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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서평/주변의 울림이 퍼져나가는 방식/신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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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79회 작성일 09-12-21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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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시집 <저 징헌 놈의 냄시>(리토피아, 2009)

정군칠 시집 <물집>(애지, 2009)

주변의 울림이 퍼져나가는 방식

신주철|시인

1.

김영희 시인은 첫 시집을 통하여 “쌓인 눈의 깊이를 재듯, 지나온 생의 깊이를”(「경칩, 눈 온 날의 단상」에서) 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편의 상당수가 지난날의 그리움과 사랑, 어머니와 아버지를 둘러싼 회고와 반성을 담아내는 데 바쳐지고 있다. 이에 대해 시인이 성취하고 있는 헤아림의 깊이와 둘레에 대해서는 시집 뒤에 해설을 쓴 고명철 선생님이 잘 밝히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김영희 시인의 시집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면모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시집에 담겨 있는 시들을 통해 볼 때 김영희 시인은 책상머리에 앉아 상상력만을 발동하여 작품을 쓰는 창작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체로 생활의 경험에서 시적 제재를 찾고 그것을 가다듬어 시를 쓰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쓰인 것들 가운데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불교적 정취가 짙게 배어있는 작품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다음 작품에서 시적 화자가 찾아간 한 암자에는 이제 스님이 거주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풀이 돋아나고 있다. 그곳을 돌아보던 화자는 암자에 어떤 스님이 살았을까 하는 평이한 궁금함을 갖는다. 그러다가 마당 한구석에 소복하게 자라고 있는 애기똥풀을 발견하고 ‘동자승이 살다 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발상과 표현은 언뜻 언어유희로 치부되고 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작품에서 언어유희 이상의 단순하고 맑은 선적 이미지를 구사할 줄 아는 시인의 재치를 느낀다.


목탁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암자.

발자국마저 지워진

마른풀이 허리를 일으키는 곳.

어떤 스님이 살았을까

절 마당 한 바퀴 돌아보다가,

마당 한구석 소복이 싸놓은

애기똥풀 한 무더기.

동자승이 살다 갔구나.

―「애기똥풀」 전문


다음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화자가 암자를 찾아가는 것은 심심풀이로서의 행락이 아니다. 주먹밥에 의지하여 ‘빗길을 나서는’ 모습에서 일종의 수행으로서의 찾아가기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암자에 다다라 그가 만나는 것은 햇살이 문살마다 연꽃으로 피어난다는 마음 밝힘의 경지이다. 그런데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암자라는 공간이 무상으로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암자에 이르는 과정에서 화자가 전설을 되새기고, 늙어 병약해져서 드러누운 것이든 폭풍에 쓰러진 것이든 와불처럼 누워있는 주목과 교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가 던지는 물음 ‘왜 여기에 왔는가’에 대해 스스로 마음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깨우침을 얻은 것이다. 곧 독자의 입장에서는 시적 화자가 행한 길에서의 나눔과 교감, 명상 등이 은근하게 작동하여 햇살이 연꽃으로 피어난다는 화자의 감흥이 전혀 낯설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하루쯤 비구니가 된다.

걸망 속에 시주처럼 받아 넣은 주먹밥에 의지하고

빗길을 나선다.

다섯 살 동자 홀로 한겨울을 살았다는,

관세음보살 그 아이 한겨울 살렸다는,

전설 산죽처럼 시퍼렇다.

푸른 이끼 법의로 걸친 주목 한 그루

와불처럼 누워

오세암 오르는 내 숨 어루만지고 있다.

―뭣 하러 여기에 왔느뇨.

수렴계곡 건너는 새가 묻는다.

산죽 소리 퍼어런 그곳에 가면

문살마다 햇살이 연꽃으로 피어난다.

―「오세암을 오르다」 전문


필자는 김영희 시인의 시집에서 볼 수 있는 주된 정조가 회고와 반성이라는 점을 언급만 한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불교적 음영이 깃든 작품을 산출하는 데에 더욱 힘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하였다. 이외에도 다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흥겨움 가득한 작품 또한 시인이 경주할 만한 시적 영역으로 생각된다. 주목받는 여성 시인들이 대체로 도시적 감수성에 기대어 작품을 산출한 데 비하여 김영희 시인의 체험과 상상력은 자연의 생생함에 가깝게 놓여 있다. 자연이 주는 건강한 변화무쌍함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흥성거림을 적절히 그려낼 수 있다면 시인의 독특한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위도 끝물이던 말복 지나고 처서 무렵

여름 막바지인지라

동네 성님들 몇몇 따라 먹실 골짜기 물놀이 갔지.

