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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서평/누란의 코끼리들/임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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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24회 작성일 09-12-21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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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누란>(창비, 2009)

김이은 <코끼리가 떴다>(민음사, 2009)



누란의 코끼리들

임태훈|문학평론가

1.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롸잇 나우! 이 시대에 ‘희망’은 허경영 콘서트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걸까? 비실거리며 무중력 댄스나 따라해 볼까나. 그나저나 소설보다 기상천외한 일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이래선 난감하지 않은가. 이런 시대에 소설은 정작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 걸까? 눈앞에 다가온 절망일까 아니면 허경영 식의 공중부양 쇼일까?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고민과 함께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2. 누란, 편집증 환자들의 세계

<누란>(창비, 2009)을 읽는 이는 누구인가? ‘이른바’ 386세대가 읽는<누란>과 ‘이른바’ 좌파정권 10년 동안 대학생이었던 세대가 읽는 <누란>은 어떤 면에서 다르게 혹은 같게 읽힐까? 아마도 후자의 입장은 노작가와 386세대 간의 신랄한 말싸움을 관전하는 기분일 수 있다. 하지만 <누란>은 그들에게도 은연중에 시비를 거는 소설이다. 386이후의 새로운 세대까지 도매급으로 부당하게 깎아내리는 말싸움이기 때문이다.

<누란>을 읽는 우리 세대의 불평에 앞서, 386세대의 독자에게 <누란>이 어떻게 읽혔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386세대를 향한 환멸과 절망의 일갈이 <누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에선 이런 유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 세대 내부에서도 환멸과 회환의 회고담은 이미 연거푸 터져 나왔다. 그렇더라도 <누란>의 목소리는 이전의 경우보다 훨씬 더 불퉁하게 들린다. 게다가 이 소설의 작가는 현기영이다.

예전에 은퇴를 앞둔 노교수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현대소설을 가르쳤던 이 노교수는, 한창 학생운동이 성하던 시절에 수업의 커리큘럼으로 김동인이나 이효석의 소설을 포함시켰다가 봉변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개강 후 첫 수업에서부터 격분한 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김동인, 이효석 따위 대신 <순이삼촌>의 현기영 쯤은 읽어야하지 않느냐고 대들었다고 한다. <누란>을 읽으면서 나는 자꾸만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김동인 따위’ 대신에 <순이 삼촌>을 외치던 그 세대를 향하여,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386세대’라는 기표가 갖는 현재적 의미에 대해, 정말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희망도 없다고 현기영은 단정 짓고 있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기성세대가 된 ‘386세대’는 그들이 전복하고자 했던 부조리하고 폭악한 세계의 구성원으로 흡수됐다. 그렇더라도 그 중에는 건강하고 선량한 예외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누란>의 세계에선 그런 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세계에선 고문했던 자와 고문당한 자가 한 패거리가 되고, 변절자와 배반당한 사람 사이의 과거지사는 난센스가 되어버린다.


“그 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하네. 워낙 바빠서 말이야. 감기 걸릴 시간도 없어. 오랜만에 한번 만나자. 아주 좋은 일이 생겼어. 자네 친구 한석민 말이야. 운동권 친구들 중에 자네랑 가장 친했잖아. 어제 뜬금없이 날 찾아왔더라고! 정말 깜짝 놀랐어. 앙심 품고 찾아온 줄 알고 잔뜩 긴장했지. 그 친구를 감옥 보낸 장본인이 바로 자네와 내가 아닌가 말이야! 하, 근데 그 친구 하는 말이 우리 당에 입당하겠으니 도와달라는 거야! 그러면서 감옥살이시켜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정치 지망생에게 감옥살이는 최고의 훈장 아닙니까 하면서 싱글벙글 웃더라고! 한석민처럼 차기 국회의원 선거를 겨냥해 우리 당에 들어오는 젊은 빵잽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아무튼 한석민은 화통한 친구야.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그렇게 왕년의 적을 동지로 껴안을 줄도 알아야지.”(p54)


결혼식날, 옛 운동권 친구 세 명이 식장을 찾아왔다. 문정선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십 년 만의 만남이었다. 식이 끝난 뒤 식당에서 허무성은 그들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면서 뜨겁게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 세 명이 모두 그의 자백으로 체포되어 똑같이 일 년 남짓 징역살이를 했던 것이다. 강일현은 노량진에서 논술학원 강사 노릇을 하고, 이종구는 그들의 모교인 K대 앞에서 시점을 운영하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정치판에 뛰어든 한석민은 이미 국회의원이 되어 있었다. 얼굴에 두툼하게 군살이 붙은 그는 시종 웃는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사교용으로 습득한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이따금씩 쏘아보는 눈빛도 예전에 없던 것으로 자연스럽지 못했다. 학원강사 강한일이 딴죽을 걸었다.

