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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흐름진단/소설/관계의 시학/이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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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진단/소설|
관계의 시학
이경재|문학평론가
∙권여선의 「웬 아이가 보았네」(≪문학과 사회≫, 2009년 가을호)
∙이호철의 「오돌할멈 손자 오돌이」(≪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박금산의 「우정을 과장할 때 떠오르는 치기를 무릅쓰고 정연에게 편지를 쓰다」(≪리토피아≫, 2009년 가을호)
1.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별이 혼자 빛날 수 없듯이, 누구도 홀로 오연할 수는 없다. 행여 홀로 빛나 보인다면, 그 오연함 뒤에는 다른 이의 더러운 피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문제는 언제나 관계의 형식, 즉 윤리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해답은 존재할 수 없기에 그 물음은 오늘도 계속 이어진다. 이 계절에는 권여선의 「웬 아이가 보았네」(≪문학과 사회≫, 2009년 가을호), 이호철의 「오돌할멈 손자 오돌이」(≪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박금산의 「우정을 과장할 때 떠오르는 치기를 무릅쓰고 정연에게 편지를 쓰다」(≪리토피아≫, 2009년 가을호)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 작품에는 일반자와는 구분되는 특수자로서의 개인들이 등장한다. 각각의 작품에서 그들은 다양한 양상을 띠며, 그것은 제각기 다른 질문으로 우리를 심문한다.
이 특수한 개인은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타자는 통약될 수 없는 차이로, 그 자체가 불안과 불쾌를 상처의 흔적처럼 공동체에 새겨놓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가 지니는 의미의 폭이 특수한 것으로 한정될 수는 없다. 고정된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면, 고정된 동일자와 타자 역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동일자와 타자의 역할을 번갈아 가며 맡을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따라서 이들 특수한 인물들에 대한 탐구는 결국 인간 일반에 대한 탐구와 맞닿을 수밖에 없으며, 그 근원적인 지점에서 윤리에 대한 사유는 태어난다.
2.
권여선의 「웬 아이가 보았네」는 온갖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예술인 마을이 배경이다. 이 무늬만 ‘예술인 마을’에 진짜 예술가가 들어온다. 여류시인이 입주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범상치 않은 미모까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등장은 예술인 마을의 평형 상태를 깨뜨리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여류시인의 존재가 “예술인 마을의 비예술적 시민사회에 불러일으킨 반향은 실로 놀라웠”(111)다. 사람들은 ‘나’의 어머니가 그렇듯이 그들 부부와 친해질 생각은 없지만, “그들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에 적지 않은 관심”(112)을 보인다.
이 작품의 서사는 결국 예술인 마을에 모여 사는 ‘예술인도 아니고 잘나지도 못한 범부들’이 시인에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이 여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모아진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윤리를 시험한다. 범부들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이유 없는 적대와 그만큼이나 이유 없는 환대가 그것이다.
이유 없는 적대는 주로 여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적대는 르네 지라르가 말한 모방적 욕망과도 맞닿아 있는데, 그것은 여류시인을 가장 미워하는 사람인 ‘나’의 어머니가 지닌 다음의 특징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 어머니는 못생겼고 여류시인은 예뻤다. 그러나 극단적인 용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는 태도였다. (중략) 어머니를 점점 예쁘게 만들고 여류시인을 점점 추하게 만든다면, 딱 중간 지점에서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쏙 빼닮은 쌍둥이 자매가 기적처럼 탄생할 법도 하였다.
따라서 등을 맞댄 샴쌍둥이처럼 다른 방향을 바라보도록 운명 지워진 두 여자는, 만나자마자 신비로운 육감으로 서로를 알아보았음에 틀림없다. (113)
어머니와 여류시인은 “외모를 의식하는 태도”를 똑같이 지니고 있다. 그들은 “샴쌍둥이”라는 적절한 비유처럼,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유한다. 공통점에서 기인한 모방적 욕망은 차이점이라는 낙차를 통해 강한 에너지를 받게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어머니가 여류시인에게 민감한 이유는 어머니가 평소에도 “자신의 모든 불운을 철두철미 외모 탓으로 돌렸”(117)기 때문이다.