폭포 아래 수박 담그고

숯불 한창 이글거려 삼겹살 익어가는데,

그중 나이 많은 잿골 막국수집 성님

오줌이 마렵단다.

간이 화장실 하나 없는 그곳

계곡물에 담갔던 발 빼며 풀섶에 돌아앉아,

추석 대보름달만한 엉덩이 내리고

솨솨 오줌을 누는데

웬 달밤에 소나기인가,

여기저기 놀라 튀어오르는

방아깨비 메뚜기.

조용하던 먹실 골짜기 들썩들썩,

불판 위에선 삼겹살 자글자글 제 몸 타는 줄 모르고,

폭포 아래 수박 뒹굴뒹굴 물매미 치고,

헛발 디딘 물잠자리 미끄러지는 듯 고개 돌리고,

마타리꽃 싸리꽃 노랗고 발갛고,

입 싼 먹실 바람 벌써 소문냈는지

저 아래 비탈밭 붉은 수수 긴 목 빼고 기웃기웃.

계곡에 발 담그고 섰던 물봉선화

아랫도리 다 젖도록 엎어졌다 자빠졌다,

빼꼼 얼굴 내밀고 바깥 동정 살피던 가재

냅다 넙적 돌 밑에 기어들고,

지난해 산마루 올라간 사내

굴참나무 사이로

벙긋이 내려다보고 있더군.

―「천렵 하던 날」 전문


여름 막바지에 동네 성님들과 어울려 계곡 물놀이를 간 곳에서 잿골 막국수집 성님이 야외에 오줌을 누는 것에서 착상된 시가 그려주는 세계는 가히 흥겨움과 생명감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흥겨움에는 지난해 이 세상 마을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산마루로 올라간 사내까지 동참한다.

이상에서 필자는 김영희 시인의 첫 시집에서 볼 수 있는 주된 정조를 논의하기보다는 이후에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아가는 데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굳이 종교시는 아니면서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선적 이미지를 그려 보이는 안목과 자연 생명들의 흥성거림을 전해주는 시 쓰기는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솜씨는 아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시인의 시 쓰기가 “어제도 오늘도 봄비 내리고 벙긋벙긋 잎눈마다 새순 돋아”(「봄비」 부분)나게 하는 봄비처럼 사람들의 눈길마다 푸르름을 더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정군칠 시인은 제주도에 거주하며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보여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려가는 시적 여정의 한가운데에는 ‘제주 4․3항쟁’이라는 한국현대사의 비극, 제주도라는 특별한 공간성이 투영된 작품들이 놓여 있다. 가족이나 생활을 둘러싼 서정이나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작품들은 그의 시세계에서 주변에 놓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판단은 그가 이루어내고 있는 시적 성취의 고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안목으로는 그가 어떤 제재를 취하든 고른 성취를 보여주는 내공을 터득하고 있으며 긴장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판한 시집에서 그의 정체성에 근사한 작품에 대해서는 해설을 맡은 홍기돈 선생님이 잘 조명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시인이 세상살이를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을 따라가 보는 데 주력해 보고자 한다.


송악산 비탈, 한 뼘만 한 풀밭

나이 든 조랑말 한 마리

말뚝에 묶여 있다

발굽 아래가 바로 벼랑인데

캄캄한 낭떠러지인데

고삐에 매인 맴돌이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라는 듯

제자리를 맴돈다

이따금 고개 들어 바다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 숙이는,

한 뼘 원주에 묶인 내 몸도

많은 날 해 저물고 목이 마르다

그러니 생은

팽팽한 심줄 끌어당기는 풀밭

그 한가운데를 바라보는 것

올봄, 내 아이가 처음 맨

―「분홍 넥타이」 전문


시적 화자가 생각하는 또는 살아가고 있는 삶은 ‘고삐에 매여 맴도는’ 것이고 심지어 매여 있는 발굽 아래는 캄캄한 낭떠러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내 아이’에게도 연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이다. 앞 작품에는 제목과 내용 간에 아이러니가 개재되어 있는데, 아이가 맨 예쁜 ‘분홍 넥타이’를 보면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화자에게는 매여 있는 풀밭과 이따금 바라보는 바다의 간극이 연속되는 팽팽한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맴돌이를 하며 목이 쉬는, 외로움을 속으로 태워야 하는 자들의 비극적인 몫일 것이다.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바다의 물집」부분


얼마나 외로웠으면 고내리 가는 길은

등뼈 다 드러나도록 검게 타들어간 채

안으로만 길을 내었을까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안의 화를 다른 이에게 넘기는 일