“야, 한석민. 만난 김에 한마디 해야겠다. 저번에 텔레비전에 나와서 뭐라고 했어?”

“뭘?”

“당선소감 말이야.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너 이렇게 말했잖아. 나의 당선은 나 개인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80년대의 동지들, 그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라고. 당선된 다른 놈들도 똑같이 말했어. 아아, 제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80년대가 너네들 사유물이냐? 아하, 우리만 좇돼버렸네, 완전 죽 쒀서 개 바라지한 꼴이야. 이 강한일의 피와 땀을 왜 네가 팔아먹냐? 야야, 이젠 80년대 그만 팔아먹어!”

“흥, 네가 정 원한다면 80년대의 피와 땀에서 네 것만 빼줄게.”

“이 새끼가!”(pp86~87)


첫 번째 인용한 대목은 주인공 허무성을 고문한 김일강의 말이다. 고문기술자였던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허무성의 후견인이기도 하다. 허무성이 종종 문제될 만한 (좌파적) 논문을 쓰더라도 대학교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강의 ‘똥개’로 산 덕분이었다. 그도 자신의 처신에 대해 깊은 절망과 혐오감을 느끼고 있지만, 결국 현실에 안주하며 자기비하만 반복할 뿐이다. 그는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골골거린다. 비단 허무강 뿐만 아니라 <누란>에 등장하는 386세대는 모두 허무와 냉소에 빠져있다. 이들의 증환(sinthome)은 한 개인만의 비극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의 결과물로 그려진다. 그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도 동정과 비아냥거림 사이를 오고간다. 그런데 그 태도는 386세대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허무성이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략 IMF 전후시기에서 2002년 월드컵이 있던 시기의 이십대들이다. (나 역시 이 시기에 학부생이었다.) 이 학생들과 교수 허무성이 수업 중에 주고받는 대화는 <누란>에 시도된 가장 인상적인 형식 실험의 하나다. 그런데 이런 장면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말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세태를 희화하기 위해 과장한 대사일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했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표현의 의도가 희화든 냉소든 간에 <누란>에는 온통 극단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모습이 한 세대의 전형처럼 그려진다. 가령 아래에 인용한 대목들은 세태풍경이라기 보다는 악의적인 의도로 그린 만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이 장면의 현실감 자체에 무신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96학번에서 02학번까지 누구든 붙잡고 물어봤으면 싶다. 아무리 산만한 분위기의 강의실에서도 이 지경으로 어이없는 대화가 오고가는 상황이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엔 이토록 나대는 학생도 찾아보기 힘들다. 교수 혼자 떠들고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면 몰라도.


학생 : 우리의 불행. 슬픔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은 꼭 필요하죠.

교수 : 그렇다고 그렇게 마냥 깔깔대고 방방 뛰어도 되는 거야? 멀지 않은 미래에 큰 불행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학생3 : (코웃음 치며) 그래요. 우린 마냥 깝치고 깔깔대고 방방 뛰죠!

학생1 : (장난조로 장단 맞춰서) 오두방정, 지랄 초방구!

학생3 : 오만 개지랄. 난리블루스 추는 거죠. 뭐!

학생2 : 스펙터클! 블록버스터! 우린 쩨쩨한 건 싫어요.

학생1 : 질질 짜는 건 정말 싫어요.

교수 : 어이, 저기 저 학생! (그가 지목한 학생은 닭이 모이 쪼듯이 휴대폰 문자판을 콕콕 찍으며 메시지를 날리는 중이다.) 김인창, 지금 수업중이잖아. 휴대폰 끄게. 인터넷은 물론. 휴대폰도 가끔은 끌 줄 알아야지. 안 그래?(p62)

학생5 : 책, 책, 하지 마세요. 지금은 영상시대거든요.

학생4 : 우리가 취직시험 땜에 바빠서 다른 책 못 읽는데, 왜 그걸 이해 못하세요?

교수 : (빈정거리며) 취직공부만 하는 너희가 불쌍하구나! 비판의 목소리, 저항의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쯧쯧쯧!

