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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특집/김수영, 4.19와 시적 언어의 혁명/여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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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84회 작성일 09-12-2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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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4․19와 시적 언어의 혁명

여태천|시인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88.7%라는 경이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은 어처구니없는 이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바로 그날 마산에서는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일어났고,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는 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한 학생이 한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떠올랐다. 충격적인 사건의 소문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졌다. 며칠 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경찰의 학원출입 금지’와 ‘마산사건 책임자 처단’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그날 밤 자유의 열기가 서울 시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다음날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 학생, 그리고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서울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이승만은 재빠르게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민중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쌓였던 분노와 열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4․19가 일어난 것이다. 4․19와 함께 문학은 좀 더 많은 자유를 얻었고, 현실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세월이 흐른 뒤 문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자유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4․19는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도덕적, 윤리적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4․19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문제는 훨씬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그 중심에 김수영이 있다. 랑시에르(J. Rancière)의 말대로 윤리가 환경과 존재방식, 그리고 행동원리 사이의 동일성을 확립시키는 생각(주형일 역,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08, 172쪽)이라는 점에서 김수영은 4․19 무렵의 한국적 상황이 요구하는 존재방식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윤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이다. 김수영이 내내 고심했던 것이 시인의 양심과 시적 진실이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러한 믿음을 확신케 하는 많은 증거가 그의 시와 산문에 있다. 그런데 4월 19일 바로 그날, 김수영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최하림에 의하면 그날 김수영은 시위대의 뒤를 따라 오후 내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도봉동에 있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있다(<김수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1, 273~277쪽). 그곳에 머문 며칠 동안 김수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사이에 그가 남긴 기록은 없다. 4월 26일, 미국의 지지마저 잃어버린 이승만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만다. 4․19가 일어난 지 꼭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12년간에 걸친 이승만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 화약 같은 혁명의 순간을 김수영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 4. 26)에서


부인 김현경이 정서한 시 말미에는 ‘1960. 4. 26. 조조早朝’라고 명기되어 있다(<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민음사, 2009, 231쪽). 이른 아침 이승만의 하야성명을 듣자마자 김수영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단숨에 시를 써내려갔다. 4월 19일 이후 일주일 동안의 침묵이 터져 나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언어는 기존의 시적 언어의 자장에서 이미 이탈한 것이었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이승만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김수영의 언어가 시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자. 이 시가 보여주는 엄청난 언어의 파토스만으로도 그날의 열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수영의 언어는 4․19와 함께 시적 혁명을 선취하고 있었다.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듯 김수영은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패배와 설움의 그림자를 조용히 밀쳐내고 반짝거리며 살아있는 언어를 골랐다. 새로운 시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 놀라운 사태 이후 수없이 많은 김수영의 후예가 탄생했음을 우리는 안다.

그날의 감동은 산문에서도 발견된다. 흥미롭게도 김수영은 오랜 독재정치로 자유를 억압했던 이승만의 굴복에 대해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보잘것없는 민중들이 일구어낸 승리에 대해 진심으로 감격했다. 그 감격을 김수영은 이렇게 적었다.


사실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

‘4월’의 재산은 이러한 것이었소. 이남은 ‘4월’을 계기로 해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작열灼熱하고 있소. 맹렬히 치열하게 작열하고 있소. 이북은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작열’의 사실만을 알아가지고는 부족하오. 반드시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통일은 안 되오.