여류시인의 존재는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공동체를 자각케 하는 동기가 된다. “뾰족집 부부가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114) ‘나’의 어머니는 그동안 이웃 여인들 중 젠체한다며 “가장 꺼려하던”(14) 이상건 씨 아내와도 부쩍 가까워진다. 그토록 가까워진 그들은 자신들의 적의를 정당화해줄 근거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땅짚고 헤엄치기보다도 쉬운 일로 실상 여류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해당된다. 그들은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는데, 그것은 여류시인이 대화 중에 무심코 내뱉은 “쇠뿔도 당기며 빼랬다”(114)는 말이다. 이 순간 ‘나’는 “나와 꼭 닮은 큰언니 같은 뾰족집 여류시인이 예술인 마을에서 그다지 오래 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115) 분명히 깨닫는다.
맹목적인 적대를 드러내는 것이 여자들이라면, 남자들은 맹목적인 호의로 응답한다. 여류시인의 결정적 문제로 지적된 “쇠뿔도 당기며 빼랬다.” 역시 이상건씨에 의해서는 “옳거니! 여보, 그런 게 바로 시라는 거요.”(125)라는 상반된 평가가 내려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건 씨는 “뾰족집 여류시인이 젊은 나이나 어여쁜 생김새와 다르게 참으로 관대하고 어른스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119) 식의 미덕을 온갖 사소한 것에서 발견한다. 나중에는 “저 귀엽고 예쁜 여류시인을 사로잡아 수중에 넣은 뾰족집 요리사에게 대관절 어떤 치명적인 매력이 있느냐”(121)는 것에까지 관심이 미친다. 이런 일들로 이상건 씨는 “아주 큰 자유를 잃어가”(122)게 된다.
결국 ‘나’의 예상대로 뾰족집 여류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여류시인이 사라지자 온갖 모함적인 소문과 낭만적인 소문이 동네를 떠돌아 다닌다.
뾰족집 여류시인은 있을 때도 그랬지만, 사라진 뒤에도 마르지 않는 샘같은 존재였다. 마르지 않는 샘은, 그 샘물을 달게 마시는 사람들(이를테면 이상건 씨 같은 경우)에게는 기적과 은혜의 대상이지만, 샘의 물을 다 퍼내고 그 바닥을 드러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를테면 내 어머니 같은 경우)에게는 고역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뾰족집 여인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그렇게 둘로 나뉘었다. (126)
이처럼 여류시인의 타자성은 그 존재가 사라진 뒤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공동체의 연대(?)는 이토록 질기고도 억세다. 모두가 공동체의 폭력적 연대에 공모하는 것은 아니다. 애심이 엄마 같은 이가 작은 균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녀는 “튀는 사람이 자기가 튀려고 해서 튀는 게 아니에요. 바탕이 튀게 하는 탓이 큰 거죠.”(126)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여류시인이 응징당하는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에 의해, “뾰족집 여류시인에 대한 반감과 적의로 똘똘 뭉친 마을 여인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 잉잉대고 공격”(126)하자, 결국 굴복하여 참회한다. 작가가 이러한 애심이 엄마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은, 이 작품의 초점화자인 ‘나’에 의해 애심이 엄마가 “마을 여인들 중 누구보다 아름답고 숭고했다.”(126-127)고 의미 부여 되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 작품도 분명 타자와 윤리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그 해결책은 ‘타자에 대한 환대’ 따위의 상투화 된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제가 결혼 전에 그 사람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130)라는 요리사의 말이 그것이다.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마을 여인들이 그녀의 결정적인 하자로 내세웠던 ‘쇠뿔도 당기며 빼랬다’가 단순한 실수나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야말로 여류시인의 근본적인 한계와 위선을 드러낸 징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자를 향한 공동체의 폭력적 공모 역시 그렇게 어이없는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권여선은 이번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안이하거나 나태한 작가가 아님을 증명했다.
3.
이호철의 「오돌할멈 손자 오돌이」은 타자가 가진 긍정적 권능과 의의를 한껏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오돌이는 그 무지와 엉뚱함으로 인해 타자성의 흔적이 그 누구보다 강하다. 6.25 전쟁 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부전선에 오돌이라는 고문관이 투입된다. 소대장인 최소위에서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심지어는 보초를 서다가 잠자는 대대장을 깨워 담배를 빌리기도 한다.
