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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특집/그리운 사람 채광석/박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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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역사의 대전환과 혁명적 상상력
그리운 사람 채광석
박선욱|시인
6월항쟁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지축을 울리던 함성, 피 끓는 젊음과 투지로 독재에 맞서 저항하던 우리 모두의 거친 숨소리가 귓전에 쟁쟁하다. 아스팔트를 질주하던 페퍼포그 차와 온 도시에 자욱하던 최루탄, 길바닥에 떨어져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 불안하던 일명 ‘지랄탄’의 난무 속에 로마 병정처럼 군홧발로 쳐들어오던 전경들의 방패와 춤추던 곤봉이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으로 각인돼 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나는 1기 채광석 사무국 체제의 뒤를 이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2기 사무국의 총무간사였다. 2기 사무국 구성원인 나는 이호철 대표, 이영진 사무국장, 현준만 재정간사와 더불어 마포구 공덕동 105의 94번지에 주소를 둔 조광다방 건물 삼층에서 당시 숨 가쁘게 돌아가던 6월항쟁의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수많은 농성과 가두 투쟁을 벌였고 성명전을 전개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자실 소속의 회원 문인들을 불러 세워 서울시청과 광화문, 종로와 을지로, 청계천과 퇴계로, 서울역 등에서 가두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시국 사건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성명서를 써야 했고, 감옥에 갇힌 회원들의 석방을 위한 호소문과 결의문을 써야 했으며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행사를 알리는 편지 또한 부지기수로 써서 붙이는 등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여의도의 여성백인회관에서는 민족문학의 밤과 민족문학교실 등을 상시적으로 운영하면서 대중들과의 접촉 면적을 넓혀 나갔고 지역문인들과 연례적으로 만나는 행사도 순차적으로 실시해 부산, 광주, 대전 등 전국 단위의 문학인의 밤이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자실은 리얼리즘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통하여 한국 문학운동 중심부에 당당히 자리 매김을 하던 시기였다.
이 모든 일들은 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모든 동지들의 협력에 의해 가능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 일을 당차게 추스르고 이끌어나간 채광석을 특별히 꼽지 않고서는 자실의 역사를 기록하기란 불가능하다. 나를 비롯해 그 무렵 채광석을 따르던 후배들에겐 영원히 광석이형인 채광석. 그가 이 땅을 떠난 지 22년 만에 다시 추억해도 광석이형의 눈매와 음성과 구수한 욕설과 너털웃음은 여전히 생생하다.
채광석을 처음 만난 것은 풀빛출판사가 역촌동에 자리 잡고 있을 때였다. 나는 1982년 가을, 무크지였던 실천문학지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뒤 이듬해인 1983년에 마포의 한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전두환 일당의 신군부가 등장해 이 땅을 공포정치로 몰아넣고 있던 엄혹한 때라서 '창비'나 '문지'와 같은 문학지가 폐간되고 정치인들도 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암흑기였다. 그 무렵엔 시인사의 조태일 선생을 만나 끝없이 이어지는 맥주집 순례에 동참하거나 풀빛출판사에 놀러갔다가 나병식 사장에게 이끌려 새벽 해장술판에까지 참여하는 일이 참 많았다.
그러면 어김없이 선배 문인들이 나에게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도록 재촉했다. 문단의 막내인 내가 노래를 부른 뒤엔 김정환이 특유의 미성으로 멕시코 민요인 「제비」를 불러 술집 분위기를 고조시키곤 했다. 술이 거나해진 박태순 선생은 늘 “짱구 아버지 짱구, 짱구 삼촌 짱구……” 하는 식으로 가사와 멜로디도 없는 노래를 밑도 끝도 없이 부르곤 했다. 어릴 적 귀가 안 들리게 된 박용수 시인은 가슴 저 깊숙이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목소리와 두 옥타브를 넘나드는 기복이 심한 곡조로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를 불러 듣는 이를 슬픔의 심연으로 데려다놓곤 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채광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시를 암송하거나 최근에 쓰고 있는 시에 곡을 붙여 즉흥시인지 음유시인지 모를 가락으로 들려주었다. 그럴 때의 채광석의 눈은 반쯤 감겨 있거나 술집 벽을 관통하여 아주 머나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평일 대낮에 풀빛출판사에서 만난 채광석은 늘 무언가를 원고지에 끄적이고 있었다. 바쁜 업무 중에도 후배가 방문하면 늘 반기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는 습작하던 시를 가방에 가지고 다니다가 선배나 동료를 만나면 간혹 의견을 구할 때가 있었는데, 채광석은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이 부분은 사족 같은데? 차라리 그 대목을 없애 버리는 게 낫겠다.”