―「저 하늘이 열릴 때」(1960)에서


“‘4월’의 재산은 이러한 것이었소.”라고 김수영은 분명하게 말했지만, 도대체 무엇이 ‘“4월”의 재산’이라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그 재산은 자유의 이미지다. 예컨대, ‘하늘과 땅 사이의 통일’이라든지, ‘다시 태어남’, 그리고 ‘작열’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좀 더 과격하게 남과 북, 미국과 소련의 구분조차 필요 없다고까지 말했다. 김수영은 4․19가 새로운 세계의 길을 열어 보여주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그는 황홀한 체험을 했으리라. 그리고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지극히 모호한 말로 그것을 대신했다. 이 느낌의 강렬도를 우리는 김수영의 언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4월의 재산은 자유가 거느리는 ‘하늘과 땅 사이의 통일’과 ‘다시 태어남’과 ‘작열’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 자유를 이행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4․19 때 젊은 학생들이 시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가슴 벅찬 자유란 정연한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김수영이 ‘느낌’이라는 지극히 모호한 표현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김수영은 뒤따라가는 영광마저 소중하다고 기록했다. 비록 4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더라도 김수영은 쿠바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쿠바는 ‘카스트로’ 단 한 사람밖에 없지만 한국은 이미 ‘카스트로’와 같은 2,000명이 넘는 자유의 실천가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4․19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 김수영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4․19를 기점으로 김수영의 시는 많은 변화를 보인다. 4․19가 터지고 난 뒤 그해,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를 포함해서 모두 14편의 시를 썼다. 다른 해와 비교하면 높은 수치다. 그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던 것이 다름 아닌 언어의 자유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분명 김수영은 뒤따라가는 영광만을 누렸던 건 아니었다. 화약 같은 열망으로 달구어진 그것은 분명 시적 언어의 혁명이었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걸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 4. 26)에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에서 보이는 산문성은 다분히 의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이 산문성은 자유의 언어적 실천인 셈인데, 김수영은 자유의 언어적 실천에 정신의 검열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격한 감동의 느낌은 매끈하게 연결된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산문적인 일상어로 전달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김수영이 산문성을 끌어들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감정의 폭발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리와 정돈이 필요 없을 만큼 절박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자유의 에네르기가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언술이 바로 산문적인 일상어에 있었기 때문이다.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가 불러일으키는 통렬한 느낌을 어떤 비유적인 언어도 대신하기는 어렵다. 김수영의 이러한 언어적 실천은 산문화된 시와 일상어의 과감한 사용으로 확인된다. 특히, 일상어가 보여주는 시적 언어의 혁명은 김수영이 주장했던 혁명의 현대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산 증거를 우리는 바로 엊그저께 ‘4월의 광장’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혁명을 하자. 그러나 빠찡꼬를 하듯이 하자. 혹은 슈사인 보이가 구두닦이 일을 하듯이 하자.

―「들어라 양키들아」(1961. 5)에서


인용한 글은 라이트 밀즈(C. Wright Mills)의 「들어라 양키들아」의 서평으로 쓰였으나 내용이 반미적이라 발표되지 못했다. 짐작과는 달리 김수영이 생각한 현대의 혁명은 육중하지도 심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과제로서의 혁명의 성격을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에서 찾았다. 일상의 사소한 현장에서 혁명을 시작하고 완수해야 한다는 게 김수영의 생각이었다. 생활에서의 혁명은 소박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절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마치 ‘빠찡꼬’를 하듯이, 혹은 ‘슈사인 보이’가 구두를 닦듯이 혁명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빠찡꼬’와 ‘슈사인 보이’라니 의아하지 않은가. ‘슈사인 보이’야 가난한 소시민으로 볼 수 있겠지만 ‘빠징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혁명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언어에 김수영 식 혁명의 현대성이 담겨있다. 김수영 식 혁명은 모든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혁명은 실제로 모든 일상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김수영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성된 일상과 그 일상을 재현하는 언어를 통해 혁명의 현대성을 강조했다. ‘빠찡꼬’와 ‘슈사인 보이’야 말로 혁명의 일상성을 보여주는, 그의 표현대로 ‘산 증거’인 셈이다. 혁명은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본에서 정치적 성격을 소거하는 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김수영 식의 시적 혁명과 시의 자율성이 여기서 나온다. 그것이 정치적 것들과의 연루로부터 시를 해방시키는 시적 실천의 길이다. 혁명의 방식과 혁명의 현장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은 그가 보여준 시적 언어의 혁명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

‘4월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 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 같기도 할 것이니

