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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젊은시인 집중조명/시의 집에서 빵이 부풀어오를 때/금은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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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집에서 빵이 부풀어 오를 때
―신정민의 시
금은돌|문학평론가
노르웨이의 국민 시인 울라브 H. 하우게는 시 쓰는 일을 집짓는 일에 비유한다. “대단할 것도 없다/이 시들은, 그저/되는대로/단어 몇 개를 쌓았을 뿐. 그럼에도/나는 생각한다,/이것들을 짓는 게/좋았다고, 그런 다음이면/잠깐 동안/집을 가진 것 같다고.”(「이파리움막과 눈집」)
시인은 집을 짓는 사람이다. 시인의 집은 일상에서 떠도는 사건이나 주변 이미지를 단어 몇 개로 쌓아 만든다. 시인은 집 짓는 과정을 즐긴다. 서까래를 올리고, 창문을 내고, 마당에 꽃을 심으며 잠시 동안 비밀의 정원을 가꾼다. 집이 완성되었을 때, 시인은 떠난다. 타자에게 집을 만들어주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목수처럼, 단지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사랑할 따름이다. 시인은 언어의 집에서 쉬었다 발을 돌리는 나그네이다. 시는 소파를 내어주고, 유리창으로 떨어지는 따스한 햇볕으로 시인을 어루만져준다. 집을 소유하지 않는 시인은 다만 멀리서 바라본다. 자기만의 형식으로 집을 짓는 일에 열중한 다음 다시, 여행을 떠난다. 독자는 시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문을 두드린다.
신정민은 집을 지을 줄 아는 목수다. 어깨에 힘주어 못 박지 않는다. 그렝이질을 할 줄 안다. 그렝이질은 배흘림기둥을 돋보이게 하는 기술로 울퉁불퉁한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는 작업이다. 나무기둥을 세우기 위해서는 밑동을 깎아 주춧돌의 결을 맞춰야 한다. 이질적인 것들의 어울림, 백년 묵은 배흘림기둥을 받아 안으면서도 모나지 않게 천 년을 버티어 낼 수 있도록 중심을 잡는다. 그렝이질은 목수의 노련미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맞물림. 못을 쓰지 않고도 집을 지을 수 있는 견고함. 신정민의 첫 시집 꽃들이 딸꾹(애지)은 목수의 손맛을 보여준다.
낡은 토슈즈를 신은 거리의 무용수
발끝으로 지구를 돌린다
호두까지 인형이 왕자로 변할 때까지
힘을 준 발끝이 돌아간다
무용수의 몸이 돈다
지구가 돈다
더러워진 날개옷 여기저기 올은 풀어지고
틀어 올린 머리 밑으로 목이 길다
검은 눈 화장 아래 지젤의 이름이 새겨진 하얀 십자가
가볍게, 란 말이 한 바퀴 두 바퀴
어지러운 턴 아웃 스텝을 물고 늘어진다
점점 느려지는 춤,
지상에 한 점,
발끝으로 서서 그녀가 돈다
지구가 느릿느릿 돈다
―「발끝으로 지구를 돌리다」 전문
집을 짓기 위해 시인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무용수가 지구 위에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지구를 돌리고 있다. “낡은 토슈즈를 신은” 발끝이 느려지면 “지구가 느릿느릿 돈다” 발끝은 힘을 부여받는다. 태양계의 우주적인 자장 안에서 펼쳐지는 역학운동에 능동적인 참여자로 거듭난다. 그것도 발끝으로 가볍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참여한다. 이때 지구는 발아래에 굴러다니는 작은 공이 된다. 아마도 시적화자의 시선이 저 바닥을 딛고 있는 가냘픈 발끝에 머물렀으리라.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이채로운 발견을 했을 법하다. 작고 여린 것으로 크고 거창한 것을 돌리는 시인의 발상은 새롭다. 사물을 바라보는 위치를 바꾼 결과이리라.
시적화자는 감각적으로 이 지점을 찾아낸다. 시선의 위치 변경은 새로운 시공간을 펼쳐놓는다. 일차원의 직선을 삼차원으로 확장시키고 공간을 겹치며 주름진 사이에서 꽃을 피운다. 야생화를 찍기 위해서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낮아져야 하는 것처럼, 시인은 낮아진다. 그리고 꽃의 입장에서 꽃과 대화를 나눈다. 사람의 눈높이에서 꽃은 대상화될 뿐이다. 상투적인 작품으로 고정된다. 꽃의 마음을 거친 뒤에 물러서서, 거리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새의 마음으로 새를 길러야 함을 강조했던 ‘화이위조化而爲鳥’(장자)의 원리가 시에도 적용될 일이다.
