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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특집-1960년 4월, 젊은 그대에게/서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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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식으로 그대에게
―김수영 선생께
서효인|시인
1. 내 이름은 불안
올해의 이름은 이천십년입니다.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그런 만화가 있었어요. <2020 원더키디>라고. 선생님은 “성대의 기본 훈련조차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은(「방송극에 이의 있다」)” 라디오방송극 조차 못 견뎌 하셨으니까, 사후의 만화에 대해 알 리가 없잖아요? 만화에서 2020년은 우울의 연속이었어요. 만화적 우울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로부터 10년 전, 4월로부터 50년 후, 2010년입니다. 이천십년이라고 발음해 보아요. 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세요. 욕이 될지도 몰라요. 혀와 앞니와 입술로 만들어지는 올해의 이름이, 불온한가요? 불안합니다.
불온한 년과 불안한 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혁명에서 50년이 지나고 항쟁에서 3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서른 살이 되었고, 서울이란 델 이렇게 온지 이제 1년째 됩니다. 생의 가장 불안한 지점을 꼽으라면, 매순간이라고 대답하여야겠지만, 그것이 불온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늘 불안하고, 또한 지금이 가장 불안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라고 우리는 “피곤과 권태와 허수룩한 술집에 나온 늦은 밤(「후기」)”마다 성토합니다. 왜 더러운 걸까요? 세상에 때가 묻어 더러운 걸까요. 아님, 내가 1등이 아니어서 더러운 걸까요. 1등이 아니면, 이 불온한 세상에 1등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무엇이 되겠습니까.
루저가 됩니다.
키가 작아서, 머리가 커서, 가슴이 작아서, 돈이 없어서, 차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여, 신용이 불량하여, 알코올에 중독되어, 문학을 하여, 인터넷에 파묻혀, 패션이 진부하여
패배자가 됩니다.
한 해 한 해 우리는 불안에 떨며 살고 있습니다. 2010년의 말로 ‘쩐다’라고도 합니다. 세상의 불안에 절어 있으니 아니 더럽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한 겨울 낡은 건물 옥상에서 그 위의 망루에서 이웃들이 불타 죽어도 저는 스스로의 안위를 살피고 불안해하며 불온한 도시를 살아왔습니다. 대머리 장군이 강남의 호화 호텔에서 팔순잔치를 벌이는 날에도 저는 저녁에 배달시킬 음식에 대한 고민이 더 컸습니다. 몸의 안녕과 위장의 번영이 이 도시에서 저를 지켜줄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이 불온하고 저는 불안하니까요. 루저가 되긴 싫어요. 올해의 다른 이름은 불안입니다.
2. 부릅뜬 눈
상경의 증거는 눈의 통증입니다. 발걸음은 빠르지만 따라가면 그만입니다. 같은 표정의 사람들이 같은 보폭으로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움직이는 계단에서도 바쁘게 걸어 내려갑니다. 저도 따라 내려가고 올라갑니다. 지하의 전차가 머리를 들이밉니다. 서라는 곳에서 타라는 곳으로 사람들을 따라 이동하면 저는 서울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움직이고, 다시 사람들을 따라 내리면, 오발탄처럼 마음대로 박혀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발탄이 아닌 실탄이 되어야 불안을 떨칠 수 있지요. 그래서 눈이 밝아야 합니다. 각 열차의 색과 화살표를 치켜보아야 합니다. 병아리나 치질, 고궁이나 노고지리를 생각하다 보면, 이런 우라질네이션(2010년의 말입니다), 보이지 않아야 할 한강이 보입니다. 들리지 않아야 할 다른 역의 이름이 들립니다. 서울에서 화살표는 중요합니다. 길을 잃음은 시간의 분실이며, 누가 찾아주지 않아요. 넋 놓고 산보散步하지 말고, 눈을 뜨고 구보驅步해야 합니다. 특히 출근길이 그렇습니다. 아래처럼.
강남 방향 →
세계인의 우측보행 ↑
패배자는 물러서시오 ⌘⊛∰
몇 번 길을 헤매고 정해진 시간에 늦고 나서야 저는 눈의 집중을 알았습니다. 물러서면 끝이라고 그러더군요. 사진 속 선생님의 눈에서는 어떤 레이저가 뿜어 나오지만, 저는 엉덩이를 붙이면 레이저 같은 속도로 잠듭니다. 책을 보고 있으면 중년의 사람이 언제고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눈을 보호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겨우 5분쯤 자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는 사람의 눈을 아프게 하고 무릎을 시리게 하고 그리고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어요. 2010년의 서울의 눈이 그렇습니다. 빨갛게 충혈 되어 있어요. 언론의 자유처럼 충혈의 자유가 보장된 서울의 아침입니다. 빨갛다면 일단 의심이니까요.
3. 하강하는 눈
올 겨울은 기록적인 추위가 왔습니다. 전쟁만큼 춥진 않았겠지만, 현대인은 허우대에 비해 나약합니다. 나약한 인간들이 우글우글, 눈을 헤치고 각자의 직장으로, 집으로, PC방으로, 스타벅스로(다방은 이제 별로 인기가 없어요) 기어코 갑니다. 제 고향은 남쪽입니다. 제게 수도의 겨울은 대단했습니다. 반지하방에서 앉았으면, 지하가 아닌 곳에서 불어오는 웃풍이 거셉니다. 수도 파이프는 자주 얼었습니다. 버스 타러 나가는 길은 제설되지 않은 눈이 여기저기 쌓여 바람에 제 몸을 움직이는 모래사막 같았습니다. 모래 속에 발이 빠지면 발목으로 딱딱한 눈이 들어왔습니다. 시린 겨울이었어요.
