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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젊은시인집중조명/귀가 외 9편/이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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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인집중조명
이정모
귀가 외 9편
풀벌레 울음이 한 짐이나 매달려도
발걸음도 없는 것이 대꾸도 없이
줄지어 가는 것이 내 마음에 길을 내네
한줌 바람은 기다리는 것들의 손짓이네
오늘의 바람은 어제와 손길이 달라
사랑이 될 것 같은 예감 보았나
때때로 안개는 숨겨진 사원이라
그 속으로 일탈하여 숨고 싶었나
제 꼬리를 끊고 산으로 들어가네
길 없는 그곳에도 참배하는 손길 있어
잎새 하나 떨구고도 파르르한 눈빛을 보네
나무도 누르고 사는 줄 몰랐어라
면목도 없어라
슬며시 꼬리를 붙이고 마을로 돌아오네
그래도 호롱불은 앞섶을 열고
발갛게 붉어지는 건
언제든 오라는 고향 식 인사라지만
눈 안의 여식 내어주는 의식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꽃멍울로 달린 가로등
불빛이 그리도 시퍼렇던 것은
꽃놀이인 줄 알고 작두를 탄 애비 탓이네
낙화, 고개 들다
꽃이 되어 목을 꺾어 보지 않고
이별의 아픔을 말하지 말라
마음 떠난 몸도 한때는 꽃이었으니
떠나는 것은 자랑도 아무 것도 아니다
소름 돋지 않는 옷고름 풀면서
불 붙었다 하면
너는
옛날의 그리움에 떨어진 것이고
바람도 없는 강가에서
표류하는 신기한 뱃멀미는
오래 전에 내린 줄 모르는 탓일 뿐
사랑에 젖었던 자 젖는 것을 두려워하랴
삶이란 미망未忘의 세월이
역풍을 꿈꾸며 흐르는 강이다
문門
마음이 닫힌 날 우포늪에 가면
아주 오래된 문門을 볼 수 있다
넘치는 줄 알면서 받기만 했다고
정성 들여 생태를 돌려주는 문.
어제는 잠자리 개구리 시집가게
문 걸어 바람 재우고 연꽃도 피웠고
내일은 철새 텃새 가리지 않고
수초로 정화한 물 내려고 난리도 아닐 것이다
항상 뒤에서 닫혀야 깨닫는 나의 맘은
기억처럼 접혀있지만
늪의 품은 언제나 인정처럼 펼쳐있으니
여기에 명줄대고 살아가는 목숨들은
갈잎 소리처럼 시원스레 노래해도 좋겠다.
그렇다, 늪이 아무리 깊고 아름다워도
세월이 만져지는 지순한 이 문,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생명을 달뜨게 한 사랑 없이는,
큰일 났다, 나이도 묻지 않고
석류처럼 열리는 자궁이 보인다
아픔 없이 태어나는 평화는 유죄
꼬리를 들켜버린 늪의 사랑은 무죄
마음을 열면 법法이 보인다고
톡톡 튀면서 유혹하는 문이 금빛이다
* 어느 학자에 의하면 우포늪의 일년간 경제적 가치는 오백육십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름
그 곳은 텅 비어 있다
욕망을 건너지 못한 발자국과
우리가 놓쳐버린 시간들만 서성이고 있었다
때가 되면 채우고 알아서 비우는 숲은
이곳이 필요하지 않았다
배경의 모습으로 다리도 버렸으나
뛰어넘는 법 없는 범종소리처럼
찾지 않아도 울림으로 다가온 후
가벼움 끌고 내려앉는 나비의 비행처럼
고요 속에 힘찬 생명으로 왔다
맨 처음 이곳으로 세상을 드나들면서
제 상처 보여주며 호명에 저리던 이는
비워야 채워지는 꿈이
나비의 날개를 가진 걸 알았을까
배추벌레 꿈꾸지 않아도 나비 되지만
고치 속에서 제 살 태우는 날개의 꿈도
존재란 이름을 통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제 몸이 통로인 것이다
그 곳이 바람처럼 가벼워야
거미줄 같은 외로움에 걸리지 않는
미인이 누워있다
이제는 울어줄 뻐꾹새도 없는데
자꾸 뒤돌아보게 한다
밀어낼 힘이 없어 힘만 불끈 줘 보지만
주머니도 명예도 헐렁한 시인에게
용기를 주어 밤차를 타고 오게도 한다
죽은 줄 알았던 감나무 밑동이
의뭉스럽게 새순 내밀듯
실패한 시 한 줄 슬며시 넣어주며
버젓이 살게 하는 이 여인의 미소는
언제까지 뒤에서 피어있을 것인가
세월이 오래, 거기 없었다 해도
"니 대나무골 정모 아니가?"
