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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단편/홀리데이/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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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홀리데이
김영주
무언가 트래블백을 잡아당겼다. 보안검색대를 돌아보았다. 대기선 너머, 사람들 틈새로 무언가 새들어오는 것 같았다. 됐습니다. 녹차색 제복의 남자가 여권과 티켓을 내밀었다. 백을 든 팔뚝이 간지러웠다. 낚아채듯 트래블백을 옮겨 들며 출국심사대를 빠져 나왔다.
게이트 표지판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걸음이 걸음을 따라잡느라 헐떡거렸다. 가게마다 뿜어낸 불빛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눈 화장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게이트 주변 통유리에 부딪는 빗줄기가 굵었다. 유리 너머로 비를 고스란히 맞고 선 비행기 여러 대가 보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광판을 살폈다. JL950 09 : 15 나리타 NARITA. 폭우에 비행기가 제대로 날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났다. 스탠드 티브이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티브이로 턱을 세우고 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따라 웃었다. 어정쩡, 모니터를 곁눈질했다. 아침배달부. 연 핑크 로고가 모니터 모서리에 꽃처럼 피어 있고, 카메라는 스튜디오를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메인테이블 양 옆으로 소파가 마주 놓여있었다. 개나리색 세트 벽은 화사했고, 중간 중간 배치된 아치창은 연두색 커튼으로 장식돼 있었다. 큼직한 꽃송이로 꾸며진 메인테이블의 꽃바구니가 막 구워낸 빵처럼 먹음직스러웠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건너편에 자판기가 보였다. 서둘러 미니백을 열었다.
“그럼요. 우리 토크쇼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시청자와 방청객 그리고 초대에 기꺼이 응해주시는 게스트라는 삼박자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덕분이지요.”
남녀 엠씨 모두 웃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드라마에 영화와 가요계까지 섭렵하신 대한민국 대표 잉꼬부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전 밤새 한 숨도 못 잤다니까요. 제 눈 떼꾼해진 거 보이시지요?”
눈에 익은 개그맨이 맞은편 소파로 눈을 부릅떠보였다. 방청석이 대번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느린 듯 힘찬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동전지갑을 꺼내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침 일찍 일이 있다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빠와 그런 아빠의 팔뚝을 슬그머니 잡는 엄마가 모니터를 채우고 있었다.
“사회전반에 걸쳐 선행을 베푸는 데 적극적이신 두 분이 이번에 또 큰일을 벌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이 나란히 기아들을 위한 국제구호단체의 친선대사직을 맡기로 했다지요.”
“그뿐인가요. 내일이지요? 성년의 날을 맞는 소년소녀가장들을 초대해 축하와 격려의 시간을 나누기로 하셨답니다.”
남녀 엠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이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저희 대학생 딸도 이번에 성인식을 하거든요. 마침 생일이기도 하고요. 하여 뜻 깊은 날을 주위사람들과 나누는 게 어떻겠냐는 이 사람 생각에 따랐던 건데, 저 역시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빠가 엄마 손등을 토닥였다. 방청객들의 박수소리가 커졌다. 개그맨이 응원단장 같은 몸짓으로 능청을 떨었다.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은 연예인부부로 선정된다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에게 받은 사랑에 비하면 해야 할 일이 아직 산더미인걸요.”
엄마가 붉어진 볼을 손바람으로 식히며 방청석을 쭉 둘러보았다. 함성이 실린 박수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동전지갑을 도로 넣으며 엄마를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웃음 띤 눈가에 어젯밤 잔해라곤 한 톨 남아있지 않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튀는 차림새부터 무뚝뚝한 차림새까지, 뽀샤시한 남자부터 뿔테안경이 멋스러운 여자까지, 모두들 비행기 시간쯤이야 상관없다는 듯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도 여럿이었다. 세수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보딩 시작합니다. 무전기를 든 직원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얼른 줄 뒤로 가 섰다. 계류장 멀리 산인지 먹구름인지 모를 덩이가 그 너머의 세상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지금이 아니면……. 저 길을 따라가면 낯선 대문에 닿을 것 같았다.
“행복한 여행 되세요.”
