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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특집-1960년 4월, 젊은 그대에게/김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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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2회 작성일 10-08-1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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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에서 나나 다방까지
―김승옥 선생께
김이은|소설가



제가 선생님을 처음으로 뵜던 게 벌써 수 년 전입니다. 어떤 문예지에 짧은 글을 하나 실었었는데 그 글에 선생님께서 그림을 그려 주셨었죠. 그 인연으로 뵙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뵜었지요. 선생님과 처음으로 만날 약속을 잡는데 선생님은 제게 충무로에 있는 ‘나나 다방’으로 나오라고 하셨지요. 지금처럼 추운 어느 겨울날 오후였던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 그때 저는 ‘다방’이라는 말에 적잖이 놀랐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다방이란 시골 읍내 장터의 끄트머리쯤에 붙어 있고, 들어가 보면 다 낡아서 결결이 틈이 벌어진데다 거끄러미가 일어나 온통 울퉁불퉁한 소파가 몇 개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 놓인 낮은 탁자 위에는 백 원짜리 동전을 넣어 뽑아 읽는 엉터리 운세 기계가 놓여 있으며, 언제적 노랜지도 모르게 구닥다리이면서 흐느적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노랫가락이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사는 이 도시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약속시간에 맞춰 충무로역으로 가서는 한옥마을 쪽으로 좀 더 걸어간 후에 ‘나나 다방’ 간판이 보였습니다. 간판을 보자마자 ‘다방’ 따위는 잊어버리고 정말, 드디어 선생님을 뵙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었던 기억이 납니다. 걸음이 오히려 느려지고 왠지 모르게 두려운 마음과 제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혹은 저라는 사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그 어떤 것을 확인하려는 순간인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다방 문 앞에 이르러 정말 다방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지하로 난 계단을 걸어 내려가 문을 밀치는데 역시나 제가 처음 받은 인상은 제 선입견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문에 매달린 종소리부터가 그랬지요. 벽에는 오래된 14인치 티브이가 걸려 있었고, 손님이라곤 중년의 남자 서넛이 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노래도…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였구요. 혼자 앉아 계신 어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 도착 전이신가 보다 생각하고 쭈뼛거리며 빈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젊은 여자가 그것도 혼자서 들어오자, 나이 지긋한 다방의 여주인도 저를 요령부득이라는 눈빛으로 건너다보더군요. 
그때 다른 분들과 앉아 계시던 어르신 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손짓을 했습니다. 바로 선생님이셨어요. 깜짝 놀라 급하게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리고는 드디어, 작은 테이블만을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 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이란 별칭을 갖고 계신 선생님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다니요. 
하지만, 저는 무슨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할지 몰랐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대화가 불편하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간단한 단어의 발음도 어려워하시는 선생님 모습을 뵈면서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심정이 되었으니까요. 다행인 건 그 자리에 수필가이자, 한국 카피라이터 클럽 초대 회장을 지내셨던 이만재 선생님께서 동석하셔서(사실, 이만재 선생님과 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터라 선생님과 이만재 선생님이 아주 오랜 친구 사이란 걸 알고 있었지요.)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지요.
이야기는 ‘나나 다방’이 저 옛날 선생님께서 한창 소설을 쓰시고 또 영화 일을 하실 때 거의 매일 드나드셨던 곳이라는 것부터 시작되었었죠. 그러니까 나나 다방은 선생님의 발자취가 그대로 묻어 있는 곳이며, 지금도 충무로의 원로 영화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구요. 그 얘기를 듣고 다시 ‘나나 다방’을 둘러보니 처음과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마치 이 도시에 남아 있는 몇 되지 않는 역사의 증거물이라는 느낌이었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다방의 모습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나나 다방에서 김승옥 선생님이 그려주신 그림이다.
이어 계속된 이야기들은 선생님께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때의 일화들이었습니다. 엄혹한 시절에 당시 아직 있었던 광나루에서 선생님이 금지곡을 목청 높여 불러 주위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던 얘기며, 「서울의 달빛 0장」을 쓸 당시 이어령 선생님에 의해 장충동의 한 호텔에 감금(?)된 채 옆방의 서영은 선생님께 감시(?)를 받으며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던 얘기를 들려주셨죠. 이야기는 나나 다방에서 나와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되었었죠. 저는 그 생생한 이야기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시대적 울분을 참지 못해 종종 ‘내가 순천 고등학교 유도부 출신이야’ 라면서 주먹을 쥐고 휘두르셨단 얘기 뿐 아니라 충무로에 있던 ‘희망’이란 카페에 단골로 출입하시면서 늘상 카페 이름을 ‘절망’이라고 바꿔 부르시곤 술잔 속에 울분을 섞어 토해내셨단 얘기, 그렇게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다가 카페 주인에게 쫓겨나기를 반복했단 얘기들이었죠.
주로 전후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또 소설로 표현하셨단 얘기들이었어요. 저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소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선생님의 소설들을 읽은 건 20대 초반이었고, 자폐의 지하실에 갇혀 알 수 없는 울분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였어요. 가장 처음 읽은 건 바로 「생명연습生命演習」이었습니다. 저는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뭔가 제 안에서 굉장한 것이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죠.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읽을 때는 책장을 넘기는 제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고 핏발이 선 눈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요.
“……그 무렵 형의 약값으로 돈이 많이 들어서 살림이 상당히 쪼들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미안해서였던지 아니면 이제는 충분히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해서였던지, 세 번째의 사내가 처음으로 다녀간 다음날 형은 드디어 어머니를 때리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에 처음으로 불이-희미하나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파란 불이 켜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 속에서 영원한 복종과 야릇한 환희와 그러나 약간의 억울함을 나와 누나는 본 것이었다. ……”
“…… 나는 누나의 한 손을 꼭 쥐고 있다. 손에는 어느덧 땀이 흐르고 있다. 선교사는 멀리 아래로 보이는 시가지의 불빛들을 꿈꾸듯이 보고 있다. 바람에 실려오는 소금기를 냄새 맡는 듯이 그는 코를 두어 번 킁킁거려본다. 드디어 바지 단추를 끄른다. ……”
“…… 절망. 절망. 누나와 나는 그 다음날 저녁, 등대가 있는 낭떠러지에서 밤 파도가 으르렁대는 해변으로 형을 떠밀었다. 우리는 결국 형 쪽을 택한 것이었다. 미친 듯이 뛰어서 돌아오는 우리의 귓전에서 갯바람이 윙윙댔다. 얼마든지 형을, 어머니를 그리고 우리들을 저주해도 모자랐다.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자 비로소 야릇한 평안을 맛볼 수 있었다. ……”