학생3 : (버럭 화를 내며) 정말 우릴 모욕하는 겁니까! 그렇게 우리한테 막말해도 되는 거예요?

교수 : (기가 꺾여 목소리를 낮추면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학생3 : 선생님은 왜 말씀하시면서 자꾸 교탁에다 분필을 찍어 부러뜨리세요? 정신 사납게시리! 교탁 밑을 보세요. 분필 토막이 수두룩하잖아요.

교수 : 아, 내가 그랬나? 미안하다. 버릇이 되어놔서. 흐흐흐!(p69)


교수와 학생 사이에 이 정도로 막역하고 격렬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질 수만 있다면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할 상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교수 앞에서 학점 깎일까 눈치 보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기백을 갖춘 학생이라면,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쯤은 생활화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란>은 학생들을 향해 혀만 끌끌 찰뿐이다. 그리고 작가는 386세대의 몰락과 환멸의 연장선에서 너무나 간편하게 다음 세대의 운명까지 비관하고 있다.

<누란>에 그려진 386이후 세대는 세상물정 모르고 쿨 한 척이나 하고, 너도 나도 인터넷 포르노와 명품에 미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 몰라라 사는 족속이다. 그러나 386세대가 하나같이 고문당한 뒤 변절하고, 세태에 찌든 기성세대가 되어 허무와 환멸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새로운 세대의 삶도 하나의 전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어느 세대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본디 세대론이란 삶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누란>은 왜 환멸이나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는 ‘다른 삶들’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이 소설이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 볼 작정으로 쓰여 졌기 때문이며(작가의 말),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의식적으로 편집증적인 인물군에 집착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허무성은 레드 콤플렉스를 비롯해 아내와의 섹스 트러블까지 온갖 심리적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의 정신 병리는 (스스로는 복잡하고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착각하지만) 세상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며 자학의 원인을 끊임없이 자가 공급한다. 그리고 이런 증환이 유전병처럼 한 세대 전체에 창궐해있다는 이해가 <누란>의 세대론이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을 386세대로 부를 때마다 환기하는 공통감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그늘, 독재와 반민주를 향한 투쟁 또는 투항, 변절의 서사에 기초한다. 허무성은 이 공통감의 영향력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확실히 386세대답다. <누란>에서 차고 넘치게 등장하는 극단적인 인물들도 공통감을 공유한다. 이를테면 허무성이 그의 386친구의 말로가 그러하듯 노숙자로 전락하는 장면을 소설의 끝머리에서 읽을 수 있다. 경제적 이유에서건 사회적 또는 정신적인 면이건 결국 이들의 삶이 파산에 이르게 될 거라는 것이 작가의 비전이며, 소설 속 허무성의 세대 중 누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다른 듯 닮은 쌍생아들이다. 위에 인용한 대화에 등장하는 ‘학생1’, ‘학생2’, ‘학생3’이 비슷비슷한 말투의 쌍생아들인 것처럼, 현기영은 <누란>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기실 세대론적 전형성에 기대 창안된 몇 가지 캐릭터의 변주에 열을 올린 것에 불과하다.

2002년을 휩쓴 월드컵의 붉은 물결을 바라보는 허무성과 작가의 시선도 편협하다. 월드컵에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은 북한의 집단체조 장면에 비교된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을 보며 왕년의 고문기술자 김일강은 환호성을 내지른다. 반면에 허무성은 불안에 휩싸인다. 광장의 군중들이 결국 김일강 같은 파시스트에게 이용당하게 될 거란 기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그의 불안은 MB시대의 개막을 예언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의 붉은 물결, MB시대의 촛불 시위는 대중의 시대가 만들어내는 다양성의 도가니를 증언한다. 허무성과 김일강의 전망과는 반대로 대중의 예측할 수 없는 힘이 파시스트들을 휘감아 끝내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순 없는 걸까? 아직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쉽게 희망을 말할 수 없지만, 쉽게 절망을 말할 때도 아니다.