하는 한마디는 고향의 장맛이다
수십 년의 시간을 순식간에 발효시켜
도랑에서 멱 감다 들킨 천둥벌거숭이 띄운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도
구들같이 푸근한 고향의 아랫목엔
여섯 살 까까머리로 자고픈 잠도 수북하고
오래된 연인처럼 나를 견인해 가는
미인이 누워있다
새는 늙지 않는가
별똥별은 천만 리 먼 길을 달려와도
그 뜨거움을 다 불사루지 못하고
운석으로 남아있다.
식어 재가 되어도 침통으로 남는
결석 같은 그리움은
한 때는 빛나던 영혼을 끌고 다니던
사랑의 흔적이다.
짧게 태울 수는 있으나
그 꼬리가 너무 길어
탈출 하려면 단서를 남기고 마는
사무침은
당신이 혐의를 받는 증거다
오늘 밤
연줄처럼 놓아버린 추억이
아득한 시간을 건너 와
새가 되어 날고 있다
새는 성형 할 게 없어서
무혐의가 거의 확실하다
빚
마음에 빚이 많으면
밤도 어깨가 무거워
새벽으로 가는 길을 잃고 헤멘다.
빛을 다 써버리고
어둠만 남아 서성거리는 귀농
시린 밭떼기에도 가을은 올 것인가
침묵하는 공기는 무거워
근저당은 더 무거워
삽을 허물처럼 깔고 앉아
가부좌 트는 맘이
농협 영농자금을 한 해만
더 써 보자고 한다
기억
봄날 꽃잎처럼
하르르
소리 없이 떨어지기만 하면
좀 좋아?
내 젊은 날의 비망록에 살고 있는
곰 한 마리
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린다
바다도 때로는 이빨을 감추는데
철없던 시절 반짝이며 박히던 삽날은
언제 그 빛을 거두어 갈 것인가
꼬깃꼬깃 접어
깊숙히 넣어둔 불면의 사유
햇살에 익혀서
가을날 까치밥으로 내어 주고 싶다
버티는 방식
자기 속을 남에게 내어주는 건
얼음 위를 맨발로 걷는 일이다
얼얼한 발은 누구의 것인가
속울음으로 뜨거운 짐승을 길들인다
속이 문드러져도 좋으니
여기에 살아도 되겠습니까
그리움에게 집 한 채 짓자하지만
나를 생산한 바람이 위태로우니
몇 십 년은 물처럼 흘러가라 한다
다행이다
내가 바란 건 하나도 이뤄진 게 없지만
목숨에겐 세상을 공짜로 주었으니
이만하면 잘 버틴 것 아닌가요
대답 없는 철길은 기약만 사이하고
인생의 기차에서 듣는 당신의 말은
등 두드리며 내리는 안녕 뿐이니
내릴 역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러니 간이역을 지날 때라도
외롭거나 지겨움을 푸는 방식을 배워요
다시는 같은 동굴이 돌아오지 않아요
똑같은 사랑은 없어요
들러붙어요, 싱싱함이 헐떡이게
호수
마음을 열어 두었더니
호수가 들어 왔다
햇살 나면 환하게 바닥 보여주고
흐린날엔 연꽃 틔울 준비하였더니
안으로 더 깊어졌다
바람 불 땐 같이 흔들려 좋았고
비가 올 땐 톡톡 물풀을 건드리니
잊었던 얼굴이 차오른다
마냥 저 하고 싶은대로 두었더니
물결 위 빛나는 햇살의 날을 빌려
가시연꽃의 몸을 가르고
왕관모양의 꽃송이를 끄집어 낸다
태어나지 못한 언어도 불러낸다
사랑해 말 한마디 못하던 가여운 내 사랑
바람 되어 내 곁에 누웠는지
호수는 까르르 웃으며 사라지고
묵정밭 개망초는
바람 가는 쪽으로 몸을 눕힌다
<시작메모>
갈수록 소통이 어려워지는 시대다.
메마른 논리들이 시끄러운 전달과 명령만을 양산한다.
이럴 때 일수록 함께 할 수 있는 시의 화자를 찾아 들어
울림을 회복 시켜야 한다.
나에겐 다행이도 분신이 있어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門도 찾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들어 담는 귀를 쫑긋 세울 수 있으니
나의 종교, 마음이 방랑을 접고 언어의 향연을 본다.
상상력의 하늘을 무한히 날 수 있는 새가 되고 싶다.
침묵의 언어로 공기를 가르며 차 오르는 서정의 힘,
그 그늘의 비상을 감각한다.
고뇌는 빗방울에 씻기어 내릴 것이다
구름과 천둥의 추억에 잠 못 들었던.
어제의 잘못을 오늘에 깨닫는 건 축복이다.
내 시 또한 새로운 잎을 내고, 뿌리를 뻗어가는 모습이
고요하고 아름다워 끝없이 변신하는 존재로 발달시키는
작업이 나의 변辯이다.
이정모∙2007년 ≪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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