채광석은 마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사제나 집안의 큰형님처럼 자상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을뿐더러 가증스런 위선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질타를 아끼지 않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1983년 2월, 시인 김정환의 장편연작시 '황색예수전' 제1권 말미에 해설 「김정환의 예수」를 쓰고 3월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한 '한국문학의 현단계 2'에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를 신인작품으로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한 터였다.
또한 그해 5월에는 조태일 시인이 발행하던 시 전문 무크 ≪시인≫ 제1집 ‘움직이는 시’에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 외 4편으로 시작활동을 펼침으로써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단 시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비판과 전망이 담긴 글을 써냄으로써 전방위적인 문화 게릴라의 면모를 일찌감치 보였다. 채광석의 이러한 면모는 뒷날 이재현, 심종철, 위기철 등 후배 문인들의 전방위적인 글쓰기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역촌동의 풀빛출판사에는 그 무렵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붙박이로 일하고 있어서 좌장 격인 채광석을 비롯해 박인배, 김정환, 김사인 등 수많은 문인과 미술인 들이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들은 대개 해질녘쯤 출판사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가졌다. 출판계의 말술인 나병식 사장이 주도하는 술판은 채광석의 걸쭉한 욕설과 명쾌한 비평이 곁들여지자마자 단숨에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와 찬사 또는 비판의 자리로 바뀌게 마련이었다. 그 무렵엔 박정희 정권 말엽에 결성된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인사들과 미술계의 이론가 및 화가들과의 합석이 잦았다. 자리가 이러하다 보니 술판은 자연히 문화 전반의 교류와 비평의 무대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화제는 결국 신군부와의 싸움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당시 우리 문학판의 젊은 진영에서는 1974년 11월 18일 결성된 이후 반유신정권의 기치를 내걸고 활동해오다가 전두환 정부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옥문인 및 양심수 석방 및 복권, 참된 민주사회 건설, 자주적인 통일, 참다운 민족문학 건설 등을 주요 실천 내용으로 내걸었던 진보적인 문인 단체였다. 하지만 자실은 활동을 정지당한 채 투옥 문인들은 오래도록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자실의 재건과 활발한 활동이 절실한 시기였다.
당시 시인 김남주는 남민전 사건으로, 시인 이광웅은 오송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밖에 시국 사건으로 끌려간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이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 있었다.
자실이 재건된다면 이들 억울한 문인들의 석방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뛸 수 있었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한 일체의 제약 철폐를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또한 노동현장과 생활현장에서 일어나는 민주의 권리주장 존중을 위해, 정부 당국과 일부 외국인들이 논의를 독점하는 통일 문제의 자주적 결단을 촉구해야 했다. 나아가 문학을 통한 생생한 현실 점검과 문학인의 개방적 자세 견지, 민족 전통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더욱 활발히 펼칠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했다. 자실이라는 공간은 문학의 열린 공간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문은 타의에 의해 굳게 닫힌 상태였다. 누군가가 잠긴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어야 했다. 이때 채광석은 그 문을 용감하게 열어젖히는 데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었다.
1984년 3월 14일, 채광석은 민족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실행위원에 임명되었다. 재야 운동가의 이력을 갖춘 채광석은 문화운동이라는 더 넓은 장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일 준비를 갖춘 것이다.
채광석이 ‘시와 경제’ 동인이 된 뒤부터 빈번하게 접촉한 사람은 시인 홍일선이었다. 홍일선은 경기 화성군 출생으로 고향 동탄면 석우리에서 농사를 짓다 5백만 원을 가지고 서울에 상경, 영등포 시장에‘백두산 푸줏간’이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하던 노동자 시인이었다. 홍일선은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구로구 독산동의‘우牛시장’에 가서 소 곱창 등을 사서 납품을 하거나 직접 곱창을 구워 팔기도 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어느 누구 못지않았다. 틈틈이 시작에 열중하면서 많은 책을 탐독하던 그는 집에 가구보다 책이 많을 정도로 장서가이기도 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해제된 뒤였는데, 역곡에 살던 채광석은 밤 열두 시쯤 김정환과 더불어 영등포의 가게로 자주 찾아왔다. 채광석은 이때 동인 가운데 유일한 월급쟁이였기에 자주 술을 사는 편이었다. 홍일선이 소 간과 천엽, 곱창 등을 석쇠에 구워 안주로 내오면 그들은 함께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시국에 관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홍형, 지금 전두환이가 정권을 장악해 문화운동을 초토화시켰는데,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지금이야말로 자실 문인들이 나설 때가 아닌가 말이오. 이제, 문학적 한계상황을 극복할 새로운 문학운동이 필요한 때요. 광주항쟁을 겪은 뒤, 우리 시단에서는 젊은 목소리들이 분출하고 있어요. 이 신선한 문학적 자양분으로 자실의 내용을 채우면 분명 문학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할 것 아니겠소? 이건 분명, 한국문학에 큰 재산이 될 게 틀림없소. 그런 면에서 지금 휴화산이 되어 있는 자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해요. 홍형이나 나나, 여기 있는 정환이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시작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 문학인들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노동자 시인들이 쓴 시를 적극적으로 우리 문단에서 수용, 문학의 지평을 더 넓게 열어 가야 해요.”
