낯선 곳을 향해 떠나야만 했던 그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멀리 떠나는 이유는 많을 것이다. 애초에 떠나려던 동기는 현실의 프리즘을 투과하면서 최초의 동기를 역전하기도 한다. 목적은 바뀌고 어느 순간 사소한 우연이 생의 여행 의의를 담보하는 상황으로 뒤집어지기도 한다. 우연은 필연이 되고, 떠나는 이유는 떠남을 결심하는 순간을 뛰어넘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마침표를 보류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건 선택의 순간 운명을 응시하고 전체를 거는 용기이다. 화자의 굴곡진 생을 통해 이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깨달음을 빌리자면 우린 누구나 지금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곳에서 해녀이다. 소설은 저마다 가냘픈 숨비소리를 내며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그래도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함을 말한다. 숨이 막힐 듯 조여 오는 수압과 어둠에 주눅 들거나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여리디 여린 몸짓으로라도 다시 수면으로 떠올라야 한다. 산다는 건 거룩한 숨비소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신성한 제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훈∙200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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