직원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가슴에 달린 이름표가 덩달아 까딱였다. 트래블백이 휘청, 창 쪽으로 쏠렸다. 이름은 있었을까. 소리가 되지 못한 내 목소리가 입안에서 저 혼자 맴맴 돌았다. 멈칫멈칫 뒤를 돌아다보았다. 티브이로 향한 머리들이 보이고, 모니터를 채운 엄마아빠의 웃음이 보이고……. 엄마아빠가 당장이라도 모니터를 박차고 나와 팔뚝을 낚아챌 것 같았다. 떠밀리듯 브릿지로 발을 내딛었다. 걸음걸음이 바닥으로 까라졌다. 굵은 빗줄기에다 이렇게 무거운 내 몸까지 싣고 비행기가 제대로 날 수나 있을지, 나는 가슴을 힘껏 부풀려 발바닥을 띄웠다.
브릿지 벽에 부딪친 전등불빛이 눈부셨다. 내 몸이 불빛인지, 불빛이 빗소린지 어둠인지조차 모르게 얽히고설키고, 벨소리가 짝짝이로 뜬 눈동자가 되었다가, 낯선 목소리가 되었다가, 방향을 놓친 걸음이 시공간이 허물이진 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부야역을 나섰다. 나리타에서부터 따라온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어젯밤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혹 꿈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어깨를 젖혀 뽀송뽀송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하치코 동상에 걸터앉은 햇살이 한가로웠다. 잠깐이라도 햇살바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걸음은 벌써 센터가를 지나고 있었다.
백화점 옆길로 방향을 틀며 쇼 윈도우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허공을 휘젓는 팔뚝이 입김에도 부서질 것처럼 가늘었는데. 어깨보다 큰 머리통은 염치없이 덜렁거렸고. 머리카락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짧았고.’
별책부록처럼 딸려 나온 기억조각이 얼핏 겹쳐 비췄다. 나는 성큼, 햇살을 비켜서 골목을 가로질렀다. 막다른 골목 끝으로 주변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건물이 숨은 듯 서 있었다.
BAND ‘HOLE’ LIVE
지하로 이어진 계단 벽에 흑백의 포스터가 줄줄이 붙어 있었다. 건물들에 막혀 겨우 손바닥만큼만 드러난 하늘로 숨을 길게 내쉬고는 계단을 내려 밟았다.
클럽 문에 붙여진 현수막이 큼지막했다. 흑과 백으로 정제된 멤버들 모습이 현수막을 찢고나올 듯 생생했다. 먼지 한 톨 남김없이 날려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계단에 걸터앉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뒤에 쪼그려 앉으며 현수막 속 멤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얼굴은 하얀 분칠이 되어 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까만 천으로 감싸여 있어 누가 H고 O인지, L과 리더 E가 누군지 구분조차 무의미했다. 공연까지 앞으로 여섯 시간. 트래블백을 끌어안았다. 뜨거운 프라이팬에 올려진 버터처럼 어깨가 풀어졌다.
드럼소리가 커졌다. 부랴부랴 펼쳐 놓았던 화장 도구를 챙겼다. 세면대 거울에 바짝 붙어서 있던 여자가 파다닥, 화장실문을 밀어젖혔다. 드럼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카디건을 트래블백에 쑤셔 넣으며 문으로 몸을 틀었다. 구두굽이 꺾이며 걸음이 세면대로 쏠렸다. 손바닥으로 거울을 짚었다. 기억타래로 그려낸 거울 속 얼굴이 아무래도 어설퍼 보였다. 원피스 위에 덧입은 블라우스와 치마도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저 먼저 콘서트장으로 뛰어든 귀를 이길 순 없었다.
짙푸른 조명 한 줄기가 아치 모양으로 돋운 무대 정중앙을 내리쏘고 있었다. 강렬한 불빛 탓에 주변은 다른 색의 침입 따윈 허락치 않을 만큼 까맸다. 무대 양 옆으로 길게 드리워진 커튼만이 무대와 객석을 구분해주고 있었다. 빛으로부터 외면당한 커튼이 탁하리만큼 두꺼웠다.