신정민 시인은 현실적인 시공간을 꼼꼼히 짚어가다가 은근슬쩍 다른 차원으로 시선을 돌린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지워진 “아침눈썹들”을 공중에 날려 보내고 (「모나리자의 눈 화장」) “얼굴에서 입을 지”워 “발바닥에 입”을 붙이고, 바닥이 “울어”대는 소리를 듣는다.(「입」)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지점에 작은 틈새를 벌린 줄 아는 것이다. “바늘을 쉼 없이 움직이며 여섯 시를 일곱 시에 얽어 한 코를 만들고” “두 시를 가위로 싹둑 잘라” “가을을 묶”어 내는(「스웨터」) 솜씨가 자연스럽다. 눈썹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듯이, 힘들이지 않고 해낸다. 그 넘나듦이 그렝이질 같다. 신정민 시인의 특장이라 하겠다.
동물 치아로 만든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아프리카 인디언이 알고 싶다 셋 이상의 숫자를 셀 줄 모르고, 방울이나 북 조차도 없어 노래가 무엇인지 춤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가 알고 싶다 야자수로 아무렇게나 얹는 지붕 아래서 불을 피울 줄 몰라 일 년 내내 벼와 곤충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내는 그가 알고 싶다 여섯 사람만 통하면 세상 누구든 알 수 있다는데, 나는 왜 아직도 그를 모를까 단 한 사람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는 왜 그가 알고 싶은 걸까
―「여섯 사람」 전문
시인은 직진하지 않는다. 시적 대상을 만나기 위해서 나선형을 그리며 에둘러간다. “단 한 사람”을 알기 위해 저 멀리 “아프리카 인디언”을 떠올린다. 사람이란 무엇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을 게다. 이때 “아프리카 인디언”을 생각하며 “그”가 알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를 모를까?” 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시 행간 사이에 시인은 “숫자를 셀 줄 모르고” “노래가 무엇인지 춤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긍정적으로 말한다. “아프리카 인디언”을 떠올린 이유도 “그”가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기無知 때문에 알고知 싶고 더욱 많은 것을 알고知 싶기에 모르는 것無知이 많다. 무한히 순환하는 고리이다. 무지無知에서 앎(知)으로 옮겨가는 것은 타자로 스며들기 위한 과정이다. 시인은 시적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기 위해서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유지한다. 첫 출발점이다. 시적 대상에 대해 안다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인은 철학자가 아니고, 깨달음 전도하는 종교인이 아니기에 더욱 몰라야 한다.
하지만 알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다른 것들이 무너진다. 앎知에서 무지無知로 역행한다. “나는 왜 아직도 그를 모를까” 이 지점에서 시적화자는 대상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기 위해 시선을 멀리 던진다. 질문은 “나는 왜 그가 알고 싶은 걸까”로 이어진다. 무지無知와 앎知은 변증법적으로 상승하며 수없이 재생된다. 내 안에 나小我를 벗어나 타자에게로 향하는 과정의 어려움일 것이다. 시 「여섯 사람」은 타자를 향해 다가가기 위한 여섯 발자국과 같다. 진실한 “그”를 만나기 위해 마음의 거리를 조정하는 발걸음이다. 단숨에 다가가지 않고 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에돌아가는 시선에, 시인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무無는 바로 내 옆, 우리 동네, 우리 마을, 타자가 살고 있는 도시로 나아간다.