오돌이의 가장 큰 특징은 공동체가 부과한 규범이나 도식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대장의 “어느 훈련교본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210)는 생각처럼, 오돌이는 어떠한 교본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고유한 개성을 발휘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완전 문맹자”(212)이다. “어찌 보면 ‘고문관’이라는 뜻조차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뜻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부러 능청을 떠는 것처럼도 보였다.”(213)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타인의 시선이나 제도적 질서 등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돌이가 전선에 서게 된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소외된 자이다. 정선의 “숯 굽는 화부 조수”(212) 노릇을 하던 오돌이는 어느 날 숯가마 주인 나리의 부름을 받아, “오돌이 네 이름은 오늘부터 박공규다.”(213)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의 아들 대신 오돌이를 대신 군대에 보내기 위해 주인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 오돌이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생일이 정확히 어느 달 어느 날인지조차”(213) 몰랐으며, 김가라는 성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오돌이는 전장에 나온 순간부터 이름을 잃어 버린 존재가 된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하되 상징적으로는 오돌이가 아닌 박공규인 것이다.
오돌이는 자신이 주인의 아들 대신 군대에 동원된 것도 모른다. 오히려 “처음으로 넓디넓은 바깥세상 구경하는 재미”에 “복불복”(214)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박공규가 되었던 오돌이는 특유의 무식과 뚝심으로 오돌이를 찾아낸다. 그의 기행들은 그가 상징적 틀을 뚫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오돌이 스스로가 박공규라는 이름을 버리고, “부대생활 전 국면에서 자연스럽게 본래의 오돌이로 행세”(215)한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부대 성원들도 그런 행태에 맞춰 준다. 오돌이는 유령이 되었기에, 바로 그 타자성을 통해 그 잘난 공동체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월비산에 배치된 후의 허구한 날 벌어지는 일들은 오돌이에게 다음처럼 기이하게 여겨질 뿐이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얼굴 생김새인 같은 나라에 산다는 사람들끼리 남과 북으로 갈려서 왜 이다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피아간에 살육전을 벌여야 하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215)
오돌이는 1952년 추석 전날 행방불명되어 전사자로 처리되었다가, 인민군 복장을 하고 백기를 흔들며 남으로 온다. 그는 북에 포고로 잡혀갔다가, 그쪽에서도 자기들 편으로 세뇌시켜 나름대로 활용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죽이기에도 총알이 아까워 맞은편 국방군 측으로 돌려보내진 것이다.
그는 북에서도 끝내 성도, 나이도, 생일도 모르는 김오돌로 남은 것이다. 이 김오돌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그것은 북쪽 부대장이 남쪽 부대장에게 보낸 “지금 남북을 통틀어 제정신 가진 제대로 생긴 조선사람은, 아마도 필경은 김오돌이라는 이 사람 하나뿐이 아닐는지요.”(221)라는 말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호철은 오돌이라는 모든 질서와 체제로부터 벗어난 인물을 통해 발본적인 지점에서 6.25라는 전쟁 자체를 송두리째 들어서 패대기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서술자는 자신의 맨얼굴을 내밀어 “남북이 분단된 후 남북간에 평화로운 모습으로 경계를 넘나든 그 첫 사람이 바로 이 김오돌 하사가 아니었을까……!!!”라고 말한다. 오돌이가 지닌 모자람의 강도는, 오돌이를 둘러싼 집단의 무지와 폭력이 지닌 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오돌이의 무지와 엉뚱함은 집단의 무지와 폭력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오돌은 모자란 성인聖人임에 분명하다.
4.
박금산의 「우정을 과장할 때 떠오르는 치기를 무릅쓰고 정연에게 편지를 쓰다」는 서간체 소설이다. ‘나’가 어린 시절의 친구인 정연에게 쓰는 편지이다. 편지는 ‘나’와 정연, 그리고 형의 지난 삶으로 채워져 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술 사러 다니던 일, 친구집에서 자며 여자 아이의 브라자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던 일, 신산했던 삶의 에피소드 등의 그 구체적인 서사의 육체이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펭귄이 우뚝 서 있다. 그것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정연의 신체적 불구를 상징한다. 정연은 한 쪽 다리가 다른 다리보다 일점 오 센티미터 짧은 신체적 불구를 타고 났다. 이러한 장애로 인해 정연은 우수한 성적을 받았음에도 선원학교 신체검사에서 떨어져야 했다. 그 후 정연은 고등학교 시험도 안 보고 직업훈련원에 들어간 다. 군대에 못 갔을 때는 “넘들 다 가는 군대도 못 갔다고 친구들도 안 볼라고”(100) 한다.
