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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떠나가 버린 사랑과 기상 캐스터 외 1편/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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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떠나가 버린 사랑과 기상 캐스터 외 1편
먼 바다로부터 태풍이 온다고
젊은 여자 기상 캐스터caster가 일기예보를 하자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와 귀가 한 곳으로 몰린다.
떠나가버린 사랑은 다시 올 것인가?
아련한 추억이 만들어낸 무지개를 서쪽 하늘에서
잠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상 캐스터가 예보한다.
우리에게도 가버린 봄은 다시 올 것이니
우산을 준비하고 집을 나서라고 말한다.
태풍이 오고 건물의 간판이 떨어질듯 마구 흔들리고
그 사람과의 이별의 추억이 가슴을 마구 헤집고
기상 캐스터는 지독히 아픈 사랑을 조심하라고 예보한다.
가슴속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릴 수 있으므로
사랑했던 사람은 나를 떠났지만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몇 날 며칠을 누워서 지냈지만
그것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습기라고 예보한다.
실제로 따뜻한 동남풍이 불면 꽃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만
러시아 쪽 대륙에서 불어오는 찬 북서풍에
꽃은 시들 수도 있다는 전제前提를 친절히 달아주면서
떠나가 버린 사랑은 북동쪽으로 영원히 날아가 버렸고
오늘은 훈훈한 온기의 추억만이 하루 종일 종을 울릴 것이라고
그 여자 캐스터가 반복해서 예보해 준다.
그 여자 캐스터가 안개로 옷을 지어 입는다.
누구에게나 이별은 있다
함께 있던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뒤돌아보면
그땐 늦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늦게 깨닫는다.
잘 해줄 수 있는 때는 함께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바람을 이고 있던 이파리 하나가 땅으로 떨어져 말라간다.
이파리의 형체가 사라지는 것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밤마다 별빛이 내려와 앉아 있었던 그 이파리 위에
별의 고요와 함성이 함께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바람의 갈기를 잡고 있던 나무는 초조하게
나무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린다.
나무들이 사는 숲 속에서
나무들은 각자가 모두 섬이다.
새가 떠난 이후로
그 섬들은 가지들로 어망魚網을 만들어
파닥이는 바람을 잡으며 놀다가
밤새 혼자서 어두움을 견뎌내야 한다.
나무들이 올려다보는 하늘 그 깊은 속살 우주를 떠돌아다니던
인공위성도 오래되면 우주에 버려진다고 한다.
기계와의 차갑지만 가슴 아픈 이별
기계와의 이별에도 차디찬 슬픔이 있었다.
폐차장에 기계를 버리기도 전에 심금을 울리는 전율戰慄
그와 함께 감정에도 속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빛보다 빠른 사랑과 이별의 감정
거실에는 먼지들이 떨어져 나온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모여서
하나의 섬을 형성하고는 미세한 소리를 낸다.
진공청소기가 먼지의 소리를 빨아들인다.
멀어져가는 먼지들의 슬픈 소음
사라지는 자보다는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식솔食率들의
마음이 더 아프게 찢어진다.
김경수∙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하얀 욕망이 눈부시다>, <다른 시각에서 보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달리의 추억>, 문학ㆍ문예사조 이론서 <알기 쉬운 문예사조와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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