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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젊은시인 집중조명/묘박 외 9편/신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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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01회 작성일 10-01-11 14:03

본문

신정민
 묘박錨泊* 외 9편


내항에 들지 못한 채
절영도 근해에 떠있는 배들

가만히, 있다는 건 힘든 일이다

항구의 불빛들도
뭍에 단단히 묶여있다

가만히 에서 나온 가막소,
감옥이란 말
싣고 온 짐들 부리지 못하고
기다리는 것, 힘든 일이다

바닥에 내려놓은 포승줄은 언제 끌어올리나

낯선 골목 어귀에
닻을 내리고 
계단 턱에 무작정 앉아있는 노파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름.




점묘화


 깊은 밤
 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밀양 돼지국밥집 앞에
 츄리닝 바람으로 서있는 사내를 완성하는 중이다
 먹물 묻은 바늘 끝으로 찍어낸 
 한 장의 점묘화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골목어귀
 화단 춤에 앉아 그늘 즐기던 한낮의 얼굴들 
 길 위에 새겨진다
 점, 점 빨라지는 굵은 빗방울들
 멀리 서있는 가로등 불빛이
 사내의 슬픈 유전자가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당겨준다
 집 없는 고양이가 숨어있는 구멍이 환히 드러나고 
 사내의 발목부터 적시고 올라오는 물비린내가 흩어진다
 까맣고 윤기 나는 빗방울들
 떨고 있는 사내의 오금을 마저 그리고 있는 중이다





때돈


 때를 민다
 빨간 팬티를 입은 나가시
 가지 많은 미송美松 사포질 하듯
 그녀의 몸을 문지른다
 발가벗은 몸이 
 쳐진 가슴과 늘어진 뱃살이 
 저렇게 당당하다니
 암, 암 그렇지
 더러움을 씻는 일만큼 당당한 일 어딨겠는가
 살찐 몸뚱이
 한바탕 씻고 나면
 절간 기둥 재목만 할까
 온탕 속에 둥둥 떠있는 나신들
 뒤틀리지 않도록 
 강물에 띄워둔 원목들 같다
 지그시 눈 감은 명상 덕에
 뒤틀린 심사들 풀리려나
 때돈 버는 생업에 농짓거리 했다고
 앗 차 차, 차가운 물 튄다





달비계*


 로프 공工*이 내려온다
 금강빌딩을 처음으로 올려다본다
 내가 딛고 서있는 이곳이
 움푹 패인 커다란 허방 바닥이라고
 서둘러 결론짓는 건 금물이다
 명퇴권고가 들어온 사내의 걸음을 이제사 눈치 채다니 
 자신이 발밑을 내려다 봐서는 안되는 줄광대라는 것을 
 그는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한 세상 살아보자고 배 밖에 내놓은 간과 쓸개 
 물통인 듯 걸레인 듯 흔들렸던 것인데
 바람 부는 날엔 위험수당 높아 
 허공 한 나절 그것도 재미가 쏠쏠해
 어미의 젖통 밀듯 툭, 툭 
 허공에 발길질하며 내려온다 
 들여다 볼 수 없어 차라리 편한 속이 
 이 거대한 유리 상자뿐이던가
 사람 속, 그 속이 그 속이지
 늦은 저녁 붙잡고 승천할 동앗줄 내려온다

 *달비계:공중작업 때 앉는 의자.
 *로프공:건물외벽을 닦거나 페인트 칠하는 인부.





공갈빵 레시피


 간밤에 읽은 시집 문장 250그램
 버리지 못한 사랑 한 큰 술
 푸른 대문 집 드럼 소리 세 컵
 울음 창고에 남아있는 눈물 약간
 준비된 재료를
 밀가루와 잘 섞은 다음
 한 덩어리로 뭉쳐진 반죽을 도마에 치댄다
 울퉁불퉁한 덩어리를 볕 좋은 발코니에 내놓고
 반죽이 부푸는 동안
 기. 다. 린. 다
 바삭해진 저녁
 창밖으로 지나가는 오후는
 이별이 발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 
 비밀의 숲에 찾아온 바람과  
 달콤한 거짓말을
 예열된 마음 안쪽에 바른다
 마음도 내 것 아니었다고
 밀대로 납작 납작 상처, 밀어보지만
 사랑만한 허풍 어딨는가
 하늘로 풍선 들어 올리는 허공
 공갈빵 빈속에 팽팽하게 들어찬다





기준!