통로 벽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닥에 퍼져 앉은 이들도 여럿이었다. 사람들에 부딪쳐 통로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종아리를 넘는 치맛단에 걸려 몇 번이나 꼬꾸라질 뻔했다. 드럼소리가 얼뜬 걸음을 부추겼다.
무표정한 여학생들이 무릎을 젖혀 빈자리를 내 주었다. 치마를 모아 잡으며 허둥지둥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의 남자 둘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나도 머리핀과 밴드로 얼기설기 틀어 올린 머리를 매만지는 척 딴청을 부렸다. 전자오르간의 떨림이 드럼의 둔한 울림을 뛰어넘었다. 조명 뒤쪽에 그림자처럼 버티고 선 드럼이 어렴풋 눈에 담겼다. 드럼채를 돌리는 H의 실루엣이 춤추듯 가뿐했다. 전자오르간을 두드리던 L이 까맣게 싸맨 머리를 앞뒤로 흔들어 흥을 돋웠다. 한 줄기 조명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졌다. 푸른 빛발이 시리도록 밝았다. 기타를 맨 O와 리더 E가 조명 한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먼지들이 기지개를 켜며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에치! 오! 에르! 이!”
“리다 이! 호르! 호르! 리다 이! 호르! 호르!”
환호성이 비명처럼 터졌다. 목을 세우며 팔을 내젓는 모습들이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환호에 답한 O가 마이크를 거머쥐었다. 가슴이 대뜸 쿵쾅거렸다. 숨소리도 커졌다. 얼마만이지? 그런데도 떨림과 흥분은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에 가려진 공간을 놓칠까, 턱을 바투 세웠다. 오르간 소리가 가늘게 이어지더니, 리더 E가 베이스기타를 머리 위로 돌리며 구호를 외쳤다. 몸 깊숙이 들러붙었던 기억타래가 소음이 반가운 듯 부스스 몸을 털었다.
수능이 한 달도 안 남았을 때였는데……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논술과외까지 마쳤을 때니까 열두 시가 훨씬 지났을 거야. 오피스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빠가 커튼콜을 받은 배우처럼 팔 벌려 나를 반겼지.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부러운 듯 힐금거리고. 새벽부터 학원으로, 학교로, 과외로, 피곤해죽겠던 난 내게 맡겨진 역할을 차질 없이 소화해내고서야 차에 탈 수 있었는데. 촬영 중에 전활 어떻게 받아요.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지금 바로 간다니까요. 휴대폰을 닫은 엄마가 아빠에게 뭔가를 속닥였고. 아빠가 눈짓으로 나를 가리켰지. 시간 없어. 엄마가 시트를 뒤로 젖혔어. 아빠는 급하게 시동을 걸었고. 긴 하루에 지친 나는 자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 뒷좌석에 기대 그대로 잠들었고. 잠결에 꿈결에 엄마아빠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어디쯤인지, 누구네 집인지도 모른 채. 파도소리가 들렸던 것 같애. 풀벌레소리도 들렸고. 얼핏 비릿한 냄새도 맡아졌는데.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영정사진이 놓인 방으로 우리를 데려갔어. 향 냄새가 어찌나 어찔하던지.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엄마를 보며 연기를 하는 걸까, 몰래카메라는 아닐까, 궁금했는데. 엄마아빠가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어.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갑자기는 무슨. 저 애 때문에 졸지에 타지생활을 한 지도 벌써.”
할아버지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어. 술 냄새가 훅 끼쳤어.
“기어이 저앨 거둬야겠다는 니 에미가 너한테야 눈엣가시였겠지만, 솔직히 마을사람들과 어울리기도 그렇고, 일을 나가도 마음만 불편한 것이. 니 에미, 하루도 다리 뻗고 자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게 누가 그러래요?”
