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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특집-1960년 4월, 젊은 그대에게/강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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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裏面을 보는 눈
―신동엽 선생께
강정구|시인
4.19 혁명의 시인, 참여시인, 그리고 시 「껍데기는 가라」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시인이 당신 신동엽이지요. 저 역시 창비에서 나온 당신의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읽으면서 한국문학을 공부했고, 또 시인의 꿈을 품었으며, 그 꿈의 좌절 이후 평론으로 전향을 했었죠. 저는 평론가로서 주로 민족문학을 본다면서도 주 관심사가 70년대여서 당신을 살짝 비껴갔었죠. 물론 신경림의 문학을 검토하다보니 당신과 일부분 관계가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평론 「민중시 형성의 한 과정 -신동엽과 신경림의 시를 중심으로」를 쓴 적이 있죠. 이것이 제가 당신과 맺었던 문학적인 인연의 전부라고 할까요.
그래요. 저와 당신은 사실 굉장히 어색한 관계이네요. 그리고 편지를 보내기에도 쑥스러운 사이가 맞네요. 더욱이 이미 저 세상에 계시는 고인이자 우리 문학사의 체계 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가인데, 저 같이 문단 말단에 겨우 이름 석 자를 내놓고 있는 자가 편지를 보낸다니, 그것이 어디 편안한 문장이 구사되고 마치 깊은 사이처럼 속내가 오가는 일인가요. 이것이 제 편지의 한계이니, 이 한계를 미리 사족처럼 달아놓아야 오히려 말을 이어가기가 편하겠네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까닭은, 무엇보다 당신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우연한 기회에 다시 읽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참여시·저항시·혁명시·민중시·민족시 등의 수사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제가 읽기에 한 마디로 이면을 보는 눈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시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제가 평론가라는 자의식 때문에 엮어낼 수 있는 일이지만요, 당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측면이 좀 더 강하지요. 우선 당신의 시를 한 번 되뇌어 보겠습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전문
이미 고전이 된 위의 시는, 당신을 말하는 혹은 대표하는 시임에는 분명하죠. “네가 본 건, 먹구름”, 그리고 “네가 본 건, 지붕 덮은/쇠항아리/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라는 ‘너’의 인지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닦아라, 사람들아/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와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을 봐야한다는 요구는, 이른바 현실 대 이상의 이원구조를 그대로 보여주지요. 플라톤의 사유를 잠깐 빌려보면, 전자의 ‘하늘’이 감각계에서 보이는 개물이고 후자가 이데아계에서 있다는 형상이겠지요. 좀 쉽게 말해보면 하나는 현실이요, 다른 하나는 지향해야 할 이상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이원구조에 근거한 논법이 4.19 혁명 이후 가장 진보적인 흐름을 형성한 참여시인의 전형적인 사고구조였다는 것이 중요하죠. 현실 속에서 이상을 바라보기, 그것은 박정희의 공업화가 진행되는 현실 속에서 진보적·참여적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실을 펼쳐보이기에 가장 적합했던 방법이었던 것이죠. 당신 말고도, 당시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이른바 시대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이러한 논법을 사용했으니 말이죠.
물론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악과 대항해서 싸우는 선이 아니라 현실을 반성·성찰하는 눈이지요. 현실에서 그 바깥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할까요. 현실이라는 이 완고하고 변화불가능하고 보수적인 이미지를 흔들고 찢고 균열시키면서 그 이면에 있을 법한 또 다른 현실을 불러들이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저는 이것을 이면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시인의 급에 따라서 더 심오하고 깊게 엿보인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가 신동엽 시인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지요. 1960년대의 방식대로 현실을 가로지르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당신의 눈이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오늘날의 시인들 나름대로 자기가 속한 현실을 균열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길을 잃으면 강을 찾으라 했다
그곳에 가면 길 잃은 자의 무덤 위에
탑을 세운 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길을 물으라 했다
어째서 죽은 자들만이 이정표를 세웠는지
잘 알지 못해도 그 강에 가면
물소리에게라도 길을 물을 수 있을 거라 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손가락을 길잡이 삼아 걸어간다
강가에서는 수고하며 걸은 자들만이
흐르는 강에 발목을 담그고
물 위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숙인다
바람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물결 위의 오래된 발자국들
얼마나 오랫동안 강물이 그 발자국들을 싣고 흘렀는지
흐르는 것들은 얼마나 거대한 서성거림인지
그 앞에서 처음으로 길 잃을 자가 되어
제 눈이 먼 줄을 알고 울게 되리라
강을 등지고 떠나는 자는 이제
세상의 모든 길이 그려져 있는
여행자 지도를 버리고 빈손이 된다
―오직 눈먼 사람만이 지도를 버릴 수 있다―
그의 귓바퀴에 강물 소리가 흘러와 부딪친다
입 밖에 낸 적 없는 물음에 대하여
강물 소리가 웅성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출렁이며 흘러간다.