다음으로는 형에 대한 ‘나’의 미안한 마음을 상징한다. “사악한 펭귄들”은 “물속에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98)기 때문에 동료를 밀어뜨린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많은 부분 포기한 형을 보며, 자신이 “형을 바다에 밀어버린 것 같다”(98)고 느낀다. ‘나’의 형은 선원학교를 나와 배를 타다가 육지로 내려온다.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결국 아버지처럼 암에 걸린다. 형은 “학교엘 다니려 해도 돈이 들고, 병원에 가려 해도 돈이 드는, 이 땅에선 발붙이고 살 수 없는 고독한 개인”(85)이다.
형은 배에서 내린 후 상경하여 “포클레인 조수, 선반 조수, 지하 봉재공장에서 다림질 조수”(85)로 떠도는 동안, ‘나’는 대학을 다닌다. 그전부터 형은 가족을 위하여 “중학교 졸업하고 이강막 그물도 못 당길 나이에 오시케 어장을 보러 댕겼으니 얼마나 세상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냐.”(89)라는 말처럼, 많은 것을 버려야 했던 삶을 산 것이다. “특허 있었던 형은 신용불량자라 은행에서 만 원도 못 빌렸는데 나는 대학원생 학생증 내밀고서 돈을 뭉텅이로 빌렸다.”(101)는 말에서도 ‘나’의 형에 대한 부채의식은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채감은 근원적인 지점을 향할 수밖에 없다. 동생이 형의 삶을 강제한 것일 수 없듯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누군가를 바다에 떨어뜨림으로써만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먹먹한 서글픔은 사회적 불평등이나 소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존재 방식에서 발아하는 것이다. 그 서글픔은 삶의 본질적 국면으로서의 슬픔이고 체념이다. 몇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살아가는 건 무슨 검사를 받아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그런 순간의 연속 아니냐?”(90), “정연아, 산다는 게 전부 이 모양으로 진단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인 거냐?”(101)라는 말은 삶의 불가측성과 의존성을 암시한다. 어린 시절 가슴을 몰래 만지던 계집애의 후일담,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 애네 집들이에 갔었는데 가이가 애기를 낳아 키우고 있더라. 남편은 공단에 나가는 사람이라더라.”(95)는 평범한 말에 묻어 나는 축축함도 인간의 비극적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펭귄의 세 번째 의미는 근원적으로 타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나누는 따뜻한 공감과 우애의 몸짓을 상징한다. 그것은 ‘펭귄을 돌보는 펭귄’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펭귄은 첫 번째로 정연을 지시한다. 그런데 ‘나’는 “상상 속에서 넌(정연-필자) 펭귄을 키우고 있는 청년”(101)이다. 이것은 형과의 관계에서는 “사악한 펭귄”(98)이었던 ‘나’가 바다로 밀려 떨어져야 했던 순간의 기억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어두운 길 더듬어 다니면서 외상술 받으러 다니던”(100) 아픈 기억이 있다. 이제 막 아내와 밤일을 치루려던 점방 아저씨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그 고통스런 긴 밤의 시간 정연은 술이 담긴 사이다 병을 담벼락 밑에 감춰둬서, 어린 ‘나’의 수치심을 다독거려 주었다.
박금산의 「우정을 과장할 때 떠오르는 치기를 무릅쓰고 정연에게 편지를 쓰다」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정연, ‘나’의 형, ‘나’는 뒤뚱거리며 빙판 위를 간신히 걸어가는 펭귄이며, 나아가 인간은 모두 펭귄일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윤리는 어둔 밤 담벼락 밑에 술병을 숨겨둔 어린 정연이처럼, 펭귄인 서로를 보듬는 작은 우애의 행동이라는 것이 박금산의 편지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이경재∙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현대소설의 구조와 미학>(공저). <어문학 연구의 넓이와 깊이>(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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