채광석은 이처럼 문학을 운동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건을 주장했다. 김정환, 홍일선은 물론, 참석한 사람 대부분이 채광석의 견해와 같았다. 자실 재건에 대해 의기투합을 한 그들은 다음날부터 선배 문인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가을 무렵, 채광석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건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때부터 채광석은 선배 문인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다니면서 자실을 재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선배 문인들은 한결같이“지금은 시기상조다”, “아직은 문인들이 나설 때가 아니다”라며 신중론을 폈다. 문인 간첩단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중앙정보부 또는 합수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경험이 있는 선배 문인들은, 광주 학살의 원흉인 신군부가 문인들을 상대로 또 무슨 해괴망측한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어서 당분간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채광석은‘자실 재건’을 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는 한편, 문학을 통해 반독재 민주화운동 및 민족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며“양계장의 닭들이 닭장에 갇혀 밤이 와도 전등만 켜놓으면 낮인 줄 알고 정신없이 사료를 주워 먹고 정신없이 알을 낳듯 문학의 미망에 갇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작품을 낳는 기능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침없이 비판하고 나섰다. 결국, 채광석의 집요한 설득에 의해 자실 재건에 대한 선후배 문인들 간의 합의가 도출되어 재건 작업은 착착 진행돼 갔다. 그해에 이부영 등이 주도한 ‘민중민주협의회’가 활동을 개시했다. 각 운동 단체는 주요 실무 책임자 및 연락 담당으로 한 사람씩 파견을 해야 했다.
“광석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도 문인을 파견해야 하는데, 그 일을 네가 해다오.”
어느 날, 박태순이 파견 문인 역役을 사양하고, 대신 그 일을 후배 채광석에게 맡김으로써 1970년대 자실 창립 멤버인 박태순에서 1980년대 재건 멤버인 채광석으로의 공식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이 해 11월 18일, 자실 창립 10주년을 자축하는 모임을 맞이해‘자실 재건’논의를 위한 확대 준비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지난 1980년 이후 무크 ≪실천문학≫ 발간 외에는 자실 활동이 미약했던 점을 자체 반성하고 이의 활성화 방안을 활발하게 모색했다. 참석자 모두가 상설 사무실을 차리는 데 대해 의견을 모았으며, 직제를 개편하여 대표간사 및 간사 중심의‘간사회’로 운영되던 것에서 탈피하여 ‘사무국’ 중심으로 체제를 정돈하기로 합의했다. 사무실은 마포구 공덕동에 마련하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마침내, 1984년 12월 19일 흥사단 강당에서 자실을 새롭게 재건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84회의’가 개최되었다. 「84 문학인대회 및 민족문학의 밤」이라 쓴 플래카드가 내걸린 대회장에는 전국에서 온 수많은 작가들로 가득 메워졌다. 채광석의 사회로 시작된 이 대회에서는 ‘84 문학인 선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향후 자실을 이끌어갈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김정한, 김병걸, 김규동, 박연희, 고은, 이호철, 천승세, 백낙청, 문병란, 신경림 등 10인의 고문단과 박태순, 양성우, 이문구, 조태일, 황석영 등 운영위원단이 선정되었고 각 실무 간사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만약 정正 간사에게 불가피한 사유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부副 간사를 각 1, 2명씩 두기로 하되, 경우에 따라서 정 간사를 복수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부를 맡을 간사가 다음과 같이 임명됐다(괄호 안이 부간사).
총무간사에 채광석(김사인), 재정간사에 김정환(백원담), 복지간사에 송기원(하종오), 홍보간사에 임정남(이영진), 연구간사에 이은봉(최두석), 섭외간사에 이시영(김도연, 심종철), 교육간사에 김진경(고광헌, 박몽구) 등이 선정됐다. 이로써,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동면 상태에 있던 자실을 흔들어 깨워‘문학의 운동화’라는 슬로건으로 강하게 뭉치게 한 ‘총무간사 채광석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사무실을 마련할 자금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 홍일선이 선뜻 거금 3백만 원을 채광석에게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사무실을 마련한 채광석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개편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뒤 1980년대 초반을 질풍처럼 내달렸다. 문학을 운동의 차원으로 인식하여 살벌한 시국 속에서 문인들을 독재 타도의 대열에 들어서도록 독려한 그를 일컬어 황지우는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으로 불렀다.
