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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삶 외 1편/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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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자
삶 외 1편
가랑비 내리는 늦은 오후
흰머리 등 굽은 노인이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뒤뚱 뒤뚱 끌고 간다
손수레에 폐지는 비닐로 덮혀 있는데
비에 젖은 노인
헐렁한 바짓가랑이가
마른 장작 같은 종아리에
철썩 철썩 감긴다.
천년이가 장가가던 날
만가실 천년이네집 마당에 채알이 쳐지고 짚을 깔고 그 위에 멍석을 깔았다. 정지(부엌)에서는 부치미 냄새가 진동해 동네 개들도 콧구멍을 하늘로 들이대며 실룩거렸다.
정오가 한참 지나 해가 고개를 숙이는데, 우물가에 빨래를 하던 문기 아낙이 손끝에 물기를 털며 바삐 신작로 길로 가고 동네 아낙들이 일제히 그곳을 향해 달려가며 꽃테이프가 나부끼는 가식기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천년이네 신행차가 온 것이다. 도락꾸 위에서 우인대표들이 ‘신랑측 하객들’ 물 쏟아지듯 내리고 가식기리‘차’에서는 홍조 띈 얼굴로 신부와 신랑이 내렸다.
온 동네가 노총각 표를 떼었다고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며칠도 안 되어 또 경사가 났다고 떠들썩했다. 장가들던 첫날밤에 신부가 애를 가졌다는 거다, 그때부터 신부는 온 식구들이 해주는 좋다는 보약을 납죽납죽 받아먹은 것인데, 어느 날 그만 팔삭둥이 칠삭둥이도 아닌 육삭둥이를 낳은 거다. 이게 무슨 가문에 똥칠이냐, 어느 개뼈다귀인지도 모르는 핏덩이를 한시도 집안에 둘 수가 없다고 사돈에 팔촌까지 난리법석이니 핏덩이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산모는 집을 쫓겨나오는 신세가 된 거다. 친정 부모도 모르는 아이를 가졌으니 친정으로도 갈수가 없는 처지라 삼월의 시린 바람이 어둠을 쓰래질 하는 밤, 그의 집 곁을 떠나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애걸을 했지만 온 집안 식구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는 통에 죽고 못살게 사랑을 나누던 신랑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추위에 떨며 안고 있던 핏덩이는 울음도 크게 울어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산모가 사라진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천년이는 또 새장가를 갔다. 어디서 데려온 신부인지 기운이 황소 같아, 나락 타작할 때면 나락못을 팽이 돌리듯 던져 올려 나락탑을 쌓는다고 동네 사람들은 새색시 잘 봤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천년이네 앞산 잔솔백이 누런 단풍이 다 떨어지는 초겨울 농사는 수지가 안 맞는다고 도회지로 떠났다. 들리는 소문은 어느 양계장집에 취직을 해 닭똥치고 닭사료 주며 산다고 했다. 그의 농토는 잡풀이 무성해 주인을 기다리지만, 도회지 어느 곳에서 뿌리를 내렸는지 명절 때면 조상묘 앞에 청솔가지 몇 개 꺾어놓고 간 흔적으로 그래도 뼈대를 지키는 자손 아니냐고 집안 사람들, 애써 말을 흘린다.
오정자∙2006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풀숲은 새들의 몸을 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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