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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대설주의보 외 1편/김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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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남
대설주의보 외 1편
길은 길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폭설보다 100년 만이라는 말에
더 꽁꽁 떨었다.
팽나무 잔가지는 바람에 칭칭 감겨
밤새 어둠의 벽을 긁는데
이불 속에서 나는 생 라면 씹는다.
스레이트 낡은 지붕 덕부 씨네 집에서
살점 찢어지는 소리
시린 생살에 사포질하는 파도의
사타구니에서 떨어져 흩날리는 비늘
냄새는 무릎뼈에 구멍을 박는다.
얼음장 같은 벽에 등짝을 붙이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책장으로 넘기며
어제 걷던 길에서 풀잎 하나 하찮게 밟았거나
이유 없이 방아개비 뒷다리를 분질렀거나
목욕탕에서 기진한 할머니의 빤한 시선을 외면했던
낱낱이 되살아나는 죄의 풍경 앞에서
아무래도 잠들기는 글렀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저자)에서 출판한 책 제목.
잡곡쌀을 씻다가
어릴 적에 물리도록 먹은
보리밥 조밥 덕에
여태 쌀밥만 밥인 줄 알았다
궁끼 찰찰 흐르는 내 입도
시절에 물들어 포시랍아 졌는지
잡곡쌀 한 봉지 샀다.
콰르르 수도꼭지 차가운 물에
알록달록 낱알이 튀어 오르고
납작 보리쌀은 힘없이 동동
떠내려간다.
첫 물에는 쭉정이려니 했다
두 물 세 물
살강살강 문지르는 뜨물 따라
무늬만 민관복합 해군기지 반대하는
강정마을 사람들 눈물이다가
용산 남일당 망루에서 살려 달라 애원하는 궁민은
국민이 아니라서 둥둥 쏟아버리는가 보다
대한민국의 주권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 2항이
수채구멍으로 쓸려가고 있었다.
쭉정이로 보이지만
누구에게는 아까운 곡식일 터
비비고 치대며 붙잡는다면
달고 고마운 밥이 되는 것을
김순남∙1993년 등단. 저서 '돌아오지 않는 외출', '남몰래 피는 꽃', '누가 저 시리게 푸른 바다를 깨트렸을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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