―「가다오 나가다오」(1960. 8. 4)중에서


이 시는 김수영 식 시적 혁명의 대표주자다. 먼저, 혁명의 방식이다. 그것은 ‘돈을 내면 다시 거둬들이는 일’과 ‘씨를 뿌리고 또 뿌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씨를 뿌리는 일의 반복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있는 반면 돈을 내고 거둬들이는 일은 자본의 이동에 대한 서술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김수영이 생각한 혁명의 방식은 이질적인 두 행위가 동시에 지니는 반복에 있다. 반복이 불러오는 경쾌감과 속도감은 혁명의 뚜렷한 속성이다. 예컨대, ‘돈’과 ‘씨’, ‘끝’과 ‘시작’의 대비와 반복에 의해 한층 강렬해진 속도감을 느껴보라. 이 속도감은 “‘미국인’과 ‘소련인’”이 “똑같은 놈들”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거쳐 그들이 자행할 끔찍할 폭력에 대한 염려까지 말끔히 씻어낸다. ‘나가다오’와 ‘가다오’는 저 내면 깊숙이 남아 있는 두려움의 끈질긴 사슬마저 끊어놓는다. 그러므로 1연과 2연의 첫 구절, “이유는 없다―”는 진술에는 모든 형식적 절차가 필요 없는 혁명의 절대적 권리가 담기게 되는 것이다.

다음, 혁명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비어홀’과 ‘강변밭’과 같은 보잘것없는 곳에서 혁명은 시작된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열기에 도취되어 정작 생활의 혁명을 깨닫지 못할 때, 김수영은 혁명이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했다.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일은 ‘비어홀’의 카운터 위에 무수히 오고가는 ‘돈’처럼 우리는 혁명과 친숙해야 한다. 잠시 찾아오는 적막은 혁명의 끝일 수 없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의 혁명의 아름다움은 바로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와 ‘강변밭’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리고, 다시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뿌리고, 다시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일은 혁명의 일상성과 무한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어홀의 카운터”와 “걸찍한 강변밭”은 삶의 현장이며, 혁명은 그 삶의 현장 속에서 쉼과 움직임을 반복한다.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혁명이면서 곧 삶이다. 4․19라는 특별한 사건에 맞춰 터져 나온 욕망의 언어는 또 다른 언어를 낳았다. 「가다오 나가다오」에서 느껴지는 힘과 속도 역시 혁명이 낳은 값진 선물이다. 이 언어가 보여준 힘과 속도가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라는 울림이 큰 어조를 만들어냈다. 김수영은 터져 나오는 혁명의 열기를 산문적 형식의 시에서 과감한 일상어의 활용으로 보여주었다. 김수영의 시에서 시적 실천과 혁명은 이렇게 나란히 걸어간다. 4․19가 일어나던 해 김수영은 우리 나이로 마흔이었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김수영은 혁명의 실패에 대해 깊게 숙고했다. 고독과 피로가 어떤 의미인지 그는 혁명의 실패를 통해 깨달았다. “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1960. 6. 15) 그는 어느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4월 26일’ 후의 나의 정신의 변이 혹은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강인한 고독의 감득感得과 인식이다. 이 고독이 이제로부터의 나의 창조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뚜렷하게 느낀다.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혁명이란 위대한 창조적 복본複本(counterpart)이니까. 요즈음의 나의 심경은 외향적 명랑성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졸시 「푸른 하늘을」이 약간의 비관미를 띠고 있는 것은 역시 격려의 의미에서 오는 것이리라.

―「일기초 2」(1960. 6. 16)에서


혁명이 지나간 뒤 고독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은 그 어느 때보다 사려 깊어졌다.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고독의 감득感得과 인식”은 “정신의 변이 혹은 발전”에 해당한다. 혁명은 위대한 “창조적 복본複本 (coun

terpart)”이고, 혁명은 고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혁명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생각들이다. 분명, 김수영은 달라졌다. 피곤을 이해하는 태도도 새로워졌다. 실제로 그는 많이 피로했다. 폭발한 감정의 뒤끝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심했을 것이다. 피로에 지쳐 스스로를 방기하고 싶은 숱한 유혹이 있었겠지만 유혹의 마지막 순간에 김수영은 그의 큰 두 눈을 깜짝거렸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

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간단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이 있거든 불러보라