한 때,
높은 목욕탕 굴뚝이
우리 동네 기준이라 생각한 적 있다
손 높이 쳐들고 기준! 하고 외쳐서
앞뒤좌우 정렬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 적 있다
형제슈퍼, 초원약국, 오아시스 사진관, 나란히 있고
점순네, 홍영감네, 숙자네, 나란히 한 골목 쓰는 것
사네, 못 사네 울고 웃던 이웃들 모두
우렁찬 기준에 맞춰 사는 거라 생각했다
굴뚝보다 높은 유리건물 솟은 뒤로
청하서림 자리에 누드바 들어서고
웁스 베이커리, 홀리데이 레스토랑, 개업하는 것
기준 바뀌자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다
맹금류가 먹이의 숨통부터 끓고
악어가 누우의 목을 물고 뒹구는 것
너, 이제 죽었어
무딘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
기준 바뀐 우리 동네
굴뚝 없는 목욕탕 때문이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기준!」 전문
“그”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은 “우리 동네”로 확장된다. 시인은 우선 공간변화를 살핀다. 어느새 동네 목욕탕 “굴뚝”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동네 “목욕탕”은 이웃 사람의 등을 밀어주고, 삼삼오오 시시콜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였다. 잘난 척하며 이웃끼리 싸워도 한 바구니에 담긴 도토리들 키 재기였다. “목욕탕 굴뚝”은 넉넉했다.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기준이었다. 더군다나 “우렁”차고 든든했다. 굴뚝은 시각적으로 “동네” 울타리를 형성해 주는 눈높이의 기준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의 심리적 기준점이기도 했다. 한 아이가 오른 쪽 팔을 번쩍 들며 “기준!”하고 외치는 것처럼, 살을 맞대고 어울렸던 공동체의 기준이다. 그 기준을 가지고 “우리 동네”를 살펴보니, 없어진 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형제슈퍼, 초원약국, 오아시스 사진관, 점순네, 홍영감네, 숙자네” 등 순박한 간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에 “누드 바” “웁스 베이커리, 홀리데이 레스토랑”라는 국적불명의 간판이 거리를 점유한다. 간판의 변화는 소비 형태의 변화를 암시한다. “굴뚝 보다 높은 유리 건물이 솟은 뒤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세련된 “유리 건물”은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옷과 먹을거리가 달라지고, 주민들이 평상에 앉아 수다 떨던 골목 풍경이 사라진다. 건물의 변화와 심리적인 변화가 맞물리면서 소시민들은 자본주의적인 삶에 빠져 살고 있던 거였다. 무한경쟁 체제에 휩쓸리면서 변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기준들을 놓치며 살아온 것이다. 기준을 잃어버린 뒤,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정작 해야 할 일들을 놓쳐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온다. 발랄하고 깜찍한 상상력 뒤에 펼쳐지는 풍경이 가슴 아리다. “사네, 못 사네 울고 웃던” 이웃 사람들은 “맹금류”에게 “먹이의 숨통”을 끊긴 초식동물이었다. 높은 “유리 건물”은 우리의 기준이 될 수 없었다.
로프공工이 내려온다
금강빌딩을 처음으로 올려다본다
내가 딛고 서있는 이곳이
움푹 패인 커다란 허방 바닥이라고
서둘러 결론짓는 건 금물이다
명퇴권고가 들어온 사내의 걸음을 이제사 눈치 채다니
자신이 발밑을 내려다 봐서는 안되는 줄광대라는 것을
그는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한 세상 살아보자고 배 밖에 내놓은 간과 쓸개
물통인 듯 걸레인 듯 흔들렸던 것인데
바람 부는 날엔 위험수당 높아
허공 한 나절 그것도 재미가 쏠쏠해
어미의 젖통 밀듯 툭, 툭
허공에 발길질하며 내려온다
들여다 볼 수 없어 차라리 편한 속이
이 거대한 유리 상자뿐이던가
사람 속, 그 속이 그 속이지
늦은 저녁 붙잡고 승천할 동앗줄 내려온다
―「달비계」 전문
시적화자의 시선은 허공을 향한다. 기준이 사라진 뒤 사람들이 어디에 어떻게 서 있는지를 바라본다. 허공에 매달린 사람들이다. 일명 로프공이다. 생계를 위해서 건물 외벽을 닦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허방”을 딛고 일한다. 한줄기 동아줄에 몸을 의지해 높은 유리 건물에 매달린다. “한 세상 살아보자고 배 밖에 내놓은 간과 쓸개”는 “물통인 듯 걸레인 듯”흔들거리고 허공에서 “발길질하며” 위험수당에 목숨을 건다. 그뿐만 아니다. 겉으로 말짱하게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샐러리맨도 언제 “명퇴권고”가 떨어질지 모른다. 지상에서 두 발로 걷고 있다고 해도, 걷는 게 걷는 게 아니다. 그 역시 “허방 바닥”을 딛고 사는 게다.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자마자 낭떠러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보다는 차라리, 허공에 뜬 인생이라는 걸 진즉 깨달은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니체) 이쪽으로 건너갈 수도 없고 저쪽으로 건너갈 수도 없는, 그렇다고 뒤를 돌아갈 수도 없는, 어디론가 건너가는 존재이다. 몰락하더라도, 무엇을 향해 건너가야 하는 운명이다. 저 높은 유리 건물에서 내려오는 줄이 하늘로 승천할 기회의 “동아줄”일지, 몰락을 안겨다 주는 썩은 줄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만큼 우리네 삶은 안정된 기준 없이 허공에 매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기준이 사라진 뒤 무엇을 새로운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어떻게 시의 집을 지어야 할 것인가?
