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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특집-1960년 4월, 젊은 그대에게/하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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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화된 권력에서 진정한 비평가로
―김현 선생께
하상일|문학평론가
1960년 4월 19일,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시화한 4월 혁명이 발발한 지 어느덧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혁명이 지나간 자리에 민주와 평등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에 의해 철저하게 배반당했고, 혁명 이후 또 다른 혁명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던 혼란과 혼돈의 세월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50년대와 60년대의 경계에 선 4월 혁명의 사회문화적 충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혁명 이후의 세대들에게 있어서 혁명의 정신과 문화적 자산은 구세대의 낡은 유산을 송두리째 전복시키는 혁신의 도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젊은 세대들은 혁명의 자리에 직접 서지 못했거나 방관자의 시선으로만 있었다면 그 자체로 부끄러운 죄의식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4월 혁명은 당대 젊은이들의 정신과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세대론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1960년대 목포에서 서울로 유학 온 젊은 비평가 김현, 당신 역시 이러한 세대의식의 토대 위에서 전후세대의 문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학의 정신과 미학을 정립하려는 당찬 포부를 지니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당신의 문학적 꿈은 서울대 문리대 동문들과 함께 한 ≪산문시대≫, ≪사계≫, ≪68문학≫ 등을 거치면서 1970년 ≪문학과지성≫의 창간으로 그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4월 혁명의 함성이 한국문학에 전후세대의 타락한 정치성에 반하는 자유주의 문학의 도화선이 되어주었던 것이지요.
어느새 당신이 떠난 지도 20년이 다 되었습니다. 당신이 뿌리를 내린 ≪문학과지성≫(이하 ≪문지≫) 동인이 주축이 되어 당신의 10주기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던 날이 2000년 4월 28일이었으니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었네요. ‘부재하는 현존, 현존하는 부재’라는 모순적 진실로 당신의 의미를 신화화하면서, 4월 혁명세대로서 당신의 문학이 196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공과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지요. 아니, 사실 공과功過라고 했지만, 차마 그 자리에서 과過를 언급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지요. 당신 사후 10년, 16권으로 구성된 문학전집의 두께만큼이나 그 위상이 남다르게 조명되고 있었는데, 그 문학적 열기를 공식적으로 추인하는 자리는 그야말로 축제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한때 ≪문지≫ 3세대로 불렸던 한 평론가가 ‘4․19세대 비평의 성과와 한계’를 소신 있게 발제했을 때 당신의 후배와 제자들은 순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문지≫에게 당신은 이미 ‘신화’였고, 신화는 절대 부서지거나 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당시 저는 그 행사와 관련된 기사와 글들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의 비평적 업적이 남은 자들의 신화적 의식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지도 모르겠구나, 당신이 떠난 지난 10년이 우리 비평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성숙의 시간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당신의 비평을 우리 비평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디딤돌로 삼기는커녕 대리석으로 장식된 묘비명 속에 김현이라는 이름을 가두어 버리고 마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당신의 비평이 점점 추문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 당신이 배출하고 길러 온 남은 자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1960년대 김현 당신에게 비평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나요? 타락한 1950년대와 전후문학의 자리를 동궤에 놓고 무조건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조연현, 김동리 등의 청년문학가협회나 50년대 이어령이 주장한 화전민의식처럼, 이전 세대와의 연속성을 거부하는 세대론적 인정투쟁으로 문학장의 헤게모니를 쥐려 했던 것은 아닌가요? ‘1965년’의 의미를 유독 강조함으로써 동세대의 문학작품에 모든 비평적 수사를 동원한 것은 의도된 전략이 아니었나요? 물론 이러한 모든 의문이 명백히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서 당신의 비평이 추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평사의 과정이 그러하듯 논쟁이 사라진 자리에서 생산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논쟁은 이전 세대의 비평적 한계를 넘어서는 비판적 문제제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아주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당신의 인정투쟁이 이후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우리 사회에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였는지, 오히려 비판의 유효성이 권력화된 비평의 시선으로 왜곡되어 버린 점은 없었는지, 그래서 이전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움의 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길을 답습하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뒤를 이은 한 평론가는 김현 비평의 현재성을 논하면서 “김현 비평의 역사적 의미를 캐는 것으로서, 비평가 김현이 속한 세대의 의미를 추적하고 그로부터 김현 비평의 구성적 특성을 살펴보는 일로 나타날 것”(정과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4월 혁명의 정신으로부터 당신의 비평, 나아가 ≪문지≫의 근간을 세워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물론 혁명 이후 대학생 문단을 형성한 ≪문지≫ 계열의 문학인들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영토를 마련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4월 혁명 이후의 새로운 문학 지도를 그리는 데 김현 당신이 한 역할을 과소평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출발이 ≪창작과비평≫(이하 ≪ 창비≫)이라는 새로운 목소리에 대한 대타적인 의식이 강했다는 점에서, 그래서 이후 한국문학의 흐름을 ≪문지≫ 대 ≪창비≫라는 이원화된 구도로 획일화시키거나 축소시켜 버린 혐의가 짙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서울대 문리대에서 모인 당신들의 문청 시절은 서구에서 유입된 새로운 이론에 열광하는 새것 콤플렉스에 압도되어 있었음도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스스로 새것 콤플렉스에 대한 비판으로 맞서기도 했지만, 이러한 태도는 결국 자기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었지요. 