나의 머리는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

―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1960. 10. 29) 전문


김수영은 일기에서 이 시를 “백팔십도 전환. ‘일보 퇴보’의 시작試作”(「일기초 2」, 1960. 10. 29)이라고 했다. 자기 확립을 위해 다시 뿌리를 펴는 작업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피곤한 일상 가운데 찾아오는 짧은 휴식을 맛보았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동안 김수영은 생각에 잠겼다. 피곤을 참지 못하고 잠깐 눈을 감기도 했다. 자신의 몸에서 자기가 빠져나가는 착각 뒤에,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그 순간에, 세계도 이러한 “무수한 간단間斷”으로 이루어졌음을 김수영은 운명적으로 알아차렸다. 잠깐 눈을 감음으로써 몸의 피로가 사라지는 것처럼 세계의 피로도, 시간의 피로도 짧은 휴지休止를 필요로 한다. 다시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피곤한 몸(“나의 머리”)은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린다.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김수영은 그것을 “무수한 간단間斷”이라고 했다. 움직임의 휴식은 새로운 움직임을 예비하는 법이다. 피로는 부단한 움직임 가운데 있는 휴식의 순간에만 지각되는 움직임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김수영에게 몸은 피곤을 견디며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나가야 할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도 이 시는 ‘에스키스(esquisse)’(「일기초 2」, 1960. 10. 31)에 불과했다. 피로를 피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필요했던 때였다. 이 시가 바로 그 생각의 흔적, 밑그림이다. 이러한 고민 끝에 김수영은 피로한 자신에게서 가벼운 희망을 발견했다. 혁명의 실패가 가져다 준 또 다른 희망이었다. 김수영은 희망의 가벼움, 혁명의 가벼움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그 방을 생각하며」(1960. 10. 30)에서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김수영은 혁명의 여운이 남아 있는 방을 나와 다른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방을 바꾼 뒤에 김수영은 무엇을 얻었을까? 그 방은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가 가득했던 곳이다. 김수영은 그 방에서 숱한 고민의 시간을 보냈고, 열망의 언어를 쏟아냈다. 낙서처럼 휘갈긴 시들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가라앉고, 거리 곳곳을 흘러 다니던 혁명의 노래가 사그라질 때쯤 김수영은 다시 그 방을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말들은 ‘실망’이나 ‘가벼움’과 같은 단어였다. 그 다음에 어떤 말들이 그의 텅 비어버린 가슴을 채웠을까? 김수영은 ‘재산’과 ‘역사’를 ‘실망’과 ‘가벼움’ 옆에 나란히 놓았다. 불혹의 나이가 준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딱히 특별한 계기가 없었지만 김수영은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알게 되었으며, 그 가벼움이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새롭게 가졌다. 그는 섣부르게 혁명을 다시 일으켜 완수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혁명의 “달콤한 의지의 잔재”마저 떨쳐버린 상태에서 혁명의 실패를 내면화하기 시작한 김수영은 자신의 입속에 쓰디쓴 냄새가 나더라도 이유 없이 풍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그때 김수영은 실망의 가벼움마저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역사의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듬해 김수영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쓴다. 혁명의 실패와 마흔의 나이, 그리고 사랑.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사랑」(1961)


사랑하는 연인을 그 대상으로 한다면 ‘너’를 사랑의 은유라고 보아도 좋다. 2연에서 시인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사랑이 꺼졌다가 살아나는 것을 확인한다. ‘너’의 얼굴이 불안한 이유다. 사랑은 1연에서 보듯 변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러나 정작 지켜보는 이의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에 ‘너’의 얼굴이 불안한 것이다. 3연에서 ‘너’의 얼굴에 번개처럼 금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켜보는 이의 마음에 금이 간 것이지 사랑에 금이 간 게 아니다. 이 시는 사랑의 이중적인 속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김수영은 사랑을 잘 몰랐다. 따뜻한 시선으로 누군가를 그윽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김수영이 열렬히 사랑을 느낀 때는 묵묵히 자유와 혁명을 실천했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저 하늘이 열릴 때」, 1960)을 만나고 난 뒤다. 4․19라는 특별한 사건이 김수영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바로 사랑이었다.


여태천∙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스윙>, <국외자들>과 비평서 <김수영의 시와 언어>, <미적 근대와 언어의 형식>이 있다. 제27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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