채광석의 주특기는 특유의 직설화법과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거지를 한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쏘아대던 입담이었다. 그의 무기는 말과 입이었다. 자실 총무간사, 민통련 중앙위원, 민문연 실행위원, 시와경제 동인, 도서출판 풀빛 주간 등을 역임하면서 서슬 퍼렇던 5공 시절 군사독재와 한 치의 양보 없이 당당하게 맞서 싸운 진보적 문학 진영의 투사였다.
시와 평론을 같은 해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혜성처럼 등단한 채광석을 빼놓고 1980년대 문학판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대화를 했으며, 수많은 서로 다른 층위의 조직과 사람을 단단히 연결시켜 주었다. 그는 불같은 열정의 소유자였으나 개인적인 욕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가 타계한 날, 채광석의 호주머니에서 달랑 150원이 발견됐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되듯이 그는 세상의 명리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채광석은 일단의 후배들을 폭넓게 엮어내어 후반기 자실 세대를 형성해 나갔으며, 침체 일로를 걷고 있던 문학판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민족문학의 밤’과 ‘민족문학교실’이 활성화된 것도 그의 열정이 지핀 불이요, 광주와 부산뿐만 아니라 전주와 대구 등지에서 지역문학인대회가 개최되어 지역문학의 실핏줄이 되살아난 것도 그의 마당발과 부지런함이 일군 결실이었다.
채광석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가열되고 있는 엄청난 에너지원인 문학 혼을 분출하면서 짧은 생애에 굵은 획을 그었다. ‘시와경제’ 동인 활동을 하던 1982년에 그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를 발굴해 내는 등 당시의 문단 풍토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의 시들은 한국 문단에 큰 파장을 몰아왔고, 채광석은 박노해의 시집에 대한 해설을 통해 문학 창작의 주체 문제를 제기하여 문학 판에 팽팽한 쟁점을 제기했다.
그의 비평행위를 일컬어 술좌석에서는 문학비난가라며 낄낄거렸지만 정작 채광석은 그런 힐난조의 농담을 예의 욕설로써 받아넘겼다. 황석영은‘단독 무장한 일개 병사’라 했고 황지우는 ‘문학 공부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열성적이고 신랄한 당 조직원’ 같다고 했다. 그는 문단 데뷔 이후 불과 5년이라는 기간 안에 한국문학의 풍토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데 혼신의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는 말하자면 문학 판을 과감히 갈아엎어 새로운 씨앗을 심고자 애쓴 농부였다. 하지만 그의 순박한 열정은 거듭되는 문학 논쟁을 통해 가열되어, 급기야 투사의 전형처럼 인식되었고 민중적 민족문학의 야전사령관으로서 맹활약을 펼치게 되었다.
채광석은 전두환의 철권통치로 얼어붙은 1980년대 초반 자실을 재창립하는 한편, 1970년대의 신화 속에 떠돌던 김지하를 대중 앞에 불러 세우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감옥에서 나온 뒤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던 김지하는 아직도 젊은 대학생들과 청년들에게는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운 한 시대의 표상이요, 전설이었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족문학의 밤’에 김지하가 강연자로 나선다고 하자 강당 안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찼고, 강당 밖에서도 수많은 청중들이 열린 창문을 통해 강의를 듣는 등 초만원 사례를 보일 정도였다.
채광석은 또한 남민전 사건을 통해 15년째 복역 중이던 김남주 시인의 시가 세상에 나오도록 톡톡한 역할을 했다.
“광석이 형, 창비에서 감옥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시집을 내기가 곤란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청사출판사 편집장이던 이영진이 한숨을 쉬면서 채광석에게 그 대책을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네가 차라리 시집을 출판하는 게 어떠냐?”
사실 채광석 본인도 박노해 시집을 가지고 창비의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거절당한 뒤였기 때문에 차제에 아예 새로운 시집 시리즈를 기획하여 출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채광석과 대화를 나누던 이영진은 청사출판사에서 청사시선이라는 새로운 시집 시리즈를 펴내게 됐다.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군 김남주의 첫 시집 '진혼가'는 말하자면 채광석의 새로운 발상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남민전을 입 밖에 올리는 게 금기로 여겨지던 당시, 그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있는 김남주를 언급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채광석이 아니었다면 1980년대의 ‘전사 시인’ 김남주가 세상에 나오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의 풀빛시선은 후배 이영진 시인이 편집장으로 있던 도서출판 청사의 청사시선과 함께 1980년대‘시의 시대’를 열어젖힌 신호탄이 됐다.