그야말로 온 몸으로 아파하고 눈물을 떨구며 피를 쏟아내는 그 구절들이 제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어요. 공포로 덜덜 떨고 때로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쥐어뜯기도 했지요. 시대를 아파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소설이란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은 깨달음에 잠도 이룰 수가 없었지요. 동시에 저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었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 안에 틀어박혀 웅크리고 있던 저를요.
선생님께서 소설을 쓰시던 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도시는 여전히 전쟁중입니다. 총성도 없고, 비명도 없고, 생사를 오가는 전선도 따로 없고, 낭자한 피와 부러진 뼈, 찢겨나간 살점들도 없는 데다 눈물도 통곡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이 모든 것들은 늘 있어 왔고 이제는 그것이 몸에 단단히 박혀서 우리는 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픔도 슬픔도 부당함도 희망도 느끼지 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단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아우성치고 있을 뿐. 거기에는 이 전쟁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거라는 체념과 그 체념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그리고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버리는 진실과 그 잠들어 버린 진실을 깨워 불러내기엔 이미 충분히 나약해진 우리만 남았을 뿐. 우리는 전쟁 속에 살면서 동시에 영원한 전후 세계에 갇혀 있는 꼴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한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이란 그런 거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 것도 없다, 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단념한 상태였습니다. 그저 무기력했었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생명연습生命演習」은 그런 저를 마구 헤집어놓고 들쑤셔 놓고 부끄럽게 만들고 가슴 뛰게 했지요. 생각해보면 제가 처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바로 그때였던 것 같아요. 많은 후배 소설가들이 그런 것처럼 저 또한 그때부터 선생님께 빚을 지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가도 저 자신이 또 다시 방향을 잃고 그저 흘러가는 것처럼, 또는 그냥 한 자리에 붙박혀 있는 듯이 느껴질 때면 저는 종종 마치 무진의 안개에 휩싸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 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
“……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저는 선생님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수많은 것들을 선생님께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처음 나나 다방에서 뵜을 때도 그랬고, 지난 해 봄에 선생님의 문학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선생님과 함께 순천고등학교에 가서 앉아 있을 때도 그랬고, 선생님과 함께 순천만의 갈대밭을 보고 그 입구에 놓인 다리에 ‘무진교’란 이름이 붙어 있는 걸 보았을 때도 그런 마음이 불쑥 불쑥 솟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었던 게 사실이구요. 선생님께 진 빚도 갚아야 하고 더 많은 가르침도 받아야 하는데, 이미
2008년 봄, 순천만 무진교 앞
늦어버린 건 아닌가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2008년 봄, 순천에서
선생님께서 쓰러지신 이후, 말씀을 거의 못하셔서 필담을 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가끔 제게 메일을 보내실 때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어떤 기호나 수식처럼 이루어진 메일 내용을 볼 때면 마음 한쪽이 아린 걸 저도 어쩌지 못합니다.
가끔 선생님을 뵈면서도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거 같아요. 한 달여 전쯤, 그러니까 2009년의 끝머리에서 뵈었었죠. 충무로 나나 다방 이층에 있는 중국 음식점 ‘싱’에서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필담으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10년에는 아주 예전에 쓰다가 완성하지 못했던 소설들을 다시 집필하고 싶다고 또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광주 혁명 당시 스스로 중단하셨던 「먼지의 방」, 그리고 서장으로 쓰여진 「서울의 달빛 0장」 그 이후를 말이에요. 꼭 올해가 아니더라도, 또 그 다음해가 되더라도 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서 아직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할 후배 소설가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해주시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소설은 바로 이런 거다, 라는 걸 다시 한 번만 꼭 다시 한 번만 제게 일러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또한 뵐 때마다 제게 인자한 미소를 건네시는 선생님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는 올해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곧 순천에서 있을 ‘김승옥 문학관’ 개관식 때 또 뵙겠습니다.

김이은∙1973년 서울생. 200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작품집으로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 '코끼리가 떴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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