엄마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어. 아빤 구석에 물건처럼 놓여있던 날더러 나가있으라고 했고. 까치발로 집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어. 목이 탔거든. 오줌도 마려웠고.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여기가 어딘지, 그 앤 또 누군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거든. 엄마아빠가 또 싸울까 봐 무섭기도 했고. 부엌귀퉁이로 숨기듯 낸 쪽문이 보였어. 문고리에 휘어진 수저 꽁다리를 걸어놓은. 깔끔하고 널찍한 양옥에 모두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게. 칭얼대는 것 같기도 하고, 앓는 소리 같은 게 나는 것도 같았어. 전등스위치를 찾는 대신 더듬더듬 문고리를 풀었지. 빠꿈이 열린 문으로, 얼마만큼의 공간인진 모르겠지만, 공간에 갇혀있던 어둠이 와르르 쏟아지는데……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이었어. 머리가 띵했지. 그러다, 그러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 한가운데 떠 있는 눈동자와 마주쳤는데. 찍소리 지를 새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밖에. 오줌을 지렸는지도. 눈을 부릅떠 어둠을 헤집었어. 짝짝이로 뜬 눈꺼풀이며, 침 범벅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며, 한쪽으로 쏠린 콧날과 턱이며…….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그만 문고리를 거는 둥 마는 둥 돌아섰지만. 요강이었을 거야. 밥그릇과 반찬그릇이 마구잡이로 엎어진 쟁반도 보였지. 이불 위로 휴지 같은 게 나뒹굴었고. 치마도, 블라우스도 엄마가 주연을 맡은,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시대극에서나 봤던 것들이었어.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밤이었어. 차 지나치는 소리는 날카로웠고. 칭얼대는 것 같기도, 앓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으니. 스케줄을 챙기는 엄마에게 슬그머니 물어볼 밖에.
“몰라도 돼.”
엄만 짧게 대꾸하고는 그만이었어. 성가셔죽겠다는 듯 하품을 물며. 아빤 아예 입도 벙긋 안했고. 어둠이 묻어왔는지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어. 향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고.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간지러웠어. 엄마가 흘깃 나를 돌아다보았어. 졸린 척 시트에 납작 엎드렸지. 그리고는 손톱 끝을 말아 종아리를, 팔뚝을, 목과 머릿속을 긁을 밖에. 벅벅. 생채기가 나지 않을 만큼만 벅벅.
짙은 화장에, 천으로 꽁꽁 싸맨 머리에, 온통 까맣기만 한 의상에, 악기 없인 누가 누군지 구분조차 무의미한 멤버들 각각의 몸짓이 무대를 뒤흔들었다. 악기소리와 노랫소리가 어디가 빛이고, 어디까지가 어둠인지 모호한 공간을 넘나들며 열기를 흩뿌렸다. 어깨를 흔들고, 박수를 치고, 객석도 하나가 되어 웨이브를 만들었다.
싸이키델릭한 오르간 소리가 다음 곡의 시작을 알렸다. 미셀 폴라네프의 ‘Holiday’를 리메이크한 곡이었다. O와 리더 E가 기타 줄을 튕기며 두 발을 돋워 뛰어올랐다.
휴일,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행기 같은 것
거리는 그 날개의 그림자 밑을 헤매고 있지. 땅은 얼마나 낮은가
조명이 그들 주위를 선회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무대 전체로 빛을 퍼트렸다. 바닥에 앉았던 이들이 어깨를 걸고 뛰어올랐다. 무표정한 여학생들도 껑충껑충, 괴성을 질러댔다. 곳곳이 뛰고, 흔드는 모습들로 들쭉날쭉했다. 옆자리의 남자 둘이 부둥켜안으며 통곡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기타소리가 천장으로 튀어 올랐다.
빗소리가 발등을 타고 꿈틀거렸다. 전화벨소리가, 낯선 목소리가 따라 꿈틀거렸다. 블라우스 깃을 잡아 뜯으며 튕기듯 일어서 웨이브에 맞춰 어깨를 들썩댔다. 발을 굴렀다. 아랫배에 힘에 실어 목청을 흔들어댔다. 잔뜩 웅크렸던 목청이 딸꾹질처럼 어젯밤 소리들을 토해냈다.