미래는 쉼 없이 가역반응을 일으키며 변화한다. 따라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절망이 아니라, 한 번도 욕망해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자본과 국가는 우리의 욕망을 회수하고 단수화하며, 체제에 반하는 욕망의 복수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세대를 반복해 되풀이 될 수 있는 굴레일지 모른다. 그러니 <누란>의 비관주의도 귀담아 들을 필요는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현실에 절망해야 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단언컨대 절망과 비관, 허무와 환멸로 귀결되는 세대론적 표상의 서사는 분명 유해하다.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낡은 세대론적 담론이나 표상으로 재생산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세대론을 넘어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이해의 형식은 더디게 도착하는 반면, <누란>과 같은 편집증적 시선은 언제나 성급하고 전염력도 강하다. 현기영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필요 이상의 절망은 무익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닥까지 내려간 절망’의 가치에 대하여 함부로 계몽하려 해선 안 된다. 도대체 그건 누구의 바닥이란 말인가? 오히려 우리가 한시라도 바삐 찾아나서야 할 것은 기쁨과 긍정의 잠재성이다. 이 일에서 중요한 것은 성취보다 계기이며, 이성으로는 비관하되 의지로 삶을 낙관할 수 있는 인내가 요청된다.(그람시) 이것은 노작가의 연륜이 담보되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고문당해보지 않은 사람들, 아직 기성세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의 잠재성을 지지하고 싶다. 이들이 섣불리 폄하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누란>의 절망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우리 세대의 산만함을 지지할 것이다.`


3. 서울, 코끼리 우리 혹은 조난자들의 세계

“대체,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김이은의 <코끼리가 떴다>(민음사, 2009)에 수록된 「여의도 저공비행」은 어느 순간 갑자기 여의도 국회의사당 지붕 위에 올려진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남자는 꽤 잘나가던 인물이었다. 도원동에 150층짜리 빌딩을 지을 계획으로 그동안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가 어쩌다 국회의사당 지붕에 올라간 것인지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조난의 과정이 아니라 조난 그 자체다. 여의도 의사당 위의 이 남자는 지퍼가 열린 바지처럼 민망하게 이 도시의 본질을 노출하고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이 소설은 4대강 사업에 대한 은유이며 MB 시대의 속도에 질린 우리들의 리얼한 괴담이다.


환경 보호 단체의 극심한 반대는 그만두고라도 한강의 줄기를 바꾸고 지질의 문제도 해결해야 할뿐더러 교통의 편리 운운하면서 아예 섬 자체를 없애야 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곧 각종 기관과 건물들이 차례로 들어서겠지. 도원동의 고요한 밤은 사라지고 또 다른 여의도가 탄생하겠지.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물론 가능하다. 개발이 곧 번영인 이 땅에서 공간을 번영시키고 시간을 교란하는 것쯤 문제될 게 없다. 150층 빌딩은 섬이 사라진 자리, 그 모래땅 위에 불안한 발을 딛고 서서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장이 아니더라도 결국 누군가 하겠지. (「여의도 저공비행」, p268. 강조는 인용자)


지난 50년간 서울이 겪은 변화에 비하면 국회의사당 지붕에 올라간 남자의 일은 싱거운 해프닝에 불과하다. 이 도시의 풍경과 일상이야말로 황당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 지붕의 남자는 뜻밖의 장소에서 그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된다. 견고한 일상의 질서로부터 조금만 삐뚤어져 나와도 서울이 오래 묵은 괴물임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도시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보금자리, 거리의 풍경, 그곳에 얽힌 사람들의 일상이 반복해서 해체되고 재배치되고 있다. 이 도시는 항상 유동하며 요동친다. ‘뉴타운’이라 했던가? 초등학생도 아는 영단어지만 그 의미는 미스터리하다. 누구를 위한 새로움(New)인가? 무엇으로부터의 새로움인가? 서울 시민으로 사는 일도 참 이상하다. 매번 새로움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변화 앞에 우리는 너무나 순종적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요동치는 도시에서 어디로 떠밀려가고 있는 걸까? 이곳에서 조난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국회의사당 지붕 위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꺼번에 맞닥트린다.