간밤에 읽은 시집 문장 250그램
버리지 못한 사랑 한 큰 술
푸른 대문 집 드럼 소리 세 컵
울음 창고에 남아있는 눈물 약간
준비된 재료를
밀가루와 잘 섞은 다음
한 덩어리로 뭉쳐진 반죽을 도마에 치댄다
울퉁불퉁한 덩어리를 볕 좋은 발코니에 내놓고
반죽이 부푸는 동안
기. 다. 린. 다
바삭해진 저녁
창밖으로 지나가는 오후는
이별이 발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
비밀의 숲에 찾아온 바람과
달콤한 거짓말을
예열된 마음 안쪽에 바른다
마음도 내 것 아니었다고
말대로 납작 납작 상처, 밀어보지만
사랑만한 허풍 어딨는가
하늘로 풍선 들어올리는 허공
공갈빵 빈속에 팽팽하게 들어간다
―「공갈빵 레시피」 전문
신정민 시인은 선택에 앞서 “가만히”(「묘박」) 정지시킨다. 기다리며 바라본다.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면서 숨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 시인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절망이 정말로 보이는 눈으로”(「완경」), 때로는 “다운된 슬픔”(「빨간 구두 연출법」)으로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시인은 길항 중이다. 겉으로 떠들썩하게 방황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내면을 성찰한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하다. 시인의 말처럼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묘박」) 빵에 이스트를 넣고 “반죽이 부푸는 동안” 발효해 보는 것이다. 기준을 잃어버린 것은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첫 번째 시집을 내고 시야를 확대하며 타자를 향해 관심을 돌리지만, 아직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지 않았을까. 시인은 여섯 사람 건너서도 알 수 없는 “그”처럼, 시의 집에서 몇 발작 뒤로 물러나 있다.
이스트를 넣은 반죽이 부풀어 오르기까지 시적인 것을 찾기 위해 흔들리는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틈새를 벌려 이채로운 상상력으로 시선을 뒤바꾸었던 발랄한 시편들. 그것들이 한순간에 “공갈빵”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낡은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의 발끝으로 지구를 돌려 보지만, 타자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스며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시적화자는 허공에 떠 있는 로프공이나 “츄리닝바람으로 서 있는 사내를”(「점묘화」)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동네”부터 살펴보니, 현실 장벽이 만만치 않았을 게다. 현실은 잣대를 쉽게 들이댈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울퉁불퉁하고 기우뚱하며 모순에 가득 차 있다. 겉으로 보기엔 일차원이지만 뒤집어 보면 다차원이다. 해석할 수조차 없는 세상, 카오스 같은 혼란 앞에서 시적 자아는 내면에 새로운 시적 기준을 찾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기. 다. 린. 다.” 도로를 재정비하듯이, 쉬는 것이 아니라, 생각 중이다. “이별이 발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간밤에 읽은 시집 문장 250그램”과 “사랑 한 큰 술”, “푸른 대문 집 드럼 소리 세 컵”, “울음 창고에 남아있는 눈물 약간”으로 반죽하며, 시를 짓기 위해 “예열” 중이다.
앎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무無의 상태로 머무는 시인은 새로운 시의 집을 지을 것이다. “허공”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시적 “기준”을 마련 중이다. 바라건대, “사랑만한 허풍”이 약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공갈빵” 속으로 충분히 스며들어가 달콤한 시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비밀의 숲에 찾아온 바람”과 “달콤한 거짓말”로 시인의 집에 맛있는 향기가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정민 시인의 특장이 계속 발휘되기를 바란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그려지는 그렝이질 솜씨가 보고 싶다.
금은돌∙2008년 ≪애지≫로 비평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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