―김학중, 시 「길을 잃으면 강을 찾으라 했다」 전문
김학중 시인은 올해 처음 문단에 발을 디딘 시인인데요, 위의 시에서 “길을 잃으면 강을 찾으라 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지요. 잃어버린 길이란 바로 현실의 막막함, 방향 잃음, 혹은 고통을 뜻하는 것인데요, “강을 찾으라”라는 시인의 화두에는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지요. “그곳에 가면 길 잃은 자의 무덤 위에/탑을 세운 자들이 있으니/그들에게 길을 물으라 했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강가에는 죽은 자를 위한 묘비가 더러 있는데요, 그 묘비란 죽은 자의 ‘탑’이요 ‘이정표’로 은유되는 것이지요.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묘비란 삶의 방황이 끝나 죽은 자가 이승에서 가지고 있었던 이름과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의미들을 기록한 것이지요. 시적 화자는 그러한 묘비에서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 혹은 죽음에 대한 숙연함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런데 위의 시에서 더 주목되는 것은 바로 그 다음 구절들이지요. 시적 화자는 “바람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물결 위의 오래된 발자국들/얼마나 오랫동안 강물이 그 발자국들을 싣고 흘렀는지/흐르는 것들은 얼마나 거대한 서성거림인지”를 깨달은 것이지요. 정리해서 말하면, 삶이 방황이어서 고통스러워했는데, 강가에서 강물의 파도가 방황하는 발자국처럼 보이더니 그 방황이 커다란 자연의 순리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유한한 인간 존재의 고통이, 무한한 자연의 순리 앞에서 파열되고 찢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시적 화자는 “그 앞에서 처음으로 길 잃을 자가 되어/제 눈이 먼 줄을 알고 울게 되리라”라고 말하게 되이지요. 길을 잃은 자가 강가에서 길을 잃었다는 자신을 잃고서 더 커다란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 이것이 이 시의 요체이지요. 이처럼 시인은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 이면을 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넓히는 것이고, 당신이 보여주던, 현실을 균열시키는 시적 열정의 반복이겠지요.
극장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네
그 의자 비에 젖네 가을비 내려 뒹구는 잎사귀 젖고
술집의 문고리도 젖어 잠마저 젖는 어느 가을날
이별이 이토록 쉬운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네
기억은 가물거리지도 않고 평생을 바친 힘으로
한사코 망각을 물리치네, 이것이 누구의 이별이든
모든 이별에는 흐느낌이 있네, 잠 못 드는 저 애인들
술집에서, 작은방에서, 깊은 시름에서
그림자마다 조금씩은 비에 젖고 인간의 역사가
이별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지라도
이별은 언제나 처음인 것을 그리하여, 몸은 아프고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고 두려운 아침이 오지만
그러나 이별도 순환하여 사랑이 사랑과 만나는 것처럼
이별도 이별과 만나 사랑이 낳은 이별을 힘껏 껴안는 것이라네
―박주택, 시 「이별의 역사」 전문
박주택 시인이 쓴 위의 시에서도 자기 현실을 균열시키려는 시적 열정이 엿보이지요. 이별한 자는 “이별이 이토록 쉬운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너무 고통스럽지요. 그것은 이 세상의 막다른 지점이요, 삶의 위기이지요. 이러한 고통의 현실을 극복하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의 극한과 마주치고 그것을 ‘이별의 역사’라는 커다란 인식틀 속에서 재해석하는 것, 혹은 자기 현실을 찢고 균열내어 그 이면을 엿보는 것이지요. 시적 화자는 그것을 “몸은 아프고/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고 두려운 아침이 오지만/그러나 이별도 순환하여 사랑이 사랑과 만나는 것처럼/이별도 이별과 만나 사랑이 낳은 이별을 힘껏 껴안는 것이라네”라고 말하고 있지요. 맞아요. 시에서 보여주는 삶의 열정이 빛나는 순간이란, 삶의 고통과 막다른 지점까지 마주쳐서 그것을 균열시키는 것이지요. 젊은 시인 김학중이 보여줬던, 우리 시단의 중견시인 박주택이 형상화했던, 그리고 당신이 표현했던 바로 그것,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하는 극단적이고 열정적인 질문이지요. 진짜 하늘(현실)을 가늠할 수 없어 끝없이 되ane는 고통스러운 그 질문이지요. 질문 속에 이미 답이 숨어있는 시인다운 그런 질문이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강정구∙2004년 ≪문학수첩≫ 신인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주요 글 「1970-90년대 민족문학론의 근대성 비판」,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민중시관 재고」 등.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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