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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회전문 외 1편/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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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회전문 외 1편
내 앞의 나와 등 뒤의 내가 빙글 돌아간다 삼등분, 사등분, 수 십 개로 조각난 얼굴들이 박힌다 정오의 햇빛이 보리수 흰 꽃을 들고 들어간다 회색빛 하늘이 유리벽에 쪼개지고 구름이 조각난다 깨진 나는 유리 안에 갇혀 있다 유리벽엔 내 얼굴이 흘러내리고 낯선 손목이 내 손에 겹쳐진다 나는 휘어지고 꺾여진다 토막난 구름들이 유리벽에 쌓인다 쭈글쭈글해진
유리 속에 나는 꽃처럼 피어 있다 조각난 얼굴이 꽃병에 꽂힌 채 출렁인다 등 뒤에서 따라오던 햇빛이 그림자를 살해한다 하지만 나는 꽃병 안에 살아있다 그 안에 수많은 내가 피어 있다 햇빛이 한 쓸쓸한 들판을 끌고 온다 눈이 내린다 눈을 맞는 나, 눈 속으로 사라지는 나, 눈 속에 뼈를 묻는 나, 나의 일개 군단이 회전문 속으로 사라진다 문이 돌아간다 설경이 부서지고 사라지고 들판이 부서지고 사라지고 눈 내리는 날이 사라진다 내가 사라진다
일요일
바나나 하나를 집어 껍질을 벗겼어 일요일이 조금씩 물러갔어 한 입 먹고 한 번 십고 바나나 겁질이 왜 이렇게 두꺼워? 바나나는 씹으면 씹을수록 두꺼워지기만 해 베란다에선 색색의 팬티들이 깃발처럼 펄럭여 오늘은 피아노가 아주 기분이 좋아 피아노가 내게 마음을 연 걸까? 그래 마음을 여는 건 중요한 일이지 마음을 열어? 어디를 향해? 브라암스 곡은 너무 지루해
지난 일요일에는 바나나를 삼키다가 세 시간이나 구토를 했지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 넣은 그것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는 거야 나는 자구 딸꾹질만 했지 포크에 찍힌 바나나를 먹다가 포크를 삼킬 뻔 했어 삼킨다는 건 참 위험한 일이야 포크를 삼키다니? 바나나를 오십 번도 더 넘게 씹으라니? 씹고 씹히는 동안 또 구토가 치밀지도 몰라
나는 강으로 갔어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보트를 탔어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 나는 그들의 손가락을 씹었어 씹고 씹어도 씹히지 않는 일요일이 아직도 한 무더기 쌓여 있어
이은∙2006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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