비 퍼붓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엄마가 건네준 A4용지 빼곡한 ‘초대의 말’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엔 엄마아빠 중에 누가 기획하고 연출을 맡은 걸까? 원한 만큼 광고효과를 얻으려면 엑스트라들도 장단 맞춰 춤을 잘 춰줘야 할 텐데? 어쨌거나 내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첫 작품이겠지? 오만생각에 머리만 지끈거렸다. 이어폰을 고쳐 꼽아보지만 노랫소리조차 귀에 담기지 않았다. 귓바퀴를 감싸 잡아도 소용이 없었다. 엠피쓰리 볼륨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 무선전화기의 수신불빛이 깜박대고 있었다. 빗소리가 아니었나 싶어 이어폰을 뺐다. 전화벨소리와 빗소리가 엎치락뒤치락 날아들었다. 건성으로 들여다보던 A4용지 용지를 내던지며 침대 모서리로 일어나 앉았다. 미니소파에 넘치도록 펼쳐 논 드레스가 물결을 타듯 일렁였다. 호텔 플래티넘 홀과 실내관현악단의 두루뭉술한 선율과 생판 모르는 또래들 그리고 실크드레스……. 성년의 날 축하파티? 생일파티? 아님……. 어떤 타이틀을 붙이든 할로윈 복장을 하고 강강술래를 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웠다. 드레스를 파티장 한복판에 내동댕이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음식을 뭉개고, 접시를 뒤엎는 상상을 해보았다. 엄마아빠라면, 당황하는 일없이 파티를 예정대로 진행시킬 게 뻔했다. 다리를 부러뜨리든, 얼굴을 스무 바늘 넘게 꿰매든, 팔 한쪽을 잘라버리든, 파티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의 수들을 떠올려보았다. 엄마아빠라면, 병원을 통째로 옮겨놓고라도 파티를 성대하게 끝마치고도 남았다. 세렝게티 초원쯤으로 도망치는 상상도 해보았다. 엄마아빠라면, 눈도 꿈쩍 안 할 게 분명했다. 하나마나한 상상이나 해대는 내 꼴이 더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웠다. 깔, 깔, 깔, 깔, 배꼽을 잡고 웃고 싶었다. 낄, 낄, 낄, 낄, 바닥을 구르며 웃고 싶었다. 벨소리에 귀가 다 먹먹했다. 엄마아빤 싸움 중일 거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에메랄드가 박힌 액세서리 세트를 밀치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에미냐. 술 냄새 거나한 목소리였다. 애빈데. 앞뒤 없이 끊으려는 찰나, 꽁꽁 묻어두었던 목소리가 튕겨져 나왔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저기, 잠깐만요.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는 운동방을, 거실을, 식당과 옷방을 지나 안방 앞에 섰다. 숨 고를 새 없이 문에 귀부터 갖다 댔다.
“내가 이혼도장 찍어줬으면 소원이 없겠지?”
“어째 이리 질척대시나 그래. 그럴싸한 명분이 생기면 그때 가서 고민해보자고.”
역시나였다. 다른 재료와 양념으로 매 번 다르지 않은 잔칫상을 차린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눈 부라리면 누가 무섭데? 주먹까지? 때려. 때려 봐.”
목소리를 짓누른 악다구니가 눅눅했다. 칙칙했다. 차라리 치고 박고 싸우면 내 속까지 뻥 뚫릴 것 같았다.
“내가 미쳤냐? 눈곱만한 흠집이라도 생겼다가 무슨 소문에 시달리려고.”
뭔가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젖히고 싶었다. 도로 한복판에 서서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다고 떠벌리고도 싶었다. 전화기에서 웅얼웅얼 소리가 새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방문을 여는 동시에 전화기를 쑥 내밀었다. 급한, 급하다고. 목소리가 혀 언저리에서 꼬였다. 소파에 기대앉았던 엄마가 은근슬쩍 팔짱을 풀었다.
“준비 잘 하고 있지?”
“피부 마사지에 더 신경 써야겠다.”