 한 때,
 높은 목욕탕 굴뚝이
 우리 동네 기준이라 생각한 적 있다
 손 높이 쳐들고 기준! 하고 외쳐서
 앞뒤좌우 정렬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 적 있다 
 형제슈퍼, 초원약국, 오아시스 사진관, 나란히 있고
 점순네, 홍영감네, 숙자네, 나란히 한 골목 쓰는 것
 사네, 못 사네 울고 웃던 이웃들 모두
 우렁찬 기준에 맞춰 사는 거라 생각했다
 굴뚝보다 높은 유리건물 솟은 뒤로
 청하서림 자리에 누드 바 들어서고
 웁스 베이커리, 홀리데이 레스토랑, 개업하는 것
 기준 바뀌자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다
 맹금류가 먹이의 숨통부터 끊고
 악어가 누우의 목을 물고 뒹구는 것
 너, 이제 죽었어
 무딘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
 기준 바뀐 우리 동네
 굴뚝 없는 목욕탕 때문이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완경完徑


 달은 나의 군주
 나는 그의 착한 백성
 내가 늙어가는 건
 달에 가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의 허락 없이 웃지도 못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달의 소관이어서
 지는 꽃을 서러워할 명분이 내겐 없었다
 해안에 고래 떼가 몰려와 죽었을 때에도 울 수 없었다
 불규칙한 썰물과 밀물 때문에 
 포구에 버려진 배들이 많았다
 붉은 루즈를 바르고 
 속눈썹을 올리며 화장을 했던 건
 달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예쁜 옷을 구하러 다닌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엉킨 실을 잘 풀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고
 어머니가 물려준 꼬인 실타래를
 초경 치루는 어린 딸에게 물려주었다
 절망이 정말로 보이는 눈으로 
 달을 읽는다





빨간 구두 연출법


 창문을 활짝 열고
 검은 꽃무늬 프린트가 들어간 스카프를 두르세요
 빨간 구두에 숨어있는 기호학적 의미가 돋보이게 
 챙이 넓은 모자를 써보세요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을 원하신다면
 젊은 안소니퀸이 나오는 흑백 영화를 보시구요
 복고풍으로 탈색된 바다는
 당신의 빨간 구두를 고급스럽게 하죠
 필요 없는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 탈이군요
 그럴 땐 두꺼운 회색 벨트로 시선을 돌리세요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도 같은 방법으로 연출하면 좋겠지요
 거실 카펫에 쏟아진 적포도주는
 감각적인 빨간 구두와 무난하게 잘 어울리죠
 우울한 날의 시선을 끌고 싶은 당신 
 마을과 마법의 세계를 넘나들고 싶을 때 
 빨간 구두를 신으세요
 빨간 구두의 은밀한 꿈이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해줄 거예요 
 다운된 슬픔, 
 남용할 수 없는 매력이 당신을 돋보이게 해줄 거예요




여섯 사람


 동물 치아로 만든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아프리카 인디언이 알고 싶다 셋 이상의 숫자를 셀 줄 모르고, 방울이나 북 조차도 없어 노래가 무엇인지 춤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가 알고 싶다 야자수로 아무렇게나 얹은 지붕 아래서 불을 피울 줄 몰라 일 년 내내 비와 곤충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내는 그가 알고 싶다 여섯 사람만 통하면 세상 누구든 알 수 있다는데, 나는 왜 아직도 그를 모를까 단 한 사람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는 왜 그가 알고 싶은 걸까





등신


 자전거 체인이 빠졌다는 낯선 사람에게
 잘 벼려놓은 송곳을 빌려주고
 뭉개진 송곳 끝을 돌려받은 그대가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등신,
 별 생각 없이 빌려준 마음을
 그냥 가지고 가버린 사람 뒤에서 들었던 등신,
 축담 밑에 앉아 마음 기다리고 있는데
 집 나간 송곳이 찾아와
 등신, 등신 하며
 등을 마구 찔렀다는 당신,
 현대시 주소록에 살아
 헌책방 골목을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당신,
 새로 쓴 시가 없어 보내줄 수 없다는
 생전에 보내준 메일을 지우지 못하고
 편지보관함에서 꺼내어 읽어보는 등신,




시작메모
 누구 ‘처럼’ 이 아닌 나 ‘답게’ 살기 위해

 며칠 전, 산티아고 여행기를 연재했던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여행기를 나눌 강의시간이 생겼는데, 강사를 소개할 약력으로 내가 보내준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시인으로 언제 어디로 등단했는지와 첫 시집 이름만 써서 보냈더니 몇 자 더 보내달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지나간 과거 몇 줄 꾸역꾸역 더 써 보내놓고 나서, 시인이란 이력 하나만으로는 부족한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 어떤 굶주림도 채울 수 있는 성배聖杯를 소유할 수 있는 자는, 그 돌그릇을 지키는 왕, 아픈 상처 때문에 몸의 반 이상이 말을 듣지 않게 된 이 왕을 향해 ‘ 당신은 어떻게 아프십니까’ 라고 최초로 말을 거는 사람이라고 한다. 불행한 존재를 주의하는 눈을 가진 사람, 그 주의력을 구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그 성배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데, 시인들이 바로 그 사람 아니겠는가. 
  싸움이 끝나고 난 뒤 승패에 상관없이 포옹을 나누는 복서들이 좋아 배운 권투 1년. 힘 빼지 않으면 물에 뜨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수영 5년. 두렵고 힘든 모든 것이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배운 암벽 2년,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한 여름,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었던 보름, 나 홀로 제주 올레 일주일, 경주 신라의 달밤 165리 완보, 누구 ‘처럼’ 이 아닌 나 ‘답게’ 살기 위해  떠났던 산티아고 한 달. 순간 스쳐 지나가는 나의 이력들. 
  리토피아의 겨울에 보낸 상처 열편은 몸으로 배운 내 이력의 말 걸음이다.  

 신정민∙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꽃들이 딸꾹.

추천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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