나와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시범 아파트 앞을 지나 여의도 길을 걸었다. 한강 개발 붐이 막 일기 시작했을 무렵에 한국 최초의 개발된 신도시 여의도汝矣島. 이명박식의 마인드를 가진 그 당시 서울시장이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인 성과라니, 아마. 아무 쓸모없는 모래무지 땅에 말을 기르던 양말산養馬山이 전부인 곳이어서 농담으로 ‘너나 가져라.’ 하던 것이 한자로 너 여 자를 이두식 표기로 바꿔 불렀다는 여의도다. 원래 섬이었던 양말산 자리에 국회가 들어서고 인근에 전경련 회관을 비롯해 많은 금융사와 방송국 등이 들어서면서부터 여의도는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장은 시범 아파트 단지 앞 시범 사우나 간판을 쳐다보며 여의도를 개발하지 않고 놓아둬 한강 가운데 나무 우거진 섬으로 보존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 …… (중략) …… 섬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들어선 한화증권과 교보증권, 미래엣 증권 건물을 차례로 지나면서 장은 모래땅 위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 발이 푹푹 빠지고 중심을 잡지 못해 어, 어, 하다가 결국 바닥에 고꾸라지는 모습. 국회의사당이고 전경련 회관이고 간에 모두 다 고작 40년 된 땅에 간신히 서 있는 꼴이잖아. 뿌리가 깊지도 않고 바닥이 단단하지도 못한 땅에 말이야.(「여의도 저공비행」, pp259~260. 강조는 인용자)


도시계획자의 발상과 「여의도 저공비행」의 발상은 동일하다. 이 도시의 실제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단단하지 못한 땅에 부실한 뿌리로 간신히 서 있는 도시. 이 도시의 풍경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 황무지 모래땅이 갑자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뉴타운에서 쫓겨나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도시 빈민들은 여의도의 미래를 미리 겪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여의도는 폭풍의 눈 안에 있는 듯 고요하다. 남자가 떨어진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폭풍의 눈 한 중심에 해당한다. 위태로운 위치로 보이지만 요동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일 수 있다.

「여의도 저공비행」이 열린 지퍼 수준에서 도시의 괴물성을 노출했다면 「코끼리가 떴다」의 수위는 훨씬 더 외설적이다. 공원을 탈출해 난동을 부리며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는 코끼리들은 도시인의 억압된 감정을 대변하는 화신이다. S는 생각한다. 내가 지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코끼리들과 뭐가 다른가?


S는 추위에 노출된 코끼리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거라고 짐작한다. 천호대교를 넘던 코끼리와 대화를 나눴을 때 분명 그렇다고 느꼈다.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 설이 사실이라면 코끼리의 추위 적응 훈련은 필수적이고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30년 가까이 겪었지만, S에게도 이 도시의 겨울은 늘 고통스러울 만큼 춥다. 월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엄마의 수입으로는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기름 값 걱정 없이 보일러를 돌려 따듯한 겨울을 날 수 없었다. 태어난 곳을 떠나 겨울을 처음 겪어 보는 코끼리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코끼리가 떴다」, p94)


「코끼리가 떴다」의 줄거리는 뜻밖의 결말로 향해간다. 정부는 코끼리들의 집단적인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펜스를 제작해 도시를 둘러싸기로 결정한다. 한마디로 “도시 전체를 커다란 우리로 만들겠다는”(p104)는 발상이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면 우리 안에 있던 코끼리와 우리 밖에 있던 시민의 상황은 역전된다. 아니, 처음부터 그 둘은 별 차이가 없었다. 바로 이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 이 도시는 더 할 나위 없이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깨닫는다. 우리는 “바닥에 낮게 발붙인 도시를 떠나 바깥세상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고. 코끼리는 도시를 떠났지만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고양이를 데려갈까, 하다가 S는 그냥 드림 월드 섬을 빠져나가 도시의 대로로 접어든다. 이제 곧 도시는 쇠창살로 무장한 우리로 변해 가겠지……. 아니, S는 쇠창살로 가로막힌 우리가 원래부터 거리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떠올려 보니 S는 한 번도 바닥에 낮게 발붙인 도시를 떠나 바깥세상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섬을 떠난 S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도시의 대로 한복판에 발을 멈칫 한다. 멈춰 서서 춤추듯 흔들리는 코끼리 몸짓에 S도 따라 몸을 흔든다.(「코끼리가 떴다」, pp105~106.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도 누란의 주인공과 달리 「코끼리가 떴다」의 조난자들은 절망이나 환멸에 떨지 않는다. 그들은 덤덤히 이토록 이상한 상황에 맞서 어떻게든 적응할 방법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이 질문 앞에서 멈춰 선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을 절망에 등치시키는 일은 되도록 유보하자. 코끼리 우리는 어쩌면 그다지 견고하지 않을지 모른다. 확인하고 싶다면 부딪혀보자.



임태훈∙1999년 삼성문학상 희곡부문 수상.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2008년 ≪판타스틱≫에 「팽형자」를 발표하며 소설 창작도 겸업. 2009년 한국추리소설작가협회 신인상 수상. 

추천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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