아빠가 내동댕이쳐진 안락의자와 내 팔을 번갈아보았다. 재차 엄마 쪽으로 전화기를 들이밀었다. 엄마는 잠옷을 한참동안 매만지고서야 테이블에 놓인 유선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는 내밀었던 전화기를 뒤로 감추며, 장식장으로 다가가는 아빠를 쳐다보았다. 입을 쩍쩍 벌려 얼굴근육을 푸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죽어요? 문틈으로 들리는 엄마목소리가 내 방으로 돌아가려던 걸음을 막아 세웠다. 옷방 문에 기대섰다. 전화기의 통화버튼이 켜져 있었다.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글쎄, 니 에미 그렇게 가고 내 시름시름이더니만 요 며칠 통 먹질 못하고, 아까 참에 저녁 챙겨 들여다보는데…… 어찌 됐든 가는 길은 봐야지 않겠냐? 잠깐 들르든지.”
“그럴 시간이 어딨, 잠깐만요!”
엄마가 말을 잘랐다. 손바닥으로 송화구를 감싸 귀에 바짝 붙였다. 전화기 너머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한참만에야 엄마가 말을 이었다.
“마침 호적이 없으니 다른 절찬 필요 없을 테고, 날 밝는 대로 통장에 돈 넣어둘게요. 이렇게 저렇게 들어갈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 읍내 가서 찾아 쓰세요. 참 그리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는 거 절대 잊지 마시고요.”
“애빈? 애비도 안 오겠대?”
“생각 안나요? 자기네 집안 대대로 쌍둥이 따윈 없었다고 얼마나 지랄을 떨었게요. 유전이 아닌 경우도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 줘도 귓등으로도 안 듣던 사람이 무슨.”
“하긴. 니 에미만 아님 진즉에 죽었을 앤데 무슨 미련이 있겠나싶긴 하다만.”
“아침에 일찍 일 나가야 하거든요? 화장 안 받으면 곤란하니까 이만 끊어요. 당분간은 많이 바쁠 테니 따로 연락드릴 때까지 연락마시고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쯧쯧, 몸 좀 성치 않다고 새낄 그렇게 내버리더니.”
웅얼거림 끝에 전화기 내려놓은 소리가 잡음처럼 섞였다.
‘어딘지 어긋나 보이긴 했지만 낯설지 않았어. 본 것 같은, 눈에 익은.’
전화기를 타고 쏟아져 나온 기억타래가 내 몸을 칭칭 감았다.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엄마아빠에게 물어봐야할 것 같았다. 이를 악물어 안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앓던 이가 쏙 빠진 것 같겠네?”
“누가 할 소린데.”
엄마아빠가 관 뚜껑에 올라앉아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 같았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 한가운데 떠 있던 눈동자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벽을 따라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착각이겠지 하면서도 숨이 탁 막히는 게. 오목? 볼록? 어쩌면 표면이 고르지 않은 거울 속 나를 보는 것 같았어. 막 잠에서 깬, 엄마아빨 기다리다 지쳐 꾸역꾸역 침대로 기어들어가는, 내가 있었어.’
눈꺼풀이 자꾸만 실룩거렸다. 코가, 턱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멀건 침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칭얼대는 것 같기도, 병든 짐승 앓는 것 같기도 한 신음소리가 목구멍을 비집었다. 당장 달려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파도소리를 따라가면, 향 냄새를, 풀벌레소리를 따라가면, 잠결인 듯 꿈결인 듯 들어섰던 대문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일이겠네.’
다른 건 몰라도 잘 가란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한 팔로 바닥을 짚고 바동거렸다. 몰라도 돼. 성가셔죽겠다는 듯 하품을 물던 엄마 모습이 내 팔뚝을 툭, 밀쳤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손톱을 세워 머릿속을, 어깻죽지를, 옆구리와 허벅지를 긁고 싶었다. 손톱 밑이 얼얼해지도록 벅벅 긁고 싶었다. 이틀 후면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실크드레스를 입고 생판 모르는 애들과 성년의 날 축하파티를 해야 했다. 눈곱만한 흠집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주먹을 꼭 쥐어 등 뒤로 감췄다. 온몸이 배배 꼬였다. 어떻게든 온몸을 간질이는 것들을 떼어내야 했다. 악악, 소리치고 싶었다. 마구잡이로 몸을 흔들어대고 싶었다. 콘서트장이 아른거렸다. 홍대 앞 클럽을 떠올렸다. 가슴이 대번에 쿵쾅쿵쾅 요동을 쳤다. 그런데…… 그러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엄마아빠 귀에 들어가는 날엔? 잿빛 방에 갇혀 지냈던 시간이 날숨을 틀어막았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저만치 앞서가는 마음을 막아 세울 수는 없었다. 이번만……. 절대안전지대까진 아니더라도, 엄마아빠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야 했다. 허둥지둥 머릿속을 뒤적였다. 하루도 공연이 없는 날이 없다는, 시부야가 손끝에 닿았다. 이번 한 번만! 엄마가, 엄마라면, 여우주연상과 최고인기상의 영광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의상을 버렸을 리 없었다. 옷방 문손잡이를 힘주어 밀었다. 의상과 소품이 천장까지 빼곡했다.