광석은 특히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근거로 하여, 시가 “관념적 통박놀음이 아니라 자기 삶의 터전에서 전개되는 대립, 갈등에 주체적,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의 한복판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문학 생산의 주체 논쟁에 불을 댕겼다. 즉, 1970년대 이래 있어 왔던, 지식인 주체에 의해 생산된 문학과 노동자 계급이 주체가 되어 생산된 문학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단호히 노동자가 문학의 생산자요 수용자일 수 있어야 하며 박노해와 같은 노동자 시인이야말로 그러한 전범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으로 민중적 민족문학의 포문을 열었다.
종종 싸움닭으로 묘사되거나 문학비난가라고 일컬어졌던 채광석. 하지만 그는 대학 시절의 피앙세 강정숙에게 감옥 안에서 무려 180여 통의 편지를 보낼 만큼 순정한 낭만을 간직한 사내이기도 했다. 5공 시절 그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끌려가 한 달간 공포의 ‘검은 장갑’에게 하루에 30대씩 가슴을 주먹으로 맞아 심각한 내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는 고문의 고통과 흔적을 내면에 간직한 채 고문기술자인 검은 장갑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문학을 통한 변혁을 꿈꾸었던, 안면도의 푸른 솔 같은 사람이었다.
1980년대 초반, 민중 운동권 및 민족문학의 대표 주자로서 자기 존재 전체를 미래 지향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사람 채광석. 살아생전에 시집 '밧줄을 타며', 사회평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등 딱 세 권의 저서를 냈을 뿐이지만 누구보다도 열렬히 우리 문학의 텃밭을 쟁기질하던 그였다.
오히려 그의 사후, 집안에서 발견된 육필 시와 평론이 라면박스 두 개에 가득 들어 있어 후배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만큼 다독, 다작을 생활화하며 남몰래 정열적인 창작열을 불태워왔던 것이다. 또한 토론과 논쟁은 그의 일과처럼 되어 마지막 가는 날에도 민요연구회 모임의 술자리에서 후배들과 뜨거운 토론을 벌일 정도였다.
만 서른아홉, 우리 나이로 꼬박 마흔 살을 채우고 자신의 생일에서 하루를 더 살다 먼 세상으로 떠난 채광석. 그는 욕설과 뚝배기와 된장 같은 맛을 버무려, 나약한 문인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조선 토종의 끈기와 매운 도전 정신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하나 가득 채워준 열정의 사나이였고, 뚝심의 사나이였다.
채광석은 또한, 군사독재의 압제 하에서 표류하는 문인들을 민중적 민족문학이라는 튼튼한 배에 승선하게 한 다음에 좌표를 설정하여 거친 파도와 싸우게 만든 일등항해사요 듬직한 조타수였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지금은 중견이 된 현준만, 김명인, 이재현, 신승엽, 백진기 등의 쟁쟁한 문학평론가들이 그의 문학이론의 계승자가 되어 그의 빈자리를 든든히 지켜내었다.
동료 문인들은“선후배가 내남없이 넘나들 수 있도록 조정하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인물이 바로 젊은 평론가 채광석이었다. 내 나이보다 일곱 살 아래이고 또 그만큼 젊은 패보다 연상인 그는, 젊은 패의 좌주座主요, 이념적 대변자로서 능란한 달변과 특유의 독설로 늘 좌중을 사로잡곤 했다”(현기영, 「그리운 망년우」에서)라고 그를 잃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사람들은 때 묻지 않은 순전한 사람들을 기억한다. 독립운동가 중 끝까지 절개를 지킨 만해를 존경하고, 혁명의 순수성만 간직한 채 황무지에서 쓰러져간 체 게바라를 흠모한다. 세상의 이치란 한결같아서, 세상의 명리와 부귀를 초개같이 여기며 오로지 자신이 꿈꾸는 민중 민족문학의 청청한 그날의 현현顯現을 위해 아낌없이 온몸을 던졌던 채광석을 이 땅의 산천초목과 더불어 사무치게 기억한다.
채광석, 그는 이른 새벽에 서둘러 길을 떠났으나, 캄캄한 밤하늘을 밝히는 별이 되었다. 그 별은,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결코 내릴 수 없는 하나의 깃발로 나부끼고 있다.
박선욱∙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실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시집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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