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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무적의 스파링 파트너 외 1편/김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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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82회 작성일 10-08-1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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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무적의 스파링 파트너 외 1편


눈빛보다 빠른 주먹. 근사하지. 그것은 절대 헛것이 아니다. 저만큼 나가떨어져 넉다운 된 챔피언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와 나의 관계는 비밀이 아니다. 불문율이다.
링 위에서 나는 챔피언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그의 나쁜 소문도 관심이 없다. 그를 쓰러뜨리고, 비웃거나 모욕하지 않는다. 그는 나의 분신이다. 다만 그의 고독이 커질수록 나의 그것은 알약처럼 작아진다. 덕분에 나의 존재는 견딜만한 통증이다. 나는 가벼운 알약처럼 둥글게 웅크리고 잠든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불 꺼진 알전구처럼 까만 그의 머리통에 번쩍 번쩍 불을 밝힌다. 숨소리만으로 한 상 가득 터질듯 차려진 제단 위에서 벌어지는 매일의 노동. 그가 쓰러지기 전에 나는 쓰러질 자격이 없다. 그가 쓰러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눈썹까지 땀이 차오르고 나는 다 태운 연초처럼 치지직 힘없이 꺼진다.
나는 잠들기 전 내일도 챔피언을 때려눕힘으로써 그를 영원히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의 앙다물었던 입속에서 뚝 떨어지는 마우스피스는 딱딱한 눈물화석 같다. 나는 거대한 주먹처럼 단단하고 둥글게 웅크리고 잠든다.
입 안 가득 눈물을 깨물고, 자고 일어나면 더 커져 있는 무쇠주먹. 오늘도 어제보다 주먹이 조금 더 자라있다. 그것은 커가는 챔피언을 향한 감정의 징후. 코치는 나의 주먹이 커지는 평균속도를 산출해서 미리 글러브 제작을 의뢰한다.
고독의 챔피언을 위해서. 나는 챔피언의 그림자, 챔피언은 나의 도플갱어.
나는 혀처럼 빨간 글러브로 챔피언의 고독을 툭툭 건드리고 강타하고, 핥는다. 나는 챔피언이 잘 됐으면 좋겠다. 나의 다리는 썩어가는 목발처럼 깡마르고 시커멓다. 아무도 상대하지 않으려하는 무적의 나는 불구다.
내게 맞는 글러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는 헛것이다.




 


우리는 새의 그림자
―새라는 심장

지상을 한창 비행 중인 소년들. 밤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녔다. 고기집 담장 앞에는 키 크고 깡마른 그 소년들 기립하여 서로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며 격하게 노래했다. 소년과 그림자는 밤새도록 합체에 실패했다. 쓰러뜨리면 일어나고, 쓰러뜨리면 또 일어나고.
그때 검은 나비 한 마리가 담장 사이에 홀연 떠있었다. 수상한 그림자처럼. 작고 검고 투명한 등을 잔뜩 웅크리고 탁란의 심장을 꺼내 물끄러미 본다. 우연히 발생한 나비의 목숨은 심장을 탁란한 대가다.
그날 밤 터키석 빛깔의 심장을 깨고, 담장과 담장 사이 허공에서 젖은 새가 눈을 꼭 감고 태어나고 있었다. 고기집 앞 공기는 오늘도 형체가 없으나 분명한 몸짓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나비는 제 비린 혀로 어린 새를 핥았다.
키 크고 깡마른 소년들은 자신들의 뼛속을 긁어내고 담장을 넘었다. 뼛속에는 총알이 잔뜩 장전되어 있었다. 소년들은 한 자루의 위태로운 무기였다.
나비가 담장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허공에서의 찰나, 부화된 새가 날개를 펴려 하자 나비는 도로 가슴속에 집어넣었다. 허공으로 총알을 갈기자, 뼛속이 텅 빈 소년들의 몸이 공중으로 새처럼 흩어졌다. 아이들의 그림자는 가볍게 담장을 넘나들고 벽을 통과했다.
독재자의 왕국에서 새와 나비의 개체수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는 그들의 그림자인 우리들을 거리에 초록 연처럼 줄곧 띄워놓았다. 오늘밤엔 평생 날리던 연을 거둔 얼레 하나가 오랜 골목의 문설주에 조등처럼 내걸렸다.

김중일∙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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