휴일, 당신의 나이로는 모를 거야. 그만큼의 하늘과 그만큼의 구름을
당신은 인생에 싫증을 내고 있지. 죽음은 얼마나 가까운가
콘서트장이 팽창을 했다. 악기소리, 노랫소리, 빛과 환호성…… 각각의 파장이 합쳐지며 증폭된, 무한의 폭발력으로 팽창을 했다.
“아름다운 당신이여.”
나는 목청을 돋우며 파장들을 따라 날아올랐다. 발을 구르며, 두 팔을 훠이훠이 저으며 콘서트장을 벗어나 대기를 뚫고 솟구쳐 우주 어디쯤으로 날아올랐다. 빗소리, 벨소리, 목소리들이 폭발력에 휩싸이며 섬광처럼 터지고 갈라졌다. 사타구니가 축축했다.
“비행기는 부서져 있소. 아! 땅은 얼마나 낮은 것인가.”
목이 터져라 한 음, 한 음을 질러댔다. 짝짝이로 그려놓은 눈썹이 삐죽빼죽 요동쳤다. 립스틱으로 떡칠한 입술이, 아이샤도우로 삐뚤빼뚤 돋워낸 콧날이 빛을 흘리며 솟구쳤다. 오줌이 허벅지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블라우스 단추와 잔꽃 무성한 치마주름을 잡아 뜯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앞뒤로, 좌우로, 뱅글뱅글 흔들어댔다. 허공을 휘젓던 팔뚝이 산산이 부서졌다. 성긴 머리카락들이, 염치없이 덜렁거리던 머리통이 터지고 갈라지며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우주 저편으로 흩어졌다. 오줌이 오줌을 타넘으며 쏟아졌다. 끝도 없이 쏟아졌다.
입국장을 나서는 걸음이 가뿐했다. 지난밤을 꼬박 공항로비에서 자다가 깨다가 했는데도 새 신을 신고 하늘로 폴짝 뛰어오를 만큼 가뿐했다. 간지럼 따윈 흔적도 없었다.
파티까지는 시간이 넉넉했다. 서둘러 가면 에스테에도 들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비행기를 탈 욕심에 공연이 끝나자마자 나리타로 달려가길 잘했다. 엄마아빠에겐 학교도서관에서 밤샘공부를 했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피부가 어째 그 모양이냐, 휴대폰은 왜 안 가져갔느냐, 한바탕 혼이야 나겠지만 예정대로 파티를 할 수 있다면……. 엄마아빠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엄마아빠 딸이라는 역할에 숨이 차오를 때면 콘서트장을 찾았다. 장소가 어디든, 출연자가 누구든, 가리지 않았다. 객석에 앉아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기소리를 따라, 노랫소리를 따라, 관객들이 지어내는 함성과 몸짓을 따라, 우주 멀리 어딘가로 솟구쳐 몸 가득 들러붙었던 이물질들을 날려버렸다. 그러면서도 엄마아빠에게 들킬까 무서워 학교수업에 지장이 없게, 학원과 과외시간을 비켜가며 눈치껏, 코치껏, 콘서트장을 찾아다녔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것들이 누군지 알아? 팬이라는 것들이라고.”