아직 국문학이란 학문적 토대가 튼튼하게 구축되지 못했을 때라는 당시의 상황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창비≫든 ≪문지≫든 외국문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의 현장이 기획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새것 콤플렉스에 경도된 젊은 문학의 지형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 결과 당시 국문학을 공부한 동년배 시인, 소설가, 비평가들은 ≪창비≫와 ≪문지≫ 중심으로 새롭게 구축된 한국 문단의 중심에 들어설 여지가 없어 <상황>이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결집하기도 했지요. 그들 가운데 진보적 의식을 가진 젊은 문인들의 경우에 ≪현대문학≫과 같은 구세대 잡지와 유연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창비≫와 ≪문지≫의 권력화는 이미 그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1960년대 김현, 당신은 자기 세대를 향해 “이 세대는 우리가 아는 한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세대였으므로,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 있었다. 나는 거의 언제나 4․19세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한 세대를 향해 이렇게 감동적인 헌사獻辭를 바친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당신에게 4월 혁명의 사회문화적 의미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진정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4월 혁명 50주년이 다가오는 지금, 당신의 사상과 생각이 ≪문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문학 전체에 깊은 성찰과 반성을 불러일으키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지금 우리는 권력의 향방에 따라 국가적 신의가 하루아침에 내버려지는, 그래서 최소한 백년 아니 십년의 대계大計도 세우지 못하는 근시안적 정치로 인한 국가적 혼란에 직면해 있습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지금의 상황과 1960년 4월 혁명의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나요? 당시 ≪창비≫의 정신이었던 ‘자유와 평등의 정신’,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토대로 한 문학의 현실참여보다는, ‘감수성의 혁명’, ‘리버럴리즘과 상상력’을 통한 미학적 탐구에 주력했던 당신의 문학관, 즉 ‘문학의 기능성’이 아닌 ‘문학의 존재성’, ‘실천적 이론’이 아닌 ‘이론적 실천’, ‘민중적 전망’이 아닌 ‘시민적 전망’, ‘현실에의 몸담음’이 아닌 ‘현실에의 반성적 질문’이라는 ≪문지≫의 이념과 문학적 입장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어떠한 문학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
민족, 분단, 통일 그리고 정치에 소극적이었던 ≪문지≫는 최근 ‘4․19와 모더니티’라는 특집으로 다시 4월 혁명의 문화사적 의미를 정리하는 기획을 시도했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 제목부터가 지독하게 ‘문지’적이라는 사실에서 반감부터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 문지는 4월 혁명 이후의 문학을 말하면서도 오로지 ‘모더니티’를 중심 화두로 잡고 있는 것인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혁명 이후의 문학에서 미학적 근대성의 추구 또한 중요한 방향 가운데 한 가지였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미적 전위의 차원에서만 해명하고 분석할 대상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면, 이제 ≪문지≫는 모더니티의 미망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김현 당신이 자신의 세대 전부를 걸고 의미화한 4․19세대의 문학이 미적 근대성의 차원으로만 발전하고 성숙해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4․19라기보다는 차라리, 4․19를 둘러싼 의식과 감각이 글쓰기의 내적 지향성과 결합하는 문제”(이광호)라는 말에는, 여전히 혁명 이후를 의식과 감각의 차원에서만 사유함으로써 ‘내적 지향성’의 문제를 초점화하는 편향된 시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의식과 감각이 왠지 4월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유리된 것처럼 느껴져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혁명은 가고 정신은 사라진 채 형상만 남아 그 형상을 분석하는 데만 골몰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게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당신을 추모하는 특집이 실린 ≪문학과사회≫ 2000년 여름호를 보다가 아주 우연찮게 저의 스승을 추모하는 기획글 한 편도 같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한두 해 선배가 됨직한 국문과를 다녔던 김준오를 기억하시는지요? 내 문학의 처음이자 마지막 은사이신 그 분의 이름과 당신의 이름이 묘하게 겹쳐지면서, 지금 나는 김준오를 신비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깊은 성찰을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문학과사회≫에 수록된 기획글 역시 그런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과장하고 서둘러 의미화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한 사람의 비평적 본질과 한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내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이 역력했습니다. 당신을 추앙하는 맹목적 태도가 오히려 당신을 추문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의도는 더욱 도드라지게 부각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제2의 김현’이라는 수사가 젊은 비평가들에게 최고의 헌사가 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헌사에 숨겨진 권력화된 시선의 위험성으로부터 젊은 비평가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이 온전히 지켜질 가능성은 너무도 희박합니다. 이러한 주체성과 자율성의 정립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다시 열망하는 4월 혁명의 정신인데도 말입니다. 1960년대의 김현, 당신은 이제 신비화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 4월 혁명의 정신과 태도를 일깨워주는 진정한 비평가로 기억되어 주십시오. 2010년 4월 혁명 50주년을 기다리는 지금, 이제 4월은 비평가로 살아가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상일∙1997년 ≪오늘의문예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비평집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 '주변인의 삶과 시', '전망과 성찰', '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 '생산과 소통의 시대를 위하여', 연구서로 '1960년대 현실주의 문학비평과 매체의 비평전략', '한국문학과 역사의 그늘' 등이 있음. 고석규비평문학상, 애지문학상 수상. 현재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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