추위는 사람을 무섭게 하더군요. 눈은 끊임없이 내려 푹푹 쌓이고, 그래도 서울은 돌아가야 하니까요. 서울이 돌아가지 않으면 나라가 미쳐 돌아버릴 지 몰라요. 선생님도 이 꼴을 보면 놀라 돌아버릴 거예요. 이 땅은 대체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달나라의 장난」)”돌고 있을 까요. “압사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병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눌려 죽는 것입니다(「양계養鷄 변명」)” 그러니까, 여기서는 정말 이러다가, 그대로 눌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게다가 닭처럼!
저 같은 치들은 자꾸만 서울로, 서울로 올라옵니다. 다른 이들은 움켜진 걸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덩치가 큰 자석처럼 모든 것이 끌려들어 갑니다. 농사 짓다말고 보따리 들고 서울역에 내려 코 베어갈까 뚤레뚤레 하던 시절과는 다른 자장을 가지고 있어요. 고향에 친구들은 거지반 실업자, 혹은 사회의 임시방편이 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입니다. 임시직이라는 말입니다.
그마저도 서울보다 지방―눈이 덜 아프고 걸음이 느린―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청운의 꿈은 폭설처럼 쌓였다가 온갖 먼지를 안에 담고 시커멓게 녹아 없어집니다. 고향에도 제법 눈이 왔습니다. 나주에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눈이 들이닥쳐서 집밖으로 나가시질 못 한다는 겁니다. 동네에 젊은이가 없으니 도처에 무릎까지 쌓인 눈을 치울 기력이 동네에 없는 게지요. 여기 젊은이들은 또 너무 많아서 지하철에 발이 묶여 동동거리다가 하루를 마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긴 너무 많고 거긴 너무 없어요. 많은 눈이 도시를 가리지 않고 하강하지만, 서울의 과밀한 욕망은 하강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실업, 스팩, 어학연수, 취집, 수능등급, 권고퇴직,
교통대란, 자살카페, 파견임시직, 철거민
2010년의 “수정될 과오(「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아름다운 낱말들, 그리고 침묵.
……… …… … ․
퉤!
4. 뱉을 침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나 메마른 나머지 뱉을 침이 없습니다. 더러운 꼴을 보고 더럽다 호통 치며 시원하게 날려버릴 침이 없어요. 비겁한 목젖으로 비굴한 침들이 꿀꺽꿀꺽 넘어오는 것입니다. 내 속으로 다시 들어오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라 이놈, 그러나 함부로 침을 뱉으면 과태료 3만원이 부과됩니다. 근래에 들어 법질서가 상당히 바로잡혀 많은 사람이 법대로 살고 있고, 돈 많은 자는 사면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거기에도 저는 침을 뱉기는커녕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최신형 IT기기를 손에 넣는 그날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대체 어디에 침을 뱉어야 하겠습니까. 그냥 삼켜버리는 게 양심의 도리를 다하는 일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삼켜도 침은 다시 차오르고.
“그래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아침의 유혹」)” 같습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손마다 작은 기계를 들고 골똘합니다. 각자의 세계를 손바닥에 펼치고 바람보다 빨리 클릭하고 바람보다 먼저 페이지를 엽니다. 당체 침 뱉을 시간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는 동안에 지구 반대편,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습니다. 땅을 열리고 건물이 무너지자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저는 시체가 쌓여진 사진을 쳐다보면서 그들의 검은 피부를 살펴보면서 죽음과 혁명의 비현실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여자가수가 춤을 춥니다. 아름답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월드컵이 열릴 것입니다. 흥분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촛불을 켭니다. 뜨겁습니다. 다른 곳에서 케로로 중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분수다!(2010년의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인이 혁명을 말할까요. 혁명을 말하는 자에게 세상은 냉소를 보냅니다. 타인이 보내는 차가운 웃음을 생각하면 저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성性」)”갑니다.
5. 내 이름은 불온
편지니까요. 적당히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저는 아직 잘 모릅니다.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라고 말한 선생님의 일갈에 용기를 얻어 더욱 모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도가 있을 뿐입니다. 다만 앞서 말한 불안한 것들은 제가 침 뱉으려고 사정권에 놓아둔 표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밝고 차가운 눈을 갖고 때에 따라 지성과 울분에 가득 참을 뱉어보려 합니다.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불온한 녀석으로 남으려고 합니다.
배신할 것들이 도처에서 생성하고 소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배신은 재빠르지만 그것보다 예민하게 움직이는 촉수를 우리는 가졌으니까 걱정은 없습니다. 촉수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선사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문학으로만 승부를 가하는 우리는 양계장도 없고 다방도 없고 심지어 혁명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독자들의 다급한 영혼의 돌진 속에서 호흡을 꺾이거나 휴식하지(「독자의 불신임」)” 않는다면, 수많은 배신의 꺼리들이 우리를 다독일 거라 믿습니다. 시인은 이 시대 배신의 아이콘이 될 것입니다.
배신은 불온한 것이니까요. 2010년 식으로, 앞니 사이로 침을 모아 빠르게 뱉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꼭 가래가 아니어도 괜찮겠지요. 2010년 식으로 내리는 눈에 독한 제설제를 뿌려 아스팔트까지 한꺼번에 녹여도 괜찮겠지요. 무엇보다 짝다리를 짚고 조금은 불량한 자세로 2010년의 혁명에 관하여 말해보겠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거대한 도시에 묵직한 돌을 던질 거예요. 패배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건 돌이 날아가는 궤적, 도시에 떨어져 만들어낸 동심원일 것입니다.
끝내 모든 불만과 불안과 불온을 담보삼아
아름답게 추락하겠습니다. 2010년의 다짐입니다.
서효인∙1981년 출생,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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