누군가 객석에 앉아 있는 나를 봤다더라는 엄마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이참에 내가 왜 그랬는지 털어놓으며 꺼이꺼이 목 놓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아빠 누구도 왜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변명조차 들으려하지 않았다. 스타들 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일종의 정신병인 걸. 아빠가 나를 외면한 채 팬들이 보낸 선물꾸러미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나는 학교를 빠지고라도, 학원과 과외를 빼먹어가며 콘서트장을 찾아다녔다. 홍대 앞 클럽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시험도 나 몰라라 했다. 삼 학년이 되고 첫 수능 모의고사가 있던 날도 아침 일찍부터 홍대 앞 클럽을 기웃거렸다. 밤늦게야 집에 들어갔고, 엄마아빠에게 팔뚝을 잡혀 그대로 구급차에 태워졌다.
눈에 담기는 방이 낯설었다. 천장도, 벽도 온통 잿빛인데다 전등 하나가 없었다. 천장 가까이 손바닥만 한 창이 나 있을 뿐이었다. 방문은 밖으로 잠겨 있었다. 악악 소리를 질렀다. 주먹으로 두드리고, 발로 차대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들여다볼 줄을 몰랐다. 벽에 갇힌 소리들이 몸 구석구석을 간질였다. 손톱이 닳도록 긁고 또 긁었다. 어찌나 긁었던지 생채기가 쓰라렸다. 군데군데 피까지 맺혀 있었다. 손톱 밑이 얼얼했다. 하루가 가고 오는 지도 모른 채 약에 취해 밤을 맞았고, 하루치 약을 받으며 눈을 떴다. 손바닥만 한 창을 통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익고, 겨울이 가고 있음을 느끼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허황된 꿈에 부풀었는지를 절절히 깨달았다.
엄마아빠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봄이 꿈틀대고 있었다. 학교에 갔고, 해외연수는 재밌었냐는 선생님들의 부러움 담긴 인사를 받았고, 후배들과 한 반이 되어 공부를 했다. 엄마아빠가 가라는 대학에 가려면 과외도, 학원도 헐렁하게 다닐 수 없었다. 콘서트장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거울이 큼지막했다. 거울 앞에 섰다. 팔, 다리 모두 말짱했다.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도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입국심사대 너머로 발꿈치를 세웠다. 계류장 멀리, 낯선 대문이 보일 것만 같았다. 내가 간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 거울로 바짝 다가섰다. 눈, 코, 입, 팔 그리고……. 몇 번을 살펴봐도 잘못된 데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자동유리문을 지키던 직원에게 팔까지 흔들어보였다.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가 녹차라떼를 곁들여도 좋을 만큼 바삭거렸다.
로비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기둥 벽 티브이에 엄마아빠 모습이 담겼다.
이들처럼…… 방송인 부부 김민욱 최나영 편
산뜻한 자막과 함께 학교강당만 한 거실을 배경삼은 아파트광고가 모니터를 채워나갔다. 유명건설사답게 소품 하나까지 우아했다. 티브이를 지나쳐가던 여자가 나란히 걷던 남자에게 속닥였다.
“저 부부, 정말 멋있게 사는 거 같아요.”
“젊은 남녀들의 로망이랍니다. 여기저기 안 나오는 데가 드물던 걸요.”
양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서류가방을 고쳐 잡았다. 기둥을 걸레질하던 청소원아줌마가 모니터를 힐끔거렸다. 정원처럼 꾸민 베란다에 어깨를 기대고 선 엄마아빠가 클로즈업되면서, 회사로고로 이어졌다. 나는 어금니가 살짝 드러나게 웃어보였다.
“울 엄마아빠예요. 제가 딸이거든요. 무, 남, 독, 녀, 외동딸이요.”
어리광이 잔뜩 묻어나는 내 목소리가 낯간지러웠다. 아줌마가 걸레를 뒤집으며 얼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이 제 생일인데 파티를 해준데요. 정말 좋겠지요?”
왈츠를 추듯 몸을 돌렸다.
“그래, 몰라도 돼.”
나는 손목에 리듬을 실어 트래블백을 흔들어댔다.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경쾌했다. 택시정류장 지붕에 부딪는 빗줄기가 어제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김영주∙1959년 서울 출생. 2003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떠다니는 사람들', 동화 '선생님, 길이 사라졌어요'와 '순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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