외로운 자들은 제 안의 화를 제 안에 태운다

―「孤內」 전문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아픔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감당해야 하는 보편적인 것임을 안 화자로서는 자신의 아픔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걸러내야 할 아픔과 화를 속으로만 삭이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이 유발된다. 그래서 제 안에서 화를 태우며 안으로 길을 낸 자들의 등뼈는 검게 그슬린 인고의 화인火印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화자가 달리 추구하거나 바라볼 수 있는 또다른 가능성의 세계는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시적 상상력이야말로 견고한 생활의 고삐를 벗어날 수 있는 시적 위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만 년 전 서쪽을 향해 걸어간

사내의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얹어

나는 노을의 다른 지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여전히 서쪽으로 향한 발자국

앞서 간 사내는 보이지 않고

발자국만 남긴 사내를 좇는 눈동자 속에도

일만 년 전 노을이 겹쳐지고 있다

―「노을의 지층」 부분


작품에서 화자는 일만 년 전 사내가 남겨 놓은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얹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데는 공감과 보편화의 능력이 한 몫을 했다. 화자는 비록 앞서 간 사내는 보이지 않지만 서쪽 노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을 사내를 사유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늠하는 것이다. 일만 년 전이라는 먼 시간 건너 편에서 삶을 영위한, 그리고 서쪽을 향해 발자국을 남긴 사내를 좇아 화자는 몇 가지 가능성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사에 생존했던 대부분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모든 상황들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그 외로움의 뒤편에서 가끔씩 서쪽을 향한 발자국을 전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은 이러한 화자의 태도가 좀더 환상적인 구도로 쓰인 작품이다.


도롱이를 뒤집어쓴 사내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본다

빗방울이 사내의 혼잣말을 동그랗게 오려낸다

사내 곁에 나뒹구는 빗살무늬토기

바다는 그 안에서도 출렁인다

뭉툭한 손끝으로 걷어 넘긴 수천수만의 시간이

빗금을 만들고 있다

무딘 화살촉에 매번 급소를 찔렸으나

석촉의 끝이 향한 바다는

상흔을 남기지 않는다

칡넝쿨에 물고기 몇 마리를 꿰어준 바다가

사내의 등을 떠민다

사금파리 주워든 또 다른 사내가

사내를 따라 바위그늘집으로 들어선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서걱거릴 것 같은 모래알들이

천장에 낱눈의 이끼로 돋아 있다

부싯돌의 번쩍거림에 눈을 돌리자

도롱이를 벗은 사내 보이지 않고

애물결나비 한 마리 바위그늘집을 빠져나간다

나비의 날개 끝으로 계명鷄明바라의 춤사위가 이어지고 있다

―「바위그늘집」 전문


앞 작품의 시적 화자는 앞에서 살펴본 고삐가 매여 맴돌고, 화를 제 안에서 태우고, 일만 년 전 앞서 서쪽으로 간 사내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얹어보는 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가 지금은 바다를 바라보는 도롱이를 뒤집어쓴 사내를 바라보고 있다. 도롱이를 쓴 사내가 화자와 겹쳐진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내이다. 그는 뭉툭한 손끝으로 수천수만의 시간을 빚어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한편 그는 매번 화살촉에 급소를 찔리면서도 바다를 놓지 않았다. 그 바다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내에게 물고기를 꿰어주고 토닥이며 등을 떠밀어 주는 존재이다. 그가 이제 바위그늘집으로 들어간다.

그를 따라 다른 사내가 역시 바위그늘집으로 들어간다(제주도 어디쯤에 ‘바위그늘집’이라는 너럭바위 아래 옴팡한 공간이나 얕은 동굴 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 모래알들이 서걱거리는 천장 아래서 누군가 부싯돌을 번쩍거린다. 시적 정황으로 봤을 때 화자가 라이터불이라도 밝힌 것일 수도 있겠다. 그때 화자가 본 환상은 다른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도롱이를 벗은 사내는 보이지 않고/ 애물결나비 한 마리가 바위그늘집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비의 날개 끝으로 ‘계명바라의 춤사위’가 이어진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시적 심층은 환상을 통한 시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환상을 통한’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공허한 것으로 치부할 이유는 없다. 짧게 더듬어온 앞서의 논의에서 볼 수 있었던 바처럼 시적 화자는 삶의 구비들을 차분히 바라보고 기꺼이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 시적 방법으로서 일만 년 전 서쪽을 향해 나아간 발걸음을 더듬어보고 도롱이를 쓴 사내를 만나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굳건하게 새겨져 있는 ‘발자국’과 새벽을 향해 날아오르는 ‘나비’를 통해 시적 비전을 제시해주는 승화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주철∙시집 <밤새 뒤척이는 뼈>.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추천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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